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국민이뽑은 대통령제 실시 주장으로,
투옥 사형 선고. 수감생활 하던 한성감옥은 최악의 환경.
사형수라 목에 칼을 차고 손발을 수갑에 찬 채로 지냈다.
그런데 그가 배재학당에 다닐 적에 워낙 성적이 뛰어나
그를 아끼는 선교사도움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 었다.
고종이 병 들었을때 의료 선교사가 왕진 치료하는 일로
고종 황제와 친하여진 선교사가 이승만을 위해 탄원 하였다.
이승만을 살려두면 이나라에 큰 일꾼이 될 인재이니 살려 두면 좋을것이란 청원.
고종 황제는 선교사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해 주었다.
그를 아끼는 선교사가 옥중의 성경을 반입해 주었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이승만 인지라 옥중에서 성경을 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숱한 강대국들의 외침에 고통당한 구약 성경의 기록을 읽으며,
우리 겨레의 역사와 비슷한 나라였구나 생각이 들어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열심히 읽던 중에 성령의 감동에 임하여 하나님이 계심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크리스천이 된 것이 우리 겨레 전체의 축복이 되었다.
1899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겨레 역사에 예수를 믿게된 첫양반이었다.
무엇이든 철저히 하는 사람이라
그가 예수를 믿게 된 후 감방 동료에게 열심히 전도 하였다.
그의 전도로 옥중에서 예수 믿게 된 죄수들 무려 41명 이었습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열사, 이상재 장로등
그때 옥중에서 그에게 전도 받아 예수를 믿게된 분들이다.
그를 통하여 예수 믿게 된 분은 한결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믿는 신앙은 처음부터 하나님 사랑과 겨레 사랑, 예수 사랑과 동포 사랑이 하나로 이어지는 신앙 이었다.
이승만 건국사(9) 미국유학: 7대독자 잃고....세계 신기록 세우다
・ 2023. 11. 4. 15:55
5년4개월 만에 미국 명문 3개대학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의 미국 유학기록은 한국은 물론 아마도 세계에서 찾기 힘든 신기록 아닐까.
그 당시 유생들이 그러했듯 이승만도 과거 시험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계속해서 낙방하였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과 부패를 생각하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것은 힘들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시험은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19세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미국인 천재청년도 아니고 배재학당 2년 학습이 전부인 한국인
30세 유부남이 어떻게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가.
이승만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과연 ”이승만은 세계사에 드문 희대의 인물“--[대한민국의 기원]을 쓴 이정식 교수가 되풀이 하는 말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에서 ”한국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이오, 미국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미국 유학계획, 한성감옥서 다 짰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언제 결정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유학을 결심했다는 설이 많지만
필자는 ‘한성감옥에서 이미 스스로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남긴 수많은 옥중기록과 논설 중에
‘미국흥학신법’(美國興學新法) 즉 ‘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이라 해제하여 쓴
긴 논설이 있다.
이승만은 글머리에 1872년 명치유신 직후
주미일본공사가 미국정부에 부탁하여 받은 것으로 미국정부의 교육부에서 채록한 자료라면서 ‘미국의 교육진흥에 관한 새 제도’라는 부제도 붙여놓았다.
“예수교로 백성 교육”을 주창한 청년 이승만이 크리스토교 국가 미국의 교육제도를 알고 싶어 이 자료를 구해 들여와 읽고 해설까지 써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 글에 미국식 교육제도를 설명하면서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 미국 동부에 산재한 이른바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교들도 소개한다.
특히 미국 건국 전 1636년에 청교도들이 세워 가장 오래된 하버드 대학은 하버드 개인이 거금을 투자해 세계 일류로 육성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때 유학할 대학들을 다 골라 놓았을 터이다.
이 글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결정적 메모가 남아있다.
<유학생이 생계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거리. Works of Students for Earning Livehood>가 그것이다.
잔디깎기, 나무 톱질하기, 우유배달, 식당 웨이터, 상품판매, 급사, 타자, 신문 기고,
야간 개인교수 등등 21개 일거리를 적어놓았다.
유학 결심이 없었다면 감옥에서 왜 이런 메모까지 남겼을까. 이승만은 이때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고학을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선택한 ‘고학 알바’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독립운동’이다. 공부하며 틈틈이 교회들과 YMCA등을 순회하며
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연하고 거기서 나온 성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 뒷날 기록들은 눈물겹다. 볼티모어 장로교회에서 9달러, 워싱턴 제일침례교회에서 7달러40센트...등등. 유학생 이승만은 가계부 적듯이 입출금을 꼼꼼이 적어 남겼다.
그는 유학기간 140여회의 순회강연을 펼친다.
만주나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인을 상대로 ‘독립 강연’ 캠페인을 장기간
벌였다는 기록이 과연 있었던가?
◆감옥서 석방되자 도미 준비...추천서 19통 챙겨
1904년 8월7일 마침내 5년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은 [제국신문] 주필 일을 하면서
미국 갈 채비를 서두른다.
첫째, 선교사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요청하였다.
세례교인으로 미국에 가야크리스토교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장로교 게일은 이승만에게 워싱턴 커버넌트 감리교회 목사 햄린((Lewis T. Hamlin)에게
세례 받으라며 추선서등 소개장 3통을 써주었다.
이 밖에도 이승만은 언더우드 7통, 벙커 등 도합 19통의 추천서를 받았다.
이 추천서들 사본이 이승만의 일기장에 첨부되어 지금도 남아있다.
둘째, 이승만은 민영환-한규설을 만나 미국에 정부대표로 가도록 건의한다.
