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천 년의 저력(底力) 1 - 소림사(少林寺) 제자(弟子)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계(殺戒)를 어기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소림사(少林寺)는 천(千) 년(年) 내내 군림(君臨)하고 있는 것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 가을은 어김없이 모든 산야를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풍으로 벌겋게 채색하고 있었다. 어느 새 가을이 세상을 정복(征服)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 그 계곡을 구비쳐 흐르는 계곡수의 청량함에서도 가을의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오악의 하나인 중악 숭산(嵩山). 태실봉, 소실봉, 준극봉으로 이어지는 숭산 역시 화려하게 채색되는 단풍으로 인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숭산의 화려함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곡이나,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오른 절정봉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천여 년 간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하나의 위대한 장소로 인해 이룩된 것이다. 대소림사(大少林寺). 누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특히 한 자루 장검을 들고 중원천하를 질타하는 무림인들이라면, 소림이야말로 그들의 영원한 성지가 아니겠는가? 2 대소림사. 달마조사 이후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여 그 위대성을 수없이 입증시켜 왔던 곳이다. 강호가 사마외도에 의해 유린될 위험에 처했던 그 수많았던 순간 탕마승(蕩魔僧)들은 불호를 외우며 군마(群魔)들을 소탕했고, 강호무사들의 무수한 분쟁도 소림 승려들의 중재로 얼마나 많이 화기애애하게 해결되었던가? 소림은 중원무예의 본산이다. 강호백도의 제반무공이 소림의 무공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 벌근세수경(伐筋洗髓經), 소림(少林) 칠십이(七十二) 종(種) 절기(絶技)……. 소림 장경각에 보관된 무공은 무수하다. 소림의 위대한 무승들은 입적하기 전, 자신의 심득을 적어 장경각의 공간을 메운다. 그 밖의 무림의 절정고수들이 강호에서 은거할 때 소림에 기증한 무수한 무공비급들이 지천으로 깔린 곳이다. 소림의 장경각에 보관된 비급 중 하나만 익혀도 당장에 무림에서 일류고수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전통을 자랑하던 소림이 갑자기 잠잠해져 버렸다. 날마다 줄은 이어 산문을 드나들던 향화객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였으며, 강호상에 군마들이 날뛰어도 소림은 탕마승을 보내지 않았다. - 소림은 잠자는 종이 호랑이였다. - 소림의 전통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강호상의 의협들은 소림의 수수방관한 태도에 벌써 그 존경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또한 몇몇 뜻 있는 강호은사(江湖隱士)들은 소림의 무관심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소림은 과연 종이 호랑이였는가? 아니면 소림은 정통을 상실한 일개 평범한 사찰로 변해 버렸단 말인가? 3 "소림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 소림은 깨야 한다." 소림으로 통하는 잘 닦여진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빛이 바랜 오래된 장삼을 걸친 젊은이의 얼굴은 죽립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저벅- 저벅-! 죽립의 젊은이는 일정한 보폭으로 천천히 산길을 걸어 올랐다. "누군가 소림을 다시 깨워야만 한다." 죽립 아래로 정광이 이글거린다. 그의 등 뒤에는 헝겊으로 둘둘 말은 검이 메어져 있고. 펄럭-! 간간이 산들바람이 일렁이면 빈 소매 하나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젊은이는 오른팔이 없는 외팔이였다. "소림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마군맹에게 점령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다. 거기에는 어떤 흑막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젊은이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죽립 밑으로 보이는 젊은이의 얼굴은 타고난 영준함에다, 세월이 안겨 준 강인한 기상을 더하여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창궁비연 철무정. 당세를 움직이는 풍운아 철무정이 드디어 소림에 온 것이다. 드디어… 그가……! 데엥- 데에에엥-! 절곡을 타고 은은한 종 소리가 퍼져 울린다. 데에에엥-! 