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트 십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분트 십자가’는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알록달록한’ 또는 ‘가지각색의’ 라는 뜻을 가진 분트(bunt)는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카리브해 연안 나라에서 만드는 십자가이다. 그들의 신앙과 민속적인 정서가 결합된 수공예품이다.
이 십자가는 그 지역의 태양처럼 강렬한 색상과 윤기 있는 물감을 사용하여 갖가지 이야깃거리를 모자이크한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신앙과 생활의 결합을 표현했다. 태양 암소 새 선인장 파인애플 빨간지붕 등과 같은 생활 상징을 담거나 학교 수업,밭갈기,아이 돌보기,열매 따기 따위처럼 일상의 체험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냈다.
분트 십자가는 인간과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삶의 자리를 재현하고 있다. 수난과 침묵,그리고 거룩성을 강요하는 가톨릭 교회 십자가상이 오랜 종속과 지배의 라틴 아메리카 현실을 반영한다면 분트 십자가에는 빈곤과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려는 활발한 의지가 엿보인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생명 십자가’는 정확하게 4등분으로 나뉘어 네 면을 구성하는 등변십자가이다. 각각 면에는 날짐승과 땅 위의 식물,물고기 그리고 인간이 시계바늘 방향으로 위치해 존재한다. 네 공간은 하늘,땅,물속 그리고 사람으로 구성된 온 세상을 뜻한다. 네 생물은 모든 생명체를 대표한다. 애초에 사람은 관리자로 위탁받았으나 자연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약탈자로 살아가고 있다.
생명 십자가는 여기에 쓰여진 ‘정의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는 구호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통한 온 세상 만물의 공존과 평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엄격한 구분과 동등한 분배를 주장하기보다는 창조의 섭리와 목적에 따른 생명질서의 보전을 강조한다.
생명 십자가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균형과 조화의 미덕은 이러한 정의를 설명하는데 좋은 표식이 되고 있다. 이는 환경파괴가 단순한 지구촌의 문제가 아닌 창조세계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돌이킬 때임을 보여준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의 후예들은 자연을 거슬러 인간의 삶터를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꾸었고,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피와 땀이 솟는 슬픔과 고통의 대지와 맞바꾸었다. ‘알고 죽는 것이 해소병’ 이란 말처럼 인류는 불 보듯 분명한 이치에 순종하지 않고,스스로 자연을 거슬렀기에 이제는 보복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자연의 생태계와 더불어 온통 파괴된 인간의 공동체적 생태계를 위해 관심을 가질 때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오메가 십자가’는 ‘창조의 마지막 날’이란 시에 나오는 십자가 심벌이다. ‘알파(Α)와 오메가(Ω)’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창조와 심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일곱 날들은 참 아름다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기쁨 그 자체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요르그 징크(Jorg Zink)는 그의 시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칠일과 대비해 마지막 칠일 동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일곱째 날에는 깊은 정적이 지배하였다. 땅은 황량하고 공허하며 갈라진 땅 위에 흑암이 있고 인간의 신은 죽음의 유령처럼 혼돈 속에 운행하였다. 그러나 깊은 지옥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미래를 결정하려 했다는 우스개가 떠돌고 있었고 하늘에서 찬송하는 천사들도 그 웃음을 들을 수 있었다.”
오메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손길과 품안에 존재하는 세상과 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오메가 십자가에서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양팔로 세상을 감싸안은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지구에 새겨진 십자가 표지는 여전히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한다.
인류는 닥쳐온 창조질서의 위기를 실감하고 다시 첫 일곱 날들의 장엄함과 경외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생태적 삶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려는 신앙회복운동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바퀴 십자가’는 독일 첼레(Celle)에 있는 루터교회(VELKD) 사역자들의 공동체적 삶을 묶어주는 프로젝트의 상징이다. 공동체성은 삶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죽음과 동행하기까지 공동체의 돌봄을 목적으로 하는 이 프로젝트는 ‘내가 연약해 졌을 때,나를 떠나지 말아요’를 모토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담보해야 할 생명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바퀴 십자가는 그리스 십자가(+)와 안드레 십자가(X)를 겹쳐 놓고 그 위에 2개의 원을 차례로 그려 완성한 것이다. 살과 살이 중심축에서 사방으로 균형과 대칭을 이루어 퍼져나가면서 서로 둥글게 연결되고 이어짐으로써 단단한 바퀴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 바퀴를 이루는 살들은 하나일 때는 매우 연약하지만 서로 연결되면 강한 힘을 받는다.
