[두레문학 10호-계간평]
잔혹한 가족사
-"먼지의 집"에서 찍은 "스틸영상"
이종섶 (시인)
두레문학 2008년 하반기호에 실린 시들을 읽는다. 계간평을 비롯한 모든 평들은 발표된 시를 텍스트로 삼아야 하는 것, 그 텍스트가 가지는 스스로의 제한성 때문에 계간평을 쓰기전 약간의 고통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주어진 텍스트 안에 내포된 의미들이 나에게 먼저 찾아와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힘들고도 어려운 작업을 해야만 한다. 그 작업 또한 정밀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그야말로 또 다른 창작을 위한 모자이크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다행히도 두레문학 2008년 하반기호에 실린 발표시들은 이런 나의 기우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그리하여 내가 계간평을 써내려가는 것이 아닌 그 시들 스스로가 나의 머리와 손을 도구로 삼아 계간평을 쓰게 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주어진 텍스트가 나를 통해 글을 쓴다는 것을 한두 가지 정황을 들어 설명해야겠다. 먼저, 서로 다른 의미와 상징들이 그 안에서 일정하게 관통하는 내면적 속성이 드러나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어진 텍스트의 표면적 소재와 주제가 서로 한 그룹 안에 속해 있으며 나아가 상호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관계라면 그 흐름에 순응하여 글을 쓰는 것이 평자의 마땅한 의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직관적 관점과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본다면, 그들이 빚어낸 관점의 표현과 정서의 용해가 나타내는 빛깔의 명도와 채도를 따라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설령 그것이 그 안에서 자주 반복되거나 이전에 있었던 것의 별다른 개선이 없는 재현일지라도, 텍스트가 외면적으로 보여준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그것 또한 현시대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며 정서적으로 반응한 것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므로, 그 점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평자와 독자 모두가 가져야할 진지한 자세라고 하겠다.
여자 그리고 남자가 찍은 스틸영상
사람에게 고향이 있고 본적이 있다면, 두레문학 2008년 가을호에 실린 시들의 출생지는 바로 이인주의 시가 아닐까 한다. 따로 풀어서 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주연 배우 두 명에 대한 적절한 에피소드와 그것들의 얽힘과 두 배우의 관계적 출연 비율까지, 그리고 첫 영상에서부터 엔딩 영상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작가주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강물 따라
무작정 떠밀려온 소용돌이,
검정말 줄기 같은 여자가
몇 번을 휘청댔는지
몇 번을 굴렀는지
정강이께 핏물이 연산홍처럼 번져날 동안
상처마다 덧나며
굽이굽이 도는 비린내
그렇게 떠내려가는 일이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혼신의 깊이라는 듯
물결무늬 이루며
꼴깍꼴깍 까무러칠 동안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에 관한
스틸영상을
일생일대의 역작인 듯
차르르, 감아올리는 저 남자
―이인주,「잔인한 교감」 전문
이인주가 보여주는 "여자"와 "남자"는 "내가 물 위에서 흔들리는 피사체였다면/당신은 수백 장 일몰을 우려낸 인화지 같은"(조유리, 「뷰파인더를 당기며」) 역할과 삶으로 각각 존재한다. 그 존재들을 있게 한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존재들 모두는 "물 위에서 흔들리는 피사체" 아니면 "수백 장 일몰을 우려낸 인화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누구든 그 이분법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일생일대의 역작"은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 그래서 가끔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적인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삶이 고단하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어두운 영화관에서 아무도 모르게 위로를 받고 싶은 법이니까.
