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1일 민주노동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씨의 차명계좌에서 발견된 167억원 중 73억원이 아버지 전씨의 돈으로 밝혀짐에 따라 서부지청에 전씨를 민사집행법 위반 혐의로 고발장을 접수시켰다. 고발장의 내용은 두 가지로 법원의 재산명시 명령에 허위로 재산을 신고한 점과 추징금 강제집행을 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산을 은닉한 혐의다. 전씨는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2205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부과받은 바 있다. 이중 314억만을 낸 전씨는 더 이상 자신 명의의 재산이 없다며 추징금 납부를 계속 미뤄왔던 터다. 전씨는 현재 대지 500여평에 시가 40억 상당에 이르는 연희동 사저에 살고 있는데, 이 집은 부인인 이순자씨의 명의로 되어 있다. 지난 해 5월 추징금 납부 만료 시한이 다가오자 법원으로부터 재산목록 제출 명령을 받은 전씨는 6월 23일 법정에 출두해 자신의 재산이 29만원밖에 안된다고 밝혀 전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편, 이순자씨 명의로 된 연희동 집말고도 전씨 일가의 재산은 어림잡아 200~300 억원에 이른다. 18살, 15살인 전씨의 손녀와 손자가 30억원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비롯 장남인 전재국씨는 시공사와 리브로의 최대 주주로 출판재벌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식들이나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추징금을 내야하지 않겠냐는 지적에 대해 전씨는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추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편 민주노동당이 전씨를 고발한 것을 두고 검찰 관계자는 “법률적인 처벌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73억원이 전씨가 조성한 비자금인 것은 맞지만 이미 아들에게 증여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씨의 재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해서 재산 허위신고로 전씨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현재로선 무리라는 설명이다.
새로운 문화권력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먹고산다고 했던가. 지난 해 전씨가 법정에 출두해 전재산이 29만 1000원에 불과하다고 진술할 무렵 장남인 전재국씨는 리브로 부산점에서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었다. 1994년 설립된 (주)리브로는 2000년 12월 을지서적 주식회사를 흡수, 합병하면서 출판 유통업계를 장악해갔다. 현재 리브로의 최대 주주는 전씨의 장남인 전재국씨로 36%의 지분을 갖고 있다. 여기에 전재국씨가 또한 대표로 있는 (주)시공사의 지분과 외가쪽 친척인 이창석씨의 지분을 합치면 전두환씨 일가의 지분율은 무려 77%에 이른다. 89년 오디오 전문 잡지를 내면서 출판 사업을 시작한 시공사는 1991년 전두환씨가 국민에게 환원하기로 약속했던 서초동으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그 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전재국씨가 대표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단행본 사업에 진출한 시공사는 1993년 한국 최대규모인 예술전문서점 아티누스 법인을 설립하고 아동도서 사업에 진출하는가 하면, 한국미술연구소와 연계하여 ‘시공아트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미술전문서적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1997년 시공코믹스로 만화시장 진출, 1999년에는 (주) 시공 M&C를 흡수, 합병하면서 패션, 게임, 오디오, 인테리어 등 잡지분야에서도 영역을 다지게 된다.
시공사의 지분율을 보면, 대표이사인 전재국씨의 지분이 47%에 이르는 가운데 전두환씨의 차남과 삼남인 전재용, 전재만씨와 손녀인 전효선씨도 시공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들 전씨 일가의 지분은 전체 지분율의 68%에 달한다. 시공사는 출발부터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주요한 판권을 사들이면서 출판업계에 세를 넓혀갔다. ‘메디슨 카운디의 다리’, ‘펠리컨 브리프’와 같은 소설류와 1995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출간, 성공적으로 그 입지를 다져나갔다. 현재 시공사는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시공북스, 시공아트, 시공주니어, 시공매거진스 등의 출판을 비롯 유통, 게임, 인터넷, 펜션 사업 등 각종 분야를 아우르며 새로운 문화권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한편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이 주축이 되어 조성된 헤이리 문화예술마을에 박노해, 윤도현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포함된 350여 회원중의 한 명으로 전재국씨도 참여하고 있다. 또한, 시공사는 한길사, 세계사, 문학과 지성사 등 10여개 출판사와 함께 1996년 서울 북클럽을 설립, 99년 파주출판유통단지 내 초현대식 물류센터를 준공하고 운영 중에 있다. 단지 내 출판조합 공동창고는 1300평인 반면 시공사와 리브로의 물류창고는 4500평에 달한다.
