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율사의 순례길을 따라가는 중국오대산 기행
Ⅰ. 문수보살신앙과 한국의 오대산
1. 문수보살文殊菩薩이란 누구인가?
2. 세계제국 당나라, 문수보살을 품에 안다
3. 자장율사慈藏律師, 문수보살을 친견하다
4.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과 한국오대산의 개착
Ⅱ. 최고의 성산 오대산과 자장의 순례길
1. 중국오대산의 역사와 도선의 기록
2. 자장율사와 주변인물들의 연대
3. 자장의 중국오대산 참배와 「오대산찬」
4. 「개창조사전기」에서 확인되는 자장의 행적
5. 중국오대산의 성적聖蹟에 대한 당나라의 조사
부록: 황제와 붓다가 동일시되는 강북불교와 운강석굴
Ⅰ. 문수보살신앙과 한국의 오대산
1. 문수보살文殊菩薩이란 누구인가?
① 칼 세이건이 말하는 우주
광활한 우주 속에서, 지적 생명체는 지구 위의 인류 밖에 없는 것일까? 『코스모스』로 유명한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은, “이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라는 말을 했다. 천문학자의 입장에서 광활한 우주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면서, 또 다른 지적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칼 세이건은, 우주에 지구와 유사한 조건의 행성이 2000개가 넘으며, 각 조건에 따른 진화의 방식도 우리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도 했다.
② 우주를 말하는 불교
불교는 현대의 천문학이 말하는 우주보다 더 광범위한 우주를 말한다. 또 부처님이란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밝혀서 깨달으면 성취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계의 석가모니 이외에도, 다른 많은 세계에 다수의 부처님들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다른 세계의 대표적인 부처님이, 서쪽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다. 또 이러한 부처님들을 도우며,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을 보살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을 돕는(脇侍) 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으며, 석가모니불을 돕는 보살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존재한다.
보살들은 일종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전문직에 비교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보살이며(大悲觀世音菩薩), 문수보살은 지성의 보살이다(大智文殊菩薩). 즉 지혜를 통해서 이지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바로 문수보살인 것이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를 도와서, 중생들을 지혜와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문수가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문수야말로 모든 성현聖賢이 존재하도록 하는 파생자라고도 한다. 우주에 별처럼 많은 세계들이 벌려 있지만, 그럼에도 지혜만큼 존귀한 가치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문수보살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한 지혜의 보살이라고 하겠다.
③ 시원함에 매료된 인도인
인도의 아열대 기후는 2모작 3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음식은 언제나 풍족하다. 그러나 고온다습한 기후는 주림과는 다른 더위의 고통을 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인도인의 모든 이상세계에는 언제나 시원한 연못이 등장하곤 한다.
더위에는 외부의 환경적인 더위 외에도 정신적인 더위라는 것도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할지가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경우 사람들은 혼돈의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인도인들은 정신적인 더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명지明智에 입각한 명쾌한 판단은 시원한 청량함이라고 이해하였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덕분에 청량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문수는 시원한 푸른색을 상징색으로 가지는데, 덕분에 푸른색 옷을 입고 푸른색 칼을 쥔 채 푸른색 사자를 탄 모습으로 묘사된다.
인도인들은 칼에 일도양단하는 명쾌함이 내포한다고 생각했다. 또 사자가 집단으로 몰아가면서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보고, 사자는 지혜로운 동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지적인 청량함을 더욱 강조해서 푸른색을 입힌 것이 바로 문수를 상징하는 ‘청색 검’과 ‘청사자’인 것이다.
또 문수의 지혜는 계산심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발취되는 천연적인 측면이다. 이로 인해서 문수는 나이어린 동자승의 모습으로도 표현되곤 한다. 즉 문수동자인 것이다.
푸른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청사자를 타고 파란 검을 쥐고 있는 모습. 이것이 바로 문수의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가 된다. 물론 문수보살은 어른의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이때의 문수는 지혜의 원숙함을 상징한다. 즉 천진한 동자와 원숙한 모습의 두 가지로 문수보살은 표현되는 것이다.
2. 세계제국 당나라, 문수보살을 품에 안다
① 대승불교의 꽃 『화엄경』
대승불교에는 많은 경전들이 있지만, 이 중 『금강경』·『법화경』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 바로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원효의 화엄사상과 의상의 화엄종에서도 확인되는, 동아시아 교종敎宗을 대표하는 최대경전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불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최초의 깨달음을 증득한 뒤에, 21일에 걸쳐 설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경전이다. 문수보살이 석가모니를 돕는 협시보살이라는 점에서, 『화엄경』은 문수보살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확보한다.