러일전쟁 종전협상을 서두르는 미국에게 ‘대한독립’을 도와달라고
설득하라는 주문이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제국신문]에 논설을 쓰던 이승만은 그 논설 때문에 일본 헌병사령부가 신문을 정간시켰고 “전쟁에서 이겨 한국을 손아귀에 넣자 그 생명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으니” 조미수호조약에 의거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영환은 이승만을 주미공사로 임명하겠다며 고종을 만났다(이승만 영문자서전 초록: 출간안됨). 결과는 “영어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 즈음 어느 날 밤 이승만의 집에 궁녀가 나타나
“폐하께서 단독 면담을 원하시니 입궐하자”고 전하였다.
이승만은 쌓였던 증오감이 북받쳐 즉석에서 거절한다.
“4,200년 왕통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많은 임금”으로 경멸하던 이승만이었다.
“금전과 밀서를 주려고 불렀겠지만 황제면담을 거부한 것을 후회해본 적 없다”고 했다.
([청년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 1904년 11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청계천 모전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
ⓒ연세대이승만연구원
◆마지막 가족사진!
이 사진은 이승만이 도미하기 직전 기념으로 서울시내 사진관에서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이승만은 양복차림, 그 옆에 서있는 오른쪽 여성이 조강지처 박씨 부인이다.
1890년 한동네 15세 돼지띠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아들 봉수(모자 쓴 어린이)를 낳았다.
6대독자가 낳은 7대독자는 미국유학중 미국에 데리고왔다가
디프테리아 전염병에 걸려 숨졌다.
그 옆에 앉아있는 노인이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 공, 맨 왼쪽이 이승만의 맏누님(우태명씨 부인)이고 봉수 뒤에 서 있는 소년은 누님 아들이다.
이승만 어머니 김씨 부인은 1896년 8월 갑자기 별세하였다.
▲ 1902년 12월 최초의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 121명을 싣고 호놀루루로 간
미국기선 갤릭호(하와이 이민사 박물관)
◆이민선 3등 객실...‘자유의 항해' 스타트
1904년 11월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다음날 제물포에서 미국선박 오하이오 호(S.S. Ohio)에 올라 미국을 향해 떠난다. 품속엔 난생처음 해외여행 여권과 여러사람이 준 여비, 그리고 아메리카 신천지 유학을 도와줄 추천서 19통이 들어있다.
1902년부터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들을 실어날으는 선박 최하급 선실에 자리 잡은 이승만은 이 날부터 일기를 쓴다. 항해일지처럼 ‘Log Book’이라 이름붙인 일기는 40여년 지나 해방후 귀국할 때까지 쓰는 ‘독립운동 항해 기록이다.
‘Log Book of S.R’은 2015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김영섭 원장(연세대 교수)이
영문과 국문 영인본과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항에 도착, 일본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청중들이 거둬주는 여비를 받았다. 이 돈은 뒷날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교회 순회강연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고학생활의 첫 성금이 된다.
고베에서 사이베리아 호(S.S. Siberia)로 바꿔타고 하와이 호놀루루에 내린 것은 11월29일 아침이다. 긴 항해동안 이승만은 [제국신문]에 기행문과 논설을 써보내 게재하였다.
배재학당 동문 윤병구(尹炳求) 목사 등 교민200여명이 한인교회에서 열어준 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장장 4시간 열변을 토하여 한많은 이민 노동자들을 감동시켰다.
자신도 울고 청중도 울었다.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이승만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온 안창호(安昌浩)는 만나지 못했고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여 1주일을 보낸뒤 대륙횡단 산타페(Santa Fe)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마침내 목적지 워싱턴에 도착한 날이 12월31일 그해 마지막날 저녁7시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의 작은 호텔에 여장을 푼 이승만은 그길로 햄린목사를 찾아갔다.
게일 선교사의 간곡한 추천서를 읽은 햄린 목사로부터 4월23일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 조지 워싱턴대학 유학생 이승만. 오른쪽은 대학내YMCA 강연회 연사로 뽑힌 다른 학생들과 이승만(맨아래) 홍보전단.ⓒ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한국 천재“ 칭찬받으며 조지 워싱턴 대학교 3학년 편입
걱정하던 대학입학은 뜻 밖에도 순조로웠다.
2월에 워싱턴 사교계의 VIP 햄린 목사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니덤(Charles W. Needham) 총장에게 소개한다.
면접 결과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다. 배재 대학 수준이 이렇게 높으냐“며 대뜸 3학년에
편입시켜 주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장차 귀국하여 교역자가 되고 싶다하니 등록금 전액에 상당한 교회 장학금까지 마련해 주었다. 유학기간이 짧아지고 학비 걱정이 가벼워졌다.
▲ 1905년 8월4일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예복을 입은 유학생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첫 대미 외교 – T.루즈벨트 대통령 만나 ‘독립’ 호소
30세 늦깎이 한국 유학생이 강대국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 민간인으론 최초의 일 –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잘해야 나라를 지킨다“고 실천강령에서 주장한 이승만의 첫 외교무대, 그것도 미국 하원의원과 국무장관을 만나고 대통령까지 만나는 최상급 외교 시험대이다. 이승만은 쓰라린 시험을 맛본다.
대학입학 문제와 함께 중요한 사명은 미국에 대한 ‘독립지원 요청’이다. 이승만은 서둘러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 모어(Hugh A. Dinsmore)를 만나 국무장관 헤이(John M. Hay) 면담 주선을 부탁하였고, 2월20일 딘스 모어 의원과 함께 헤이 장관을 30분 면담한다.