이 프로젝트는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따뜻한 눈길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1990년부터 중증환자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를 훈련시키며 호스피스 운동의 생활화를 꾀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긴급구호기관인 말테저(Malteser) 호스피스 프로그램과 연대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연약함이나 이를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발견한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관계 십자가’는 생활 속에서 표현된 십자 형태이다. 십자가 뒤를 받쳐주는 또 하나의 나무 기둥과 함께 ‘두 개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십자가로 구성됐다.
마치 서로 의지하고 기대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즉 십자가는 ‘홀로’가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구약의 언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늘 쌍방적이듯이,복음은 십자가의 두 방향처럼 언제나 ‘서로 서로’의 관계에 충실하다.
십자가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구원의 징검다리였다. 더 나아가 십자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화해시키는 구원의 유일한 표식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표식이 됐다. 관계 십자가는 십자가가 두 개의 나무로 구성됐듯이 십자가의 정신은 서로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뤄진다. 관계 십자가는 서로가 서로를 통해 짜나가는 날줄과 씨줄을 통해 완성됨을 가르쳐 준다.
성경은 ‘서로 화목하라’(막 9:50),‘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서로 종노릇하라’(갈 5:13),‘짐을 서로 지라’(갈 6:2),‘서로 위로하라’(살전 4:18),‘서로 기도하라’(약 5:16),‘서로 사랑하자’(요일 4:7)처럼 다양한 ‘서로’로 가득하다. 관계는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지구촌 십자가’는 독일 남부도시 밤베르크에 있는 국제학생기숙사의 심벌이다. 이 기숙사는 개신교에서 설립한 것으로 바이에른주 마르틴 루터 기숙사협회에 소속돼 있다.
교통과 통신 발달은 지구의 다양한 문화권을 한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구촌이란 표현은 세계가 하나의 동네가 된 것을 실감나게 한다. 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거리의 간격을 뛰어넘어 지구 어디에서나 동시에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세상은 현기증이 날 만큼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지구촌 개념은 시간과 공간의 원근감을 좁히는데는 성공했으나 민족과 나라간 친밀감을 깊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여전히 전쟁과 테러,차별과 분쟁으로 지구촌은 중병을 앓고 있으며 이웃 사이의 인심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남과 북의 경제적 간격,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넘어 화해와 나눔의 지구촌은 이 세상의 이상이 됐다.
지구촌 십자가는 지구 위에 우뚝 서 있지 않다. 오히려 지구와 한몸이 되어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십자가는 스스로 몸을 휨으로써 지구의 원형과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세상과 더불어 존재하는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서는 우리 동네에 살러 오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지구촌 십자가는 공생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무릎 십자가 무릎 십자가는 마루 바닥에 다리를 꺾고 무릎을 꿇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해마다 정초에 한 주간씩 지역교회마다 회원들이 같이 모여 기도회를 연다.
이 기도모임에는 독일교회(EKD)는 물론 자유교회와 선교기관,기독교 단체가 두루 참여해 기도의 연합전선을 펼친다. 무릎과 무릎이 마주한 경건의 동맹은 국가동맹 신성동맹 한자동맹처럼 동맹과 연합이 뼈대를 이루어 온 독일사회가 지닌 또 하나의 근간이기도 하다. 무기 아래 세운 민족은 망할지언정,무릎 아래 있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알리앙츠 기도운동은 바로 ‘하나님과 기도로 동맹하라’는 정신의 발현이다. ‘함께 믿고,같이 기도한다’(Gemeinsam glauben,miteinander beten). 이것은 신앙공동체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가장 진실한 기도와 간구를 통해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고 표현한다. 즉 기도 안에 내 십자가가 담겨있고,십자가에 내 기도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렘 29:12) 송병구목사… 농업 십자가 농업 십자가는 십자가 사방에 다양한 소재와 상황을 그려 넣었다. 십자가 왼편은 돌덩어리가 널려 있는 버려진 황무지이다. 그 아래 여전히 전쟁으로 황폐화된 현실을 증언한다. 땅은 잉태할 수 없는 불임상태에 놓여 있다.