② 『화엄경』, 문수보살을 말하다
『화엄경』에는 여러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이 존재하지만, 워낙 방대한 경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조금 특이한 측면들도 다수가 수록되어 있다.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이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보살들이 각기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지도처럼 묘사해 놓고 있어 주목된다. ‘보살주처’란 바로 보살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 중에는 당연히 문수보살에 대한 내용도 있다. 이에 따르면, ‘문수보살은 동북방의 청량산清涼山에 1만의 보살권속들을 거느리고 항상 가르침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화엄경』은 문수보살이 동북쪽에 위치한 청량산이라는 시원한 산에서, 작은 보살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과 함께할 때는 보조적인 보살에 머물지만, 자신의 처소에서는 작은 보살들을 지도하는 교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국가대표가 세계대회에서는 1등을 못할지라도, 국내대회에서는 최고의 실력자인 것처럼 말이다.
③ 당나라 불교세계를 꿈꾸다
우리는 중국의 역사가 찬란하다는 것에 현혹되어, 르네상스 이전은 언제나 중국이 최고였는 줄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중국은 수隋·당唐 시기가 되어서야 로마를 압도하며 세계최고로 등장하게 된다. 즉 그 이전시기에는 로마에 미치지 못했다. 중국사를 펼치면 ‘수·당 세계제국’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이 수·당이지 수나라는 고구려정벌 실패 등으로 단명하는 왕조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화의 찬란함은 당에서 만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당나라가 바로 불교국가이다. 세계최고의 제국이자 불교국가였던 당나라. 이 당나라에서 불교국가임을 강조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당의 제국 안에 불교성지를 만드는 노력이다.
④ 오대산五臺山, 청량산이 되다
「보살주처품」에는 문수보살이 동북방의 청량산에 거처한다고 되어 있는데, 인도의 동북방이면 중국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중국 동북지방인 태원太原의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성산聖山인 청량산으로 변모하게 된다.
오대산의 불교화는, 태원의 인근인 평성平城(현 大同)에 수도를 둔 북위北魏시대부터 비롯된다. 이때 불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오대산이 문수보살성지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당에 들어와 문수보살성산으로 발전한다. 즉 ‘오대산=청량산’의 확립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의 오대산 역시 문수보살의 성산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도에서의 시원하다는 ‘청량’의 인식이 중국으로 와서는 추위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오대산은 4월이 돼야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9월이면 눈발이 날리는 추운 곳이다. 즉 인도인이 생각하는 청량과 중국인의 청량사이에는, 큰 폭의 온도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오대산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매우 춥다. 그리고 이 추위가 동반하는 폭설이 바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⑤ 당나라를 수호하는 문수보살
당나라의 문수신앙은, 이후 밀교의 불공不空(705∼774)과 화엄종의 징관澄觀(738∼838)에 의해서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신앙으로 확립된다. 실제로 772년에는 불공의 건의에 의해서, 당나라의 전 사찰에 문수보살을 보시는 문수원文殊院이 건립되기도 한다. 즉 문수신앙이 당의 천하를 뒤덮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에서의 문수가 지혜뿐만 아니라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3. 자장율사慈藏律師, 문수보살을 친견하다
① 목숨을 걸고 재상자리를 외면한 자장율사
자장율사(약 594∼655)는 신라 진평왕대(재위 579∼632) 진골이자, 조정의 실력자인 무림공武林公의 아들로 태어났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무림공은 1,000구의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공양을 올리고는 아들이 생기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회임하여, 부처님 오신 날인 4월 8일에 탄생하게 된다.
이후 양친이 돌아가시고 출가했는데, 당시에 마침 재상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래서 명망 있는 인물을 천거하게 하니, 자장에게로 중론이 모아졌다. 왕이 사자를 보내, 출가의 길을 버리고 재상이 되기를 청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절했다. 마침내 분노가 치밀어 오른 왕이,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어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자장은 사자에게 목을 내밀면서,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율戒律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100동안 파계破戒하고 살기를 원치 않노라”라고 하였다. 사자가 자장의 높은 기상에 압도되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그 결연함에 탄복하여 출가를 인정하게 되었다.
② 자장, 중국오대산을 참배하다
자장은 신라에서 불교를 수학하다가, 638년 당나라의 선진불교와 교류하기 위해 서해를 건너 장안으로 가게 된다. 자장은 출가했지만, 최고의 귀족으로 선덕여왕과는 인척관계에 있었다. 이로 인하여 입당유학도 신라의 사신과 함께 갔으며, 장안에 도착해서는 당태종(재위 626∼649)과 황실의 높은 대우를 받게 된다. 장안에서 여러 불교의 발전상을 본 후에, 642년 당나라의 여러 불교유적들을 참배하다가 마침내 오대산에 도착한다.
오대산이란 산의 형태가 동·서·남·북·중앙에 각각 5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각 방위에 따른 5개의 봉우리로 된 산을 오대산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대산의 ‘대臺’는 의상대·낙산대·태종대와 같이 높고 뭉뚝한 언덕 같은 지형을 의미한다. 즉 오대산이란 5개의 뭉뚝한 산봉우리가 5방에 걸쳐 존재하는 산이라고 하겠다.