헤이는 조미수호조약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7월1일 돌연 사망하였다.
낙담하던 차에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일본 방문길에 호놀루루에 들렀다.
윤병구와 교민들은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린다고 발표된 러일전쟁 강화회의에 이승만과 윤병구를 파견하기로 정하고 미국대통령에게 제출할 탄원서를 만들었다.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과 탄원서를 가지고 윤병구는 워싱턴 이승만을 찾아가 백악관에 대통령 면담신청을 한다.
의외로 금방 정해진 면담은 1905년 8월4일 오후 3시30분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 여름 백악관(Summer Whitehouse), 두 사람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를 직접 만났다.
외교관 차림의 이승만은 탄원서를 제출하며 ”각하께서 언제든지 기회 있는대로 조미수호조약에 입각하며 불쌍한 나라를 위험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고 거듭 간청하였다.
루즈벨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중대한 사안이니 이 문서를 공식루트를 통해 다시 보내주면 강화회의에 올리겠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기대이상의 반응에 접한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 한국공사관 대리공사 김윤정을 찾아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이없게도 김윤정은 ”본국 훈령이 없어서“라며 필요한 절차를 거부한다. 분노한 이승만은 온갖 설득과 협박까지 해봤으나 맹수같은 흑인 경비명이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뿐인가. 이승만 자신도 국제문제를 잘 안다 했지만 그때 ‘루즈벨트의 연막작전’에 속아 넘어간 것을 어찌 알았으랴.
루즈벨트는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장관이 가쓰라 일본총리와 ‘밀약’을 맺은(7.27) 뒤에야 대한제국의 ‘특사’를 형식적으로 만나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장악과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한 ‘태프트-가쓰라 메모’는
192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덴네트(Tyler Dennett)가 발굴해낼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이승만은 이때의 ‘미국 배신’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 용미(用美) 전술에 기막힌 무기로 활용한다.
특히 6.25 휴전 협상때 한미동맹 요구를 기피하는 미국의 목덜미에
이 배신의 칼을 꽂아 굴복시킨 일은 유명하다.
★9월5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제2조는 이렇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및 감리 조치를 취하는데 대하여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아니할 것을 약정한다’
이미 8월12일 체결된 2차 영일동맹협약 제3조에도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인정한다고 명문화 되었다. 이로써 양국의 양해를 얻은 일본은 11월18일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한다.
▲ 이승만을 줄곧 도와준 민영환과 한규설.ⓒ뉴데일리DB
◆민영환의 자결...”우리집은 누가 돌봐주나“
11월18일, 고종이 끝내 일본의 압력에 굴복,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하던 의정대신 한규설은 파면되고 감옥에 갇힌다.
반대 상소를 계속하던 민영환도 끌어내자 이틀후 그는 자결하였다.
11월30일 민영환 순국 소식을 접한 이승만의 충격은 남다른 것이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해주고 감옥살이 할 때 자기집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으며 석방운동에 앞장섰고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면서 ‘집 걱정은 말라’던
두 사람의 지원자 민영환과 한규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이승만은 국가존망과 가족 생계가 아득하다.
이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영문 메모가 눈을 끈다. ‘Min Young Whan is dead. Who will Support our home?’
민영환이 죽었으니 우리 집은 누가 지원해주나?
그래서일까. 이승만의 ‘강연 알바‘는 더욱 많아지고 바빠졌다. 그의 연설이 인기를 끌자 YMCA등 곳곳에서 초청도 많아졌다. 그해 12월엔 뉴욕과 메릴랜드까지 9회나 뛰어다녔고 이듬해 1월엔 8회, 아들 태산(봉수는 아명)이 숨진 순간에도 교회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 조지워싱턴대학때 뉴잉글랜드의 국제크리스토교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벌어진 일
조지 워싱턴 대학때 1906년 6월말, 이승만은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만국 크리스토학생 공회‘에 대학대표로 참석했다. 한국인으론 처음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가 열렸다. 각국 깃발이 걸린 홀에는 남녀 3,000여멍 참가자들이 각기 제나라 의상을 입고 축하연설을 들으며 미국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국가별로 순서에 따라 일어나 경축하는 차례였다.
일본 학생 4명이 ’일본 만세‘를 부르고 중국학생 10여명이 일어나 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그때 이승만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단에 올라가 주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 학생인데 혼자 경축하겠습니다.“
주최자는 흔쾌히 그러라며 장내에 알렸다.
이승만은 무대에 올라 힘차게 ’독립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대한제국 만만세“를 세 번 부르고 ”아메리카 만만세“를 세 번 불렀다.
청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지르며 이승만에게 몰려와 악수를 청하였다.
이날 행사를 이승만은 편지로 써서 서울의 [제국신문]에 보내어 3일 연속 크게 보도되었다. 이어 [대한매일신보]도 전문을 전재하여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다.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손세일 지음, 조선뉴스프레스. 2015)
▲ 1905년 미국에 온 아들 태산을 돌봐줄 크리스토교가정을 찾는 워싱턴 타임즈 신문기사.
오른쪽은 디프테리아로 숨진 태산의 묘비.(필라델피아 공원묘지에서 필자 찍음)
ⓒ뉴데일리DB
◆독립운동 강연다니다가 7대독자를 잃다
서울의 박씨 부인은 아들 봉수를 박용만 편에 미국으로 보냈다.