십자가 오른편은 충실하게 파인 보리 이삭과 그 아래에서 먹을 것을 찾는 새들의 모습이다. 자연은 평화로운 질서를 누리며 서로 공생한다. 생명의 파괴와 소생이 십자가 양편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농업 십자가는 농사가 단지 곡물과 축산을 비롯해 야채 양념 화훼 따위를 생산하는 소극적 노동에 그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생명의 풍성함,평화로운 세상,창조질서의 보전과 같은 적극적인 차원의 일임을 제시한다.
개신교농민회는 본부가 소재한 바덴부르크에서 농촌기숙전문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단위 공동경작과 도시·농촌 사회간 자매관계,더 나아가 제3세계 문제 지원 등 창조질서 보전의 실천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세계 십자가 전시회 작품들
※4세기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로마시대이후 성당, 성지 외에 이콘에 많이 보이는 (
XPISTOS 라는 그리스어의 약자로 그리스토스의 약자가 되겠습니다 키로 라고 읽습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방패에 붙어셔 싸워 이겨서 콘스탄틴 황제의 문장이 됩니다. 초기 교회의 심볼은 이 모양이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가톨릭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개신도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에선 '알파' A-α, '오메가' Ω-ω 와 '누' Ν-ν 아니면 '알파' '오메가' 그리고
'누' Ν-ν 는 아까 말씀 드린 NIKA '니카' 승리자의 첫 철자 뜻을 주어 성화를 그립니다. 위 심벌이 얼마 전에 만들어 졌으리라 의심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4 세기 로마 동전을 보면 됩니다. 서기 351년 그 당시 Tier (독일) 지역의 nummus'누무스' 라는 동전 입니다. 지름 27 mm. (우리의 데센시우스, 강한 카이사르). 뒤: '알파' A , '오메가' ω 그리고
(우리 아우구스트스와 카이사르 의 구세주 [그리스도])
생명 십자가
오메가 십자가
바퀴십자가
관계 십자가
지구촌 십자가
무릎 십자가’는 개신교회 알리앙츠 기도운동(Die Evangelische Allianz in Deutschland)의 십자가 심벌이다. 동맹 또는 연합이란 뜻의 알리앙츠는 세계적인 기도운동으로 해마다 연초에 기도주간을 통해 기도로 연대하고 있다.
농업 십자가’는 독일 남부에 있는 ‘뷔르텐베르크 주 개신교농민회’의 상징이다. 헬라어로 ‘그리스도’의 첫머리에 쓰인 두 문자 ‘Χ’(키)와 ‘Ρ’(로)를 결합시켜 십자가를 구성했다. 이 ‘키로 십자가’는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물고기나 배의 닻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 무덤 벽에 새겼던 매우 고전적인 십자가 표식이다.
출저:송병구목사
아르메니아 교회의 생명나무 십자가.
예수상 대신,
잎이 풍성하게 매달린 생명나무를 아로새겨 넣었다.
나무로 만든 켈틱 십자가.
십자가 뒷부분에 원형이 추가되어 있는 것이
켈틱 십자가의 특징이다.
이집트 곱틱교회 사제들이 사용하는 목걸이 십자가.
십자가 몸체와 목걸이 부분을 모두 가죽으로 만들었다.
도형의 조형미를 강조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러시아정교회의 이중십자가.
예수의 발 아래 파란 원 안에 묻힌 해골은 원죄를 지은 인간,
즉 아담을 의미한다.
독일 슈바르츠 발트 지역의 전통 십자가.
보통 열십자로 긴 막대가 가로놓이는 형태인 것에 비해,
이 십자가는 가로 나무가 없다.
또한 예수상에도 두 팔을 생략함으로써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하였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십자가.
가운데의 붉은 구슬은 빈 무덤을 상징한다고 한다.
탄자니아에서 흑단으로 조각한 예수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만 십자가를 표현했다.
흔히 묘사되는 백인 예수가 아닌, 토속적인 느낌의 예수상이다.