산의 정상이 뾰족하지 않고 뭉뚝하다는 것은, 지질학적으로는 노년기의 흙으로 된 지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산형태가 둥글둥글하고 바위가 적은 토산土山인 것이다. 이는 한국오대산도 마찬가지이다.
③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
자장은 먼저 오대산의 동쪽에 위치한 동대東臺에서 기도를 드리고, 다시금 북대로 옮겨 문수보살상 앞에서 문수보살을 뵙기 위한 간절한 기도에 돌입한다. 그러자 꿈에 선몽이 있었고, 다음날 아침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된다. 이때 문수보살은 많은 가르침과 석가모니불의 사리 및 가사袈裟 등의 성물聖物을 전해준다. 그리고 끝으로 신라의 동북방에도 오대산이 있고, 이곳에도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들과 함께 거처하는 장소이니 돌아가서 찾아보라고 고지해준다.
④ 당나라의 오대산 원정대
자장의 문수보살 친견 이야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매우 신기하게 들리는 특이한 종교체험이다. 그러나 오대산은 굉장한 에너지가 응축된 신령한 땅으로, 오대산의 이적들에 대한 내용은 다양한 각도로 장안과 황궁에까지 전해졌다. 결국 제3대 황제인 고종은, 662년에 칙명으로 오대산의 이적을 조사(檢行聖迹)하는 칙사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마저 이적이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조사결과를 보고 받은 황제는 크게 감탄하여 오대산에 대대적인 보시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이후 제4대 중종 때인 702에도 발생한다. 즉 당나라 최고의 불교성지이자 성산이 바로 오대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적의 체험자 중 한 분이 바로 자장이라고 하겠다.
오대산의 위상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1956년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이때까지도 오대산에 존재하던 사찰이 124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 산에 124곳의 사찰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종교성지가 바로 오대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4.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과 한국오대산의 개착
① 자장의 귀국과 환대
자장은 643년 3월 16일 현재의 울산인 사포絲浦로 귀국한다. 경주 쪽은 배를 접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시 선박의 주 출입로가 울산이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의 서울과 인천의 관계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자장이 경주에 도착하자 국가적인 환대가 있었다. 당시의 승려는 선진문물의 수용 통로였다. 특히 최고의 귀족으로 당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장은, 많은 선진문물을 가지고 귀국했다.
당시는 삼국통일 직전의 상황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에 의해서 신라의 선덕여왕 체제가 심한 위기 국면에 처해 있었다. 이때 당의 정보에 밝고 당황실과도 직접적인 교류가 있는 자장이 귀국했으니, 그 환대가 성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②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지다
자장은 선덕여왕에 의해서 대국통大國統이라는 신라불교의 최고 수장에 임명된다. 이후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통한 국론통합을 위해서, 645년부터 646년에 걸쳐 높이 약 80m에 이르는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때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와 맨 아래인 주심초석에 문수보살에게서 받은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즉 부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인식을 강화하여, 불교로 국론을 통일하는 효과를 꾀했던 것이다.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하는 목적은, 부처님의 보호를 통해서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감을 갖춘 단합된 신라는, 강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한국사에 일대 획을 긋는 대사건을 완수하게 된다. 자장은 재상의 지위를 거절했지만, 진골귀족의 입장에서 불교를 통한 호국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자장은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 이후에 양산의 통도사와 울산의 태화사를 창건하고, 이 두 사찰에도 각각 문수보살에게 받은 불사리를 봉안하게 된다. 또 통도사에는 특별히 부처님의 가사도 함께 모셨는데, 이 가사는 자장스님 가사와 더불어 음력 9월 9일의 통도사 창건기념일에 일반에 공개된다.
③ 동북방의 오대산을 찾아가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불교를 정비하고 국가의 위기상황을 안정시킨 뒤에, 자장은 비로소 오대산을 찾는 동북방행을 감행하게 된다. 당시 동북방은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우려 속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자장은 불교를 통해서 동북방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고자 했다. 즉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른 오대산을 찾는 목적과, 최전방인 동북방의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장은 먼저 현재의 오대산 중대中臺로 가서,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정골頂骨(두개골)사리를 봉안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서 향나무가 자란 곳(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 이는 부처님께 향공양을 올리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현재까지 통도사에는, ‘고산제일월정사高山第一月精寺 야산제일통도사野山第一通度寺’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높은 산의 터로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첫째가 되며, 낮은 산지에서는 통도사의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제일’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리를 모신 두 곳을 가리키는 말이 오늘날까지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중대에 사리를 봉안한 뒤 자장은, 이후 월정사 터에 이르러 풀로 암자를 짓고 3일 동안 머문다. 그리고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고 8척의 건물을 세우고 일주일을 더 주석했다. 이렇게 해서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과 월정사의 위치가 확립되는 것이다.
