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산악계 최초의 연합단체는 1965년에 결성하여 1983년 해체된 부산산악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1969년 대산련 부산경남연맹이 생기기 전까지 부산에선 유일한 연맹체로서 단위산악회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며 부산 등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부산학생등산대회를 비롯해 가맹단체 합동등산회, 산악강연회 개최, 식목등산 등이 당시 부산산악연맹이 남긴 족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부산산악연맹은 당시 정부가 전국 산악단체들에게 대한산악연맹(1962년 발족)에 통합할 것을 지시했으나(유사단체 통합령) 부산 지역의 자생적인 조직으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부산산악연맹 결성에 앞서 1961년 9월5일에는 재부 산악단체 통합준비위원회(위원장 성산)가 발족돼 산악회 통합을 시도한 바 있다. 부산산악회, 대륙산악회, 한국산악회 경남지부, 쟈일크럽 등 당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모든 산악회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해 부산 등산의 발전을 꾀하자는 의도에서 통합에 박차를 가했으나, 산악회 간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통합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1965년 부산산악연맹 창립
이후에도 통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그 사이 메아리산악회 등 새로운 산악회들이 창립해 기존 산악회간 통합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1965년 가맹단체가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면서도 수평조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연맹체인 부산산악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1965년 연맹 결성 당시 가맹단체는 한국산악회 경남지부, 부산산악회, 대륙산악회, 쟈일크럽, 메아리산악회, 부산교직자산악회, 산정클럽, 하이커클럽 등이었고, 초대 회장은 신업재 한산 경남지부장이 맡아 1972년까지 8년간(1~4대) 역임했다. 역대 회장은 신업재씨를 비롯해 김재문(5대) 손경선(6대) 김해진(7대) 김희정(8~9대) 오점량(10~11대) 손경선(12~13대), 최상원(14대~현재)을 포함해 모두 7명이 역임했다.
연맹이 거둔 뚜렷한 성과는 부산학생등산대회를 매년 개최한 것으로, 이 행사는 초기 부산 등산운동 활성화에 밑거름이 됐다. 이 대회는 사실상 1964년부터 부산일보 주최로 대륙산악회 등 부산 산악인들이 행사를 주관했으나 1965년 연맹 발족과 함께 1966년부터 연맹이 주최가 되어 제1회 부산학생등산대회를 개최한 뒤 지금까지 매년 실시되고 있다.
1969년 연맹 차원에서 개최한 가맹단체 합동등산회도 이 연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행사였다. 이 행사 때는 서울 지역 산악인들을 초청하여 행사 규모를 짜임새 있게 추진했으며, 특히 한국산악회의 거목 김정태씨(작고)와 이인정씨(현 대산련 부회장) 등 여러 인사들이 참가해 금정산 상계봉 등에서 암벽등반 강습회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밖에 노산 이은상 등 원로산악인을 초청해 산악강연회를 개최했고, 금정산에 식목등산을 실시해 산악인의 자연보호자세를 고양시킨 것 등이 연맹의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1969년 대한산악연맹 부산경남연맹이 새로이 창립되면서 산하단체 중 대륙산악회와 고려산악회가 탈퇴해 가맹단체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한일산악회, YMCA산악회, 구덕산악회, CBS산악회, 수정산악회, 여명산악회, 아페나인산악회 등이 새 식구로 가맹하여 세를 넓혀 나아갔다.
이 연맹은 1983년 10대 회장 오점량씨 재임시 한산 부산지부와의 소속단체 중복과 업무중복을 피하고 운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거암산악회, 홍아산악회, 엣센스알파인크럽, 부산산악회, 쟈일크럽, 한산 경남지부, 서로산악회, 황령산옥세정산악회 등 가맹단체들을 사단법인 한산 부산지부 회원단체로 흡수함에 따라 19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학생등산대회 지금까지 성황리 개최
부산 산악계 초기 발전에 큰 영향을 준 행사 중의 하나가 부산학생등산대회였다. 이 대회는 중간에 주최기관이 부산시교육위원회, 한산 부산지부 등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기존 산악단체와 산악인, 학생들은 물론 언론사까지 함께 참가한 부산 지역사회의 큰 행사로 축제분위기를 이뤘다.
학생들에게 등산의 기술과 올바른 자세를 심어주자는 것이 이 대회 개최의 취지였다. 이 대회의 전신은 1964년 6월13~14일 이틀간 부산일보사와 한산 경남지부, 대륙산악회 등이 금정산에서 공동 주최한 부산등산대회다. 이 대회 역시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위원회, 부산문화방송, 군수기지사령부 등 사회 각 분야의 기관과 단체들이 후원했으며, 대회장은 부산일보 최세경 사장, 부대회장은 한산 신업재 고문과 대륙산악회 안성수 회장이 맡았다.