십자가 나무 아래에서 턱을 고이고 앉아
고뇌에 빠진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비할 만하다.
두 팔을 벌린 십자가의 형상은 나뭇가지로 대체되었다.
독일 동서 분단선 철조망으로 만든 십자가.
철조망 위를 향해 볼트로 만든
두 사람이 사력을 다해 기어오르고 있다.
자유를 향해 생명을 걸고 분단선을 넘었던
독일 민족의 비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폴란드 소금광산의 소금으로 만든 투명십자가.
소금 덩어리에 구멍을 뚫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연결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성경 말씀을 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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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교회의 십자가
기독교 최고의 상징인 십자가. 이 십자가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을까? 이 십자가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었다. 닻(anchor)이나 물고기(fish), 양(lamb) 등이 최초의 대중적인 상징들이었다. 기독교의 시작 후 첫 2백년간 교회의 예술 유적에서 십자가의 사용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는 십자가가 고대 근동의 사형 도구로 널리 사용되어 왔고 또 로마제국 시절에도 여전히 이방인의 중죄에 대한 처형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에 연유한다. 즉, 기독교만을 가리키는 독특성이 부여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십자가를 장식으로 이용해 신체 일부분에 매달고 다녔다면 - 그렇게 하지도 않았지만 - 그것은 마치 오늘날 사형수단 중 하나인 전기의자 모형을 목에 매달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십자가가 초기 교회에서는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징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또 그림에서 보듯이 닻의 모양과 결합되어 많이 사용되었다.
십자가가 본격적으로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등장한 것은 4세기이후 로마황제 콘스틴틴 시대부터이다. 312년 10월 콘스탄틴은 로마의 황제위를 놓고 막센티우스 장군과 밀비안 다리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군사 5만대 12만으로 절대 열세에 놓여있던 그는 바로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는 ‘십자가의 환상’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헬라어 첫 두 글자로 만들어진 (X 와 P) 키로(Chi-ro)십자가를 이 환상에서 보았다(왼쪽 그림 참조). 또한 하늘에서 ’이를 새겨서 승리하라(hoc signo vinces: In this sign, Conquer!)‘는 음성을 들었다. 그날 콘스탄틴은 자신과 병사들의 방패와 깃발에 이 십자가문양을 새기고 황제 위를 다투는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황제로서 그가 취한 여러 조치 중 하나는 바로 십자가형의 폐지이다. 이로써 십자가 형은 이제 과거의 제도가 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됨에 따라 교회의 가장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이때에 부가된 십자가의 의미는 초기 교회의 ‘예수의 죽음’이외에 ‘승리자 예수’이다. 즉, 이교 로마를 기독교가 정복한 상징으로서 십자가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는 희랍어 키 (chi) 와 로 (rho) 의 대문자,
이 모양은 원래 콘스탄틴 황제가 꿈속에서 본 모양이고
나중에 십자가형태로 바뀌기는 하지만.
앞: 당시 카이사르 Decentius (351-353)의 초상. D N DECENTIVS FORT CAES SALVS DD NN AVG ET CAES
(출처: Gabriel Finaldi (2000) The Image of Christ, Yale Univerity Press. Page 20 을 스켄 )
현재 카톨릭에서 많이 쓰는 예수의 상이 새겨진 십자가(crucifix)는 5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초기 교회에서는 신성을 담은 형상을 새기기를 꺼려해 예수의 모습을 조각한 이런 유형의 십자가를 만들지도 사용하지도 않았으나 6세기 이후 중세교회에서는 보편화 되었다. 거의 모든 신도가 문맹인 시절 이런 십자가는 자체로 수난 강조의 신앙 교육 교재로서 좋은 역할을 한 긍정적인 면이 있었으나 이를 입 맞추고 숭배하는 미신적 신앙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등 부정적 현상도 일어났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십자가의 모양은 각각의 기독교회사의 분파들과 그룹들의 신앙과 신학을 반영하며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동방 교회들은 그 나름대로, 또 카톨릭과 개신교 교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의미를 담은 다양한 모습의 십자가를 창조적으로 기획해 내어 사용하였다.