묵직한 종 소리는 가을의 단풍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울리고 있었다. "후후후……!" 종 소리가 들리며 철무정의 굳은 얼굴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대범천종(大梵天鐘)! 석가세존이 아수라를 물리칠 때 울렸다는 대범종이 아니던가? 이 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소림의 혼(魂)이 여전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무정의 고개가 끄덕이며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후훗… 역시 소림은 마군맹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묵묵히 참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살계를 어기고 싶지 않아서겠지. 하나……." 철무정의 눈길이 순간 예리해지더니. "그들은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군맹의 악마들은 여태껏의 마도인들과 질적으로 틀린 자들이다. 그 자들은 가차없이 베어 버려야만 하는 진짜 악마들이다." 철무정은 더욱 마음을 굳히며 더욱 속도를 빨리했다. 스스스슷-! 일순 철무정의 모습이 한 줄기 연기로 화한 듯, 불타는 듯한 단풍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데에에에엥- 데에에에엥-! 백 리(百里) 밖까지 퍼져 나가는 대범천종. 과연 소림사는 건재한 것인가? 4 "흐음, 지겨운 소리." 종 소리가 울리면서 이맛살을 지푸리는 여인. 타는 듯한 붉은 홍장에 구련채대를 두른 홍의미녀 하나가 종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찌 그 늙은 중은 매시진마다 이 지겨운 종 소리를 낸단 말이냐?" 홍의미녀는 종 소리에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현법(玄法)이란 자가 저희들에게 내건 단 하나의 요구 사항이었다. 매시진마다 종을 울리는 것은 강호상에서 죽은 자들의 명복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홍의미녀 앞에 팔(八) 척(尺)의 거한이 공손한 자세로 응답을 한다. "죽은 자들의 명복을 위한다고!" 홍의미녀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려진다. "어리석은 자들! 자신의 사문(師門)도 변변히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원혼을 달래는 종이나 열심히 치고 있으니……." 홍의미녀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팔 척 거한이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띄운다. "속하는 현법이란 자가 어떤 흉계를 꾸미지 않나 해서 수하들을 시켜 살펴본 바, 아무런 조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승려들의 반응은……?" "모두들 현법의 지시에 순응하고 있었습니다." 팔 척 거한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한다. "철마신(鐵魔神),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방심이라니요?" 철마신이라 불린 팔 척 거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홍의미녀를 쳐다본다. "무림태자께서는 마군맹(魔軍盟)의 위업에 가장 큰 장애를 소림으로 보시고, 친히 나 혈잠화를 이 곳으로 파견하신 것이다. 그런데……." 홍의미녀는 바로 헌원자방의 호법인 혈잠화였다. 얼음꽃처럼 차가운 여인,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진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소림이 너무 순수히, 저항 없이 마군맹에 투항한 것이다." "그것은 더욱 잘된 일이 아닙니까? 제아무리 소림사라 할지라도 마군맹의 위력 앞에서는 대항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지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 약간의 저항이라도 있었다면 의심을 않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사찰을 너무 쉽게 포기했단 말이다." 혈잠화의 얼굴색이 잠시 어두워진다. "그거야 혈잠화 대호법께서 지휘하시는 사멸마전(死滅魔殿)의 무서움을 현법이 재빨리 알아차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철마신은 소림을 의심하는 혈잠화의 태도를 이상스럽게 여긴다. "아니다. 아무리 사멸마전이 마군맹의 정예고수들로 이루어졌다지만, 소림의 전통과 역사는 그보다 더욱 뛰어난 것이다." 혈잠화가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대호법께서는 너무 심려 마십시오.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무슨 특별한 사건이라도 일어나겠습니까?" "알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주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철마신은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물러선다. 