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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걸은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 302호 강의실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세미나식 2시간짜리 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미나
식 강의는 신라불교의 의의라는 강의로 불교로 유명한 ㄷ대학교 ㄱ캠퍼스 불교학과 김봉춘(가명) 교수가 강의를 합니다 김봉춘
(가명) 교수가 어떤 ㅂ대학교 ㅈ캠퍼스 대학생 한명을 지명하면서 "자네가 내가 강의하는 강의실에서 반장으로 임명하겠네 그러
니까 자네가 여기모인 대학생들에게 '차렷 경례'를 하면 되는것일세 알겠는가? 그 ㅂ대학교 ㅈ캠퍼스 대학생은 알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대학생은 ㅂ대학교 ㅈ캠퍼스 노어노문학과 여대생인 만으로 22세인 23세로 김지연(가명)양이라고 하며, 김지연(가
명)양은 위로 묶은 트윈테일에다가 반팔탠색블라우스와 다리를 다 드러내는 탠색초미니스커트와 진한 하얀색팬티스타킹과 하이
힐이 달린 탠색롱부츠를 입었습니다 김지연(가명)양은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생 같아보이는 초특급동안여인입니다 김지연
(가명)양은 애니메이션 괴도키드에 나오는 히로인 남녀공학 에코다고등학교(한국더빙판은 고은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이름은
모모이 케이코짱(한국더빙판은 이혜미양)양을 많이 닮았습니다 이혜미양이 문과인지 이과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문
과겠지요 김봉춘(가명) 교수는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 302호 강의실로 왔으며, 강의실에 20~30여명의 ㅂ대학교 ㅈ캠퍼스 대
학생들을 보고 조금 실망한 그런 눈빛이라고 합니다 김봉춘(가명) 교수는 자신의 대학교인 ㄷ대학교 ㄱ캠퍼스에서 이런 100석 규
모의 강의실에서 세미나식 강의를 했다고 하면 ㄷ대학교 ㄱ캠퍼스 대학생들이 50~60여명이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너무 아
쉬워서 그런 눈빛을 보였겠지요 김봉춘(가명) 교수는 세미나식 강의를 하며, 2시간 연달아서 강의를 하는게 아니라 1시간 강의를
하고, 10분 휴식끝에 1시간 강의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김봉춘(가명) 교수는 신라불교의 의의라는 강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국왕조 중에 신라와 조선이 불교를 박해했다는 기사가 나오는군요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였으며, 승려들도 고구려를 통
해서 왔습니다 최초의 포교승은 눌지왕 때 온 묵호자이며, (검은 이방인이라는 의미) 소지왕 때 아도(아기 같은 빡빡 머리)가 왔고,
묵호자와 아도 사이에 정방과 멸구자라는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왔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의 국적은 고구려입니다
그럼 뭔가 보이시지 않나요? 고구려가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물왕 말기에 고구려는 대군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해줍니다
그런데, 이일 이후로 고구려는 신라 내정에 간섭하며, 왕위 계승에까지 관여하고, 고구려와 신라는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승려를 이용해 백제 왕실을 무너뜨린 것을 본 신라에서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을 결코 이쁘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래서 박해
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눌지왕이 절을세워 주었다는 기록은 불교의 기록을 끌어 올리려는 왜곡이거나 고구려에서 불교를 접한 눌
지왕 개인의 호감 정도였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고구려에 대한 공포가 가시며, 불교가 줄 이점들이 보이면서 신라도 불교를 선택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물마립간 때 고구려와 신라의 외교관계가
긴밀했던 것을 미루어볼 때, 늦어도 눌지왕 때에는 아도(阿道:黑胡子)에 의해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을 것이다. 그후 불교는 교통
의 요충지인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 이차돈(異次
頓)의 순교가 계기가 되었으며, 529년에는 살생(殺生)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천경림(天鏡林)에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
를 지어 544년에 완성하면서 진흥왕은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으며, 551년에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
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를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비구니를 관장하는 도유나랑(都維那娘)을 두어 교단을
통솔하게 했으며, 진흥왕이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행할 때 사문도인(沙門道人)들이 수행했는데, 이들은 행사에서의 의례를 집행
하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왕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이유는 4~6세기의 사회적 변동과 관련이
깊습니다 불교 수용 이전에 왕의 종교적 지위는 다른 부(部)의 장(長)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라의 왕명인 차차웅(次次雄)이
무(巫)를 의미하는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또, 각 부나 읍락공동체에서 행해지던 천신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례는 공동체의 결
속을 공고히 했습니다 따라서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계층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해체되어가던 읍
