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주요인물
① 학술
지조와 변절의 상징 - 근대사의 두 거인
▲ 신채호 ▲ 최남선
☞ 신채호(1880-1936) : 대한제국 시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민족주의계몽사상 고취. 1910년 신민회 동지들과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등을 출간하여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 확립
☞ 최남선(1890-1957) :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독립선언문> 기초.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였으나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의원을 역임하면서 한국사 왜곡. 1941년부터 각종 친일단체의 주요 임원으로 강연 및 좌담회에서 징병·징용, 헌금헌납 선전
② 문학
▲ 이육사 ▲ 서정주
☞ 이육사(1904~1944) : 본명 이원록. 호 육사는 수인번호. 일제강점기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1943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
☞ 서정주(1915~2000) : 창씨명 다츠시로 시즈오. 친일문학지 편집 및 <오장 마쓰이 송가> 등 다수의 친일시 발표
③ 음악
▲정율성 ▲ 현제명
☞ 정율성(1918-1976) :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함. 그가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됨
☞ 현제명(1902-1960) : 1930년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 결성하여 초대 이사장 역임.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 친일단체에 가담해 친일활동
④ 교육
▲차미리사 ▲ 김활란
☞ 차미리사(1879-1955) :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 창립. 1921년 근화여학교 설립 및 교장 취임. 1940년 일제에 의해 교장직 박탈
☞ 김활란(1899-1970) : 창씨면 아마기 카쓰란.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하여 일제의 황민화교육정책에 철저히 순응함
⑤ 언론
▲ 안재홍 ▲ 방응모
☞ 안재홍(1891-1965) : 1919년 삼일운동 만세시위 주도. 1924년~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 사장 역임
☞ 방응모(1890-?) : 1933년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 인수. 사장 취임. 같은 해 일제에 기관총 헌납. 수많은 시국강연회에서 친일연설
민족주의자의 비극과 영웅주의자의 타락
조명희(1894~1938)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한인촌 교사로 일하면서 연해주 한인신문과 잡지 등에 시와 기고문을 발표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지부 간부로 일하는 한편,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대하소설《만주 빨치산》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집필 중이던 1938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가 실시되는 와중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뒤에 누명이 벗겨져 복권되었고 ‘러시아 한인문학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김동인(1900~1951)
1939년 성전종군작가의 일원으로 중국 각지를 돌며 일본군을 위문했고, 이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보국회 등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했다. 그의 친일소설로는 1941년 매일신보에 기고한〈백마강〉과 1944년 《조광》에 연재한〈성암(星巖)의 길〉이 있다.〈백마강〉은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적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 쓴 소설이고,〈성암의 길〉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시인이자 양이근왕론자(攘夷勤王論者)였던 하리가와 센간(梁川星巖)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황이데올로기를 선전하려는 작품이었다. 이외에도〈총동원태세로〉〈반도민중의 황민화〉〈일장기 물결〉 등 친일 수필을 다수 발표하여 문필보국(文筆報國)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문인이다.
광야의 지사와 해바라기 시인
이육사(1904~1944)
1933년 귀국하여〈황혼〉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고,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청포도〉〈절정〉〈광야〉등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국내에서 지하항일운동을 벌이던 중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북경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정주(1915~2000)
해방 후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두루 영합하였고 문단 원로로 행세하면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온갖 감투를 썼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5·16민족상, 자유문학상, 금관문화훈장 등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받는 등 양지에서만 온갖 영화를 누린 자칭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이다.
명(明)과 암(暗) - 두 얼굴의 조선일보
안재홍(1891~1965)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 사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좌우합작의 민족운동조직인 신간회 간사를 맡아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벌였다. 문화운동에도 관심이 깊어 1929년부터 조선일보에 ‘한글맞춤법강좌’를 연재하는 등 문자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조선일보 퇴사 후 칩거하면서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나라 상고사를 새롭게 정리한《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등을 저술하였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과 관련하여 다시 수감되었다. 해방 후에 ‘신민족주의론’에 입각한 좌우통합을 역설하였고 김구·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수립운동에 앞장섰다.
