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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중세 유럽의 변화(2)-군주 및 지배 세력들(국왕에서 기사까지)
임광자 추천 0 조회 209 08.05.28 08: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세 유럽의 변화 - 유럽의 군주 및 지배세력들(국왕에서부터 기사까지)

중세 유럽의 변화(2)                      이길 상

가. 중세 유럽의 군주들

(1) 독일(Deutschland : 영 Germany)

12-3 세기의 유럽프랑크왕국이 칼 대제의 손자3명이 베르덩조약(843)으로 3분 하였고, 다시 메르센조약(870)으로 재분할하여, 오늘날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때, 왕국의 동쪽을 차지한 것은 칼 대제의 손자루트비히 2세(Ludwig Ⅱ: 프, Louis Ⅱ)로서 이것을 동프랑크왕국(Francia Orientalis)이라고불렀습니다.

루트비히 2세(재위 843∼876)가 초대 국왕이 되었으나,왕국을 구성하는 프랑켄·작센·알라마넨·바이에른 등 여러 부족의 독립성이 강했기때문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강력한 왕권은 아직 없었고, 부족 연합체의長으로서 행세하는데 불과 했습니다.

2대 국왕 카를 3세(876~887)는 한때 서프랑크왕도겸했으나, 노르만인의 파리 포위 때 당한 굴욕적인 패배 때문에 폐위되었으며, 조카인케르텐 변경(邊境)의 영주 아르눌프가 동프랑크왕으로 뽑히어(887∼899) 브라반드의레벤에서 노르만인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으나, 그의 아들 루드비히(재위899∼911)의 요절(夭折)로 카롤링거가(家)의 혈통은 단절되였습니다.

이에 귀족들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프랑켄공(公) 콘라트1세(911∼918)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고, 여러 부족의 연합체 형식으로 독일제국을탄생시켰습니다.

콘라트 1세(Konrad I : 911∼918)는 대외적으로는마자르인·노르만인·슬라브인의 침공으로 고통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작센公 하인리히를비롯한 제후들의 독립화 경향을 억제하지 못하여 왕권은 약했고, 남자 후계자가 없어서,그의 대립자인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하인리히는 하인리히 1세(HeinrichI : 919∼936)로 왕위를 계승하여 작센왕조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까지도 왕권(王權)은 약하였고, 제후들의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여 국왕으로서 절도 있는 태도를지키고, 자기 본령(本領)인 작센의 발전에만 힘쓴 것이 의외로 다른 제후들의 호감을사게 되었고, 이민족의 침입에도 철저히 대비하여 치세기간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아들 오토 1세(Otto I : 936∼973)가 즉위하여제후들의 분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왕족을 제후로 삼아서(大公,王領伯) 임명하자,제후들은 물론, 그의 아들 루돌프까지 반항하였으므로(루돌프의 난 : 953-954) 실패하고,초부족적인 교회 세력과 동맹을 시도하여 제국교회정책을 확립하였습니다.

이어 3차에 걸친 서프랑크의 루이 4세를 원정하여정세를 안정시키고, 동쪽에서도 마자르족에게 승리하여 왕권을 높이고(955), 로마교황요하네스 12세의 파병 요청에 따라 다시 이탈리아로 출정, 962년에 교황으로부터숙원의 제관(帝冠)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신성로마제국이 출현되었는데, 신성(Holy: 神聖)이란 말을 붙인 것은 그 후의 일이기는 하나 이 후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분할당할 때 까지(1808), 약 1000년간 이 이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것은 독일 왕권을 비잔틴 황제와 같은 격인 보편적·초독일적인황제권으로 높이는 반면, 그 뒤의 역대 황제가 이탈리아 정책에 깊이 개입하는 화근의씨앗을 뿌려, 최고 지배권을 둘러싼 교황권과의 운명적인 대결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평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윤허를 얻어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설치하여(962),동방 발전의 기초를 닦았고, 아들 오토 2세의 비로 비잔틴 황녀 테오파노를 맞아,수교와 황제권의 상호 승인을 꾀하는(972) 등의 포석은 당시의 여러 조건하에서 최선의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교회 정책이나 이탈리아·비잔틴 관계를 계기로문학·예술의 융성을 가져왔으며, 흔히 이를 오토의 문예부흥이라고 합니다. 오토2세와 3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2세가 즉위하였습니다.

