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구문(家傳舊聞)」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문중사를 밝혀줄 귀중한 문헌입니다.
오는 10월 21일 안성회합에서,
유창배씨의 선대 유절(兪棁)공에 대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일화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관련 자료를 통해 공개할 계획입니다.
그것은 『왕고은대일기(王考銀臺日記)』 <가전구문(家傳舊聞)>에서 전하는 내용입니다
본래 유절공에게는 부인이 강화도출신 채씨로 알려졌는데
병자란에 유절공이 포로로 끌려가는 바람에 생사를 확인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족들은 그날을 기일로 삼고 가묘(虛葬)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13년만에 고국에 귀환하게 되었고,
후배 상주유씨 사이에 3남을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 강화출신 채부인에 대한 기록도
족보에서 사라졌던 모양입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채씨부인에 대한 이러한 기록이
사촌동생 유평공이 남긴 「강도일기(江都日記)」, 곧, '강화도 일기'에
실려있다고 구전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서소문밖에 살았던 유성증공 일가가 병자란 피난을 갔던 곳이
바로 강화도 유절공의 처가 채씨댁이었다는 것입니다
옛족보에서 「강도일기(江都日記)」라고 명명한 문헌이
<가전구문(家傳舊聞)>, 곧, '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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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족보」 자산공파에 유절(兪棁)에 대한 기사는 아래와 같다.
“절(梲)은 정축년에 강화도가 함락되는 난을 당하여 돌아오지 않자, 모친 연안이씨(延安李氏) 묘소 좌측에 허장(虛葬)을 썼다. 종제 평(枰)의 「강도일기(江都日記)」에는 배위인 채씨(蔡氏) 본가는 강화도에 있었다고 하였다. 구보(舊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상고를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유절의 처가인 채씨가(蔡氏家)가 강화도에 있다”는 기록은 곧 이를 두고 하는 말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본「가전구문(家傳舊聞)」이 본래는「강도일기」로도 불렸음을 알수 있다.
-구보(舊譜: 옛족보)에는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3자(三子), 절(梲), 매(梅), 자는 산립(山立)이다. 정축년(1637) 강화도 난리에 오랑캐에게 운수가 막히는 변고을 당하여, 항복하라고 종용했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로인해 바다로 끌려가게 되었다. 10여년이 되어도 살아서 돌아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도망쳐서 야심한 밤에는 걸어가고, 낮이면 깊은 산속에 몸을 숨겼다. 이와 같이 도망한지 3년이 지나서야 조선에 도착하게 되었다. 산립(山立)이라고 애도하는 이름을 지었다. 본래 죽산 동면 월곡(竹山 東面 月谷)에 살았다. 후배(后配)는 상주 류씨(常州柳氏)이며 세 아들을 낳았다.”
이글을 살펴보면, 배위가 채씨(蔡氏)라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유절(兪梲)을 허장(虛葬)을 썼던 이유가 병자란으로 포로로 잡혀 13년만에 생환하였기 때문임을 알수 있다.
「병자년(인조14년, 1636) 12월 14일, 새문(서소문)밖 본가 강화도 피난」
-피난처인 강화도 장령촌(長令村)에 있는 채생(蔡生)댁은 유절(兪梲)공의 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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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인조14년, 1636) 12월 16일에 김포를 출발하여 통진의 광성촌 나루터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워 모두 들 저녁밥도 먹지 못한 채 촌집에서 밤을 세웠다.
12월 17일 동이 트자, 나는 하인 선남이를 데리고 나룻터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다. 배 한 척도 없는데 상황에 배를 기다리는 피난행렬이 산과 들에 가득 메워서 몇만 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병이 이미 통진읍내(通津邑內)까지 닥쳤다고들 한다. 여기서 20여 리밖에 안된다는 소문이다. 사람들은 필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날 오전 10시경 나는 하인 선남이를 데리고 나루터에 가보았다.
나루터 가쪽 바위틈에 작은 배 한 척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칼을 들고 배 위에 올라보니 배 위에는 사람은 없었다. 이불 보따리와 궤짝이 보여서 몇 번인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불 보따리는 참판공(俞㯙)이 예문관에 숙직할 때 덮었던 것이었고, 궤짝은 예문관 사초(史草)를 담은 것이었다.
