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거상 ‘사울 아이젠버그’
1950~1970년대 한국경제 부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는 유대인 거상(巨商)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 1921~1997년)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약 4반세기 동안 한국의 차관 도입 중개에 깊이 간여한 독일·스위스계 유대인 사울 아이젠버그!
그는 한국의 독립 이후 우리와 인연을 맺은 최초의 유대인으로서 한국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에 수호천사로서 출현했다. 1921년 독일 뮌헨 출생인 아이젠버그! 그의 선조는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양국에 걸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이자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던 ‘갈리치아’ 출신이다.
1939년이 되자 아이젠버그의 가족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직감하고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갔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였던 상하이엔 유럽 각국에서 피해온 약 3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같은 시기 만주의 ‘하르빈’에도 나치를 탄압과 살육을 피해 건너온 유럽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1945년엔 미군정 치하에 있던 일본으로 건너가 미군을 상대로 생활 용품과 고철을 판매했다. 일본의 혼혈 여성과 결혼한 아이젠버그는 도쿄에 거점을 두고 한국과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 정전 무렵 한국에 진출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오퍼상을 차리고 철강과 섬유, 목재 등 수입품 중개업을 했다.
유럽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대형 사업을 벌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아이젠버그는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당시인 영부인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오스트리아 여권을 소지했던 아이젠버그의 한국 진출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스라엘과 오스트리아 이중 국적자인 아이젠버그는 같은 나라 출신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막역한 사이로 발전하여 경무대를 수시로 방문해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이승만이 하야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1년부터 한국에서 본격 사업을 시작했다. 5·16 직후 미국의 무상 원조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서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아이젠버그가 처음으로 서독 차관 도입을 중계한 것은 1961년 가을이었다. 그가 주선한 차관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재원에 있어 가뭄의 단비였다. 서독과의 끈끈한 관계는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는 우호 관계로 급발전 하기에 이른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의 주요 사업에 깊숙이 간여했다. 1959년에 도입된 서독 지멘스社의 전화교환기도 아이젠버그가 중계한 것이었다. 그는 시멘트 공장, 발전소, 원자로 도입 등 초대형 사업에 외자 도입을 주선했다. 대부분 정부와 기업, 은행과 건설회사 등을 일괄 아우르는 턴키방식이었다.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인천 화전, 월성 원전 3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쌍용․고려․동양․한일 시멘트, 일신제강, 유니온 셀로판, 피아트 자동차, 석탄공사의 채탄시설 현대화, 중앙선 전철화, 포항제철 증설 등등. 그의 성과는 한국기간산업의 총람으로 간주될 정도라는 것이 관련 연구가들의 평가이다.
특히 1973년 한국원전 3호기인 캐나다 원자로의 도입 땐 유럽 30개 은행의 차관단 컨소시엄을 형성하는 비상한 수완을 발휘했다.
앞서 밝힌바, 아이젠버그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의 2중 국적소지자였다. 1949년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아이젠버그는 1968년 텔아비브에 본사를 둔 이스라엘코퍼레이션(IC)이란 다국적 기업을 설립했다. 핵심 업종은 무기·에너지·해운업이다.
그는 현재에도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과 특공대가 애용하는 이스라엘제 기관총 우지(Uzi)를 90여 개국에 전파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협력 하에 캄보디아와 중국에도 이스라엘제 무기를 밀매했다. 비정하게도 이란·이라크 전쟁 땐 양측에 무기를 팔았다.
아이젠버그는 1970년대 말 월남패망 후 공산 베트남에 억류됐던 이대용 공사 석방을 위해 막후에서 움직였으며, 중국-이스라엘 간 관계개선 교섭에도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이젠버그는 1997년 중국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젠버그는 100억 달러 대의 재산과 함께 보잉 727 자가용 비행기와 세계 7개 도시에 저택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