혈잠화의 시선이 철마신의 뒤를 따른다.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한 탓일까? 철마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일천의 고수들로 운집된 사멸마전을 감히 누가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혈잠화의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내가 이렇게 골머리를 앓는 것은 그 망할 놈의 동천류 때문이다.' 혈잠화의 얼굴에서 살기가 피어 오른다. '동천류… 그처럼 지독한 독종은 처음이다. 멸망한 천겁만마전에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마군맹에 들어오기를 거절한단 말인가?' 혈잠화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진다. "흐음……!" 혈잠화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잠하던 혈잠화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그 자가 그래도 본맹에 들어오기를 거절한다면 가차없이 죽여 버리자.' 혈잠화의 두 눈에서 그녀의 결의를 나타내는 듯 섬광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5 소림사 경내(境內). 천여 년의 전통을 말해 주듯 고색창연한 무수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다. 웅장한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장경각(藏經閣), 계도원(戒導院), 미륵각(彌勒閣) 등등……. 많은 고옥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소림의 담장의 길이만 해도 십 리가 넘는다지 않는가? 평소라면 무수한 고루거각들을 헤치며 삼천을 헤아리는 승려들이 오고 가는 경내이지만 현재는 그러하지 않았다. 고승들이 염불을 외며 다니던 길목마다 백, 혈, 흑의의 흉악한 무사들이 병장기를 들고 설치고 있다. 그 많던 승려들은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은 모두 어디를 가고 무사들만이 소림사 내를 설치고 다니단 말인가? "가을 공기가 좋다. 하나, 무수한 낙엽을 쓸자니 골머리가 아프다." 현법(玄法). 나이 지긋한 노승으로 그 깊은 수양과 학식으로 만인의 숭앙을 받는 소림의 장문인이다. 이름 하나로도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 삼천의 소림제자를 깊고 넓은 불법의 세계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는 신분이다.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강호의 협사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만 하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에에엥- 데에에엥-! 대웅전이 마주 보이는 높은 종루 위에서 묵묵히 타종을 하는 노승, 사바세계의 무수한 업보를 종 소리 하나로 풀어 버리겠다는 듯이 열심히 타종을 하고 있는 노승이 있다. '업보로다, 업보!' 노승의 늙은 혜안에서는 지혜의 빛이 번쩍이고 있다. '아미타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빈승을 제발 겁(劫)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노승은 더욱 힘차게 타종을 하려고 팔을 휘젓는다. 그 때. "이제 그만 두시오." 한 줄기 선풍이 부는 듯 가벼운 바람 소리가 나는 순간, 철마신이 종루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열심히 종을 치는 것이오." 천마신이 비아냥거리며 노승의 타종을 방해한다. 노승은 조용히 합장을 하며. "아미타불… 빈승 현법은 이제 막 그만 둘 참이었소." 현법! 종을 치는 노승이 바로 소림의 장문인인 현법이란 말인가? 철마신은 현법이 그의 명에 순순히 응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핫핫핫… 현법, 당신 같은 자들만 있다면 무림을 정복하기가 얼마나 쉽겠소? 당신은 비록 머리를 깍은 중이지만 너무 똑똑하단 말이야." "……." "당신이 감히 혈잠화께서 지휘하시는 사멸마전에 대항을 하였다면, 아마도 소림이란 두 글자는 강호무림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아미타불……!" "그 지겨운 염불일랑 그만 읊으시오 하도 들어서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오." "아미타불……!" 여전히 아미타불이다. 현법은 철마신의 비꼬는 말투에도 시종일관 미소를 보인다. "후후후… 수양이 대단하시군. 나 같으면 죽더라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철마신은 현법의 공손한 태도에 눈꼬리를 치며 세운다. 이어. "어떻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소.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순한 양처럼 구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지 않겠소?" "아미타불……!" "빌어먹을! 또 그 아미타불이오?" 