나중에 자신도 미국에 갈 생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대학편입 두 달 만에 아들까지 돌봐야 했던 고학생 이승만, 더구나 그는 대학수업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몰두해 있었다. 교회들과 크리스토교 단체 등 어느 모임이든지 달려가 일본의 압제에 몰린 한국의 현실과 역사를 알리는 강연을 진행하고 있던 이승만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이자 강연장 청중의 성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승만은 친분있는 신문기자에게 부탁하여 [워싱턴 타임즈]에 아들을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기사까지 낸다. 그날로 희망자가 나타나 아들 태산을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보이드 부인 집에 맡겼다.
그러나 그 부인은 태산을 자기집에 두지 않고 시립아동보호소에 보냈다.
거기서 태산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숨졌던 것이다.
영어를 몰라 언어장애 등 이상증상을 보이고 우울증까지 겹친 소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흘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뒤늦게 전보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 이승만은 ‘방역법’에 막혀 아들 시신도 보지 못했다.
그는 일기에 ‘슬프다’ 딱 한줄만 써놓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아들의 죽음과정을 적어 남겼다.([Log Book of S.R.] 이승만 일기)
나라를 잃고 후원자 민영환을 잃고 유일한 혈육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승만은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그의 공부와 독립운동 양면활동은 더욱 치열해진다.
필자도 필라델피아에 묻힌 태산의 묘를 참배한 적이 있다.
조그만 묘비엔 ‘RHEE TAISANDH 1899~1906’이라 적혀있어 태산이 7살에 숨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시립아동보호소의 착각으로 여겨진다.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열네살’로 말할 뿐더러 그가 배재학당에 들어갈 때 아들 나이가
세 살이었다고 회고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6대독자 이승만은 7대독자 아들을 어이없이 잃었고 다시는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58살에 만난 30대 프란체스카 부인에게 이승만은 농반진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미(호칭)는 다 좋은데 아이를 못 가지는 게 탈이야.“
▲ 이승만이 미국유학 시절 자료를 보관했던 하버드 앨범 표지,
하버드 대학원생 이승만이 머물던 주택.ⓒ연세대이승만연구원
◆”나는 2년내 하버드 박사 돼야, 입학시켜 달라“
이런 무모한 도전이 가능한가. 한성감옥에서 부터 하버드를 꿈꾸던 유학스케줄을 고집한 이승만 다운 용기였다. 미국 일류대학생도 힘든 것을 30대 동양남자가?
이승만은 스승 서재필에게 먼저 편지를 보냈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박사를 하려는데 도움 말씀을 달라는 요청이다.
서재필의 응답은 뜻밖이었다.
"석사만 하고 귀국하라. 박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왜 그랬을까? 스승이 시샘하나?
미국시민이 되어 의학박사가 된 서재필은 미국여성과 결혼,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문방구를 경영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B.A.) 취득을 앞둔 1907년 초, 이승만은 하버드 인문대학원장에게 단호한 편지를 쓴다.
”나는 동양학을 다년간 연마한 학자인데 하버드대에서 2년 내 박사학위를 얻게 해달라.
조선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는 2년 내 박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의 우수한 학생도 하버드 인문학 분야 박사를 따려면 최소 5년이 상식인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승만은 목표를 향해 정면돌파하는 신념과 용기를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하버드 대학원은 논의 끝에 일단 ‘2년 시한 없는 입학’을 허가할 테니
석사과정부터 완수하라고 회답한다. 이승만은 두말없이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자마자
보스턴으로 달려갔다.
배재학당 입학순간 발견한 ‘자유의 신대륙’ 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요람 보스턴, 거기서 장차 ‘대한독립의 꿈’을 연마하며, 하버드 출신 미국 지도층과 대등한 대화와 협상력을 키울 수 있는 본거지 아닌가. 1907년 가을학기부터 1908년 봄까지
이승만은 ‘청교도의 자유 독립역사’를 호흡하면서 강연 순회도 계속하였다.
그때,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난데없는 뉴스가 터진다.
애국열사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다.
스티븐스는 일본이 고용한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인데 ”일본 지배가 한국에 유익“ 운운 막말 선전을 계속하자 동포들이 격분했다. 3월23일 아침 기차역에서 그는 쓰러지고 만다.
문제는 검거된 두 사람의 재판 변론을 영어 잘하는 이승만이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티븐스 피격사전이 터지자 친일 분위기 미국 언론은 친일적 보도를 계속한다.
따라서 캘리포니아는 물론, 동부지역도 한국인 기피 현상이 생겨나고 하버드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의 역사학 지도교수는 면담을 피할뿐더러 과제논문들 심사도 않고 우편으로 돌려보내는 등 지식인들마저 따돌림 판이었다. 하버드냐, 변론이냐, 이승만의 고민은 깊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첫째, 평소 무장투쟁은 이대로는 무익하다고 주장해온 것,
둘째 크리스토교신앙에서 폭력 살인을 거부한다는 것,
셋째 적국 일본의 선전꺼리만 되며 본국 동포를 탄압하는 빌미만 준다는 것,
넷째 지금은 실력양성이 먼저요 무장투쟁은 국제환경이 조성되면
미국과 함께 총력전을 벌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하버드대 석사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가장 큰 이유임은 물론이다.
이래저래 하버드대 박사까지는 이런 분위기에서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보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기숙사에 머물면서 2년내 박사학위를 줄 다른 대학, 컬럼비아대학교나 시카고 대학을 물색하며 입학수속을 진행하였다.
그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서 옥중 이승만을 도왔던 선교사 홀(Ernest F.Hall) 목사와 우연히 마주친 일이다..