방응모(1890~?)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와 유착, 협력하면서 조선일보의 사세확장에 힘썼다. 그해 9월 제2차 전선순회시국강연반에 가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임전보국단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 간부를 지냈고 수많은 시국강연회에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였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 월간지《조광》을 확대 개편하여 1944년 12월까지 발행하면서,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내선일체에 대한 이념〉〈대동아전과 우리의 각오〉등 친일논설을 게재,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였다.
길을 달리한 은막의 동지
이경손(1905∼1978)
1931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정기탁 등과 함께 ‘상해파’ 영화인의 일원으로〈이원염사(梨園艶史)〉와〈양자강〉등을 감독했다.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로 인해 쫓기는 몸이 되어 태국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전창근(1908∼1975)
1938년 귀국하여 자신이 각본·감독·주연을 맡은〈복지만리(福地萬里)〉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복된 땅을 일궈 풍요한 생활을 누린다는 내용으로 일제의 만주이주정책을 홍보하는 선전영화다. 이후 영화활동을 접고 친일연극에 매진하여 〈빙화(氷花)〉〈밤마다 돋는 별〉을 연출하여 국민연극 경연대회에 출품하였다.
해방 후〈고종황제와 안중근〉〈3·1독립운동〉〈아! 백범 김구 선생〉등 항일영화를 발표하면서 재빨리 변신하였고 1960년 제10회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영화의 영예와 치욕 - 약과 독이 된 빛나는 재능
윤봉춘(1902∼1975)
1930년〈도적놈〉의 감독으로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고,〈큰 무덤〉〈두만강을 넘어서〉등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북돋우는 영화를 발표했다. 1938년 8월 일제가 친일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를 만들어 친일영화만을 제작하게 하자 영화인 등록을 거부하고 퇴계원 산곡리로 낙향하여 산곡학원을 세우고 계몽교육운동을 펼쳤다.
해방 후 연출활동을 다시 시작하여〈윤봉길의사〉〈3·1혁명기〉〈유관순〉등 일제하 독립운동을 형상화한 ‘광복영화’를 다수 제작했고, 1970년 국가문화보상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최인규(1911∼?)
1941년 조선의 부랑아들을 교육시켜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든다는〈집없는 천사들〉을 감독하였고 이후〈태양의 아이들〉〈가미가제(神風)의 아이들〉〈사랑과 맹세〉등 다수의 어용국책영화를 제작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해방 후 발빠르게 변신하여〈자유만세〉〈독립전야〉를 발표하는 등 ‘광복영화’ 붐을 조성하였다.
지조와 변절의 상징 - 근대사의 두 거인
신채호(1880∼1936)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명문〈조선혁명선언〉을 집필, 일제에 항거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1920년대 꾸준히 진행한 민족사 연구의 결실을 묶어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를 발표했다.
1928년 북경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인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였고, 폭탄테러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최남선(1890~1957)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일제의 역사왜곡과 식민사학 수립에 협력하였으며 1938년부터 2년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친일 고위관리를 양성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시작으로 임전대책협의회 등 각종 친일단체의 주요 임원으로 참여했다.
징병·징용 동원과 국방헌금 헌납을 선전하는 시국강연과 좌담회에 단골 강사로 참석하였고〈보람 있게 죽자〉등 많은 친일논설을 발표하였다. 하늘이 준 재능을 민족 반역의 길에 내다버린 안타까운 지식인이다.
민족을 외친 교육자의 양심을 묻는다
차미리사(1879~1955)
1934년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는데 이후 총독부가 ‘근화’라는 이름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못쓰게 하자, 덕성여자실업학교로 변경하였다. 1940년 8월 황민화교육 실시를 거부해 교장직에서 쫓겨나고 친일파 송금선이 새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해방 후 김구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108인 성명서 발표에 참가하여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으며 줄곧 여성교육사업에 힘썼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활란(1899~1970)
1937년 애국금차회 간사를 필두로,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 조선연합회 위원장, 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등 각종 친일단체 간부와 시국강연 연사로 활동하였다. 1939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제의 황민화교육정책에 철저히 순응하였으며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 강연과 징병제 실시 환영 담화 발표,〈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기고 등 일본군국주의체제를 고무 찬양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해방 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섰고 공보처장을 지냈으며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비롯하여 전후 수십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그 공로로 1970년 1등 수교훈장을 받았다.