철마신은 현법의 무저항에 질린 표정이 된다. '도대체 이 늙은 중놈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철마신의 안광이 이글거리며 광염이 타오른다. 츠츠츳-! 강철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열기가 쏘아져 나오며 현법의 눈동자에 부딪친다. "아미타불……!" 현법은 계속 불호를 외우며 미소를 띄우고 있다. "크으으으……!" 이글거리던 철마신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무서운 늙은 중놈. 삼 갑자 내공이 살린 철안광염마공(鐵眼光焰魔功)을 주시하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다니…….' 철마신은 갑자기 현법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여 버리자.' 철마신은 살기를 돋우며 우수에 내공을 주입한다. 츠츠츠-! 철마신의 우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며 손목까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흑철파옥수(黑鐵破玉手). 마도무공 서열상 백 위 안에 든다는 전설적인 마공. 강철을 두부처럼 부수며 강옥을 유리처럼 부숴 버리는 전설적인 마공이다. "크으으으……!" 철마신의 우수가 서서히 현법의 머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검어진 철마신의 우수가 서서히 현법의 정수리로 향하며, 어느 순간에 현법의 정수리에 가볍게 올리어졌다. '내가 약간의 힘만 가한다면 이 중놈의 머리는 두부처럼 부서진다.' 철마신은 더욱 살기를 끌어올렸다. 빙긋! 현법은 오히려 웃었다. 현법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자비스러운 얼굴로 철마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철마신은 현법의 미소 띤 얼굴을 계속 노려보고만 있었다. '죽이자. 죽여야만이 이 께름칙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철마신이 최후의 일 푼의 힘을 더하려는 순간. "아미타불……!" 현법이 나직이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크으으……!" 철마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빌어먹을! 또 아미타불인가?" 철마신은 전신에 힘이 쭉 빠진 듯 우수를 힘없이 내린다. "현법, 아직까지는 너를 죽이라는 명이 없었다. 명이 떨어진다면 내 손으로 죽여 주겠다." 철마신이 재빨리 등을 돌린다. 스슷-! 몸을 가볍게 비트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현법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살계를 어기지 않아 다행이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내 손이 발출되었다.' 현법이 살며시 소매 속에 감추었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의 오른손이 어느 순간 녹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소림의 비전의 절기인 미륵심인공(彌勒心印功)을 운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다. 미륵심인공. 칠십이 종 절기 중 다섯 번째 안에 드는 것. 이백 년 간 터득한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소림제일의 파해신공이다. 그것을 십 성의 경지에 익히면 십 장 밖의 철석을 한순간 가루로 만들 수 있다. '아직까지 수양이 모자란단 말인가? 살계를 피하라고 모든 제자들에게 명하고 내 스스로 그것을 깨려 하다니…….' 현법은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현법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천기가 틀렸단 말인가? 살겁을 막을 수 있다는 천기가 있기에, 불전이 악마들에게 유린당해도 참고 보고만 있었거늘… 어이해 이 신성한 경내에서 악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단 말인가?' 현법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6 송림(松林) 근처. 소림 경내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지라 평소에도 승려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송림 한가운데 세워진 석옥, 이 곳은 소림 승려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모아서 보관해 두는 곳이다. 얼마 전 이 곳에 한 사람이 들어왔고, 그 순간 일대에 천라지망이 설치되었다. 송림 일대에 검은 옷의 무사들이 장검을 든 채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천마백팔영진(天魔百八影陣). 하늘을 나는 새라도 그들의 감시망을 뚫을 수 없다. 건물 안, 얼마 전까지 잡동사니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말끔히 치워진 상태이다. 그 대신 한 사람이 들어왔고, 이제껏 차디찬 돌바닥에 누워 지내고 있다. 철삭으로 온몸을 결박당한 청년, 온몸은 상처 투성이이다. 혈사(血蛇)가 기어간 듯한 상처 자국, 엄청난 고문을 받았음을 쉽게 잠작케 한다. 아아, 동천류. 