홀 목사는 대뜸 말했다. ”주저 말고 당장 프린스턴대로 가자“며 기차표부터 끊는 것이었다.
프린스턴대학과 프린스턴 신학원(Prinston Thelogical Seminary)을 나온 홀목사는 ”2년내 박사 가능할 것“이라며 이승만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 하버드 대학원 재학시절 급우들과 국제법 지도교수 윌슨(앞줄 가운데)
ⓒ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프린스턴대 대학원생 이승만이 기숙사 Hodge Hall 숙소에 앉아있다.
책상에 테니스 라켓이 보인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프린스턴大서 2년만에 박사...최초의 국제법 학자
프린스턴대 웨스트 대학원장은 이승만에게 ”2년내 박사과정을 끝낼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약속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원 기숙사에서 무료로 기숙하라는 혜택까지 베풀었다.
이승만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에서 외교학과 국제법을 전공하며 미국사, 철학사 등을 공부하고 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1년간 신학도 연구하였다.
당시 대학총장인 윌슨(Woodrow Wilson), 대학원장 웨스트(Andrew West), 신학교 학장 어드만(Charles Erdman) 등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이승만은 엘리엇(Edward Elliot) 교수의 지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
제목은 ’미국의 힘에 영향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즉, 오늘날의 국제법상의 전시중립(戰時中立), 교역의 중립을 다룬 것인데, 미국의 독립 1776년 이전과 그후 1872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발전한 전시 무역의 중립에 미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검증해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기간 크게 발전한 통상의 자유는 인류에 대한 큰 축복이며, 그 중심에 ”미국의 공헌이 절대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영국등 유럽 해양강국의 반격를 제압하며 무역의 중립성을 역사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것은 “미국의 힘“이었으므로 ”아메리카 만세“라는 말로 논문을 끝맺는다.
이승만이 당시 독립분야도 아닌 국제법과 평소 주장하던 ‘자유통상 부국론’과 연결시켜 미국100년사에 걸친 해양경쟁 국제관계를 연구한 목적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이승만의 미국유학 목적의 하나라고 추정한다.
[독립정신]에서 명백히 밝힌 ‘미국과 동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연대가 절대필요하다는 지정학적 인식에서 지정학적 접근법으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현대적 버전을 만들려는 이승만의 ‘독립유지 전략’이 그 동기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 구축을 향한 출발점이
‘국제정치와 국제법적 미국 탐구’ 논문인 것이다.
그의 유명한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전략의 사전 점검과 동력을 생산 축적하는 여정이 미국 유학이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의 졸업2년뒤 1912년 1월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공해상의 중립문제가 대두하자 이 단행본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어
”당시 나는 중립교역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고 이승만이 기록할 정도였다.
(이승만 자서전 초록)
★하버드 대학원 석사학위(M.A.)는 1910년 2월23일 취득한다. 프린스턴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이승만은 석사학위 취득을 요청하였고, 하버드 대학원은 여름방학 기간 한과목을 더 수강하도록 하여 미국사 B학점을 받음으로써 석사를 수여하였다.
▲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과 프린스턴 대학서 출판한 박사논문 단행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을 총애한 윌슨 총장은 집으로 데려가 가족만찬을 함께 즐기며 딸의 피아노 반주도 들려주었다. 윌슨은 주위 사람들에겐 ”이 사람은 미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the future redeemer of Korean independence)라 소개하며 이승만과 한국독립문제와 미국 정책등 토론도 벌이곤 하였다. .
프린스턴 대학총장으로서 마지막 졸업식은 1910년 6월14일, 윌슨과 대학원장 웨스트는 이승만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어깨에 전통적인 후드를 걸어주며 축하의 박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윌슨은 직후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 그해 뉴저지 주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1912년엔 2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승만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도 참관한다.
윌슨의 세 딸 중에 둘째 제시(Jessie Wilson)가 이승만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하며, 자신의 결혼식땐 하와이에 망명중인 이승만에게 청첩장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면사포를 쓴 여인이 제시,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윌슨 대통령과 윌슨 여사.(1913년 11월23일 제시 결혼식 기념사진).
이승만 건국사(9) 미국유학: 7대독자 잃고....세계 신기록 세우다
5년4개월 만에
미국 명문 3개대학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의 미국 유학기록은 한국은 물론 아마도 세계에서 찾기 힘든 신기록 아닐까.
미국인 천재청년도 아니고 배재학당 2년 학습이 전부인 한국인 30세 유부남이 어떻게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가. 이승만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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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룡은 늦게 성공할 사주라 하여 승만(承晩)으로 개명하고
우수현 남쪽에 거주한다고 하여 우남(雩南)으로 호를 지었다.
이승만은 입신양명의 유일한 길인 과거 합격을 목표로 이름 있는 서당에서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 과목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는 실력이 출중하여 소년등과의 기대 속에 나이를 속여 가며 과거를 보았으나
출제문제 유출 등 권문세도가 자녀에게 유리한 과거제도의 타락으로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마저 폐지되어 더 이상 응시할 수 없게 됐다.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영어라도 배워 통역 등으로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선교사가 세운 정동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은 영어뿐만이 아니라 크리스토교 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이었으며 알게 된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교사로 독립협회를 창설한 서재필의 영향으로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활동,
젊은 지도자로 부상했다.
젊은 시절 이승만[사진=이승만 기념관]
1899년 급진개혁 운동 참여와 갑오개혁을 주동한 박영효가 꾸몄다는
고종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의 어려운 생활에서 배재학당 은사의 권유로
크리스토교(감리교)를 받아들이고 동료 죄수들에게도 개종을 권유했다.