※중세시대 중반이후
상징으로서의 십자가는 9세기가 넘어서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담고 있는 성물로서 여겨지게 된다. 여기서 성물이라함은 성만찬의 요소(sacrament)수준이 아니라 그 보다 아래 등급인 요소들(sacramentals)을 의미한다. 중세 후기에 접어들어 여러 미신적, 주술적 이해가 십자가에 덧붙여졌다. 공로사상과 결부되어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행위가 구원을 위한 점수를 쌓는 행위로 까지 여겨졌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시대 후
종교개혁자들은 이 십자가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루터는 예수께서 매달린 모습을 담고 있는 성상 십자가를 미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나 이를 예배 때 사용하는 것은 금하였다. 그러나 이를 교회 벽이나 집안의 장식에서 제거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쯔빙글리와 칼빈 등의 개혁자들은 루터와는 상이한 입장을 보이며 성상이나 성상십자가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영향은 영국 교회를 통해 청교도들에게 전해졌고 이들의 후예 교회들, 미국의 여러 개신교단들을 포함하여 이들에 의해 선교가 된 한국 교회 등은 청교도적 신앙 요소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십자가 자체를 달지 않거나 아니면 가장 단순한 모양의 십자가 (Latin cross라고 칭함)만을 예배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교회와 십자가 사용
미신적 성물 숭배를 하지 않는 성숙한 신앙의 전제하에서 성물이 가지는 교육적 효과를 한껏 누리고 십자가를 수집하거나 감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기독교 복음의 승리를 되새겨 보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러한 표징(Sign)와 상징(Symbol), 그리고 (Representation)의 의미가 다 조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즉, 십자가는 분명 표징으로서 일상적인 우리들의 삶에서 여러 모양으로 장식으로도 이용된다. 목걸이, 반지, 귀걸이등 신체장신구로부터 생활물품에까지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기독교를 가리키는 표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예전적 사용으로 제한되던 양태에 비하면 이는 종교개혁이 이뤄낸 성상에 대한 자유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징으로서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기독교에서는 십자가가 또한 단순한 표징으로서의 사용을 넘어 상징으로서도 인식되고 있다. 표징에 비해 상징이 갖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전술했듯이 상징이 갖는 자체의 존엄성이다. 즉, 표징의 대표적인 예인 신호등을 모두가 따르고 이해하고 바라보지만, 이는 표징이므로 이를 존경하고 아끼고 엄숙한 마음으로 신호자체를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존경과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가장 비근한 예로 국기를 들 수 있다. 국기는 나라와 그 국가정신의 상징이다. 이는 국가 자체는 아니지만 국가를 나타내며 마치 국가처럼 대우와 대접을 표하고 있다. 신호등을 발로 차는 행위와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결코 같은 수준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상징이라는 의미는 이것이 보편적으로 쓰여지는 표징으로서의 사용을 넘어 마치 국기처럼 특별한 존경과 취급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출저:기독교대한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진짜 십자가는 어디에 있을까?
초기 교회는 임박한 종말론, 박해 정황, 유대의 멸망(AD 70) 등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예수의 성지나 성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로 인해 예수의 죽음이후 300년 동안 예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는커녕 무덤조차도 어디 있는지 잊혀지게 되었다. 예수의 무덤과 십자가를 포함한 성물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바로 콘스탄틴 대제였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성지 발굴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 326년 경 예수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까지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무덤안과 주위에서 발견된 십자가가 하나가 아니라 모두 3개의 십자가였었고 죄패는 따로 떨어져 있었다. 어느 것이 예수의 십자가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를 그 중에서 구분해 내기 위해 헬레나가 취한 조치는 병든 여인을 데려오게 하여 각각의 십자가를 져보게 하였다. 결국 한 십자가를 졌을 때 그 여인이 나았고 이를 예수의 십자가로 인정하여 그 자리위에 세우게 되었다고 4세기 말부터 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예수님의 무덤에 세워진 진짜 십자가는 7세기 초에 파르티아제국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아 왔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고 전해진다.
나침반 십자가는 별을 통해 먼 장래를 헤아리고,바른 삶의 방향을 찾으려는 상징처럼 보인다. 흔히 컴퍼스라고 불리는 나침반은 원을 동서남북으로 분할한 것이다. 선박이나 항공기의 행로를 정하고,방위를 측정하기 위한 계기이다.