락공동체를 직접 지배하에 두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민(民)을 통치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왕실의 입장에서는 새로
운 신앙을 필요로 했으며,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던 귀족들로서는 전통신앙에 대치되는 불교의 공인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는
데, 이것은 이차돈의 순교설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의 수용을 용이하게 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업설(業說)이었습니다. 업설
은 인간의 의지적 행위인 업에 따라 자연의 필연적 반응인 보(報)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살아 있을 때의 행위에 따라 6도(道)의 차별이 생깁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업설은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던 무교(巫敎)의 세계
관과 달리,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입장의 표명이었으며, 죽은 후에도 현실에서의 신분 및 생활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던 계세(繼世)사상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공덕을 쌓음으로써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사
회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습니다 또한 현실에서 누리는 복과 괴로움이 전생에서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설명되
므로 왕과 귀족층이 누리는 특권을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에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던 귀족층에 의해서도 적극적으
로 불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불교신앙의 대중화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에서는 불교가 대중화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의 대중
화는 교단에서 소외되어 있던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습니다 특히 원효는 중국·백제·
고구려의 교학 연구성과를 수용하고,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근거하여 일심(一心)으로써 불교사상을 화쟁(和諍)·회통했습니
다 그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모든 사람에게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원효는 일반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
라는 염불만으로도 서방 극락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만나 설법을 듣고 쉽게 성불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후 아미타신앙이
널리 성행하여 노비 욱면(郁面)을 비롯한 신라인들이 극락에 왕생했다는 설화가 만들어졌으며, 나아가서는 신라에서 아미타불로
성불했다는 설화도 유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미타신앙은 계속되는 전쟁에 시달리던 신라인들에게 안락한 사후세계를 보장해
주었으므로 급속히 정착할 수 있었으며, 그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행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관음신앙(觀音信仰)도 현실의 고난
을제거하고 복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져 아미타신앙과 함께 널리 성행했는데, 의상은 낙산에 관음의 상주처를 설정하여 관음신앙
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중고기에는 미륵보살이 화랑(花郞)으로 하생했다는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했으며, 미륵신앙은 중대
(中代)에도 계속 숭앙되었습니다 경덕왕대의 진표(眞表)는 미륵상 앞에서 정진하여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전해받았으며,
그후 금산사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했다. 이는 중대에도 진표로 대표되는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신라불교의 교학
사상(敎學思想) 565년 유학승 명관(明觀)이 불교경론 2,700여 권을 가져온 이래, 유학승들에 의해 경전이 전래됨에 따라 교학연
구가 깊이 있게 행해졌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성행하던 삼론학(三論學)뿐만 아니라 6세기에 새로 중국에 전래된 섭론학(攝論
學)과 현장이 새로 전한 유식학(唯識學) 등도 수용·연구되었으며, 그리고 계율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 초기에는 소승율 위주였으
나, 자장이 보살계를 황룡사에 설할 무렵부터 범망경보살계를 중심으로 한 대승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것은 삼국전쟁
기였던 당시로서는 결과보다 동기를 중시하여 살생(殺生) 등에 대해 융통성을 보여주는 대승계를 중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김봉
춘(가명) 교수는 여기서 일단 1시간 강의를 마치고 나서 10분간 휴식을 취합니다 이때, 감귤걸은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 302
호 강의실 교탁에 ㅂ유업에서 나온 감귤맛 우유 팩 1개를 갔다둡니다 김봉춘(가명) 교수는 감귤걸을 보고 "학생 너무 고마워요 혹
시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김규리(가명)양은 김봉춘(가명) 교수에게 "김규리(가명)이라고 합니다 ㅂ대학교 ㅈ캠퍼스 일어일
문학과 2학년생 여대생이랍니다" 김봉춘(가명) 교수는 김규리양(가명)에게 "잘 마실께요 김규리양(가명)" 이렇게 말하면서 김봉
춘(가명) 교수는 감귤걸에게서 받은 ㅂ유업에서 나온 감귤맛 우유 팩 1개를 너무 맛있게 잘 마십니다 김봉춘(가명) 교수 입장에서
는 약간의 갈증이 풀렸을듯 하네요 김봉춘(가명) 교수는 10분간 휴식을 취하고나서 다시 1시간짜리 강의를 마저 합니다 한반도에