그리고 명저 <독립정신>을 저술하고 영어를 보급하기 위해 영한사전도 집필했다.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고 억압적 대우를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이에 개입,
우호적 조정(amicable arrangement)을 행사함으로써 그 우의(friendly feelings)를 보여준다.’ 이는 1882년 5월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규정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지나친 주권 훼손에 대해 미국 정부의 조정이 필요했다. 고종황제는 민영환 등의 추천을 받아 감옥에 5년 이상 중죄수로 복역 중이나
유창한 영어와 미국 선교사와의 인맥이 두터운 이승만을 풀어주어
밀사로서 미국에 파견했다.
1905년 8월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대표 윤병구와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여름 백악관을 찾아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다.
그들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러 일본을 향하던 육군 장관 태프트가 이러한 비밀을 알 리 없는 하와이 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윤병구에게 써준 소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비밀조약으로 대한제국을 필리핀과 맞바꾸기로 결정하였기에 이승만 일행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과의 양자 관계뿐만이 아니라 국제적 다자문제로 관련국의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국제법과 외교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고
국제여론과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대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필라델피아의 소극장에서 개최된 한인대표자대회에 참석했던 대표들의 기념사진
(1919년 4월 14일~16일)[사진=이승만 기념관]
이승만은 국제법과 국제관계를 공부하기 위해 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해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안은 국제법에 따른 중립 외교라는 것이 그의 논문에 녹아 있다. 당시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이승만을 가족 파티에 초대하는 등 장래 유망한 청년으로 아꼈다고 한다. 윌슨 총장은 후에 뉴저지주지사를 역임하고 미국 대통령이 되어 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선언, 3.1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에 힘이 되고자 5년여 만에 귀국했다. 당시 절망적 국제정세 속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조선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이승만은 YMCA 청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지방의 청년들을 위해 순회강연도 가졌다.
1911년 초대 총독 데라우찌 마사타케와 헌병 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는 항일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총독 암살모의 누명을 씌워 애국지사 105인을 체포한 사건을 만들었다.
이어서 젊은 독립지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자 이승만은 1912년 세계감리교 총회 참석을 명분으로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 은사 윌슨 지사를 만나 조국의 독립에 대해 상의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를 만나는 등 본격적인 독립외교의 시동을 걸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윌슨 대통령을 위시하여 수많은 미국 지도자들과 탄탄한 인맥을 형성한 이승만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천거되어 취임했으나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를 거점으로 차세대 교육과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 당시 이승만(1933년)[사진=국가기록원]
1931년 9월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괴뢰국(만주국)을 세우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일본군의 부당함을 제소하자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빠지면서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개최되는 제네바에는 국제연맹 회원국 외교관과 언론매체가 모여들었다. 외교의 천재 이승만은 만주에서의 일본만행을 비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총회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된 이승만은 제네바로 와서 각국 외교관을 접촉하고 언론매체를 만나는 등 적극적 외교활동을 수행했다. 그의 나이 환갑을 앞둔 58세 때였다. 그 무렵 국제연맹총회에서는 압도적 다수로 리튼 보고서의 권고안이 채택되자 일본 대표 마쓰오카 요스케는 준비해간 국제연맹 탈퇴 선언서를 낭독하고 퇴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었다.
1933년 2월 21일 바쁜 하루를 보낸 이승만은 체류 중인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자 했으나 이미 만원으로 빈자리가 없었다.
호텔 종업원이 한구석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모녀가 식사하는 4인용 테이블을 찾아
합석 양해를 구하고 이승만을 안내했다.
그때 프란체스카 도너 양을 만나게 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친의 사업을 잇기 위해 영국 유학을 한 이혼 경력이 있는 인테리 여성이었다. 프렌체스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이승만에게 감동하여 국경과 25년의 나이 차를 초월한 사랑으로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1934년 그들은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모국어인 독일어뿐만 아니라 영어 및 불어에도 유창하고 타자와 속기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국제무대에서 독립운동에 바쁜 이승만의 부인이자 비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 고립을 자처하여 본격적으로 미국과 대립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 정가의 유명인사가 된 프란체스카는 “여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Woman should be seen, not heard)”는 이승만의 뜻에 따라 소리 없이 내조를 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일본의 야망을 꿰뚫어 보고 미국에 대한 침략이 머지않았음을 경고하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영문 저서를 발간했다. 몇 차례 원고 수정 등 손가락이 부르터가면서 찍어낸 프란체스카의 타자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1941년 6월 책이 발간됐을 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수개월 후인 12월 초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경고 예언이 현실화되자 이승만의 정세 분석의 정확함에 모두 놀라고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가 됐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이러한 배경으로 미국 내 여론 조성을 위해 한미협회(Korea-American Council)를 창설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국 충칭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고 한국을 미국의 우방국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노력이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보태져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의 선언문에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enslavement)를 기억하고 일본패망 후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했다’는 문구가 들어가 한국이 유일하게 국제적으로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1945년에 들어와서는 소련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전후처리를 예상한 이승만은 얄타 비밀협약 폭로 등으로 미 국무성 실무관리들을 불편하게 했다. 강대국의 속셈을 간파하는 통찰력과 예지력을 가진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소련 유화책이 한국인에게 ‘소련의 멍에’를 지워 줄 것으로 경고하고 이는 러일전쟁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일 유화책이 ‘일본의 멍에’를 지어주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40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게 한 것을 상기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드디어 조국이 해방됐다.
