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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묵상글 (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성화聖化되십시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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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되십시오!”
-성덕聖德의 여정-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자연속에서 살다보니 자연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집무실옆 꽃길이라 칭했던 애기똥풀꽃도 완전히 사라졌고, 수도원 성전 입구 천국문이라 칭했던 아치형을 싸고 있던 넝쿨 장미꽃도 시들어 사라졌고, 꿈처럼 사랑으로 피어났던 수녀원 담장의 장미꽃들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젊음도 인생도 그러합니다.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모든 변화가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남은 삶도 금방일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짧은 인생 최대 화두일 것이며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단연코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가는 성덕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요즘 제가 자주 바치는 인사말은 수도형제에게 배운 “성화되십시오!”입니다. 우리의 살 날이 연장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 부단한 회개를 통해 성화되어가는 것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은 2세기 활약하다 순교한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성 폴리카르포의 뒤를 잇는 사도교부입니다. 이름 뜻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주님에게서 오는 평화” 참 멋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주간 중인 1월21일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을 ‘일치의 학자(Doctor unitatis)’로 공식 선언했으며 이로써 이레네오 성인은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무려 사후 1822년 후입니다. 교황은 이레네오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교령에서 “위대한 스승의 교리를 통해 더욱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완전한 일치를 향해 걷는 여정을 만들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동방에서 태어났고 서방에서 주교 직무를 수행했다”면서 “성인은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2세기 주교로 가톨릭 신자들과 정교회 신자들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으며, 당시 그는 영지주의 이단사상에 맞서 주님의 전사로서 치열한 싸움중에 초기교회의 정통신앙을 확립한 대표적 교부로,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였습니다.”
이런 성인들이야 말로 가톨릭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되어 성덕의 여정에 무한한 영감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은 성인들을 기억,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사실 성인이 되는 목표는 옛 동방과 서방이 일치합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이 궁극으로 목표했던 공부도 성인이 되는 공부였습니다.
참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병든 영혼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강조하는바 정신건강, 영혼건강, 마음건강의 참사람, 성인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없다고 참으로 건강한 영혼의 사람은 없다고 많은 이들이 개탄합니다.
교회학자는 교의로써 교회에 큰 기여를 한 교회내의 학자들에게 부여되는 칭호로, ‘생활의 성성聖性’, ‘탁월한 학식’, 그리고 ‘교회에 의한 선포’ 등 세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학자는 성덕의 사람, 학식의 사람, 교회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위 세 요소에 많이 접근하여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참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어제 31년만에 만난, 신학교 시절 호감을 지녔던 후배 프라도 사제 정석수 유스티노 도반과의 만남이 어제의 각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사제품을 앞두고 1992년 여기서 피정을 하고 그해 서품을 받았으니 만31년만에 만난 것이니 이 또한 기적입니다. 돌“석石”에 물“수水”자라 쓰니 한 수도형제는 “암반수”라는 기막힌 별명도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이 신부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라며 덕담도 드렸습니다. 면담성사중 프라도 영성도 배웠습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섬김, 십자가의 주님 사랑, 감실안의 주님 사랑의 나눔으로, 즉 구유의 섬김, 십자가의 사랑, 감실의 나눔으로 요약되는 삶과 영성으로 이대로 살면 정말 가난하고 겸손하게 사셨던 주님과의 일치로 순수와 열정의 참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눈 성덕의 삶과는 너무 다른 오늘 복음의 거짓 예언자들의 삶입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오늘날로 보면 흡사 양심이 없이 뻔뻔한 사이코패스, 소시어패스에 속했던 부류들 같습니다. 디다케 11장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의 식별기준이 재미있습니다. 교도소에서 가장 사람 취급 못받고 무시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전형적 소시어패스 사기꾼들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정말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한다면 사이코패스도, 소시오패스도 치유되리라 믿습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틀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만 가져야 합니다. 만일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다 예언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을 지녀야만 예언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라도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요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질 거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마음이 순수하고 좋아야 생각도 글도 말도 행동도 순수하고 좋습니다.
우선적이 것이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한 마음의 정화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순수와 열정의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타고난 기질이 있더라도 이를 깨달아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열하고 가열찬 선행의 노력을 다할 때 주님은 이런 기질도 은총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착한 마음에서 선행이지만 부단한 가열찬 선행을 통한 나쁜 마음의 변화도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예수님을 떠나 참 사람이 되는 것은 요원합니다. 필시 변질 중독 부패되어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아가면서 참나의 성인이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새삼 날로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벗이라는 아브람과 하느님의 관계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아브람을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하늘을 쳐다 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주님과의 우정을 북돋아 주시어 성덕의 여정에 큰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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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3.06.27.(연중 12주 화요일. 묵상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부기하셨습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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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8 05:46
연중 12주 수요일-믿음과 하느님 체험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명사이고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오늘도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전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믿지 않고 살 수 없고,
다만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라는 점 말입니다.