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으로 계속 정립되는게 아니라 신라가 중국대륙의 당제국과 손을 잡아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그 다음에 신라는 당제국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둬서 신라까지 지배해서 한반도를 당나라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알고
는 신라는 백제유민과 고구려유민과 힘을 합쳐서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축출하는데에 성공해서 신라는 676년에 삼국통일을 한 한
반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이 신라는 통일신라라고 부릅니다만 다른 사학계에서는 한민족이 세운 나라가 통일신라만 있는
게아니라 통일신라가 남쪽에 있으며, 북쪽에 고구려 유민인 장군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세웠으므로 통일신라와 발해가 아니
라 남북국시대라고 불려야 되고, 그렇게 되니까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라고 불려야 된다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그런 학설도 있나봅
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안정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교학 연구가 발달하여 열반종·계율종·법성종·화엄종·법상종 등 교학의 연구
가 활발했습니다 의상(義湘)은 671년 귀국하여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학을 강론하여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
定) 등에 의해 크게 화엄종을 이루었습니다 현상세계의 모든 대립물에 차별이 없다는 화엄사상은 통일후 삼국민을 융화시키며,
신분간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신문왕 때 국로(國老)를 지낸 경흥(憬興),원측(圓測)의 제자로서 효소왕
때 귀국한 도증(道證)과 그 제자 태현(太賢) 등에 의해 유식학이 연구되어 법상종(法相宗)이 형성되었습니다 화엄학과 유식학을
비롯한 불교교학의 연구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 및 현상세계를 분석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했다는 점
에서 전통신앙보다 발전된 것입니다 하대에는 교학 연구가 훈고학적 성격을 띠게 되고 신앙은 의례화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만
족하지 못하던 승려들은 당(唐)에 유학하여 선종(禪宗)을 수용했습니다 법랑(法朗)이 선덕·진덕 여왕 때 중국선종 4조 도신(道信)
의 법을 처음 전해왔으며,도의(道義)가 821년 남종선을 전해왔지만 신라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826년 귀국한
홍척(洪陟)이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를 세워 흥덕왕과 선강(宣康)태자의 귀의를 받는 등 많은 제자에게 선법(禪法)을 전해 실상
산파(實相山派)를 형성했습니다 그후, 고려초까지 가지산파(迦智山派)·동리산파(桐裏山派)·성주산파(聖住山派)·봉림산파(鳳林山
派)·희양산파(曦陽山派)·사굴산파·사자산파(師子山派)·수미산파(須彌山派) 등이 성립하여 각지에서 크게 성행했으므로, 총칭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이라 부릅니다 이때 활동한 선사(禪師)들의 신분은 진골출신의 몰락자나 6두품이하의 귀족, 지방세력인 호족,
가난한 생선장수 출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문9산이 전국 각지에 성립하여 지방에 등장한 호족 및
왕실의 적극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지방문화가 활성화되어, 김해지방은 한때 선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라말 고려
초에 성립한 9산선문은 법계(法系)가 긍양(兢讓)에 의해 바뀐 희양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조도일(馬祖道一) 계통의 홍주종(洪
州宗)의 법을 전해왔습니다 이것은 홍주종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선사들이 중국에 유학하기 전 공부한
화엄종의 사상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선종도 모든 인간이 불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一心]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선종은 그 이전의 사상체계가 출세간의 수행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세간과 출세간의 한계를 없애고 세간에서의 삶 그대로가 부처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승려들이 중국과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그중 귀국하지 않으며, 중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측(圓測), 신방(神昉), 무상(無相),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慧超) 등이 있습니다 통일 이후 불교교단은 국가의 통
제하에 있으면서 국통을 두고 지방에 주통·군통 등을 파견하여 관할했으나, 왕실 및 귀족들은 재산을 기진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드는 불사를 했으므로,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불교예술이 꽃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사는 많은 경제력을 기울여야 했으므
로, 그 폐해가 나타나 문무왕과 애장왕 때에는 사찰에의 기진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왕실이 성전이라는 기구를 두어 관할하는 원
찰인 성전사원을 세우고 복을 빌었으므로 이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흉년이 들면 유랑하는 농민들의 공격대
상이 되기도 했으므로, 해인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치군이라는 승군 조직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도
불교의 성격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불교의 정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은 축소되었으며, 신앙과 사상으로서의 측면이 강화되었습니
