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십계명의 응용 : 자선, 기도, 단식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의 의로움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예수로부터 위선자로 책망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의(義)"를 인정받았다.
이는 구약의 율법 자체가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규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十誡命, Decalogue)이 건재(健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위해 선포하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나은 의로움이 십계명의 기본 정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이라는 단어가 모세오경에 들어 있지는 않다. 이 단어는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경(五經)에는 "증거판"(출애 31,18; 32,15; 신명 4,15), "훈계와 계명의 돌판"(탈출 24,12; 25,16),
또는 "두 돌판"(신명 5,22)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로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약에 주어진
십계명(탈출 20,2-17; 신명 5,6-21)의 참 뜻을 하나하나 새겨들어야 한다.
십계명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는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을 의미하며,
인간의 응답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며,
이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품위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다.
십계명의 참된 의미에 대한 해설은 도서출판 "일과 놀이"가 펴낸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116-119 페이지 참조)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십계명 전부를 열거하여 각각의 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십계명에 대한 충분한 풀이로 간주된다.
마태오복음 5장의 여섯 개 대당명제는
우선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4일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는
산상설교의 둘째 부분(마태 6장)이 봉독된다. 마태오복음 6장은
대당명제와 같은 비중의 율법에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지녀야할 성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의 응용"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신앙인의 성덕으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신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조그만 선행을 하고도 크게 불려서 나팔을 불며 떠벌리고,
남이 몰라주면 오히려 섭섭해하는 우리들이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과 신뢰심과 겸손의 마음이다.
신앙인은 이웃에 대한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게 되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얻게 되며,
음식과 육정을 절제하는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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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 버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행동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습관으로 이어져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그 행동을 하게 되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좋은 행동을 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 가는 길에 묵주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집 대문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묵주를 꺼내 듭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설거지할 그릇이 눈에 보이면 고무장갑에 손이 갑니다.
이외에도 어려운 이를 보면 도와주는 일, 슬픔에 잠겨 있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 외로운 이들에게 찾아가는 일 등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왼손도 모르게 하는 오른손의 일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이 베푸는 자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실제 우리 사회에는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구 어느 시장의 청년 상인들은 의료진에게 200인분의 도시락과 커피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소외 계층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9년째 선행을 이어 오는 익명의 기부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산골짜기 은둔 장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는 봉쇄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다짐하고 몸에 배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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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사바 신부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선 당시에 신앙의 실천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던 자선,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덕목들도 올바른 정신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자신에게 맡겨 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노력과 희생과 모든 것이 투자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재산이 하느님께서 맡겨 두신 것이라는 의미는, 나의 노력 위에
하느님의 허락이 더해져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재산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자기 재산을 쓸 때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주시하십니다. 그러고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사랑을 베풀 때는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실천해야
하느님을 위한 선행이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나 단식을 할 때의 마음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거나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은밀한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며, 그렇게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우리의 자선이나 기도가 마치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위선처럼 여겨져서 위축되거나,
하려던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 주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빌며,
또 용감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됩시다.
성 베네딕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
참조 : 굿뉴스 매일미사,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