아내와 어미로 살아가는 여자
"스틸영상"에서 보이는 한 "여자"의 삶은 한 "남자"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그 "남자"와 만났을 때 그 "여자"는 "여자"에서 '아내'로 전환된다. "여자"가 연기하는 "아내"라는 배역은 그리 녹록치가 않아서 "결혼하고 삼십년"을 찍어야 한다. 그 "삼십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 "삼십년"이 지나 "여자"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늦은 귀가
발길 재촉한 달빛이
휑하니 열린 창문으로 먼저 들어간 방안
난장판이다, 없다, 결혼하고 삼십년
한 번도 외출한 적 없는
아버지 같고 남편 같은
지친 골목을 끌고 돌아오면 한 아름 조팝꽃으로 꽂혔거나
빨랫줄에 셔츠나 바지 환하게 펄럭이던
그가, 격렬한 몸싸움이라도 벌였던 것일까
나자빠진 장롱 문짝이 한바탕 혈투를 말해준다
옷장 속에 숨겨주었던 속옷 나부랭이
앨범 속에 간직해두었던 비밀이
뙤약볕에 쫓겨난 벌레들처럼 함부로 기어 다닌다
우두커니 앉은 내 등허리로
검은 그림자 스멀거리며 지나가고
급류에 떠내려가는 아이처럼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도대체
이 깊은 밤 누가 그를 납치해간 것일까
그가 없어 낯선 방안에 나는 버려진다 밤새
불안이라는 짐승 한 마리 방안을 기웃거린다
―김광희, 「평안을 도둑맞다」 전문
"결혼하고 삼십년"이 지난 뒤 그 "여자"는 "불안이라는 짐승 한 마리"가 되었다.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누가 볼세라 입고 있던 옷을 아프게 물어뜯어/깔아주고 덮어주는 어미"(박정원, 「오동꽃」)가 된 것이다. "새끼"를 낳는 일이란 "검은 박쥐가 눈먼 새끼를 낳아/어둠 속에다 풀어 놓"(성은경, 「그림자」)는 것이었을까. 그 "새끼"들을 키우기 위해 "하루 서너 시간을 잠자며"(이용일, 「Working Poor」) 일을 해야 했고, 일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한여름의 비릿한 일상을 빼곡하게 싣고 떠나는 수유리행 버스"를 타기 위해 "지하도에서 뛰어나와 정거장에" 서서 "눈 둘 곳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대학로의 밤"(하봉채, 「단절」)을 만나야 했다. 그런 날들 속의 "밤과 낮의 행간에 무시로 자라나는/안개"들과 "서툰 비질이 쓸어내지 못하는/무거운 내 그림자"(성은경, 「그림자」)가 때때로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언제나 쪼들려 "늘 바람 같은, 유령 같은, 그림자 없는 그 여자의/휴학한 전화벨이 울"(이용일, 「Working Poor」)리면, "휴학한" 아들을 생각하며 "쉰일곱, 빛바랜 그 여자가 울고 있"(이용일, 「Working Poor」)는 것이 보였다. "슬픔의 온도를 더듬는 전화에/짓무르는 건 입술이 아니라/언제나 늑골 아래 깊숙한 곳"(성은경, 「그림자」)이었다. "삼십년" 전부터 "어미"의 그곳만 물고 빨았던 자식들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그녀, "늘어진 가슴의 명치 끝/선명하게 찍힌 건포도 자국/가랑이 사이로 흘낏 보이는/땀에 젖은 검푸른 닭 볏"(권정욱, 「문」)만 늘어가는 몸만 보인다.
그런 몸으로 살아가는 '아내'라는 "여자"들은 "그토록 모질게 빨리고도/더 우려낼 진국이 있는지/해변 귀퉁이에 걸린 해수 찜질방"에서 뒤집히고 엎어지고/여기저기 너부러져 있"(권정욱, 「문」)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순하디 순한" "母性"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외간남자를 봐왔다고 툭하면 폭언폭행에/틈만 나면 새끼들에게 해코지하는 남편을/눈 깜짝할 사이에 물어죽"(박정원, 「오동꽃」)여버리는 "살인"적 "母性"도 있었다.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사나흘"도 지나지 않아 "어미"마저 죽고마는 "母性"도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되고 "어미"가 돼야 했던 "한 여자가 쇠저울에 던져"(고석종, 「이슬」)졌다. 수명을 다하든 다하지 못하든 간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세상은 하나의 사체부검실"이었므로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누구도 죽음으로 갈 수 없"(고석종, 「이슬」)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비가 되지 못한 사내
"스틸영상"에서 보이는 한 "남자"의 삶 역시 한 "여자"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그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이인주, 「잔인한 교감」) 같은 존재였다. "지느러미" 없이 헤엄쳐야 하는 "물고기"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물고기"가 "지느러미" 없이 태어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없다면 아마도 그 "지느러미"는 "남자"를 만난 순간부터 서서히 닳아 없어져버린 "여자"의 것인지도 모른다.