바이에른 공으로 있던 하인리히 2세(Heinrich II :1002∼24)는 사촌형제간인 오토 3세가 후사(後嗣) 없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왕비 크니군데와 함께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는 반베르크에 주교구(主敎區)를설정하여 죽은 뒤인 1146년에 성자(聖者)로 추서되었는데, 후년의 교회가 전하는기록으로는 약체군주(弱體君主)라는 평이 있는 것과는 달리 다리를 절고 병약한 몸이면서도적극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이탈리아에 3차례나 원정했고, 폴란드를 정복하는 등유능한 군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콘라드 2세(Konrad II : 1024-1039)는 하인리히 2세가죽어 작센왕조가 단절된 후에 국왕에 옹립되어 잘리에르왕조를 열었습니다. 폴란드를지배하에 두었고, 부르군트를 병탄하였으며, 북이탈리아의 주교(主敎)에 많은 독일사람을 임명함으로써 북이탈리아의 지배를 굳히고, 독일에서는 왕의 영지확대에 따른왕권의 강화에 힘써 바이에른·슈바벤·케른텐의 대공령(大公領)을 직할령으로 삼아아들 하인리히 3세에게 주었고, 또한 하급 가신을 보호하고 봉토의 세습을 인정하여그들의 힘을 빌어 유력한 제후의 자립화를 억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대학과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야경잘리에르왕조의2대왕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 1039∼56)는 클뤼니 수도원 개혁이 한창일 때이를 적극 지지하고, 실천하여, 왕령(王領)의 확대, 지방 제후의 통어(統御)에 의하여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멘·헝가리를 정복하여 독일 왕의 종주권(宗主權)을인정 받았고, 또, 과감한 이탈리아 정책과, 제국교회(帝國敎會) 정책을 실행하고,제1회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대립하는 교황을 추방하고,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2세를세웠으며, 3명의 교황을 순차로 자기 뜻대로 세워서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자기 지배아래 두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기 위하여 클리니의 개혁운동을 지지하였는데,그것이 후일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4세 때 카노사 사건(1077)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은 십자군 원정, 이단 단속, 황제와교황의 다툼 등으로 매우 어수선한 시기를 마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보름스 협약을 체결하여(1122)하여 성직 서임권 문제를 매듭 지었고, 그가 죽고 잘리에르왕조가단절되고, 콘라트 3세(Konrad III : 1138∼52)가 즉위하여, 호엔슈타우펜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켄공 콘라트는 작센공 로타르 3세에 반대한 제후들에의해서, 대립왕(對立王)으로 뽑혔다가 로타르가 죽은 후에야 정식으로 즉위하여,벨프가(家)의 하인리히 오만공의 지위를 빼앗고 오만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사자公과는 다시 화해하여 작센 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제2회 십자군에 가담하여소아시아에 건너갔으나 병을 얻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하였습니다.

독일의 황금 양모 기사단슈타우펜왕조에서 가장잘 알려져 있는 군주는 적염왕(赤髥王)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로서,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 1152∼1190)는 붉은 턱수염이 너무나 유명하여 적염왕이라불렀으며,

그의 치세기(治世期)에 오랜 부족태공(部族太公)의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제국제후(帝國諸侯)가 등장하게 되었고, 제6차 이탈리아 원정(1184∼86)후, 제3차 십자군(1189∼91)을 거느리고 소아시아 원정 중 세우레키아에서 사레프강을건너다가 익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무장(武將)으로서의 자질과 동시에 예리한 웅변술을갖추고 있었으며, 인재등용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후일 궁정기사 문화를 한 몸에모은 인물로 찬양되고, 중세 말기 이후에는 곤궁과 오욕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으로서황제 전설 속에 오래도록 살아 남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 1215∼50)는가장 비독일적인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성장기와 가계에서 들어 나고있는데, 젊어서 죽은 부왕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모후인 콘츠탄츠가노르만의 기사 오트빌가의 피가 흐르는 시칠리아국왕 로저 2세의 딸이 였기 때문에,어머니 콘스탄츠의 고국인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의 궁정에서 교황 인노켄티우스3세의 후견하(後見下)에 자랐습니다.

