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은 추성구선생의 유상입니다. 태은(泰隱) 추성구(秋性求1844-1921)선생은 평안도 양덕(陽德) 출신으로 약관(弱冠) 20대의 젊으신 나이에 탁월하신 유학(儒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 추문(秋門)의 위선(爲先)사업에 참여하셔서 어두움의 장막에 묻혀있는 우리 추문의 선대내력과 현조(賢祖)분들의 사실을 그토록 찬연히 밝히셨으니 그 공로가 실로 지대하다 하겠다. 또한 태은 선생의 학문과 행적(行蹟)이 이 태은집 한 권에 소상히 나타났으니 문집을 보는 후손(後孫)들로 하여금 가히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하는 바이며, 선생의 이름을 우리 추문의 가승(家乘)과 군지(郡誌) 기타 관련 제문적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한 행장(行狀)과 연보(年譜)로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실로 그 훌륭하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하겠다. 선생은 1864년 종숙(從叔) 신재(愼齋)공을 따라 한양으로 가서 어가(御駕) 앞에서 추세문(秋世文), 추성옥(秋成沃)공등이 격쟁(擊錚)하심에, 노당(露堂)선조의 신원(伸寃)상소에 참여하셨고, 1865년 노당선생의 신도비(神道碑) 수비, 1866년 인흥서원(仁興書院) 창건 등에 옥과의 추성옥(秋成沃), 대구의 추세문(秋世文)공 등 제공들과 협심진력하였고, 노당선조의 문묘(文廟) 종향(從享)을 성균관(成均館)과 사림(士林) 향교(鄕校) 등에 통문(通文)을 발하였고, 고려유학(高麗儒學)의 연원(淵源)이 안회헌(안향) 추노당(추적) 두 선생에 있음과 운심재 ,세심당의 충훈 실적을 소리 높혀 알렸다. 합관, 입종문의 선도하였고, 1869년 기사대동보, 추계가승을 발간함에 중추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셨고, 특히 당시 영의정 김병학의 추계가승 서문을 보면 세문과 민구(旻求 추성구 선생의 초명)두 분이 찾아와 서문을 구한다 하였다. 당시가 공의 나이 26세였음을 상기해 볼 때 가히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하겠다. 1870년 대보단(大報壇)에 참반하고, 1874년 31세의 나이로 향교(鄕校)의 유사직에 천거되었다. 32세에 향교 장의(掌議)에 추천되고 33세에 문묘(文廟)도유사(都有司)에 임하였다. 39세에 곡산 추산리로 이거하시다. 이후 1910년 선생의 나이 67세 경술(庚戌)대동보 당시에도 대구에 거소하시면서 수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한말 격동기를 살아오시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 하시고 1883년 선생의 나이 40에 두 번째 경시(京試)에서 입격하여 그 이름이 과장(科場)에 높히 걸렸음에도 입사(入仕)하지 아니 하시고 초야(草野)에서 후학을 길으시고 율곡(栗谷) 화서(華西) 두선생의 학문을 높히 사모하시고 조선말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사람이자 낙론성리학(洛論性理學)의 정통학맥을 이으신 화서 이항로(李恒老1792-1868)선생의 고족이신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1805-1882)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시면서 성재(省齋)유중교(柳重敎1831-1893), 면암(勉庵)최익현(崔益鉉1833-1906),홍재학(洪在鶴1848-1881), 의암(毅庵)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의 문도들과 학문의 교분을 두텁게 가지셨다. 화서 이항로 선생을 사숙(私淑)하고 1900년 선생의 나이 57세에 봉평면 원길리 사리평으로 이주하여 포촌여숙(浦村閭塾) 이란 학당을 건립하고 많은 후진을 가르쳤으며, 평촌 율곡선생이 포태된 곳에 강수재(講修齋) 즉 봉산서재(蓬山書齋 봉평면 평촌리 산 16번지에 있는데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노 선생을 모신 곳) 창립의 주역을 맡으셨다. 정미의병 봉기 때 화남(華南) 박장호(朴長浩) 장군과 같이 6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낭천(狼川)까지 진격 하다가 왜군(倭軍)에 포로가 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매. 고문당할 적에 썼다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爲國而死, 吾得死地, 爲身求免, 非吾志也, (사람은 나라 위해 죽는데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몸이 위태롭다고 면함을 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로다) 1921년 선생 78세 3월 18일 신시에 사평정사(泗坪精舍)에서 고종(考終)하시다. 선생의 행장(行狀)은 1922년 2월 성주인 배진환(裵縉煥)이 근찬하다. 선생의 문집에는 밀양인 박동로(朴東老)외 37인의 문인록(門人錄)이 전한다. 선생의 종유(從遊)로는 민와 송민영, 직방 이택승, 충재 오인영, 의암 유인석, 금계 이근원, 항와 유중악, 습재 이소응, 송관 신우균, 산양 김주형선생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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