우선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거나 안 계신다고 믿는 것일 뿐 다 믿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든 나쁜 사람이라고 믿든 다 믿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가능성을 믿든 불가능성을 믿든 믿는 것이며
다만 불가능성을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시작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불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을 때도 이 관점에서,
그러니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거나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을 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을 믿을 때는 거짓이 없이 진실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좋으신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악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하느님이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은,
늙은 그에게서 수없이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은 것이고,
나쁜 건 주지 않고 좋은 것만 주시는 하느님
곧 사랑의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믿기로 선택했지만
이 선택에서 더 필요한 것이 체험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도 믿은 아브라함이 신비경을 체험하는 얘기를 전합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이 처음에는 그저 황홀경만이 아닙니다.
공포와 암흑을 먼저 체험하고 그 후에 황홀경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도 그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먼저 끔찍한 고통과 그로 인한 두려움 체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 질 무렵 공포와 암흑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이내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횃불로 오심을 체험합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구약에서 하루의 시작이 그 전날 저녁인 이유가 이것이고,
우리의 대축일이 제 1저녁 기도부터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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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그별하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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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가 되었습니다. 새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서가 있는 곳에는 조화가 있고, 조화가 있는 곳에는 적절한 때가 있으며 적절한 때가 있는 곳에는 유익이 있습니다”(성 이레네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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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11월에는 교구장님의 ‘사목교서’ 설명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의 사목회장님, 기획분과장님, 총무님이 주로 오셨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교서를 발표한 후에 교구의 각 부서의 다음연도 행사의 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사목국의 교육담당 신부였기 때문에 주로 교육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총구역장 피정, 구역장, 반장 교육, 사목위원 교육, 지구연수와 같은 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냥 이야기만 하면 지루하기 때문에 가끔 양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기억나는 이야기 중에 ‘성직자와 조폭의 닮은 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 자기 지갑을 열어 돈을 내는 법이 없다. 서열이 확실하다. 남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조직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일면 비슷한 점이 있기에 당시에 ‘소화제’처럼 웃음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꾸르실료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지갑을 열어 계산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한 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이 계산한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성직자가 가난하기 때문에 계산을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만큼 대접 받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 순례 중에 ‘카파도키아’의 오래된 동굴 성당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굴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세상의 것들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은수자들은 동굴에서 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은수자들의 삶이 수도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공통점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음식이 거칠고 부족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도원과 교도소는 차임점이 분명이 있습니다. 수도원은 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교도소는 강제로 들어갑니다. 수도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은 닫혀있습니다. 형기를 마쳐야만 나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결정적인 차이는 ‘감사와 불평’입니다. 수도원은 모든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교도소는 불평과 불만이 넘쳐납니다.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면 으레 뒷자리를 찾아갑니다. 뒷자리는 때로 멀미를 하고, 내릴 때도 늦게 내리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짐을 내릴 때도 버스 트렁크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이웃의 짐을 내려 줍니다. 허리가 아프지만 그것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본인의 간식은 물론 이웃의 간식까지 챙겨서 나누어줍니다. 그분들은 나눔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교도소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편하고 쉬운 일만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늘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합니다. 이웃의 순례와 묵상을 방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고 있는지, 교도소처럼 살고 있는지 내가 지나온 삶의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수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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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혹은 ‘땀은 그 흘린 것만큼 결과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서 ‘성실함’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많은 취미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릴 적부터 해온 ‘탁구’입니다. 탁구를 통해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땀을 흘린 만큼 실력은 늘어납니다. 누군가와 시합해서 이기고 싶다면 상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저는 조리사입니다. 요리를 취미로 하다 보니 조리사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만드는 것도 참으로 정직합니다. 정성과 시간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집니다. 또한 단 것을 넣으면 달아지고, 짠 것을 넣으면 짜집니다. 매운 것을 넣으면 매워집니다. 아주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진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립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꼭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고 인내하는 시간입니다.
땀을 흘리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구별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시간을 주십시오.
삶 속에서 흘린 우리의 땀이 좋은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 속에서 봉헌한 모든 기도와 봉사가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보시기에 탐스러운 열매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야구장
야구장 가보셨지요?
저도 얼마 전에 야구장 다녀왔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함성과 음악 소리
자기 팀을 응원하는 열정들
즐겁게 마시고 즐기는 모습들
그렇게 야구장 안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날을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하루를,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오늘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 안에서 우리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구장의 함성과 같은 그런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통해 매일매일 하늘로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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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지금 직접 하느님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또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면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혹시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려 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안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알았을까요?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을 직접 느끼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될 것입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는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나서입니다. 비록 걷지도 또 말하지도 못하지만,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어머니 배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 것을, 사랑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뵐 그날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나쁜 나무를 바라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 나쁜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가 나오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거짓된 말과 행동에 빠져듭니다. 좋은 나무가 아닌 나쁜 나무를 바라보면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분명히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나무의 모습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크게 후회할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맞은 햇빛과 비, 풍부한 거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열매를 보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구슬땀을 흘리며 나무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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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온종일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의 조합이다(조셉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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