해가 조금씩 게으름을 피운다
커튼 열어젖힌다
조바심은 책상 앞에 앉는 나를 일으킨다
빵부스러기 같은 햇살 쪼던 까치 한 마리
산 넘어 날아간다
갈비뼈만 남은 낙엽들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런 날이면 부고장이 날아들기도 한다
언젠가 이곳에 자살소동 있었다 사내는
벽을 향해 이별의 부산정거장 큰소리로 부르며
제초제를 탄 알코올 병 비웠다
푸른 유리잔 식도를 컥컥 거리다 토해냈다
그 집에는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 같이 살고 있었다
그림자는 무엇이든 따라다닐 뿐
누가 죽었을까 죽으려 했을까
낡은 집을 주저앉히는 검은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읍내에는 은행이 성업 중이다
사람들은 주워 모은 금싸라기 맡기러 간다
유품이 자신의 가계를 지켜 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금가루 같은 햇빛을 당겼다 놓았다 장난치는 나무는
관심없다, 죽음 따위도
그림자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며 기회를 넘본다
집으로 종종걸음치는, 그림자 길게 따라붙는 시간
나뭇가지마다 달빛이 조등처럼 걸린다
슬픈 표정 짓지 않는다
무덤을 뚫고 푸드덕거리는 박쥐들
초롱초롱한 눈들이 하늘에 박힌다
―박동덕, 「그림자와 동행」 전문
"사내"는 다 그런 것일까? "벽을 향해 이별의 부산정거장 큰소리로 부르며/제초제를 탄 알코올 병 비"우며 "자살소동"을 벌이는 그런 존재일까? 어쩌면 "힘없는 아빠의 딸, 전학 하나 못 보내는 아빠의 딸"(김경곤, 「코리안 밴디드 퀸」)이 안쓰러워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딸이 "위암으로 삼 년 투병하다/화안하게 꽃물진 봄바다로/썰물 되어 무정스리 가버린/아내의 빈자리 채워주는/열 살 배기 영순이"(임정택, 「골목길 1」)였을지도 모르니까.
어머니라는 내 푸른 방의 집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가 되어버린 이후 그 "지느러미"는 그리움의 표상인 동시에 고단함의 상징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느러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이후부터 조금씩 사라지다 완전히 없어져버린 "지느러미"는 남편과 함께 살며 생활해야 했던 생애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중의 하나, "어머니"라는 "지느러미"마저 없어지려고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무들이 문을 열고 있다
일 년에 딱 한번씩만 열렸다 닫히는 문
붉은 문에서 장미의 정령들이 나온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통하는 외길
혼령처럼 흔들리며 백목련이 여는
한 번 나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 같은 문들
내가 나오는 그 문도 한때는 저렇게 고왔으리
꿀벌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저 붉고 푸른 문처럼
그곳이 그리워 새들이 집을 짓는 둥근 나무 속
나도 그곳 가까이 집을 짓고 살았다
기꺼이 내게 한쪽을 내어주고 늙어가는 가슴속
넓고 아늑한 내 푸른 방의 집
어디에 있을까 다시 돌아가는 문은
제 문을 부수고 작아져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어머님도 오래전에 문을 부수고 요즘 점점 작아지신다
어머님이 작아지시면서 내 집이 조금씩 허물어진다
기대고 있던 벽에 금이 가고 끄떡없을 거라 믿었던 기둥이
비스듬 넘어간다
꽃이 지고 있다
―엄태우, 「꽃」 전문
"여자"에게 있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리움 같은 문"이다. 자신도 그곳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곳 가까이 집을 짓고 살"면서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쪽을 내어주고 늙어가는 가슴속"에서 "넓고 아늑한" 자신만의 "푸른 방의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머님도 오래전에 문을 부수고 요즘 점점 작아지신다/어머님이 작아지시면서" 그 "여자"도 자신의 "집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기대고 있던 벽이 금이 가고 끄떡없을 거라 믿었던 기둥이/비스듬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꽃이 지고 있"는 것이다.
그 "칠순 어머니께 왜 나는 여동생이 없냐"(김광희, 「진달래」)고 투정부리듯 물어보기도 하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동생의 이야기와 함께 섞인 어머니의 한스러운 기억이었다.