마도 천재라 불리던 그가 아니던가? 동천류는 마황 헌원사령이 죽은 후 천겁만마전의 부흥을 위해 뛰어다니다가 헌원자방에게 잡혔으며, 소림이 마군맹에 점령당할 때 이 곳으로 끌려온 처지이다. 지금 그를 쏘아보는 사요한 눈빛이 있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이 나풀거리며 싸늘한 음성이 흐른다. "동천류, 마맥(魔脈)은 원래 하나이다. 천겁만마전의 힘은 마황이 태자님의 것을 훔쳐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그것을 넘겨 준다 해도 너는 배신자가 아니다." "……." "네가 반역자들의 명단만 넘긴다면 태자께서는 너를 다시 천겁만마전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 동천류, 그는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는 마군맹에 잡히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가 입을 연 순간은 고통에 겨워 비명 소리를 냈을 때뿐이다. 표정이 너무도 싸늘하기에 얼음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여인, 혈잠화. 그녀의 눈빛에 일순 살기가 스쳐 지나간다. 동천류는 잔혹한 시선을 접하고도 눈빛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 할 말이 없소.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동천류, 그는 헌원사령의 후계자이다. 그는 절맥 체질을 타고나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처지이다. 마황은 그것을 항상 애석히 여겼으며, 그의 모든 것은 동천류에게로 전해졌다. 무너진 천겁만마전, 하나 그 저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어둠 깊숙이 모습을 감춘 중원마도계. 그것을 끌어낼 사람은 천하에 오직 하나, 가련한 신세로 전락한 동천류인 것이다. 마군맹은 그에게 온갖 협박과 갖은 회유를 했으나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혈잠화의 눈빛이 잔혹한 살광으로 타 들어간다.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태자께서는 널 살려 두라 하시나난 참을성이 없다." 그녀의 손끝이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비파혈수강(琵琶血手 ). 츠으읏-! 홍옥으로 빚은 듯 붉게 변한 손바닥이 떨쳐졌고, 그 순간 석벽에 칼로 도려 낸 듯한 자국이 만들어졌다. "내일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네 머리통이 저렇게 변할 것이다." "……." 동천류는 눈을 감았으며 혈잠화의 눈빛이 격랑을 만난 호수 물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헌칠한 키에 태산보다 당당한 기개를 흘리던 남자. 아아, 그의 이름이 철 농부라 했던가? '천하에 그 분만한 남자가 없다 여겼는데…….' 혈잠화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7 저벅- 저벅-! 일정한 보폭으로 철무정은 소림을 향해 걷고 있었다.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의 턱은 굳은 결의를 나타내듯 강인해 보였다. 대소림으로 뻗어 올라간 산길. 평상시 같으면 많은 향화객으로 붐빌 산길을 철무정 홀로 외롭게 걷고 있었다. "후후… 드디어 시작인가?" 철무정은 얼마 전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철무정은 모르는 척 소림사 정문을 향해 계속 걷는다. 스스슷-! 철무정의 뒤를 쫓아 무수한 인영들이 은잠을 하면서 뒤를 쫓고 있었다. "괴상한 놈이다. 무슨 목적으로 봉문한 소림사를 향해 간단 말인가?" "그냥 죽여 버립시다." "아니다. 전주께서 필요 없는 살생을 금하라 하셨다." 뒤를 쫓는 추적자들은 전음입밀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철무정 뒤를 밟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철무정은 계속 일정한 보폭으로 산문을 향해 걷고 있다. '계속 쫓아들 오거라. 잠시 후 너희들이 바라고 있던 진짜 악마의 축제가 벌어질 것이니…….' 철무정의 이목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 수준에 있었다. 허공 중에 은밀히 오고가는 전음은 그의 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철무정은 무슨 마음을 품고 묵묵히 소림으로 가는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철무정은 소림사의 웅장한 정문 앞에 다다랐다. '이럴 수가?' 철무정의 죽립 밑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소림사란 현판 대신에 사멸마전(死滅魔殿)이라는 붉은 글씨로 쓰여 있는 거대한 현판이었다. 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던 소림은 이미 현판마저 빼앗긴 비참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 철무정이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산산조각이 나서 한쪽 담벼락에 처박힌 현 소림의 현판이었다. 