신과 민족 앞에 선 종교인의 선택
신석구(1875∼1950)
1919년 2월 중순, 서울 수표교회 목사로 재임 중 삼일의거 계획을 전해듣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7년 감리교단이 신사참배 결정을 내렸지만 이에 불복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1945년에는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거부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
해방후 북한에 체류하며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7년 기독교민회당 비밀결사사건으로 피검되어 1950년 10월 총살당하였다.
정춘수(1875~1951)
1936년 9월 6대 조선총독 우가키가 추진한 심전(心田)개발운동 강연회 연사로 참석하면서부터 친일로 돌아서서 감리교단의 황민화에 앞장섰다. 기독교조선감리교단 회장 등 친일교단의 대표를 맡았고 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등 시국단체의 요직을 지냈다. 1943년 10월에는 서울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황도문화관장에 취임한 뒤 신도들에게 황도문화를 설교하고, 그들을 남산의 조선신궁으로 끌고 가 참배케 하였다.
1996년 그의 친일행각이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청주지역시민단체가 삼일공원에 서있던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저항과 굴종으로 갈라진 성서의 가르침
김교신(1901∼1945)
1942년 3월호에 그가 쓴〈조와(弔蛙)〉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성서조선》이 강제폐간당하고 그를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등이 검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이 공장에 입사하여 교육·후생·주택 등의 문제를 보살펴주다가, 1945년 4월 45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최태용(1897∼1950)
1941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대장상 가야(賀屋興宣) 등 일본 고위관리들에게 ‘조선자치정부론’을 역설하였다. 1942년 10월 친일잡지《동양지광》에 기고한〈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神)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교역자들과 글라이더 모형비행기 공장을 세워 군수공장 인가를 받아 교인들을 사역시키기도 하였다.
해방 후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걸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했으며 1948년 10월 ‘농민회’(현재의 농협) 부회장에 취임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순교와 배교 - 진정한 믿음과 위선자의 신앙
주기철(1897∼1944)
그 후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시켰지만 이에 불복하여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거절하였고, 1939년 의성농우회사건에 관계되어 7개월간 구금되었다. 출옥 후 산정현교회로 돌아와서 ‘5가지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고 설교하여 이튿날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자 평양 임시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할 것을 결의하고 1940년 3월 산정현교회당도 폐쇄하고 말았다. 이어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10년 형을 언도받았고 1944년 4월, 복역 중 순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길창(1892∼1977)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는데 이때 그는 총회 부회장을 맡아 각 노회 대표에게 가결을 종용하였고 총회가 끝난 후 각 노회장을 이끌고 평양신사를 참배하였다. 그해 12월 그를 비롯한 기독교계 지도자 5명이 일본에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야스쿠니(靖國)신궁 등을 참배했다. 이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장 등을 지내면서 경남 장로교계의 황민화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친일 혐의를 극구 부인하여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적산(敵産) 불하과정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남성여중고와 부산신학교를 설립했으며,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경남기독교계의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사람이 하늘이냐, 천황이 하늘이냐
최동희(1890∼1927)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에서 양기탁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 정의부와 국내의 천도교혁신파·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것으로서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국제연대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 직후 상해로 건너가 김규식의 집에 거처하던 중, 위장병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그 해 12월 고려혁명당 간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1월 38세로 요절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최린(1878∼?)
1934년 4월 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의 참의에 임명되었고 그 해 8월부터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는 친일단체 시중회를 만들었다. 1937년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사장에 올랐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시동원을 위한 친일단체의 간부직을 맡았다.
1949년 1월 13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는 민족을 위해서,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친일파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며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말했다.
마지막 선비와 훼절한 대제학
김창숙(1879∼1962)
해방 후 유림재건에 힘써 1946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위원장과 성균관장을 겸임하였고, 그 해 6월 성균관대학 설립을 인가받아 초대총장에 취임했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고 이승만정권이 들어서자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정만조(1858~1936)
일제 강점 후에 친일유림의 거두가 되었고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맡으면서 일제의 역사왜곡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자 다시 위원으로 선임되어 1935년까지 장기간 활동했다.《고종실록》과《순종실록》 감수위원으로서 ‘일제의 침략정책 사실을 은폐하고 일제가 이른바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실록을 편찬하는 데 기여했다.