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면서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불교사상을 이용한
측면이 많았던 반면 통일신라 사회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세계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반
성 및 불교 신앙을 통한 대중들의 삶의 위안 등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삼국통일을 주도한 중
대왕실에 의하여 주도되었습니다 중대왕실에서는 이전과 같이 불교적 신성성을 이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달으며, 불교정치이념 대신 국왕의 실제적 능력과 백성에 대한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당나라의 유교정치이념의 강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춘추의 아들로서 통
일을 달성하였던 문무왕이 ‘용은 미물로서 국왕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승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스스로
동해의 용이 되고자 했던 것은 불교적 신성함보다 국가와 백성에 대한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중대왕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
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대왕실이 정치운영에 있어서 불교보다 유교의 원리를 중시하였지만 불교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사후에 자신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였으며, 고승들에 대한
왕실의 귀의도 여전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선왕들을 위한 원찰 건립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열왕의 원찰인 봉성사(奉聖寺),
문무왕의 원찰인 감은사(感恩寺), 신문왕의 원찰인 봉덕사(奉德寺) 등이 후대 국왕들에 의해 연이어 건립되었으나 이러한 신앙에
도 불구하고 불교를 정치운영에 직접 이용하려는 모습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정치운영에서 불교정치이념 대신 유교적 원리가
강조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운영방식도 변화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통일이전에는 국가가 직접 불교계를 통제하기보다 불교계의 자
율적인 운영을 중시하였지만 통일이후에는 불교계의 자체적 조직 이외에 별도로 중앙에 불교계의 운영을 담당하는 정법전(政法
典)을 설치하며, 일반 관료들이 불교계의 운영에 관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왕실 원찰을 비롯한 주요 사찰의 건립과 운영을 담
당한 사원의 성전(成典)들이 불교계를 운영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여기에도 최고 책임자들은 승려가 아닌 속인인
고위 관료들이었습니다 정치이념으로서 불교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불교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통일기에는 일반 대중들의 불교신앙에 대한 참여가 확대되어 불교가 사회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불교대중화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통일전쟁기를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일군의 승려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왕궁이나 사찰이 아닌 시장과 마을을 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직접 서민적 신앙생활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반민들은 불교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갖고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진평왕대에 활동한 혜숙(慧宿)은
시골마을에 숨어살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수행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펼쳤으며, 혜공(慧空)은 작은 절에 살면서 삼태기를 둘러쓰고
길거리에서 춤과 노래하며 일반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대안(大安) 역시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며, 왕궁
의 초청이나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친 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일반민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이러한 불교대중화의
흐름을 계승하여 일반인들에게 불교신앙을 폭넓게 전파한 인물이 원효(元曉)였다고 합니다 중급관료집안 출신인 원효는 출가하
여 불교학을 깊이 연구한 이후에 세속과 출세간의 걸림이 없음을 직접 실천하기 위하여 환속하였으며, 이후에는 광대들이 놀이하
는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과 거리를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써 불법의 가르침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모든 중생들이
염불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신앙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교화에 의해 미천한 사람들까지 불교를 알게 되었고 곳
곳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년)에 백제를, 668
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그 후 당의 세력마저 몰아내어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삼국시대까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민족의 고유 신앙과 결합하면서 민중 속으로 퍼졌습니다 원효(元曉, 617~686년)는 일