그리고 정문 앞에 길게 늘어선 흑의를 걸친 수많은 마도인들의 모습이었다. 또한 마도고수들 사이에서 두려운 듯 떨고 있는 어린 사미승 한 명이었다. "멈춰라." 정문 앞에 늘어선 무사 중 눈이 날카롭게 째진 자가 호통을 친다. 잔검귀(殘劍鬼) 마충(馬忠). 관서무림의 마도계에서는 제법 명성을 높였던 자다. - 전 마도인들은 마군맹으로 모여라. 마도인의 힘을 하나로 뭉쳐 백도무림을 타도하고 마군맹 천하를 이룩하자. 잔검귀 마충은 헌원자방이 출도하자마자 신속하게 맹에 가입을 하였다. 백도무림인에게 받은 수모를 마군맹에 가입하여 풀어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었다. 잔검귀 마충은 사멸마전의 하급무사로 배속을 받고 있던 처지에, 이제 소림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잔검귀 마충은 따분하게 산문을 지키고 있던 차에 철무정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자 한 번 몸을 풀 작정을 하고 있었다. "네놈은 이 곳이 어딘 줄 알고 왔느냐?" 잔검귀의 찢어진 두 눈이 더욱 찢어진다. "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소림사가 아니오?" 철무정이 시치미를 떼며 더욱 다가선다. 잔검귀는 재미있다는 듯이 철무정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심심하던 차에 멍청한 녀석이 재미 상대로 나타났군.' 잔검귀는 더욱 철무정이 다가서기를기다리고 있었다. 산문을 지키던 나머지 부하도 흥미 있다는 눈초리로 철무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소림사 내에서 엄청난 마의 기운이 나오고 있다.' 철무정은 서서히 다가서는 가운데 소림 전체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심안(心眼)! 그 경지는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의 경지를 수십 배 능가하는 것이었다. '현법은 살계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다. 분명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잠시 져 주고 있는 것이다.' 철무정은 소림의 현 상황이 아주 미묘한 대립 관계에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 지는 것. 현법은 살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동안 소림을 사멸마전에게 빌려 준 것이리라. '그러나 이번만은 현법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들은 심성을 악마에게 팔아 먹은 자들이다. 이 자들은 소림이 굴러온 떡이라 여기고, 아주 서서히 소림의 혼을 갉아먹을 것이다.' 철무정은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훗훗… 현법, 당신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내가 도와 주겠소.' 철무정은 어느 새 소림을 깨울 방법을 결정하고 있었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림의 속가제자라 할 수 있소." 철무정이 허리를 쭈욱 펴며 당당하게 외치자. "크ㅋ… 네놈이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키키… 소림의 현판이 떨어진 지 언제인데 속가제자라고 떠드느냐?" 무사들이 철무정을 비웃는다. "소림이 망하다니?" 철무정이 크게 놀란 듯하며. "여기 이렇게 훌륭한 사찰이 있고, 소림의 속가제자인 이 몸이 있고, 그리고……." 철무정은 턱 끝으로 떨고 있는 사미승을 가리킨다. "저기 나이는 어리지만 버젓한 승려가 있는데, 어찌 소림이 없어졌다 말할 수 있소?" "크크크… 녀석, 팔이 하나 없는 대신 주둥이만 커졌구나." "아니, 내 말이 틀리단 말이오?" 철무정은 사미승에게 다가섰다. 무사들은 철무정의 다음 행동이 궁금한 듯 그의 행동을 말리지 않는다. "어디 소화상이 한 마디 하시오. 소림이 망한 것이오, 아니면 그대로 있는 것이오?" "소승은……." 사미승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어디 말해 보시오." "소림은… 소림은… 건재합니다. 다만……." 사미승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간신히 연다. "하하하… 모두들 이 소화상의 말을 들었소? 소림은 건재하다지 않소?" 무사들은 사미승의 태도에 모두 화가 나 있다. "저런 괘씸한 놈 같으니!" "죽이지 않고 살려 줬더니……." 사미승은 무사들이 흉폭하게 변하자 덜덜 떨기 시작한다. "어서 이 곳에서 도망쳐요. 저 자들은 소림을 마의 소굴로 만든 악마들입니다." 사미승이 철무정의 옷을 잡아당긴다. "어서요!" "소화상. 내가 무엇이 두려워 도망친단 말이오? 나는 소림의 속가제자이거늘……." 철무정의 능청에 사미승의 얼굴이 퍼렇게 질린다. 그러나 철무정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천년마동에서 악마의 기연을 얻을 때 철무정은 소림의 십오대 장문이었던 무아성승(無我聖僧)의 진전도 함께 얻지 않았던가? 무아성승은 유서에서 천수(天修)라는 법명까지 하사한 바 있었다. "소화상. 이 몸은 비록 소림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직껏 한 번도 사내에 들어가 보지 않았소. 모처럼 이 곳까지 왔으니, 소화상이 나를 안내하여 경내를 구경시켜 주시오." 