1929년 총독부 직속기관인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고 명륜학원 총재를 겸임하였다. 경학원은 총독부가 조선 유도(儒道)를 식민통치의 교화수단으로 이용하고자 만든 대표적인 친일유림기구였다. 이외에도 시중회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이사 등 친일단체 간부를 지냈고 일본천황을 기리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그 공로로 1912년 일한병합기념장, 1928년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두 천재 문인의 엇갈린 삶
홍명희(1888~1968)
1927년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신간회 일에 전념하였다. 부회장을 맡은 그는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면서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추진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고, 그를 비롯한 신간회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1932년 출옥한 그는 만주사변으로 전시체제가 강화되자 은둔하여《임꺽정》집필에 힘을 기울였다.《임꺽정》은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1939년까지 3차례나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해방 직후 미완의 상태로 총 10권이 간행되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가 북에 잔류하였으며, 이후 북한 부수상을 지냈다.
이광수(1892~1950)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병 보석으로 풀려난 뒤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9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여〈내선일체와 조선문학〉〈황민화와 조선문학〉을 쓰는 등 조선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드는 데 앞장섰고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고〈창씨와 나〉를 기고하는 등 창씨제도를 적극 선전하였다. 1943년 징병제 실시가 공포되자 일본 유학생들한테까지 찾아가서 학도병으로 출진할 것을 권유하였고〈지원병장행가〉〈징병제의 감격과 용의〉등을 기고하여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신념으로 일제에 협력한 최고의 친일 이데올로그로 평가받고 있다.
목숨 건 장정(長程)과 추악한 귀화
김사량(1914∼1950)
1945년 5월 노천명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병사후원부 파견으로 '재지반도 출신 학도병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갔으나,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조선의용군의 항일근거지인 태항산 남장촌에 도착하여 의용군에 가담하였다. 이때 겪었던 숱한 고난과 가슴 벅찼던 감격을 자전소설인《노마만리》를 통해 형상화했다.
장혁주(1905∼?)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문필활동을 하던 그는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을 영웅으로 미화한《가등청정》과 지원병 제도를 고취, 선전하는《이와모토 일등병》을 발표하였고 1942년 동경에서 일본문학보국회의 황도조선연구회 위원과 대륙개척문학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를 작품화하기 위해 화북·열하지구를 취재 여행하기도 했다. 해방 후 6·25전쟁을 취재한《오호 조선(嗚呼朝鮮)》을 출간하고 일본에 영구 귀화했다. 김사량과 장혁주 모두 일어작가였지만 “김사량이 고개 쳐들고 나아갔으며, 장혁주는 타협 항복하고 배신한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다.
작가정신의 극단 - 절필(絶筆)과 화필보국(畵筆報國)
오지호(1905∼1982)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동원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친일작품 이외는 창작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1942년 전쟁기록화 제작 명령과 화가 등록을 거부하여 일제경찰의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1944년 9월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자 일가족을 고향 전남 동복(화순)에 보내고 함남 단천으로 피신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8·15 해방과 함께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해 10월 열린 ‘해방기념문화축전’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이후 광주로 내려와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며 인상주의를 독자적으로 소화한 생동감 있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김은호(1892∼1979)
그가 친일화가의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다. 1937년 8월 조선 귀족 부인들이 애국금차회를 결성하여 금비녀와 금반지 등을 모아 전쟁 승리를 위해 국방헌금으로 헌납했다. 그는 애국금차회장이 조선군사령관에게 금비녀를 증정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 미나미(南次郞) 조선총독에게 바쳤다. 조선인 화가가 그린 최초의 노골적인 친일작품이었다.
이후〈영봉(靈峰)에 엉킨 일억일심(一億一心)〉〈방공훈련〉등 친일그림을 그렸고 경성미술가협회 제1부 평의원과 임전보국단 발기인 등 친일단체 간부로도 활동했다.
