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행복
글 : 불편한생각 ・ 2017. 3. 15. 18:20
드디어 ‘행복 유전자’ 책이 배달되었다. 일단 서문만 읽는데도 나는 마냥 행복했다. 그동안 나혼자 관찰하고, 사색한 것이 다른 누군가 전문가에 의해서 객관적 사실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의 블로그 초기글중에 ‘행복의 공식’이란 것이 있다. 그 글에서 내가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행복의 공식을 아래처럼 적었다.
행복 = (능력 x 노력) % 만족할 수 있는 목표
그리고 이 공식은 현실의 많은 일들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다 보니 몇가지 경험을 통해서 ‘사랑’ 이나 ‘희생’ 같은 정신적인 요소들 또한 행복을 만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공식을 내 나름 대로 아래처럼 고쳐보았다.
행복 = (능력 x 노력 x 사랑 x 희생) % 만족할 수 있는 목표
하지만 ‘사랑’이나 ‘희생’같은 것은 현실적(물질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많지 않은 거라서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아마도 내 개인적인 기독교적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행위로 타인의 행복을 만들면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익을 얻고 이것은 보다 더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사회성이기 때문에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유전적인 이유일 것 같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물론 '희생'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를 '동물의 왕국'같은 다큐멘터리에서 가끔 들었다) 나만의 생각으로 결론을 지었었다.
그런데 ‘행복 유전자’ 책은 서문에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과 경험으로 행복에 대한 정의를 위의 첫번째 공식처럼 정의하였다. 이것을 ‘일반 행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인간의 행복에 생물학적인 토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생물학적/과학적 행복을 ‘내적인 행복’ 또는 ‘자연적 행복’이라고 부른다.
“외적(일반) 행복은 더 좋은 일자리를 얻고, 더 큰 집에 살고, 외제 차를 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결국 상황이 변하게 되면 외적 행복은 우리를 공허하고 결핍된 채로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반면에 내적 행복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인간에게는 생각, 행동, 감정으로 일깨울 수 있는 유전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내적 충만감, 명상, 이타주의를 실천하면 ‘자연 행복’을 생성하는 DNA 암호를 발견하였다” (‘행복 유전자’ 27 페이지)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과 ‘희생’이 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지 드디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두 종류의 행복
[출처] 두 종류의 행복|작성자 인디지오
2015. 9. 30. 16:50
1퍼센트? 내 아이들은 아니다.
사이먼 쿠퍼 Simon Kuper
올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을 파리 어느 놀이터에 데려다 놓고 놀게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한 미국인 엄마와 자식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 미국 엄마는 아이를 일년에 3천500만 원 드는 학교에 보낸다고 했다. 그 학교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유명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유급을 적극 권장했다. 이 아이는 학교 성적이 그저 그래서 5학년을 두 번 다니기로 결정했다. 최종 목적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 소득 상위 1% 안에 드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흔하다. 상위 1% 소득은 점점 늘어나고 나머지 99%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1%로 만들려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 최근 발표된 행복에 대한 여러 연구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소득이 오를수록 행복도 증가한다. 예전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나도 돈 많이 좋아한다. 하지만 난 내 아이들을 1% 그룹으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 1%에 들면 그에 따르는 보상도 많지만 그만큼 희생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1%에 들기 위한 아이들의 고통은 아주 이른 나이, 아마도 0살때부터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게 되면 자신과 비슷한 다른 1%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된다. 보통 런던이나 뉴욕처럼 집값 비싼 동네에서 산다. 이런 동네에 있다보면 돈이 웬만큼 많은 사람이라도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끼게 된다.
유로퍼시픽캐피탈이라는 금융회사의 마케팅 디렉터였던 앤드류 스키프라는 사람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자. 그는 2012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연봉 4억을 받지만 브루클린의 좁은 복층 아파트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린 40평도 안 되는 집에 삽니다. 설거지도 직접 합니다. 어렸을 때 내가 상상했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에요.”
1% 사람들은 직장 생활도 빡세다. 역사의 흐름과는 정 반대로, 이들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오래 일한다. 게다가 이제는 IT기술의 발달로 하루 종일 회사와 연락이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쉬고 언제 일해야 하는지 스스로 정할 수 없게 됐다. 요즘 투자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은 회사가 정해준 개인 할당 수익을 채우기 위해 일하고,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다. 공장 제조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받던 스트레스를 그대로 받고 있다.
결국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소득 상위 1%에 들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의 주변에는 당신처럼 분노로 가득한 워커홀릭들, 그리고 부모 잘 만난게 전부인 멍청한 2세들만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많은 금융계 종사자들이 ‘최대한 빨리 돈 벌어서 업계를 떠야지’라고 꿈꾸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도 문제가 있다. 그런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명제도 다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노벨상을 탄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과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의 2010년 논문에 나온 얘기다. 이들은 45만 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갤럽의 설문조사를 분석했다.
- Type 1 행복: 어제 너는 행복한 감정을 느꼈니?
- Type 2 행복: 니 삶은 성공적이니?
