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와 ‘옹기’의 산실, 강진의 품위를 높인다
강진은 고려청자의 고향이다. 청자는 중세예술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문화재다. 고려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청자. 드디어 11세기 말 형태와 문양이 독창적으로 정립됐다. 그 중에서도 강진 도요지는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굽는 곳이었다. 12세기엔 상감청자 이외에 철화청자, 진사청자 등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가 등장하면서 꽃을 피워냈다. 그러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백자가 들어서면서 시나브로 청자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진에는 고려청자 가마터 188곳이 남아 있었다.
고려시대 최대 청자 도요지, 강진을 역사에서 건져낸 것은 우리가 아닌, 일본사람들이었다. 고려청자가 타의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청자를 빚어내려면 무엇보다 흙이 중요하다. 그 다음이 빛깔을 살려내는 유약이다. 그러나 그 비법이 조선시대 들어 끊기면서 ‘수수께끼’가 돼버린 것이다. 강진 산 청자는 현재 국보 14점, 보물 6점으로 올라 있다. 서남해에 침몰됐던 청자보물선은 모두 강진 청자를 싣고 가던 중 화를 당했다. 그 명품을 만들어낸, ‘도공의 후예’ 강진사람들은 달랐다. 50여 년간 구슬땀을 흘린 끝에 1978년 마침내 고려청자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가마터가 밀집돼 있던 대구면 일대에 일 년 내내 ‘1300℃ 불’이 타오르고 있다.
강진군은 7~8월에 강진청자축제를 연다. 해마다 정부가 2개를 뽑는 ‘대한민국 대표축제’에 선정될 정도로 내용이 튼실하다. 청자빚기 체험과 국제학술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또 해마다 유럽·미국·남미를 도는 고려청자 순회전도 열고 있다. 1997년 대구면 사당리에 청자박물관을 지었다. 이곳에선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청자토요경매가 열린다.
생활자기인 ‘옹기’도 강진산이 으뜸이다. 플라스틱의 등장으로 한 때 주눅들었던 옹기가 웰빙시대를 맞아 당당히 대접을 받고 있다. 칠량면 봉황마을이 옹기의 산실이다. 꽃병, 술병, 콩나물시루, 떡시루, 유골함, 초꽂이 등잔 등 온갖 크고 작은 옹기가 선을 뵈고 있다.
따뜻한 기온·풍성한 먹을 거리, ‘스포츠 겨울 훈련기지’로 떴다
강진군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스포츠 마케팅’으로 한해 200억원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겨울 같지 않은 기온, 넓은 들녘과 ‘해산물 보고’인 강진만, 때 묻지 않은 산에서 나는 먹을 거리가 ‘선수단’을 불러 모은다.
2005년 놀리기 일쑤인 종합운동장을 개보수한데 이어 운동장 2개를 더 지었다. 여기다 축구장(7면), 베이스볼 파크, 육상트랙, 테니스장(10면), 태권도체육관 등이 속속 들어섰다. 모두 국제 경기를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다. 이 덕분에 지난해만 해도 전국에서 1056개 팀이 강진에서 겨울을 났고, 연중 각종 전국대회가 23개나 열린다. 축구·야구·테니스·사이클·베이스볼·태권도…. 지방대회도 17개다. 이렇게 해서 228억원 소득을 올렸다. 올해는 300억원 이상을 예상되고 있다. 선수들이 몰려오면서 식당이나 숙박업소가 연중 호황을 누리고 있다.
‘축제’ 그리고, ‘산해진미’, ‘강진 남행’은 행복하다
다산제와 영랑문학제, 강진청자축제 외에도 마량미항축제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매년 추석 무렵이다. 마량은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잇는 공식항로였다. 수군기지가 있었고, 한반도 최남단 봉수대가 있었다. ‘가깝고 멀었던’ 완도군 고금면과 마량 사이에 2007년 고금대교가 놓였다. 고금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통합지위부가 설치됐다. 전쟁 끝 무렵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이 100일간 안치하기도 했던 곳이다. 마량포구의 해질녘은 한 폭의 ‘명화’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