④ 자장의 정암사 입적과 5대 보궁
그 뒤에 자장의 행적은 수다사水多寺와 강릉의 한송사寒松寺를 거쳐 석남원石南院으로 이어진다. 석남원은 현재의 정암사인데, 이곳에서 자장은 최후까지 문수보살을 재차 친견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입적한다. 자장은 이후 이곳에서 화장되어 돌로 된 골호(石穴)와 같은 시설에 안치된다. 자장은 한국고승 중 가장 먼저 화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또 자장에 의한 불사리신앙은 이후 강원도로 전파되면서, 정암사·법흥사·봉정암의 3곳으로 확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5대 보궁 즉 5곳의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은, 통도사·오대산 중대 그리고 정암사·법흥사·봉정암이 되는 것이다. 5대 보궁의 위치를 보면, 5곳 중 4곳이 강원도에 있다. 이는 자장의 최후 행적이 빚은 또 하나의 결실이라고 하겠다.
⑤ 일본에서도 확인되는 오대산
중국불교에서 확인되는 오대산 문수신앙의 영향은, 자장에 의해서 한국오대산의 개창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일본으로도 확대된다.
일본 제45대 성무聖武천황(재위 729∼749)은, 보위에 오르기 전 꿈에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그리고 724년 문수의 화신으로 평가되는 행기行基(668∼749)를 통해, 고지현高知縣 고지시高知市에 일본오대산이 개창되기에 이른다. 즉 오대산은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에 걸쳐 존재하는, 동아시아 문수보살 신앙의 강력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Ⅱ. 최고의 성산 오대산과 자장의 순례길
1. 중국오대산의 역사와 도선의 기록
오대산이 불교와 결합되는 것은, 오대산 인근의 대동大同을 수도로 둔 북위北魏(386∼534)에서 시작되어 헌문제(재위 465∼471) 때 강화된다. 이 시기 북위 역도원酈道元(466?∼527)의 수경주水經注에는 오대산의 문수보살이 독룡毒龍을 진압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같은 북위의 보리유지菩提流志(Bodhiruci) 역 문수사리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寶藏陀羅尼經에는, ‘동북방의 대진나국(중국)에 오정산五頂山이 있고 그곳에 문수동자가 거주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북제北齊(550∼577) 때에는 황제의 셋째 아들이 문수를 친견하기 위해서 소신공양한 것을 기념하는 왕자소신탑이 건립되었고, 이때 왕자가 대동하고 온 유겸지劉謙之는 문수를 친견한 뒤 화엄경의 뜻을 깨달아 화엄론 600권을 찬술했다. 또 북조시대에는 이 밖에도 오대산에서 화엄경 전독轉誦이 행해진 기록도 존재한다. 즉 오대산이 문수와 결합되어 화엄경과 연관되는 것은, 당나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양상인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이 청량산으로 확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역시 당唐에 들어서라고 하겠다. 즉 북위시기에 오대산은 문수와 연관되고, 당 시기에 청량산으로 확정되면서 문수신앙의 본산本山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도선은 북위시대부터 불교성지로 발전하기 시작한 오대산이, 당에 들어와 문수신앙의 본산으로 발전하자 이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실제로 진징鎭澄이 1596년 찬술한 청량산지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법장法藏의 화엄찬영기華嚴纂靈記를 인용해서 도선이 오대산을 직접 참배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도선은 이를 바탕으로,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 권3과 권2 및 속고승전 권25의 「석명은전釋明隱傳」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인용문이 다소 긴듯하지만, 본고의 전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므로 차례로 이를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주오대산태부성사岱州五臺山太孚聖寺」
대주 동남오대산 … 남쪽을 청량산이라 부르는데, 청량부가 건립되어 있다. 경전 중에 밝혀 놓기를 “문수가 500선인仙人을 거느리고 청량설산清涼雪山으로 갔다”고 하였으니, 곧 이 땅이다. … 운운
대천大泉이 있는데, 이름을 태화太華라고 한다. 청징한 것이 거울과 같다. 2부도가 그 양 옆에 있는데, 가운데에는 문수사리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지극함이 있으면, 종성鍾聲과 향기가 있지 않은 날이 없다. (또) 신승神僧의 서상瑞像을 왕왕만나게 된다.
(중대)의 남쪽에 3경쯤 되는 화원花園이 있는데, 사시로 이름난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난다. 정관 중에 해탈선사가 문도들을 모아 놓고 정定을 익히다가 스스로 말하였다. “화원의 북쪽 사방에 문수사리가 보이는데, 따르는 이들이 허공에 가득하다. (또) 군선群仙과 이성異聖들은 기록할 수 없이 많구나.”