오선지 위에 쓴 항일과 친일
정율성(1914~1976)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안으로 가서 루쉰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본격적인 작곡수업을 받았고 1939년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때〈연안송(延安頌)〉〈10월혁명행진곡〉과 더불어 대작〈팔로군대합창〉을 완성했다. 이 곡은 6개 곡으로 구성된 대형 군가로 그 중 ‘팔로군행진곡’은 팔로군의 전투적 정신과 기상을 행진곡으로 표현해 뒤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가로 채택됐다.
1942년 산동 동남부 태항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전투에 나서 조선인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치하였다.
현제명(1903~1960)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풀려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했다. 1937년 10월 조선문예회 애국가요대회에서〈전송(お見送り)〉〈장성(長城)의 파수〉(작사 최남선) 등을 작곡하여 발표했고 1938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 관련자 18명과 함께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에 가입했다.
1942년에〈싱가폴 함락에 부친다〉는 일제 전승 축하 메시지를 발표하고 경성후생실내악단을 조직하여 시국음악회 공연과 일본군 위문 순회 연주를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음악관계자에 대한 숙정작업을 할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 후 초대 서울대 음대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빼앗긴 노래와 고개 숙인 봉선화
채동선(1901∼1953)
1933년에 그동안 작곡한 가곡들을 모아《채동선가곡집》을 펴냈다. 그 중〈고향〉은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인 노래인데,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보성에 돌아왔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일본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어 그 원통하고 분함에 가슴이 아파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흰 한복에 두루마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민요 등 국악 채보에 전념하며 지조있는 삶을 살았다.
홍난파(1898~1941)
1937년 9월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발표회를 열었는데 이때 최남선 작사의〈정의의 개가(凱歌)〉에다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부터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를 맡아〈애국행진곡〉등 친일가요를 연주했으며 또 이광수가 대동아공영을 찬미한 시〈희망의 아침〉에 곡을 붙여 조선방송협회가 펴낸《가정가요》제1집에 발표했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등 친일음악단체 간부를 지냈고 매일신보에〈지나사변과 음악〉〈조선영화와 음악〉을 기고하는 등 죽기 전까지 음악보국에 힘을 기울였다. 민족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봉선화〉가 전시체제하에서 금지곡이었다는 전래의 속설은 최근의 연구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혁신과 부역 -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승려상
한용운(1876~1944)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임하며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해소 이후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고 월간지《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8년 그가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비밀결사단체가 발각되어(卍黨事件) 많은 조직원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1940년대 일제의 전시체제가 노골화하자 창씨개명과 징병제 실시를 반대하며 불교혁신운동과 문학작품 집필에 힘쓰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1944년 서울 성북동 심우당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강대련(?~1942)
1919년 11월 그는 “일본승려와 조선승려들이 조선왕족의 여자나 양반 딸과도 혼인할 수 있게 한다면 조선 동화(同化)와 불교 감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해 민족계열 학승(學僧)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조선불교계의 큰 악마’라는 깃발 아래 북을 등에 지고 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전시체제기에 들어서 우가키 총독의 심전개발운동에 협력했고, 일본군의 국위선양과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법요식을 봉행했으며 수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했다.
누구를 위한 창공의 꿈인가 - 여류비행사의 인생항로
권기옥(1903∼1988)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경에 있는 국민당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에 임명되었다. 1943년 김규식 선생의 부인 김순애 등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으며,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1949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박경원(1901~1933)
1933년 5월 일본공군 창설 25주년을 맞아 제국비행협회는 그를 ‘일만친선(日滿親善) 황군위문(皇軍慰問) 일만연락비행(日滿連絡飛行)'의 비행사로 선정했다. 1932년 3월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는 일본-조선-만주의 일체화를 꾀하며 전쟁동원의 기세를 북돋우고자 노력했다. 이 일만연락비행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조선인 여비행사가 해낸다면 더욱더 큰 반향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1933년 8월 7일 제국비행협회 관계자 등 환송 인파를 뒤로 하고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시즈오카현(靜岡縣) 겐가쿠산(玄嶽山)에 비행기가 추락, 사망했다. 최근 그의 일대기가〈청연〉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친일 미화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