남녀 대학부와 고교부로 나뉘어 열린 이 대회는 금정산 행군 10km와 팀웍, 감투, 장비, 품위, 막영, 이론 등 7개 부분에 800점 만점으로 채점, 수상단체를 선정했다. 당시 대학부 종합우승은 부산대산악부가, 고등부는 경남고가 우승기를 차지했다.
부산등산대회의 이 같은 열기는 1966년 6월에 개최한 제1회 부산학생등산대회(대회장 신업재 부산산악연맹 회장)로 이어졌다. 1965년 탄생한 부산산악연맹이 부산등산대회의 취지와 방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등산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제1회 대회에는 부산대 A, B팀, 동아대 A, B팀 등 대학팀과 고교부의 경남고, 부산고, 동래고, 경남여고 등 모두 20개팀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는 25일 오전 중앙동 부산일보사 앞에 모여 개회식을 갖고, 충무동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한 뒤, 차편으로 범어사에 도착, 금정산 등산에 들어갔다. 만덕고개로 이어지는 금정산 주능선을 종주해 성지곡수원지~서면 코스로 하상해 부산상고 교정에서 폐회식을 가졌다.
대회 평가는 6인 1조로 구성된 1개팀을 기준으로 대회기간 중 행동, 품위, 협조, 장비, 막영, 이론 등 6개 부분 평점을 종합해 심판위원회가 수상팀을 결정했다. 제1회 대회의 심판위원장은 오점량 부산산악연맹 이사가 맡았다. 시상은 대학부와 고교부로 나눠 각각 우승, 준우승, 감투상, 장려상 등을 골고루 수여함으로써 참가팀의 의욕을 고취시키도록 배려했다. 또 이 대회에는 당시 부산산악연맹의 산하단체였던 한국산악회 경남지부를 비롯하여 9개 산악회가 참여했고, 이원락(부산산악회), 박창수(쟈일클럽), 김진규(산정클럽), 김우원(부산교직자산악회), 김계선씨(메아리회)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1970년 제5회 때부터는 장소를 신불산, 영취산, 시살등, 염수봉 일원으로 옮기는 등 대회의 질을 높였다. 1966년 제1회 대회부터 1970년 제5회 대회까지 각부별 입상 팀은 아래와 같다.
회수 대회년월일 대회장소 대회장 부 별 우 승 팀(남대/여대/남고/여고)
1 1966 금정산 일원 신업재 부산대/경남상고
2 1967 〃 〃 부산대 A/-/경남상고/동래여고B
3 1968 〃 〃 부산대/부산여대/경남고A/동래여고A
4 1969 〃 〃 해양대A/부산여대/경남고/동래여고A
5 1970 신불, 영취산, 원동일원 〃 동아대/부산여대/경남상고/덕명여상
1971년 제6회 때부터는 부산시교육위원회가 교육적인 측면에서 이 대회의 주최와 경비를 부담하며 대회를 주최했고, 부산산악연맹은 실질적인 행사를 주관, 1981년까지 계속했다. 1982년부터는 부산산악연맹 회원 단체들을 흡수한 한국산악회 부산지부가 맡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학생연맹 발족, 부산 산악계 발전 전기
1960년대 부산 지역 대학 및 고교산악부의 꾸준한 등산활동은 부산 등산계에 싱그러운 충격과 새 바람을 일으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더욱이 경북학생산악연맹의 활발한 등산활동은 당시 경향 각지의 학생산악부에 건전한 등산을 유도하는 길잡이로 충분한 명분을 부여했다. 특히 집행부 구성에서 선후배들의 짜임새 있는 참여와 효율성 있는 운영은 대학산악부를 이끌어 나가는 다른 지방 임원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부산 지역에서도 1960년대 초반에 학생 등산활동을 주도한 부산대 산악부 출신 박진과 김재도, 그리고 경북학산련 주최 60km 등행대회에 심판위원으로 참가한 성산씨는 1966년 하반기부터 만나서 부산학생산악연맹 결성을 위한 치밀한 구상을 시작했다.