해외 독립지사들이 속속 귀국했지만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루가 급한 이승만은 국무성을 움직일 수 있도록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게 연락, 도움을 청했다.
몇 년 전 이승만 내외가 사는 워싱턴 주택가에 로물로라는 필리핀 가족이 살고 있어
가족끼리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승만은 로물로로부터 맥아더 장군을 소개받아 서신 교환 등 교류를 해왔다.
로물로는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 고문 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의 오랜 친구였다.
맥아더의 주선으로 이승만은 출국할 수 있게 됐고 귀국길에
도쿄의 사령부에서 군정청 존 하지 중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맥아더 사령관을 면담하고 1945년 10월 16일 그의 전용기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돈암동에서
일시 지내고 다시 마포장으로 전전하는 등 거처를 수시로 옮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지지자들이 돈을 모아 지금의 이화장을 마련해 주었다.
1947년 11월, 귀국 2년 만에야 겨우 안정적인 사저를 갖게 됐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동대문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이승만 내외는 이화장을 떠나
하지 사령관이 일시 사용한 조선총독 관저를 ‘경무대’라고 고치고 입주했다.
제헌국회 개헌식(1948년 5월 31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미동맹 등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장기 집권과 부통령 선거 부정으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결국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공과(功過)가 뒤섞인 파란만장한 경무대 생활 12년 만에
이화장 사저로 돌아왔으나 한 달 후 하와이로 망명한 후
1965년 7월 19일 그곳의 요양원에서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이승만의 병상을 지킨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와 사별한 후
오스트리아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1970년 영구 귀국하여
이인수·조혜자 양자 내외의 보살핌 속에 1992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지인의 안내로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었던 이화장을 방문하면서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넌 사저를 찾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789년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가 8년 후인 1797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당시 대통령 임기 제한 규정이 없어 미국인들은 워싱턴이 유럽의 왕처럼 종신 대통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지만 워싱턴은 듣지 않고
마운트 버넌 사저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워싱턴의 결단은 그 후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연임을 통한
독재 정권의 출현을 막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경우에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의 재침 우려와 전후복구 등 당시의 불가피한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야 하고
그의 33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업적과 재임 중 한미동맹 등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놓는데 기여한 공(功)은
그의 정치적 허물을 덮고도 남는다고 한다.
1914년, 교장인 이승만과 한인중앙학원(Korean Central Institute) 졸업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 1918년,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학원. |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의 호텔 라파예트에서 개최되었던 '한인자유대회'.[52] | 한미협회 만찬회 모습. 왼쪽 끝이 이승만,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호머 헐버트 선교사 |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앞 줄 왼쪽부터 전진한·임영신·안호상·이인·이범석·이승만·윤치영·김도연·조봉암·장택상. 뒷 줄 왼쪽부터 윤석구·김동성·민희식·유진오. |
사람들의 막연한 인식과 달리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은 친일파 출신인 윤치영을 제외하고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들이었다.[89] 그리고 초대 내각에는 다양한 당파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한민당은 자기 당 출신이 내각에 2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에 지명했다. 이윤영은 이북 출신이고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후에 남북통일을 위해서 이북동포들의 힘을 얻기위해서 지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헌 국회는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부결되었다. 그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장관에 자신과 반대되는 좌익 인사인 조봉암을 임명했다. 이는 지주계급인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시급한 문제인 토지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회주의가 퍼지는[90]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91]하여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조국 위해 싸우자!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환영대회서 이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
조국이 일제 기반으로부터 광복된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 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의 환호성은 ... 은 태극가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래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던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여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도 자유의 태양을 ... 었다.
20분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의 열광적인 대통령 환영 시민대회도 개최되었다. 이 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 ... 으로 개시되었는데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시민의 제창소리는 온 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대통령 각하를 환영하는 환영사가 있었는데 임시장은 감격에 복받치어 눈물이 어린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를 통하여 조국 광복과 3천만 동포의 구제를 위하여 헌신하신 대통령 각하를 모시게되니 이 감ㅁㅁ격이야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대통령 각하의 영도하시는대로 뜻을 받들어 온갖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하여 조국 재건에 심혈을 경주하겠습니다.'
임시장의 환영사가 끝난 다음 신 국무총리 서리겸 국방장관으로부터 '이제 대통령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하고 말을하니 시민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미칠듯한 환희에 쌓여 만세 소리가 우러 나왔다. 이때 광장 북편에 있는 교회장으로부터 '자유의 종소리가 천지에 퍼저울려라'하고 고이고이 울려나왔다. 시민들의 환호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한복의 대통령께서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평양 동포에게 약 한시간에 처 간곡한 언사말씀과 훈화 및 윤시를 하시었다.
'본인이 39년만에 다시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어보게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 대전 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우리는 자유 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新)생활을 할 줄 알았었더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소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이 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소련은 그리고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소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한편 살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하여 아름다운 이 조국 향토를 더렵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서로 노나먹으면서 화애롭게 살어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 중 많은 사람이 민주 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소련은 소위 '막부삼상결정'이라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하여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소동이니하는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서 소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 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여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가지 국제관계상 무기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소련이 대한민국의 무기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워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 민주 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 입니다.
보시지요 우리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국가는 24시간내에 자유를 위하여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 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소련은 필시 한국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여 전세계가 다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꿍꿍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소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요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 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멀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속히 교통이 통하는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 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살림을 하려는데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인 관계들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음으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앞으로 우리를 도와 만사를 잘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와서 누가 남쪽 사람이니 북쪽 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요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요 다같이 의론하여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 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성의껏 경제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여 주십시요. 자 여러분 다시한번 나와같이 맹세합시다. 통일된 자유 조국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싸워나갈 것을!'
