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본당의 날, 사랑과 섬김과 베풂 05,02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입어 신창동에 천주교 본당이 섰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신창동 본당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황공스러우면서도 영광스럽게도 주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하느님 성령의 활동도 함께 체험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모이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선교할 때마다‘사랑과 섬김과 베풂’의 특은(特恩)을 주셨습니다. ‘사랑과 섬김과 베풂’은 조선교회 교우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의 교회가 세상에 보여준 표징(表徵)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천주교회가 생기자 불란서 신부님들이 백성들의 영육(靈肉)을 돌보려고 선교사로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가르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우려고 오셨습니다. 그분들의 편지를 읽으신 달레는 조선교회사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다음 초대교회의 모습이 2000년 동안 없어졌다가 조선 땅에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저희가 조선에 와서 본 것은 ‘사랑과 섬김과 베풂’이 넘치는 사도들의 교회입니다.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섬기고 베풀고 있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베풀 줄을 압니다. 박해로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들, 박해로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고아들이 가난하지만 주님을 섬기는 교우들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들을 매일 늘려주십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말씀이 있습니다(2,44-47).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조선교회엔 정하상(丁夏祥)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상재상서(上宰相書)란 글이 있습니다. 재상(宰相)에게 올리는 글입니다.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주동자인 우의정(右議政) 이지연(李止淵)께 가톨릭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작성한 글입니다. 부록인 '우사(又辭)'까지 합하여 3,400여 자(순 한문)에 불과한 짤막한 글입니다.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천주학(天主學)의 진수를 밝히는 박력 있는 명문장(名文章)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조선의 주자학적(朱子學的) 전통에 크게 어긋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美德)이 가톨릭교의 정신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변증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으로 된 일종의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예비자 교리서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본당의 날 외부행사를 경축하면서 정하상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정 하상 바오로는 신부님들을 모셔오고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함께 사랑하고 섬기고 베풀면서 신앙공동체를 만들다보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순교의 영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의 참된 친구가 되어주면서 정하상처럼‘사랑과 섬김과 베풂’을 나의 삶 안에 간직하면 얼마나 좋을는지요?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신창동 본당 공동체를 비롯한 천주교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때마다 교우들은 사랑과 섬김과 베풂을 반성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조선천주교회에 박해가 끝나고 신자들의 신앙공동체가 커져갈 때 최양업신부님의 편지가 떠오릅니다. 최 양업신부는 자기를 가르치신 스승님들께 편지를 보내어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양반들이 교회에 들어와 페레올 고주교를 도와서 조선천주교회를 세울 때는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선교회의 상징인 ‘사랑과 섬김과 베풂’을 저버렸습니다. 자기들을 자랑하고 공로를 앞세우면서 가난한 서민 출신교우 공동체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다른 교우들의 충고도 무시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까지도 거절하면서 자기들을 내세우다가, 언제부터인가 교우행세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4월 26일부터 광주 대교구 사제들의 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논산 씨튼 영성의 집에서도 일부 사제들의 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지도 신부는 충청도 출신 전주교구 김 진소 신부였습니다. 그분은 한국천주교회 역사를 찾아서 후손에게 전하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강론 중에 앞뒤가 콱 막힌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이런 일이 있었더랍니다. 천주학쟁이들이 여산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관장은 베고픔에 시달리는 천주학쟁이들의 고통을 애처롭게 여겼습니다. 나가서 밥을 빌어먹고 오라고 풀어주었습니다. 사학죄인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관장이 욕을 했습니다. “이 앞뒤가 콱 막힌 천좍쟁이들아! 여기 있으면 굶어죽지 않으면 맞아 죽으니 달아나라고 풀어 주었더니. 밥이라도 빌어먹으라고 보냈더니! 그냥 돌아오다니. 이 멍청한 놈들아! 천좍쟁이 놈들아!” 그런데 그 천주학쟁이 중에서 김성첨 토마가 하는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위주(爲主) 치명(致命)할 좋은 기회를 잡고서 이렇게 몇 년이나 고생고생하며 옥살이를 했는데 이제 와서 도망가다니요? 그런 짓은 못합니다.”그 앞뒤가 콱 막힌 김성첨 토마와 그 가족들은 여산에서 순교했습니다. 성인품에도 못 올랐습니다. 그 후손 중에는 오늘도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친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호성지를 떠나지 못합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저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신창동 교우들을 생각하니 서럽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습니다. 6대나 지났는데도 김성첨 토마 집안의 그 앞뒤 콱 막히고 융통성 없는 전통은 예나 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창동 성당을 짓고 공동체를 만들면서 믿음이 약한 분들에게는 인간적인 칭찬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데! 칭찬 한번 그럴싸하게 해주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가문이 원래 유통성이 없나봅니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과 베풂’에 대하여, 그 갚음을 주시는 분은 우리 앞에서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첫댓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