근자에는 승명僧明선사가 있어 산에 거처하기를 30여년이나 하였다. 이 역시 선성仙聖을 만나서 비공飛空하여 가고는 오직 피皮만을 남겼다.
(남대) : 거듭 이인異人이 보이곤 한다. 형용이 빼어나고 관冠을 쓰고 있는데, 언어지간에 높이 솟아올라 먼 곳에 이른다.
그 山은 심히 가까운데 속자俗者는 막혀 오르는 이가 드물며, 등자登者는 반드시 승연勝緣을 감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서 내왕來往한 이들의 기록을 적어본다.
「당대주오대산상변성현연사십구唐岱州五臺山像變聲現緣四十九」
(산) 정에 대지大池가 있는데, 이름이 태화천太華泉이다. 또 (다수의) 소천小泉들이 서로 잇다아 있다. 천泉을 끼고 2부도가 있으며, 중간에는 문수사리상이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문수사리가 500선인仙人과 더불어 청량산으로 가서 설법한다” 하였다.
(남대) : 누차屢次에 승려가 나타났다가 홀연히 찾을 수 없게 되며, 성적신사聖迹神寺가 왕왕 출몰하곤 한다.
해탈선사와 승명선사의 유적인 좌굴坐窟과 신상身相이 존재하고 있다.
「석명은전釋明隱傳」
오대산이라는 곳은 신성神聖이 머물러 쉬는 곳이다. 중대가 최고로 (그곳에서) 제산諸山을 내려다보면 모두가 아래가 된다. (산) 위에 대천大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태화太華이다. (그) 곁에 2탑이 있고, 그 뒤로 제소석탑諸小石塔들이 백천이나 있다. … 운운 …
중대에서 동남쪽 30리를 가면 대부영취사大孚靈鷲寺에 이르게 된다. (그) 남쪽에 화원이 있는데, (그곳의) 전후로 성자聖者[문수]를 만나게 되는 일이 이 땅에서는 허다하다. 동서로 두 도량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한 골짜기가 있다. (다시) 서북 위로 8리쯤 가면 왕자소신탑이 있다. 사寺는 원래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황제의 제3자가 성품이 불법을 좋아하여 문수를 친견할 생각으로, 깊은 산으로 와서 그 소원으로 소신공양한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로 인하여 탑을 건립하였었다. 대동한 내시 유겸지劉謙之는 이 사중에서 7일을 행도行道하며 문수에게 기청祈請하니, 곧 성자聖者(문수)를 만나서 장부丈夫가 되었다. (그리고는) 화엄경의 뜻을 밝게 깨달아서 이에 화엄론 600권을 지었다. 이제 오대의 제사諸寺에서 거두어 모아 놓은 것이 아직도 300여권이나 있다.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 오대산을 문수성지로서 신성하게 여기는 도선의 관점과 신이에 경도된 측면을 확인해볼 수 있다.
2. 자장율사와 주변인물들의 연대
* 주변인의 연대
① 도선道宣 : 596 ∼ 667년 / 도선의 불적순례 : 630 ∼ 640년
② 법상法常 : 567 ∼ 645년
* 자장의 활동 연대
① 자장의 탄생연도: 594(진평왕 16) ∼ 599(진평왕 21)년
② 입당 : 638년
③ 종남산 운제사 동쪽에서 수행 : 639 ∼ 641년
④ 중국오대산행 : 642년
⑤ 신라로 귀국 : 643년 3월 16일
⑥ 황룡사구층목탑 건립 : 645년 착공, 646년 완공.
⑦ 자장이 당의 복제服制 도입을 주청함 : 649(진덕왕 3)년
⑧ 자장이 당의 연호年號 사용을 주청함 : 650(진덕왕 4)년
⑨ 자장의 입적연도: 653(진덕왕 7) ∼ 655(무열왕 2)년
* 주변상황
① 자장은 소판무림의 늦자식임. 「제일조사전기」에는 “무립공지제이자武林公之第二子”로 나옴.
② 자장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함.
③ 자장의 조카인 명랑은 632년 입당하여 635년 귀국함. 명랑은 670(문무왕 10)년 당의 침략이라는 비상시에 등용됨.