1967년 11월 부산시내 중구청사 옆에 자리잡고 있던 아주관광여행사 사무실을 성산씨의 주선으로 방문하게 됐으며, 그곳에서 김진규 부장(산정클럽)과 김경희 사장을 알게 됐다. 이 상견례는 성산씨의 지인으로 아주관광 전무이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만석씨가 소개해 주었으며, 회의는 자기 사무실을 이용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에서 하루가 다르게 창립을 위한 업무추진이 가시화됐으며, 회의가 밤 늦게까지 계속되면 간단한 식사까지 제공해 주었다.
부산대, 동아대, 수산대(부경대 전신), 해양대가 창립에 동참했고, 뒤늦게 부산여대(신라대 전신)까지 참여해 대학부는 일단 5개 대학으로 묶고, 고등부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쟈일크럽 임원진과 협의를 통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고등부로는 경남고, 동래고, 부산고, 경남상고, 부산공고, 배정고 등이 참가해 1968년 3월31일 부산 남일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던 대청장 예식장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총회에는 한산 원로회원인 신업재 회장을 비롯하여 김택진, 오점량, 김용기, 박태권 교수가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초대 회장에는 김택진 동아대 교수를 만장일치로 추대하고, 성산 박진 김재도 채중권 구철은 등 선배 산악인들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했다. 대표상임위원은 김태근(동아대), 학술상임위원은 윤명길(수산대), 기술상임위원은 김형대(동아대)가 임명됐다.
당시 연맹 창립규약에는 연맹 결성의 목적을 ‘산악지식의 보급과 등산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향토 및 자연애호의 소양을 마련하여 각급 학교 산악부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회관은 현재 부산우체국 옆 국민은행 자리에 있었던 당시 베이호텔 2층의 부산대학교 학사산악회 회관을 잠정적으로 같이 사용했다.
정기총회 후 4월 금정산에서 창립기념등산을 집중등산 방식으로 구포, 동래온천장, 부산대학교, 범어사에서 대학부와 고등부가 각각 조를 편성해 출발, 고당봉 정상에서 집결하여 다시 북문산장 광장에서 모여 연맹 발전을 위한 학생산악부의 위상을 정립하자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다.
같은 해 12월에는 영남알프스 일원에서 대학산악부가 중심이 되어 동계 합동훈련등반을 실시했다. 1969년 3월 제2차 정기총회에서 오점량 부산대 교수가 회장으로 취임했고, 대표상임위원에는 최해곤(동아대 64학번), 운영위원장에는 김정실(부산대 67학번)이 임명됐다. 5월에는 연맹회지 ‘산소식’을 발간, 가맹단체의 동정과 등산기술 이론 등으로 편집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7월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좌천 달음산에서 하계 산간학교를 개설하여 지도위원들이 산하단체 회원들에게 이론교육과 암벽등반 초보기술을 교육했다.
1970년 3월 YMCA 강당에서 개최된 제3차 정기총회는 오점량 회장에서 엄익주 회장으로 바톤을 넘겼으며, 대표상임위원은 김정실군이 맡게 됐다. 대학부에 부산공전(현 부경대)과 부산교육대학이 가입하면서 7개 대학으로 단체가 늘었다. 고등부는 동래고를 비롯하여 경남상고, 배정고, 부산상고, 금성고, 영남상고, 동성고, 낙동고, 덕명여상으로 9개 단체가 됐다.
2년간 회장직을 맡고 연맹을 꾸려간 엄익주 회장에 이어 맡은 장두석 회장까지는 다소 활동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974년 김동인 회장(작고)이 취임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김동인 회장 재임 중 실시한 1982년 히말라야 파빌봉(7,102m) 원정은 부산학산련이 주최하고 부산일보사가 후원한 행사로서, OB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등정에 성공한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 이 원정대는 부산대 OB 이승렬 대원(당시 29세)이 정상을 밟았으며, 권경업, 주시정 대원 등 OB회원 8명이 참가했다.
부산학산련은 김동인 회장에 이어 이용달, 최상문, 황순철, 최해곤, 김정실, 정성호 회장까지 승계되면서 부산 지역 학생산악운동에 내실을 기하며 후배양성을 위해 꾸준히 매진하고 있다.