심과 화쟁(和諍) 그리고 걸림없는 무애(無礙)를 제창했고, 665년(문무왕 5년)에 당에서 귀국한 혜통(惠通)은 밀교를 전했다. 671
년에 당에서 귀국한 의상(義湘, 625~702년)은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널리 전파하여 해동화엄 초조(初祖)가 되었습
니다 승전(勝詮)은 당에 가서 현수 법장에게 화엄학을 배우며, 692년(효소왕 1년)에 귀국하면서 현수가 의상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의 저술 7종 29권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덕왕(702~737년) 때에는 봉덕사를 건립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인
왕도량(仁王道場)을 베풀었으며, 751년(경덕왕 10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했습니다 755년에는 분황사에 약사
여래를 조성했는데, 약사여래는 지극한 마음으로 그에게 예배하면 모든 질병과 가난을 없애준다는 여래입니다 이 당시는 여러 불
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예배하는 신앙형태여서, 약사여래 · 아미타불 · 미륵불 · 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사유하여 신봉하
는 사방불 신앙도 나타났습니다 또 경덕왕 때에는 왕실이나 귀족들을 위한 사찰 건립이 성행했는데, 이런 사찰을 원당(願堂)이라
합니다 특히 왕실 원당에는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거나 나라에서 관료를 파견했고, 사천왕사 · 봉성사(奉德寺) · 감은사
등 주요 사찰에는 성전(成典)이라는 관청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진표(眞表)는 점찰법회를 자주 개
최했고, 태현(太賢)은 유식학에 정통하여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를 저술했지만 혜공왕(765~780년) 이후부터 불교는 점
차 쇠퇴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830년(흥덕왕 5년)에 당에서 진감(眞鑑, 774~850)이 귀국하여 쌍계사를 중심으로 선법(禪法)을 전
파했습니다 9세기로 접어들면서 수용되기 시작한 선(禪)은 통일신라 불교에 활력을 주었습니다 선은 이미 진덕여왕(647~654년)
무렵에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의 선법을 전래했으며, 이어서 신행(神行, 704~779년)이 신수(神秀, ?~706년)의 북종
선을 전래했으나 수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선이 신라에서 성행하게 된 것은 마조 문하의 선법을 지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도의(道
義)와 홍척(洪陟)이 각각 821년과 826년에 귀국한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후, 당에서 조사선을 전해 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
여 선사찰(禪寺刹)을 건립했습니다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 302호 강의실에서 2시간짜리 세미나식 강의인 신라불교의 의의가
마쳐졌으며, ㅂ대학교 ㅈ캠퍼스 노어노문학과 졸업반 4학년생인 김지연(가명)양이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 302호 강의실에서
모인 ㅂ대학교 ㅈ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차렷 경계"라고 말했으며, ㅂ대학교 ㅈ캠퍼스 대학생들은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면서
김봉춘(가명) 교수에게 수고했습니다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ㄷ대학교 ㄱ캠퍼스 불교학과 김봉춘(가명) 교수는 ㅂ대학교 ㅈ캠퍼
스 인문관 앞에 세워둔 주차장에 자신의 애마인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어디로 갔습니다 믿을만한 소식통(?)의 말로는 김봉춘(가
명) 교수가 부산광역시 ㄱ군에 있는 사찰인 ㅅ사에 가서 비구스님들에게 불교사학강의를 해서 짭짤한 부수입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울산광역시에 있는 이름난 사찰인 ㅅ사에서 불교사학강의를 해서 조금 많은 현금을 수업료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다
음에는 부산 ㄱ해수욕장이 눈에 보이는 부산광역시 ㅅ구 ㄱ동에 있는 ㅎ사에 있는 비구스님들에게 고려시대불교사를 강의해서
그 강의의 대가로 부수입이 그야말로 꿀(?) 같이 챙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ㅎ사는 전남 ㄱ군 ㅁ면 ㅎ리에 있는 사찰
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ㅎ사는 지리산에 위치한 전남 ㄱ군에 있는 사찰로 봅니다 ㅎ사는 불교경전인 대한광불화엄경의 화엄경
이 사찰의 명이기도 합니다 감귤걸은 ㅂ대학교 ㅈ캠퍼스 인문관을 나와서 ㅂ대학교 ㅈ캠퍼스 앞에 있는 ㅁㅁ만두로 가서 왕만두
1접시를 주문해서 제때인(?) 점심식사로 먹었습니다 왕만두 1접시는 왕만두 3개로 감귤걸은 왕만두를 ㅁㅁ만두에서 준비해준 양
념장에 찍어서 단무지와 같이 곁들어서 먹어서 잠시 고양이인 묘공이 빙의된 것처럼 너무 맛있게 잘 먹었겠지요 이로써, 감귤걸
의 점심식사가 해결되었습니다 감귤걸은 ㅁㅁ만두에서 나와서 그 근처에 있는 ㅇㅇ분식으로 가서 계란튀김 1개를 구입해서 잠시
고양이인 묘공이 빙의된 것처럼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감귤걸은 그 근처에 있는 ㅁㅁ편의점에 들어가서 감
귤쥬스 캔 1개를 구입해서 후식디저트로써 감귤쥬스 캔 1개를 잠시 고양이인 묘공이 빙의된 것처럼 너무 맛있게 잘 마셨다고 합
니다 감귤걸은 ㅁㅁ편의점에서 나와서 ㅂ대학교 앞 부산시내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집인 ㅂ동 3층 양옥집으로 가
는 부산시내버스를 탔으며, 그 부산시내버스로 남녀공학 ㅂ고등학교(실업계 고교라고 하네요) 부산시내버스정류장에 잘 도착했
다고 하네요 감귤걸은 남녀공학 ㅂ고등학교 부산시내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남녀공학 ㅂ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인 ㅂ동
3층 양옥집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감귤걸이 다음세상에서 제가 계획대로 잘된다고 하면 제 대여선배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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