나침반은 지구 자전을 이용해 항상 정북(N)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졌다. 흥미롭게도 자석을 사용하는 마그네틱 나침반은 바늘 끝이 늘 조심스럽게 떨린다. 그 가벼운 흔들림은 오히려 고정된 부동의 모습보다 신뢰를 준다. 마치 아이의 걸음마처럼 불안감과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마치 나침반을 보며 목적지를 찾고,천체망원경의 렌즈를 닦으며,별과 미래를 헤아리는 일이다. 더군다나 교육은 가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학교의 합리적인 신앙교육은 독일인의 신앙노선을 적절히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합심은 두 마음이 일치하고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한 상태를 뜻한다.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을 움직인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기도의 위대함은 특히 합심할 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합심 십자가’는 공동기도 프로그램(Gestaltendes Gebet)의 상징이다. 이 모임은 자신들의 삶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곧 피조물로서 진지하게 응답하려는 것이다. 공동기도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삶의 문제들을 이야기하거나 토론과 창작,색 구성 작업,몸짓 등 다양한 창조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삶을 변화시킨다.
이 십자가는 보는 눈에 따라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품안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느낄 수도 있고 두 사람이 함께 짊어진 십자가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십자가는 함께 짊어질 때 훨씬 가볍다. 하나님 앞에서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지난 50년 동안 유럽인들은 경제적 정치적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토대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유럽연합은 1950년 유럽통합을 위한 슈망 계획 이래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로마조약(1957.3) 마스트리히트조약(1992.2) 등의 단계를 밟으며 그 결속의 범위를 확대하고 강화해왔다.
특히 독일 통일을 계기로 급격하게 유럽통합 논의를 진전시켰다. 그러나 내적 통합은 밖으로 블록을 강화하게 하고 경제논리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충족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대안 마련에 대한 요구는 다양하다.
별 십자가를 앞세운 범유럽연합운동이 제안한 밤베르크 프로그램은 유럽연합의 국가와 정당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유와 정의,평화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유럽교회의 숙제이기도 하다.
여전히 에큐메니컬 친교에 머무를 뿐 아직도 국경을 넘지는 못하는 교회일치운동은 현재 진행중인 정치?경제적 통합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유럽연합은 현실이 될지 또는 대안이 될지 아직 미지수이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 147:4) 새 천년 십자가는 푸른 창공을 바탕색으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비둘기와 문자 도안으로 이뤄졌다. 가로와 세로,모두 세 가닥 선으로 표현한 십자가는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빛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십자가 한가운데 모여 있는 비둘기떼는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처럼,또는 시간의 회전을 뜻하는 바람개비처럼 보인다. 비둘기들은 원을 맴돌다가 흩어지려는 몸짓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화의 구심점과 원심력으로서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새 천년 맞이는 역사와 화해하면서 시작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희년을 맞은 2000년 사순절 첫 주일,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용서의 날’ 예절에서 가톨릭 교회와 구성원들이 지난 역사에서 잘못했던 일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전 인류를 향한 화해의 메시지에서는 일반적인 죄를 포함해 십자군 전쟁과 종교 재판,그리스도교의 분열,유대인 증오와 박해,선교사를 앞세운 제국주의,여성의 존엄성과 태아의 권리,그리고 인종을 차별하고 민족을 배척한 죄를 참회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구원의 징표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생명나무 십자가’는 부활을 통한 생명의 풍성함을 담고 있다. 사형틀인 십자가 위를 무성하게 뒤덮은 푸른 잎과 열매는 분명히 죽음을 뛰어넘고 있다.
본래 ‘열십자’(十) 형태는 어떤 방향으로도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생명나무’(창 2:9)를 근원으로 하는 에덴동산의 네 줄기 강도 십자 형태로 흐른다. 더 나아가 생명나무 십자가는 자연과 공존하는 창조질서를 표현하고 있다.
생명나무 십자가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펼치는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JPIC)운동을 상징한다. JPIC 운동은 1983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제6차 총회에서 제기됐고 회원 교회를 비롯해 폭넓게 확산됐다. ‘정의와 평화’의 문제는 WCC의 출발과 함께 주요 관심사였으나 ‘창조질서의 보전’은 새롭게 제기된 주제이다. 특히 1986년 옛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는 창조세계 파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공동 책임을 환기시켰다.