3. 자장의 중국오대산 참배와 「오대산찬」
월정사에서 오대산사적기 「개창조사전기開創祖師傳記」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장의 오대산행과 관련된 두 가지가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자장의 오대산행 ‘연도年度’와 앞서도 언급된 장소로서의 ‘동대東臺’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창조사전기」 : 정관 16(642)년에 이르러 오대산으로 갔다. 동대에서 일좌一坐하여 30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 (이상은 원효가 찬한 바의 본전本傳에 나와 있다.)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자장의 입당행적에서 642년이 공백으로 남는데, 바로 그 연도에 오대산행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창조사전기」를 제외한 자장의 전기 자료에 입각해서, 자장의 입당행적과 연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638년 : 자장의 입당과 승광별원勝光別院 주석 – 장안 공관사空觀寺의 법상 친견
639 ∼ 641년 : 종남산 운제사雲際寺 동쪽 초암草庵에서 3년간 수행 및 운제사 주석
643년 3월 16일 : 신라의 요청으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현재의 울산)로 귀국
민지의 자장전기에는, 자장이 당에서 불적순례를 떠났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의 해당 기록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창조사전기」 : 자장은 입당해서 명산을 유력하며 두루 성적聖蹟을 살폈다. … (이상은 원효가 찬한 바의 본전에 나와 있다.)
「제일조사전기」 : 두루 천자의 영토를 다니며, 선지식들을 참례하였다. (그러한) 연후에 비로소 오대五坮에 들어갔다. … (이상은 원효가 찬한 바의 본전에 나와 있다.)
이와 같은 불적순례 기록과 연관되어, 바로 자장의 오대산행과 642년이라는 연도가 적시되어 있는 것이다. 민지의 기록은 두 가지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자장의 입당행적 속 공백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자장이 처음부터 오대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불적순례 과정 중 오대산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자장이 1년간 다양한 불적순례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친견이라는 종교 이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도선의 만 10년간의 불적순례와 오대산에 대한 언급의 영향을 시사받아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1년이라는 불적순례과정은 당나라의 영토를 상정해 보았을 때 전체를 순례할 수는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도선에게 오대산에 대한 내용을 사전에 들었다면 1년 안에도 오대산 참배가 가능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개창조사전기」의 동대에 대한 언급은, 돈황문서인 「오대산찬五臺山讚」의 주인공을 자장으로 비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대산찬」이라는 제목의 문헌군에는 “신라왕자新羅王子” 또는 “신라왕新羅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9종류의 문헌이 존재한다. 「오대산찬」은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연대가 일정하지 않지만, 이 중 일부는 현재 9C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서의 상호교감을 통한 완성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東臺 … 滔滔海水無邊畔。新羅王子泛舟來。不辭白骨離鄕遠。萬里將身禮五臺。佛子。
동대東臺
도도滔滔한 해수海水는 경계가 무변無邊인데,
신라왕자新羅王子는 배를 띄워 왔다네.
백골白骨이 (될 위험도) 사양辭讓하지 않은 채 고향을 멀리 여의고서,
만리萬里에 몸을 실어 오대五臺를 참배參禮하네.
불자佛子.
지금까지는 여기에서의 신라왕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신라시대 왕자나 왕족출신으로 입당이 확인되는 인물은, 송고승전에 원측圓測·지장地藏·무루無漏가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헌장·김능유·김장염·김의종·김흔·김윤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대산찬」에는 신라왕자가 배를 타고 와서 오대산에 참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의 상황에서는 삼국시대에 비해서 해로를 통할 필연성이 약해지며,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 오대산을 참례하는 것이 더 용이한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 왕족출신을 고려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자장에게는 「법상전」에 “수가산항해원조경사遂架山航海遠造京師”라는 기록이 있으며, 「제일조사전기」도 “서부대양명기고목西浮大洋命寄刳木”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자장은 당시 시대상황상 선박을 이용했던 것이다. 물론 자장은 신라에서 곧장 오대산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장안을 경유해서 오대산으로 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장의 행적과 관련해서 불일치의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대산찬」이 축약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과, 「오대산찬」이 강조하려는 것이 ‘신라왕자의 죽음을 불사하는 오대산 참배’라는 점에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외에 「오대산찬」과 관련해서는, 자장이 신라의 왕자가 아니라는 문제도 존재한다. 그런데 도선은 「자장전」에서 자장을 “본왕족本王族”이라 하였으며, 「법상전」에서는 “신라왕자김자장新羅王子金慈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자장이 당시 신라를 대표하는 진골귀족으로, 당 황실의 존숭을 받자 왕자라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자장이 종남산에서 수행한 종남산 안의 운제산雲際山에는, 현재까지도 ‘신라왕자대新羅王子臺’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자장이 운제사雲際寺 동쪽 초암에서 3년간 수행한 곳과 인접한 장소로 추정되는데, 이로 인하여 이 종남산의 신라왕자를 자장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오대산찬」의 신라왕자는 자장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실제로 「오대산찬」과 관련된 선행연구에서, 정병삼과 신동하는 모두 ‘신라왕자’를 자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론에는, 「오대산찬」이 제공하는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 여기에는 「오대산찬」에 등장하는 “동대東臺”라는 부분의 불일치가 존재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개창조사전기」에서 동대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면서, 이와 같은 추론이 보다 확실해지게 된 것이다.
자장의 오대산행이 보다 명확해진다면, 자장이 화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에는 재론의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본고의 주제는 자장의 화엄사상이 아니라, 자장과 화엄의 관계문제이기 때문이다.