출판으로 시작한 시공사가 시공 미디어 그룹을 자칭하며 문화예술계에 그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돈’에 있다. 설립 초기부터 중간의 아이엠에프 사태를 거치는 와중에도 시공사는 자금력을 앞세워 외국의 베스트 셀러와 일본의 유명만화 등을 비싼 판권료를 주고 사들였다. 이러한 시공사의 공격적인 경영에 동종 업계는 부러움과 의혹의 시선을 동시에 보내고 있다. 의혹의 초점은 지금의 ‘시공 미디어 그룹’을 가능케 한 자금의 출처가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과거 5공시절 조성한 수천억대의 비자금이 그 출처로 짐작되지만, 그저 상식적인 짐작일 뿐 법은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안된다는 전씨 및 새로운 문화재벌로 배를 불리고 있는 그 일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지난 3월초 MBC <신강균의 사실은..> 은 ‘전두환씨는 법 위에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경찰의 과잉예우 및 전씨의 비자금 문제를 다루면서 전씨 일가가 어떻게 대를 이어 권력화하는지를 다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전씨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서 프로그램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시청자 의견은 2000여건에 이른다.
요즘 만화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잡지가 있다. 지난 해 시공사가 창간한 <오후>라는 격월간 순정만화 잡지로, 잡지로서는 드물게 초판 4쇄까지 발행되는 등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잡지뿐 아니라 실제 시공사는 많은 양서들을 출판했다. 디스커버리 시리즈와 같은 교양 총서는 물론이고, 제러미 러프킨의 ‘육식의 종말’, '음식혁명‘과 같은 책들도 시공사에서 펴낸 것이다. “시공사는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 네트워크 안에서 대중을 향한 정보, 지식, 교양, 오락과 감동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메시지들을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문화 기지국의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전재국씨는 시공사 홈페이지의 CEO메시지에서 밝히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자신은 빈손이라며 추징금 납부 요구에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고 있는 형국에서 그 아들은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권력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변신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역사는 정말로 되풀이되는 것일 뿐일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친일이라는 과거 행적은 덮어둔 채 외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소위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풍경을 우리는 오랫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새로운 문화권력은 몽둥이도 군홧발도 없이 ‘지식과 교양과 감동이라는’ 세련된 문화의 외양을 띠고 촘촘하게 우리의 일상을 포섭한다. 그 익숙하고 아름다운 권력에의 투항! 이미 익숙해진 탓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여도 좋은 것일까? 친일행위 진상규명법이 해방 반세기만에야,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누더기가 되어 간신히 국회를 통과한 것처럼 교묘하게 대물림되는 독재권력의 청산도 요원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닌지. 정말이지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 늙은 군인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문화예술과 붙어먹게 하고 과거 화려했던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오늘, 가만 들여다보니 산뜻한 장정의 책에는 향기대신 피냄새가 가득하다. 이 이상한 이종교배에 침묵하고 만다면, 당신 또한 짜고치는 고스톱에 합류하고 있다는 혐의를 면하기는 힘들 듯 하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한다는 빌미로 비자금 수사를 위해 방문조사를 실시하는 검찰처럼. 민중의 지팡이로서 학살죄인에게 구십도로 허리를 꺾는 경찰처럼. 도대체 누가 그에게 판돈을 쥐어 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