학산련 이전 고교산악부의 발자취
한국등산사 초록 '부산편1'에서 언급한 1947년의 동래중학교 산악부 활동내용 외에 소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가 뒤늦게 입수되어 사료로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수록한다. 아울러 경남고교 산악부와 졸업생들로 회를 구성하여 연맹 가입을 굳이 사양하고 독자적인 산악활동을 활발하게 지속하고 있는 구덕산우회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3.1운동이 있었던 다음 해인 1920년 한글 학자인 최현배 선생께서 동래고보에 교사로 부임해 휴일에는 학생들과 함께 금정산, 장산, 영취산 등 근교의 산을 오르며 일본의 압박에 대한 울분도 삭이고 애국애족하며 국토를 아끼는 마음과 호연지기를 길렀다.추월영(고보 1회․전 경남고교 교장), 김하득(고보 4회․전 부산교육대학 학장) 증언)
그 시대에 일반 사람들은 등산운동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1920년 후반에 일본인 이이야마(飯山達雄)가 일본인들을 모아 등산을 시작하면서 한국 사람들도 등산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보고 한국 청년들이 모여 등산한 것이 처음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학교 산악부가 있었고 활동도 활발했지만, 우리 나라에서 학생들이 20년대 초반에 등산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근대 등산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후 1930년을 전후로 서울의 양정고보, 배재학당, 서울치전 등 학교 산악부가 활동했으며 일반 단체로는 조선산악회가 처음 발족됐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학생들의 등산활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활동을 못했지만, 1942년 김하득 선생(동래고보 4회)은 함경도 함흥 영생여고에 생물교사로 근무하면서 백두산에 여러 번 올라 생태계와 식물 분포를 조사해 책을 발간했다. 다만 현재 그 책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만약에 이 책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 나라에서 발간된 최초의 백두산 식물분포를 조사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1945년 해방된 다음해 동래고보의 등산활동은 김하득 교장이 부임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는다. 교장이 직접 교실 수업에 들어와서 백두산에 올랐던 이야기, 국토의 아름다움과 백두산의 생태계 등에 관해 흥미롭게 강의하여 학생들이 등산에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이후 1950년 한국동란으로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1947년 중학 1학년이었던 김현섭(29회), 최욱(29회)을 끝으로 1956년 학교 건물이 환수될 때까지 학생활동이 중단됐다. 1950년 9월 학교는 다시 개교했으나 건물은 군대에 징발돼 동래역 앞 논바닥에 세워진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1956년 학교 건물이 군으로부터 환수되면서 학생들의 교내 활동이 시작되고, 등산반 활동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어 1961년 40회 김수웅(의사․미국 거주)이 주축이 되어 최환영(40회), 이병근(41회․동서대학 교수), 김영목(미국 거주), 손영진(농장), 이상헌(사업), 양창석(코롬비아 거주), 박영순(파라과이 거주), 이진렬(42회․대우학원 원장), 박정근, 박동상, 안병철(43회․사업), 오영남, 신정철, 이호길(45회․관세사), 김중배, 서정해(광업진흥공사)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2년에는 대구 팔공산 60km 등행대회와 1964년에는 제1회 부산등산대회 및 제1회 서울 도봉산 한국 특수체육 등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교내 학예전에는 등산장비전시회(당시에는 등산장비를 보기 힘들었음)를 통하여 학생들에게도 활발한 계도활동을 했다.
특별활동으로 시작한 경남고산악부
경남고산악부가 창립한 것은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그리고 60년 말 쟈일크럽이 학생부를 운영하게된 것이 계기가 됐다. 1960년 9월 졸업기수로 16회 김한무 반장, 문수신, 서수홍, 17회 김대성, 윤기태, 임남태, 조진웅 등이 중심이 되어 산악반을 결성하니 태동의 의미가 크다할 것이다. 서울이나 대구보다 산악운동이 늦게 시작된 부산에서 고교 산악부가 창설됐다는 것은 학교의 교풍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남고등학교는 특히 체육활동에 많은 부들이 있어 학교에서 특별활동을 장려했다.
창립 후 부산 근교의 산을 두루 오르면서 1961년 대구 60km 극복등행대회에 참가하여 견문을 넓히고, 1962년 쟈일크럽의 하계 지리산 종주에 졸업생으로 김한무(16회), 문수신(16회), 재학생으로 하자호(18회), 이창흠(19회)이 참여함으로써 장기등반에 대한 경험도 축척하게 됐다.
19회 이창흠 반장, 이용만 부반장, 김봉호, 연두현, 석용태, 임우근, 강동완, 김욱, 백기호, 노창학, 20회 오기현 반장, 최진송 부반장, 이실근, 이상헌, 성인표, 양승태, 허증경, 김정환, 박병철, 이기복 등 많은 재학생들이 입회하여 바야흐로 중흥기를 맞는다. 1963년 1월 쟈일크럽의 동계 덕유산 종주에 하자호(18회), 노창학(19회) 회원이 참가하여 동계등반의 값진 경험을 쌓았다.