철무정이 사미승의 등을 밀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공포에 떨고 있던 사미승의 얼굴이 아예 퍼렇게 질려 버린다. "시… 시주, 저기 있는 자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자들이오. 어서 도망……." "하하하…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한단 말이오?" 철무정이 계속 사미승의 등을 떠밀 때. "이상한 놈이다." "무언가 흑심을 품고 온 놈이다." "예사 놈이 아니다. 어서 저 놈을 잡아라." 무사들은 철무정의 태도에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다. "일단 놈을 포위하자." 차창-! 무사들은 일제히 장검을 빼어 들며 몸을 날렸다. 스스슷- 스스슷-! 무사들은 한순간에 철무정과 사미승을 에워쌌다. "으으, 시주! 이미 달아나기란 틀렸소. 어서 저 자들의 손에 순순히 잡히시오." 사미승은 철무정이 행여 다칠까 항복을 권했다. "하하핫… 소화상, 너무 걱정을 말게. 내가 배운 소림의 무공은 무적의 신공이 아닌가?" "그렇지만……." 사미승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의 두 눈 속에는 철무정의 죽립 속 얼굴이 담겨 있었다. '무서운 얼굴이다.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절대 실언을 하지 않는다.' 사미승은 순간적으로 철무정이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 소화상!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철무정은 사미승의 등을 떠밀었다. 비틀-! 사미승이 휘청이며 앞으로 밀려갔다. 그리고 철무정이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섯거라." 철무정의 앞을 막고 있던 잔검귀 마충이 검을 내뻗었다. 슈욱-! 예리한 검기가 철무정의 머리를 향해 사납게 다가섰다. "어이쿠!" 철무정이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며 사미승을 한 팔로 밀어냈다. 순간, 철무정의 한쪽 다리가 허공으로 가볍게 뻗으며 잔검귀의 복부를 강타했다. 펑-! 잔검귀는 검을 휘두르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발길에 채여 뒤로 날아갔다. "크윽!" 잔검귀는 담벼락에 부딪치며 게거품을 내뿜고 혼절을 했다. "소림나한퇴(少林羅漢腿)라는 것이다." 철무정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보통 놈이 아니다." "무공을 숨기고 있는 절정고수가 틀림없다." "일제히 공격하자." 무사들은 분분히 몸을 날리며 철무정을 향해 삼엄한 검광을 뿌렸다. 휘이이익- 슉슉-! 철무정을 향해 다가오는 날카로운 검날! "이번에는 백보신권(百步神拳)이다." 철무정은 그 자리에 우뚝 서면서 좌수를 내뻗었다. 꽈르르르릉-! 장심에서 노도와도 같은 경력이 분출되더니 몸을 날려 덤비던 무사들은 추풍낙엽이 되어 사방으로 퉁겨 나갔다. 쾅-! 풀썩-! 무사들은 모조리 담벼락에 부딪치면서 뻗어 버렸다. "자, 어떻소? 이것이 바로 무적의 소림신공이 아니오?" "……." 사미승은 경악의 표정이 되어 입을 좌악 벌리고 말았다. 창궁비연 철무정, 그의 무공은 이미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 경지에 이른다면 초식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 소림 승려라면 누구든 익혀야 하는 기초적인 무공이 철무정의 손에서 전개되는 순간, 절정의 초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소림연환퇴법(少林連環腿法)-!" "복마권법(伏魔拳法)-!" "나한십팔장법(羅漢十八掌法)-!" 신명이 난 듯 춤을 추는 철무정, 철무정의 손과 발이 움직일 때마다 소림의 가장 초보적인 무공이 하나씩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흑의를 걸친 사멸마전의 무사들이 하나둘씩 허공 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이쿠!" "크응……!" 철무정의 정신없는 손짓 발짓에 소림을 점거하고 있던 마군맹의 무사들이 벌써 수십 명씩 나자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입이 벌어진 사미승은 이제는 눈까지 부릅뜨고 있었다. "자, 소화상. 어서 안내를 하게. 이번에는 대웅전을 가 보세!" 철무정은 혼이 완전히 달아난 소화상을 이끌며 걸음을 재촉한다. "아… 예!" 소화상은 이제 철무정을 신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던 천공(天空) 스님보다도 더욱 소림무공이 뛰어나셔.' 사미승은 철무정을 앞서 나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곤 한다. '진짜 소림의 제자일까?' 사미승은 아직도 철무정의 말이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무정은 그런 사미승을 보고 환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소화상.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틀림없는 소림의 속가제자이네." "하하하……!" 사미승도 신바람이 나는 듯 따라 웃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