아마 임금의 수레가 애초에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참판공이 어가를 호종(扈從)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예문관에서 강화도로 먼저 물건을 보냈던 것이리라. 그런데 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어있는 자가 눈에 띄어 선남이에게 잡아서 끌어내게 하였다. 예문관 서리(書吏) 최세윤(崔世允)이었다.
예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람이길래, “대부인 마님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배가 없어 망극한 처지에 놓여있소. 다행스럽게 이 배를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천운이요”라고 하였다. 최세윤은 일행의 승선을 완강히 거절했다. 내가 칼을 뽑아서 베려고 하자 최세윤은 그때서야 목숨을 애걸했다. 선남이에게 그 배를 지키게 하고 다시 돌아와 모든 일행을 보호하며 급히 배에 태웠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12월 18일에 나루터에서 강화도 장령촌(長令村)에 있는 채생(蔡生)의 집에 갔더니 밤이 이미 저물었다. 채생(蔡生)은 유절(兪梲)씨의 장인이다. 대감께서 작년 봄부터 이 집에 곡식과 책들을 먼저 보내어 받아두게 하였다. 그래서 모든 일행은 안정을 취할수 있게 되었다. 그 달 23일∼24일사이 대감(俞省曾)과 참의공(兪榥)은 끝내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해서 강화도 채생(蔡生)의 집으로 돌아왔다.
-『 왕고은대일기(王考銀臺日記) 』 가전구문(家傳舊聞)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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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日, 離發到通津廣城村, 津邊則日已昏矣. 上下不得食, 經夜村舍. 十七日平明, 余率奴先男, 周覽津路, 無船隻. 避亂候舡之人, 漫山蔽野, 不知其幾萬也. 且聞賊兵已至通津邑內, 距此卄許里, 人人自分其必死. 同日巳時, 余率先男又往津邊, 津邊巖石間, 藏一小舡. 余持劍上其船, 船中無人, 有衾籠封櫃, 再三諦視, 衾籠乃參判公, 以翰林入直時衾籠, 封櫃, 藝文館史草櫃也. 蓋大駕初欲入入江都, 而參判公將扈駕, 故自本館先達江華者. 又見有人潛伏腔底, 使先男拿出, 則乃藝文館, 館吏崔世允, 而自前熟面之人, 故大夫人一行今到此處, 無舡罔涯之中, 幸逢此舡, 此實天也云爾則, 世允有拒塞之言, 余拔劍欲斬之, 世允始哀乞. 使先男守其舡, 余親進護上下一行. 急急載舡. 渡津夜已三更. 十八日, 自津頭往江華長令村蔡生家, 日已曙矣. 蔡生兪梲氏妻父. 自乙亥(인조13, 1635)春後, 書冊穀物先送接置於其家. 故一行上下賴以安頓. 同月卄三四日間, 大監與參議公 終不得達山城. 還到蔡家. |
첫댓글 안성에서 개최되는 추계 포럼 문화행사에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계유씨포럼의 품격은 바로 이런 학술활동에서 더욱 진가가 발휘됩니다.
인당 동재 포럼지기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좋아요^^
안타까운 역사중 하나 입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백성들이 목숨걸고 탈출하여 조선 땅으로 돌아 왔건만 인조는 이를 지켜주기는 커녕 다시
잡아 다가 청나라에 보내는 일을 진행 하였습니다
인조는 도망한 포로를 쇄환하는 일로 또다시 온나라가 놀라움에 떨고 있엇다 우리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여 돌아 왔으나 남한산성의 조약 때문에 도망한 포로를 결박 하여 청나라로 보냈다 한다
봉림대과 함께 청명전쟁 에 참여 하였다 합니다 귀국 하여서는 현종이 불러들여 북벌에대한 군사교육을 맛아 교육시키엇다 하네요
현종미 아니 효종 입니다 ㅎ
인당동재포럼지기
연구발표 노고에
감사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