매월 월례산행을 부산 근교의 금정산, 원효산, 영취산, 무척산, 토곡산, 가지산 등에서 가졌고, 학교 뒤 구봉산 암장과 금정산 상계봉 등지에서 기초 암벽훈련도 꾸준히 했다. 1964년 6월 제1회 부산학생등산대회에서 고교팀으로는 유일하게 A, B팀 두 팀이 참가하여 A팀이 종합우승을 했다(A팀 대장 이창흠, 석용태, 연두현, 오기현, 최진송). 이후 대회가 부산산악연맹으로 행사가 이관되면서 대회명칭도 바뀌어 그 우승기가 아직도 경남고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1964년 7월 부산의 고등학교 산악부로는 처음으로 지리산 종주를 시도하게 된다. 18회 졸업생인 하자호가 대장으로 2학년 오기현, 최진송, 이실근, 이상헌, 성인표 6명이 출발하여 대원사~치밭목~천왕봉~장터목~세석~노고단으로 종주 계획을 세워 출발했다. 1962년 쟈일크럽의 지리산 종주에 참가한 하자호가 치밭목 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조개골로 접어들어 등산로가 없는 산에서 예기치 못한 고생을 했으며,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도착하니 태풍의 전조인 엄청난 강풍으로 설영을 포기하고 당시 천왕봉 정상 아래의 움막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태풍이 상륙해 천왕봉에 하루 더 머물고 중산리로 하산하게 되니 경남고산악부로서는 첫 장기등반에 많은 경험을 얻었다.
1964년 8월 16, 17, 18회 졸업생과 19, 20, 21회 재학생들은 제1회 하계 임해트레이닝을 일광 해수욕장에서 4박5일에 걸쳐 실시했다. 그 후 10여 년간 이 행사가 계속됐으나 고등학교 입시제도가 바뀐 후 학교 산악부의 행사를 계속 유지하지 못해 아쉬움을 더한다.
구덕골 정기 이은 구덕산우회 출범
경남고산악부는 1965년 19회 기수가 졸업하면서 OB산악회를 창립하니 모교가 있는 구덕산의 정기를 이어받자는 의미에서 산악회 명칭을 구덕산우회라 정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창흠, 연두헌, 임우근, 석용태와 부산에서는 김봉호, 문무영 등이 주축이 됐다. 그 후 고교를 졸업하는 각 기수들이 들어왔고, 문호를 넓혀 산악부 출신이 아니더라도 등산에 관심있는 동문들까지 받아들여 그 전통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1966년 20회 졸업생들은 하계 한라산 등반을 계획을 세우고, 대장 오기현 외 5명은 관음사~개미등~용진각~백록담~서북벽~영실~수로~중문 코스로 무사히 하산했다. 산행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은 야영이 금지된 백록담에서 야영하면서 취사를 위해 백록담의 물을 뜨니 장구벌레와 올챙이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60년대 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노창호(22회), 문경표(〃), 이충덕(23회), 서기식(〃), 이영재(〃), 석용환(〃), 안형수(24회), 이명규(〃) 등이 주축이 되어 인수봉, 선인봉 등 서울 근교 암장에서 암벽등반도 열심히 훈련했다.
1968년 8월, 고교산악부로서는 처음으로 지리산 칠선계곡 코스를 택해 천왕봉을 등정하고, 세석과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종주했다. 참가한 대원은 졸업생 김봉호(19회), 오기현(20회)과 재학 2학년 하웅봉(24회), 장민제(〃), 권수찬(〃), 김경석(〃), 유홍석(〃)으로, 1969년 1월에 계획한 동계 칠선계곡 등반의 사전정찰을 겸했다.
현재 구덕산
우회의 회원 구성은 중장년층으로, 산행경력은 물론 선후배간에 형성된 끈끈한 응집력과 수준높은 등반실력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일본 북알프스, 동남아 최고봉인 키나발루, 중국 황산 등을 등반했고,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히말라야 등반을 중반을 넘긴 나이로 2001년 4월 이창흠(19회․55), 이용만(〃․55), 오기현(20회․54), 김대원(〃․54), 안형수(24회․51), 김준연(28회․47) 대원이 참가하여 쿰부히말의 아일랜드피크(6,189m)를 등정하고 돌아왔다.
부산지역의 60년대 고교산악부 활동은 동래고, 경남고 외에 부산고, 경남상고, 부산상고, 부산공고산악부도 선배들의 관심과 후배들의 열정이 대단했으며, 활동 영역과 수준이 한때는 거의 평준화가 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