한 살 터울 나보단 훨씬 이뻤다고
두 돌도 안 지났는데 손님을 맞았제
몸에 벌건 열꽃 피더라, 가려움
덮어썼지 그 가시낸
염천도 멀었는데
'엄마 물, 엄마 물'
날은 가문데 빈 젖 물고 늘어지고
―김광희, 「진달래」 부분
그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다녀오는 길은 "있는 것 모두 내어주고도 더 줄 것 없나/두리번거리던 눈빛"이 떠올라 "목덜미가 유난히 뻐근하고 아파온다." "눈물을 참고 애써 웃음으로 배웅하시는/어미" 생각에 "다리가 휘청거린다."(김삼주, 「깻단」)
아버지라는 집의 뼈
"어머니"가 "넓고 아늑한 내 푸른 방의 집"(엄태우, 「꽃」)으로 존재했다면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을까?
아버지가 아픈 다리를 끌고 계단을 오를 때
내 부축을 받지 않는 걸 안 뼈로 이해한다
눈 내리는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걸어간
아버지가 남긴 발자국이 마디마디 고리로 이어진 뼈 같다는 생각을 한 이후
우리 집은 기울지 않고 서 있었으니까
물이 모든 것의 뼈로 일생을 살듯
깊고 넓적한 아버지의 뼈
뭐 그리 대단한 생이라고
뼈 사이에 쇠젓가락을 찔러넣고 헤집을 때
동그랗게 뜬 고등어의 자존심 같은 것
역광의 노을 속으로 하루살이들이
하루의 뼈를 물고 들어간다
저 붉은 무덤
하늘이 한 생을 넘겨받고 있다
―엄태우, 「뼈에 대한 명상」 부분
"아버지가 남긴 발자국이 마디마디 고리로 이어진 뼈 같다는 생각을 한 이후/우리 집은 기울지 않고 서 있었"다는 내용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집"을 "기울지 않"게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자식들이라는 "집"과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집"이 "깊고 넓적한 아버지의 뼈"로 인해 기울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고 아늑한 내 푸른 방의 집"(엄태우, 「꽃」)으로서의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뼈"로 인해 "집"으로 기능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나가다 팔이 닿았다 생채기가 났는지 붉은 피가 비친다 만져보니 피가 아니다 붉은 벽돌담이 하, 짓궂어라 제 눈물바람을 묻혀놓은 것, 키득거리며 침 뱉으며 까탈 부리더니 제 눈물바람을 감추고 싶었던 것
차갑고 도도한 네가, 끄떡없이 밤을 잘 견디는 네가, 너와 나 사이의 벌어진 거리 아랑곳 않고 의젓하게 침묵하던 어르신, 네가,
―김금용, 「붉은 벽돌담」 부분
"집"의 "뼈"로 계셨던 그 "아버지"가 "눈물바람을" 하신다. 아니, "눈물바람을 감추고 싶"어 하신다. 이제는 "밤을 잘 견디"시지도 못하고 "의젓하게 침묵하"시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끝내 "제길 떠나"셨다. "그리곤 다시 업어주려 오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식들은 "그분 이름 잊지 않으려, 햇살 손톱 빌려/깡마른 허벅지 꼬집"어야 했다. "누가 빈 나를 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곧은 양심 잡고 길 나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애통해야 했다. 그러다가 "잠시 정신 놓"치기도 하는 자식들로 살아가야 했다.(이성웅, 「아버지의 지게」)
자식들의 잔혹한 고통과 슬픔
중년부부의 모습과 노부부의 모습을 보았다면 필연적으로 자식들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쉰일곱, 빛바랜 그 여자"(이용일, 「Working Poor」)는 그동안 "새끼 다섯"(박정원, 「오동꽃」)을 낳고 키웠다.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의 자식들이 있다면 저마다 각양각색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고, 집에 있는 자식은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의 막내가 아닐까 한다.
딸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한다
어르고 달랬지만 열일곱의 생각을 알 수 없다
근처 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수소문 해 보지만
같은 지역이라 전학을 받을 수 없단다
아이에게도 마누법전이 있었다
힘없는 아빠의 딸, 전학 하나 못 보내는 아빠의 딸,
언제부터 아이의 눈은 초승달을 닮았다.
―김경곤, 「코리안 밴디드 퀸」 부분
"딸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비 때문이라면 학비를 내야한다거나 낼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만, "근처 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수소문을 해 보"는 것으로 보아 학비가 아닌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 듯싶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열일곱" 살 먹은 "딸아이"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고통의 강도나 깊이를 더욱 체감하게 해주는 것 또한 그러하다.