4. 「개창조사전기」에서 확인되는 자장의 행적
(장안과 성적聖蹟을 참례한 연후인 642년에 오대산에 들어갔다.) 동대에서 일좌一坐하여 30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꿈에 일승一僧이 나타나 말하기를, “불법을 깨닫고자 한다면 마땅히 북대에서 문수를 면견面見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조사가 이에 가서 북대를 살피니, 과연 문수상이 있었는데 (이는) 제석(천)이 건립한 것이었다. 조사가 상 앞으로 나아가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고, 정진하기를 10일을 하였다.
(그러자) 꿈에 그 문수상이 나타나 정수리를 만지면서 범어로 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주었다. “鉢羅佉遮那, 嚩哩哆伽那, 曩伽休舍喃, 哆哩盧舍那.” 조사가 게송을 받고서 깨어나 밤이 마치도록 외우다 날이 밝았다. 명일 새벽에 홀연히 범승梵僧이 와서 말하기를,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문수상이 범어로 된 게송을 주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그것이 심히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범승이 그것을 해석해 주기를, “일체법一切法을 요지了知코자 한다면, 자성自性은 (그저) 무소유無所有라네.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이해한다면, 곧장 (일체처一切處에서) 보사나盧舍那를 보리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불법을 구하고자 함에 이 게송 (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 비라금점가사 1령·백옥발우 1좌·주패금엽경 5첩·전신사리 100매·불정골·불지절골佛指節骨 등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들은 본사석가의 신물이니, 가히 삼가서 호지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이상은 원효가 찬술한 본전에 나와 있다.)
“뒤에 마땅히 경을 태백산 갈반처에서 볼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곧 (범승은) 사라졌다. 조사가 여기에서 범승이 곧 문수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추모함을 그칠 수 없어 이에 대화지로 갔다. 지변池邊에 정사와 석탑이 있었는데, 지룡池龍이 창건한 것이다. 조사가 탑 앞에 앉아 있으니, 어떤 노인이 못으로부터 솟아나왔다. … (이상은 원효가 찬술한 기記에 나와 있다.)
5. 중국오대산의 성적聖蹟에 대한 당나라의 조사
자장의 입당시기로부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662(龍朔 2)년에, 황제의 칙명으로 오대산의 이적을 조사(檢行聖迹)하는 칙사가 파견된다. 이는 702(長安 2)년에도 한 차례 더 이루어진다. 이후 불공(705∼774)과 징관(738∼839) 때가 되면, 중국오대산 불교는 만개滿開하게 된다. 오대산 중대(현 남대)에 국가적인 역량이 결집된 금각삿金閣寺가 낙성되는 것은 767(大曆 2)년이다. 이때 불공이 이 금각사를 위임받으면서, 오대산은 장안과 낙양의 2도二都에서 발전한 교학불교에 필적하는 신앙적인의 최고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불교의 역량에 의해, 자장의 위상이 중국오대산 불교로 들어가 굳건한 자리매김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부록: 황제와 붓다가 동일시되는 강북불교와 운강석굴
① 북위의 등장과 강북불교의 새로운 조짐
중국의 5호16국시대를 마감하면서 강북의 폐자가 되는 것은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건국한 북위(386∼534)이다. 북위는 강북의 통일기반을 마련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와 마찰이 빚어지게 된다. 그 이전의 강북불교는 5호16국시대라는 분열된 여러 왕조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이들 왕조들이 자체 존립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불교의 지지를 얻어야할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위는 강북의 단일왕조이며, 이는 불교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황제는 곧 현재의 붓다이다
북위의 태조인 도무제는 승려를 통솔하고 총괄하는 도인통으로 396년 승려 법과를 임명한다. 도인통이란 도인의 총괄자라는 의미로 여기에서의 도인이란 곧 승려를 의미한다. 이는 이후에는 사문통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강북은 문화적으로 집단적이며 정치적인 경향이 강하다. 법과가 도인통으로 있었던 기간은 396~398년인데 이 기간에 『위서』 권114 「석노지」는 법과가 했다는 매우 놀라운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태조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이니, 황제는 곧 현재의 붓다이다. 그러므로 사문은 마땅히 예를 다하여야 한다”라는 것. 또 “사람들에게 도를 넓히는 자는 군주이다. 나는 황제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붓다에게 절을 할 뿐이다”라는 것이다. 조금 늦은 시기에 강남에서는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즉 강북의 불교는 강남과 같은 주체적인 교단운영을 포기하고 정권에 예속되어 보호받으려는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강북불교의 흐름이며 이것은 결국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면 중국불교는 완전히 국가적인 예속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에 이르면 ‘금생에 출가하는 것은 다음 생에 유교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짓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가 된다.