첫 번째 행복은 ‘감정적 웰빙’이다. 이것은 “어제 당신이 느낀 감정들은 어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조사할 수 있다. 이 감정적 웰빙에는 돈이 엄청 많이 필요하지 않다. 평균적으로 누군가의 연수입이 8천만원을 넘어가면 그 이후로는 감정적 웰빙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아이들도 감정적 웰빙을 위해서라면 8천만원씩 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직업의 종류도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면 도움이 된다. 텔레마케터나 피자배달원 같은 직업은 행복감을 줄인다. 이런 ‘불쉿 잡’은 단순 반복적이고, 자율적이기보다는 강압적이며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꼭 불쉿 잡이 아니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변호사는 불쉿 잡에 비해 수입이 훨씬 더 높지만 훨씬 더 많은 행복감을 주는 직업은 아니다. 대체로 얘기해 스스로 더 많은 컨트롤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일수록 소득과 행복감의 상관관계는 약해진다.
2014년 영국 정부의 조사에서 행복도가 가장 높은 직업은 성직자였다. 성직자 평균 연봉은 3000만원 정도였다. 피트니스 강사는 연 1500만원 정도 벌었는데 이 역시 행복도가 높은 직종이었다. 물론 인과관계를 의심해볼 수는 있다. 어쩌면 원래부터 즐거운 사람들이 성직자가 되고 우울한 사람들이 변호사가 되는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확실한 건 소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거주하는 지역의 문제도 있다. 뉴욕에 사는 사람에겐 연봉 4억이 아주 큰 돈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아이들은 부동산값이 폭락한 지중해 어느 마을에서 불교 수도승이 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사치는 돈이 아니다. 돈을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사치다. 많은 가난한 사람은 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 난 내 아이들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딱 그만큼의 부를 갖게 되길 바란다.
이제 카네만과 디턴이 정의한 두 번째 종류의 행복이 남았다. 이것은 ‘인생 평가’다. 나의 삶이 얼마나 잘 굴러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만족도는 소득이 올라갈수록 계속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내는 만일을 대비해서 우리 아이들이 1% 그룹에 들도록 키우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난 ‘인생 평가’ 만족도도 높게 나올 수 있는 비법을 가르칠 수 있다. 자존심과 돈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돈 이외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존감을 찾는 이들이 많다. 남보다 더 날씬하다거나, 남보다 더 정신적으로 성숙하다거나, 남보다 더 젊어 보인다거나, 남보다 더 많은(혹은 적은) 섹스 파트너를 갖고 있다거나, 혹은 남보다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더 좋다거나 등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남들보다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은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는 것 말고도 무한히 많다는 것을 알려줄 생각이다.
또 타인들은 네가 어떻게 사는 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려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해 걱정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The 1 per cent? Not for my kids - FT.com
One day this summer, while we were watching our kids play together, an American mother told me her child-rearing strategy. Her childre...
www.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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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FT에 실린 사이먼 쿠퍼의 칼럼. 쿠퍼는 파리에 살면서 영국 신문에 칼럼을 쓰는 남아공계 네덜란드인이다. 주로 축구와 문화인류학에 대해 쓴다.
유럽에 살고 FT를 읽는 사람이라면 다들 연봉 8천만원 이상은 벌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면 맘만 먹으면 Type 1 행복은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어떨까. 타입 1 행복이든 타입 2 행복이든 둘 다 이루기가 어렵다. 한국은 나라 전체적으로 좁은 국토에서 5천만이나 되는 사람이 박 터지게 경쟁하는 국가다.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꼭 남들이 참견한다. '넌 왜 그렇게 사니?'라고 물으며 비참하게 만든다(나 역시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남들을 괴롭게 한 적이 많다). 그러니 한국에선 '어제 너 행복했니?'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 이 나라에선 성직자들도 경쟁을 한다.
어제 만난 친구 곰탱이는 아이가 벌써 국민학교 1학년이 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원했던 사립학교에 떨어져서 별로 교육비가 안 들겠거니 싶었는데, 실제로는 사립학교 보내는 것 만큼이나 돈이 든다고 한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데 방과후에 애를 그대로 둘 수가 없다고 한다.곰탱이의 계산에 따르면 자기 수입의 1/3은 교육비, 1/3은 이자비용(집, 원금 제외), 1/3은 생활비로 나가는 지경인데, 생활비가 1/3에 묶여지지 않아서 큰 고민이란다. 명문대 교수로 사는데도 이렇다.
실제로 주위에서 애를 키우는 집을 보면 수입이 상위 1% 안에 드는 몇(부부가 모두 의사라거나)을 제외하곤 다들 빡빡하게 산다. 빡빡하게 사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 부모, 조부모 세대는 분명히 우리보다 더 빡빡했는데 애들은 열 명씩 낳고 키웠으니까. 진짜 문제는 미래 전망이다. 우리 자식들이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더 잘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걱정 때문이다. 아이를 가진 내 친구들은 대부분 괜찮은 대학들을 나오고 괜찮은 직장들을 다니고 있는데, 과연 그 아이들이 부모만큼 좋은 대학을 가고 부모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냉정히 말해 힘들다.
요즘 많은 30대가 애를 낳지 않는 이유를 '이기심'이라고 분석한다면 어리석다. 우리 세대가 유독 이기심이 많아서 자식에게 쓸 돈을 나에게 쓰고 싶어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식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든지간에 자식이 나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영 들지 않기 때문 아닌가. 회사에 우리 팀만 해도 30~40세의 팀원 10명(남 3 여 7)이 앉아있다. 특별히 이기적이거나 자기 쾌락적이라고 볼 수 없는 이 집단이 가진 자식의 수는 모두 합해 단 2명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내린 판단이라기보다는 생물의 본능 아닌가 싶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불리한 환경에서는 번식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최소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