약 한시간에 달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여 식은 오전 11시 55분 국방부 정훈국 파견군 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식 진행중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 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 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한 일행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고 일로 서울로 귀환, 오후 1시 30분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이승만 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 39년동안 그리던 곳에
천지를 뒤흔드는 시민의 환호성
대통령 평양 환영대회 임석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발] 이 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 35분 C47형 미군 특별 비행기로 이를 통하여 그간 해외 풍상 30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 10월 환국한이래 몽매간에도 잊지못하고 그리워하던 앓았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중심도시 평양을 향하여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10월 29일 오전 7시 40분 경무대 관저를 출발하시어 신 국방장관, 이 공보처차장, 김 공군참모장, 김 비서관, 이 정훈국장, 김 한청단장들을 대동하시고
29일 오전 8시 35분! 이 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가진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하고 서면질의를 제출하였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쁘다. 그보다도 세계 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여 과거 5년간 분단되었던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되니 더한층 기쁘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여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 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쾌에 쌓여 아름다운 조국 산천 촘목을 바라보는동안 비행기는 시속 160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여 어느덧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틀어놓았다. 우리 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여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 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거리를 불과 55분밖에 안걸려서 평양 능라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 10월 29일 오전 9시 30분 역사적인 평양입성의 제일보를 열으신 이 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여 일행과 기념 촬영을 하신뒤에 아군 제O군단에 배속되어있는 미군사 고문단 고급 장교들에게 그 수고를 치하하신 다음 아군의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발걸음을 옮기시여 정 총참모장을 비롯하여 제O군단장 백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 등 제장성들의 환영과 인사를 받으신 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의 장병이 전후를 보위하는 가운데 지프차로 한때는 피로 물들었던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 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소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1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 소리로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 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환영하는 플랜카드와 아치문이 처처에 보였었다.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 만세를 환호하는 남녀동포의 모습에 일제히 답례하시며 5년간 공산괴뢰 치하에 유린된 고 도시의 시가를 달리시며 환영대회장인 전 평양시청으로 향하시었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소련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오던 살인, 방화의 본진이었던 지금은 새살림 집이된 평양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이곳에서 외국기자 및 신임된 평양 임시 시장 등을 접견하신 후 동 10시 45분 5만 애국시민의 태극기를 휘저으며 그칠줄 모르는 만세와 환호속에 식장에 임석하시었다. 간단한 국민의례와 임 시장의 환영사에 뒤를이어 대통령께서는 약 70분간 요지 다음과 같은 감명깊은 훈화를 끝마치신 후 시민 각계각층에서 드리는 화환과 기념ㅁ품을 받으시고 곧 회장을 떠나 정오 40분 평양 비행장을 출발 동 오후 1시 35분 서울에 안착하시었다.
한강철교 폭파전 한강대교 옆에 만들어 놓은 부교로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 사진
김덕영 영화감독이 미국에서 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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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 박사는 이 전 대통령의 하와이 체류 시절 양자로 입적됐다.
1961년 11월 전주이씨(李氏) 문중의 결정이었다.
대통령의 연세(당시 86세)가 많으니
대학 졸업자에 프란체스카와의 의사 소통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미혼이며 가정교육이 바른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 대통령과 계대(系代)가 맞는 17대손이기도 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의 양자라는)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지만 주변에서
‘전주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고 해 결국 설득당했다”면서
“양주군 초대 교육감이었던 친부도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열심히 모셔라’고 격려했다.”
그는 입적 당시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독일 유학을 접고 운명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양자 인수가 오기를 학수고대했고,
처음 만났을 때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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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19살에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해서도 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매일신문의 자금난 해결을 두고 갈등이 발생해 유영석과 이승만은 해임당하게 되는데
그 뒤 이 둘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했고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과 항일을 계속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남궁억과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
투옥되었을 때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혀 종신형이 내려졌다. 홍종우가 그를 취조하였고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아버지가 이리저리 부탁하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고문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때 당한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평생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
그는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크리스토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미완성이지만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비롯해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도 계속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1905년, 도미한 이승만이 시카고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문경호 전도사, 한성 감옥 간수장 이중진의 동생 이중혁. | 1907년 7월, 이승만이 워싱턴의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할 무렵. |
1904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1월에 워싱턴포스트지와 기자회견을 열어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였다.
2월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았고, 생활비는 동양과 한국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한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미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도움으로 20일에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존 헤이는 몇달 뒤 사망하고 만다.
1905년 8월 5일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문서로 절차를 갖춰 제출하면 검토해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공식적인 절차로 제출하라는 말은 그저 외교적 수사일 뿐 애초에 그런 요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않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워싱턴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이런 공적 성격의 일은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야하며 1882년 조미조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고 미국 정부와 대통령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다.'는 답변을 해왔고 김윤정을 처음 주미 조선 공사관에 소개시켜준 조지 워싱턴 대학교 총장인 찰스 W. 니드햄 박사 또한 '이런 중대한 문제는 김윤정 공사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고 본국에 먼저 물어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뿐이라며 자신은 김 공사를 신뢰한다'고 하며 이승만에게 단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이 루즈벨트와의 면담소식은 국내에서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황성신문에서는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전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며 극찬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 나무위키
설립순으로 나열하였다. 컬럼비안 문리과대학 (Columbian College of Arts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