③ 태무제의 불교말살과 중국불교의 교훈
법과의 정치권력 속에서의 안정이라는 태도는 제2대 군주인 태종 때까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강북의 통일을 완수하는 제3대 군주인 무제 때가 되면 전혀 예상 밖의 다른 결과를 빚게 된다. 그것은 바로 중국불교 최초의 폐불사건이다. 폐불이란 국가권력에 의해서 불교가 강제로 파괴되는 것으로, 중국불교에는 이것을 시작으로 총 4차례에 걸친 폐불이 존재한다. 이를 3무1종의 법난이라고 한다. 3무1종이란 세 명의 무자든 군주와 한 명의 종자든 군주에 의한 폐불이라는 뜻이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북위의 태무제의 폐불(446~452)·북주 무제의 폐불(574~579)·당 무종의 폐불(842~846)·후주 세종의 폐불(955~958)을 의미한다.
태무제의 폐불은 오두미도를 개량하여 신천사도를 개창한 도사 조귀진과 유교의 재상이었던 최호의 건의에 의한 것이다. 태무제는 444년 스스로 도교황제를 칭하면서 도교를 국교화하게 된다. 이후 최호의 주청에 의해 446년 폐불이 단행되는데, 그 방법이 ‘모든 사찰과 불상 및 불화를 파괴하고 승려들을 가리지 말고 묻어 죽이라는 것’으로 매우 잔인했다. 폐불의 방법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에 구겸지와 태자까지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태무제의 폐불은 도교를 신봉한 때문이다. 즉 종교의 차이에 따른 무자비한 종교탄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북위의 내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당시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는 점차 한족문화를 수용해서 한화되고 있었는데, 이를 선비족 중에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한족이었던 최호는 외래문화인 불교가 한화를 반대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태무제의 폐불에는 황제의 종교적인 요소와 한족과 선비족 간의 갈등이라는 민족적인 측면이 이중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태무제의 폐불은 448년 구겸지가 사망하고, 450년 최호가 탁발씨의 황족 조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표면화되면서 최호의 일족 128명이 주살되는 것을 통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태무제 역시 452년 환관인 종회에게 피살되면서 끝이나고 만다. 태무제를 이은 문성제는 452년 즉위한 즉시 폐불을 중지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국가적인 지원하에 불교를 믿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의한 잔혹한 참화는, 중국불교에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정치권력과 반목하면 안된다는 점을 각인하게 된다.
④ 담요의 운강석굴 개착과 강북불교의 자세
태무제의 폐불 이후 문성제의 불교지원은 강북의 불교교단이 국가구조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강북의 불교교단 체제는 국가의 조직에 따른 관리하에 임명되는 별정직 관료제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문성제(재위 452~465)의 집권 후반기인 460~464년 사이에 사문통이 되는 담요이다. 『위서』 권114 「석노지」에 따르면, 담요는 460년 수도인 평성에서 15㎞ 정도 떨어진 운강에 문성제 이전에 있었던 북위의 다섯 황제들을 불상으로 재현한, 석가불·미륵불·아미타불·약사불·비로자나불의 오대불五大佛을 조성하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것이 후일의 담요5굴로 현재의 대동에 있는 운강석의 시작이다. 이는 담요가 불교와 정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석굴의 개착은 태무제의 폐불 이후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불상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인식한 결과이다. 담요5굴은 현재 운강석굴의 제16~20굴에 해당한다. 석굴에 모셔진 본존불의 크기는 제16굴이 입상으로 13.5m, 제17굴이 의자에 앉은 것 같은 교각의 미륵상으로 16.25m, 제18굴이 입상으로 16.38m, 제19굴이 앉아 있는 좌불로 16.48m, 제20굴 역시 좌불로 13.46m가 된다. 현재 불상의 뚜렷한 명칭이나 다섯 황제와의 연결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담요가 거대한 불상을 만들면서 법과의 ‘황제는 현세의 붓다’라는 주장을 사실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운강석굴은 귀족들에 의한 개착이 가속화되는데, 현재 약 1㎞에 걸친 252개 석굴에 51,000여기의 불상이 확인된다. 또 이러한 운강석굴의 개착은 이후 북위의 7대 군주인 孝文帝가 493년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석굴의 개착으로 연결된다. 용문석굴의 개착은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현재 약 2300개의 석굴과 14만 2천여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담요의 방식은 북위의 불교확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로 인하여 477년의 불교조사에서는 수도인 평성에 100곳의 사찰과 2천명의 승려가 존재했으며, 전국적으로는 6478곳의 사찰과 77258명의 승려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승단은 국가예속은 불교의 확대와는 무관하게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겠다.
첫댓글 참 좋은 행사군요. 35기도 많이 참여하도록 홍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월정사의 누가 이 건의 업무를 보는지 몰라서 일광여행사에 여권사본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