아랫도리 벗겨진 채
차디찬 모텔방에 누워 있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자
실잠자리처럼
포충망을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외로운 날갯짓을 했을까
까르르, 보랏빛 웃음도 식어버린
커피 잔을 싼 보자기에서
쓰르쓰르 쓰르르르
여치가 운다
―고석종, 「휴대폰」 전문
그런 가족에게는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도회지로 옮겨간 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삶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아서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하며 모텔에서 몸까지 파는 자식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이웃에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자식이어도 가정이 순탄치 않아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나와 찜질방에서 살고 있"(김경곤, 「즐거운 여자 -조울증」)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처음 보는 남자와 건배하며 합석을" 하고 "벨벳블라우스와 플레어스커트가 벗겨지"는 일탈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귀에 언제나 들려왔던 소리는 "오늘 밤 외로운가요?"라는 자기 스스로 뇌까리는 말이 아니었을까.
보증금 이백만 원 월세에
강릉시 노암동 단칸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통지서를 따라온 감기와 동거하느라
그나마 덜 적적했는데
감기 녀석 훌쩍 귀향했는지
땀벅벅 몸뚱이 널어 말리고 싶던 낮 두 시부터
온몸을 사각사각 죄어오는
스프냄새 짙은 라면 생각에
한참을 질질거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그랬나
퇴근길 편의점 사발면에 뜨거운 물 넣고
추측하건대,
어머니 임신했을 때 라면을 즐기신 게 분명하다
탯줄을 타고 낮은 포복으로
꼬불꼬불 흘러든 익숙한 맛에
발가락부터 까르르 흥분하던 뱃속 기억
라면 냄새 지독하면
슬그머니 발바닥 가려웠다
이제 엄마를 만나기 위해
뜨겁게 3분을 기다린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가려움이
오한이 머물던 자리에
으늑하게 번지고 있다
―최은묵, 「추측」 전문
그런 자식들 중에도 착실한 자식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다. "보증금 이백만 원 월세에/강릉시 노암동 단칸방으로 발령을 받"아 "감기"와 싸우고 "라면"을 먹으면서도 "엄마가 보고 싶어" "한참을 질질거"리는 자식, "이제 엄마를 만나기 위해/뜨겁게 3분을 기다"리는 자식도 있는 것이다. "독한 몸살을 앓고/밤을 골라 딛는 습관이 생"길 때마다 "까닭 없이 웃어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흥건히 고인 눈물"(성은경, 「그림자」)을 보는 자식의 얼굴에 뜨거운 김이 서려 "으늑하게 번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먼지의 집에서 사는 가족들
이 시대 가족들의 초상인 "여자"와 "남자"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식들"이 모여서 살고, 태어나고, 흩어지는 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먼지의 집"일 것이다. 이인주의「잔인한 교감」이 프롤로그였다면 조유리의 「먼지의 집」은 에필로그가 되어 "잔인한 교감"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집, 그들이 이루어놓은 집 한 채를 보여준다.
먼지도 뭉치면 집이 된다 나는 지금
먼지로 지은 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 집은
오래된 세간과 구석진 변두리에서 발주되었다
어쩌다 잘 못 찾아 든 햇살에 눈살 찌푸리며 돌아앉는 것은
이 집의 피할 수 없는 생리다
월세에서 전세, 다시
임대로 문패를 바꿔다는 동안
윗목에 파지더미 증축하시던 조부
기왓장 한 채 되어주지 않는
원고지 빈 칸을 채워주곤 했던 것은
만기를 엿보던 청약부금이었다
한 계좌씩 헐릴 때마다
문설주 부여잡고 풀풀 일어서던 먼지들
먼지도 뒤엉키면 가계의 대를 잇는
유산이 된다 굴리고 굴려
후대에 길이 상속할 든든한 밑천이
내 집 곳간에 그득 쌓여있다
―조유리, 「먼지의 집」 전문
"오래된 세간과 구석진 변두리에서 발주"된 "이 집은" 세월이 흐를수록 "월세에서 전세, 다시/임대로 문패를 바꿔"달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문설주 부여잡고 풀풀 일어서던 먼지들"만 보였다. 그러나 "먼지도 뒤엉키면 가계의 대를 잇는/유산이" 되는 것을 깨닫고 "후대에 길이 상속할 든든한 밑천이/내 집 곳간에 그득 쌓여있"는 것을 보게 되는 가족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종섶 - 1964년 경남 하동 출생, 2007년 기독교 타임즈 문학상 시 당선. 2008년 대전 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제 10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시흥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