JPIC 운동은 선언과 고백에 머물지 않고 나라와 지역의 생활현장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구체적인 생명운동이고 환경보전운동을 의미하고 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12). 바람 십자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날개를 돌리며 회전하는 바람개비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한 가운데 위치한 작고,흰 십자가는 바람을 일으키면서 푸른 기운을 밖으로 내뿜으며 점점 확대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십자가가 지닌 두 가지 모습,즉 정지하고 있는 움직임과 움직이고 있는 정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지금 그 침묵은 곧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려는 신비함으로 가득하다.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대속사건이라는 자가발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십자가는 속죄하는 힘(골 2:14)이고,화평케 하는 능력이며(엡 2:16),다시 살리시는 권세일뿐더러(고후 13:4),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바람(행 2:2)이다.
이러한 바람은 먼저 내적 고요함에서 출발한다. 묵상과 기도라는 침묵의 힘을 통해 충전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바람에 따라 이끌림을 받는다. 성경은 거듭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삶과 역사 속에서 성령의 바람 체험을 하였음을 전한다. 바람은 신앙의 부드러움과 거셈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나침반 십자가
나침반 십자가’는 독일 에쎈시의 가톨릭 계통 초등학교 안내홍보물 표지에 담긴 십자가이다. 신앙교육은 자신의 나침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해시키는 일이다. 마치 첫 걸음을 뗀 아이의 불안정한 모습처럼 1학년의 첫 걸음은 미지를 향한 희망의 행로처럼 느껴진다.
합심 십자가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수는 둘이다. 두 사람은 만남,친교,합의 그리고 합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이다. 성경에는 합심이라는 낱말이 한 차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교훈에서다.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합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별 십자가
‘별 십자가’는 유럽의 범유럽연합운동(Paneurope-Union)이 사용하는 십자가이다. 파란색 바탕에 12개의 노란 별을 그려 넣은 유럽연합(EU)의 깃발을 응용한 것으로 가운데 노란 색의 원을 만들고 빨간 십자가를 중심에 세웠다.
새 천년 십자가
새 천년 십자가’는 로마가톨릭 교회가 선언한 대희년 2000년의 로고이다. 이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어제,오늘 그리고 영원히’라는 말씀이 무지개 모양으로 쓰여 있다.
생명나무 십자가
바람 십자가
‘바람 십자가’는 묵상을 위한 십자가로 독일 뮌헨에 있는 가톨릭교회 피정의 집(Exerzitienhaus)의 심볼이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묵상 과정을 통해 영적 분별에 눈뜨게 하고,성경연구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말씀생활을 지원한다.
송병구십자가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못박혀 죽은 끔찍한 형틀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 십자가를 형틀로 사용한 것은 페니키아인으로 추정되며, 그 뒤 여러 민족에게로 퍼졌고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워낙 잔인한 형이였기 때문에, 흉악범이나 노예에게만 사용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가 처형되었던 골고다언덕의 성스러운 십자가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어머니의 헬레나가 주교(主敎)와 함께 성(聖)십자가를 발견(320∼345년)해서,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는 것이다. 또한 중세의 십자군들이 성십자가의 단편(斷片)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모두 서유럽으로 가져갔다고도 전한다.
이런 유래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상징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의미였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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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의 기본형태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두 나무조각이 가로로 된 조각의 한 중간에서 교차한 모양이다. 이 기본형태에는 두 나무조각의 길이가 같은 '그리스식 십자가'와 세로가 아래쪽으로 더 길게 뻗은 '라틴식 십자가' 두 형태가 있다. 한편 기본 이외에도 세로나무가 가로나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는 '안토니우스 십자가', 두 나무가 비스듬한 형태로 교차하는 안드레아 십자가 등의 여러 변형 형태가 있다.
한편,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십자가상(十字架像)이 단순한 십자가를 대신해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7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예술적 차원에서 만든 것이었던 것 같다. 단순한 미술품인 아닌 종교적 상징으로서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3∼14세기 무렵이다.
출처<심볼리안 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