그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97∼1212)로서 시칠리아왕위를 이었고, 다시 1212년 독일왕, 28년 예루살렘왕이 되었는데, 그의 여러 가지기행 중에는 점성술, 시칠리아 구어(口語)로 쓴 문학, 교황으로부터 세 번이나 당한파문(1227, 39, 45)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동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의 동물원에는그 시대에 알려진 괴수(怪獸)가 다 모여 있었으며, 관찰과 실험도 대단히 철저했었다고합니다.

심지어는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양육하면, 부모가 쓰는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같은 것 중에서 어느 것을 사용하게 되는지 확실하게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어린애를 대려다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고, 기르게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무 결론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실험에 동원된 아이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라고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황제를 몹시 비난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통치는 두 아들하인리히 7세와 콘라트 4세에게 맡기고, 1220년, 1231∼32년의 성속제후(聖俗諸侯)에대한 2개 칙령(勅令)에 의하여 영방화(領邦化)를 승인하였습니다.

7∼8개 국어에 능통하여 학예를 보호하였고, 그 스스로도시인이기도 했지만, 이후 독일의 왕권은 더욱 약해지고, 드디어 대공위시대(Interregnum1254? ~ 73년)가 등장하고, 금인칙서(Goldene Bulle :金印勅書 1356)가 발표되어7선제후에 의한 선거황제가 등장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서 사실상왕위를 세습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합스부르크가는 독일의 통일보다는 오스트리아와이탈리아 경영 등 자신들의 영지 확장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독일은 수백개의 영방(Land)으로분열되어 있다가 1871년에야 프로이센에 의해서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2) 프랑스(France)

칼 제국 분할에서 그 서 쪽, 즉 서프랑크왕국(WestFrankish Kingdom)은 루트비히(루이) 1세와 유디티(Judith) 사이에 태어난 막내인칼(카를) 2세가 왕국의 서부, 즉 네우스트리아와 아키텐을 차지하고, 서프랑크왕국을세운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후 870년의 메르센조약으로, 중부 프랑크왕국에속해 있던 로트링겐이 동·서 양 프랑크왕국에 분할되었으며, 이로써 후일 프랑스와독일 양국의 영토적 기초가 이 때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역대 카롤링거가(家)의 국왕들은 차츰 격화되는노르만인의 침입에서 국토를 제대로 방위할 능력이 없었으며, 각지에 귀족층이 대두하여국내가 분열상태에 놓이자 왕권은 약화되었고, 대신 제후들의 세력이 높았는데, 987년루이 5세가 갑자기 죽고 카롤링거가가 단절되자, 제후(諸侯)의 지지로 파리백 위그카페가 왕위에 올라 카페왕조 프랑스가 탄생하였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프랑스만큼 왕권이 약한 나라도 없었습니다.교황이 독일왕과 성직 서임권 투쟁을 할 때도 이 프랑스만은 매우 조용했는데, 그것은조직적으로 교황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페왕조(Capetien dynasty : 987∼1328, 14대)는직계와 그 방계로 나눌 수 있는데, 후의 방계, 즉 발루아 왕조(1328∼1498, 7대)·발루아오를레앙 왕조(1498∼1515, 1대)·발루아 앙굴렘 왕조(1515∼89, 5대)·부르봉 왕조(1589∼1793,1814∼30, 7대) 등 프랑스의 7월혁명으로 루이 필립이 왕위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망명할 때 까지 엄격히 이야기하면 모두가 위그카페의 집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직계 카페는 초대 위그 카페에서 비롯되어 처음에는봉건사회 속에서 취약한 왕권을 갖는 데 불과했으나 12세기 전반(前半) 루이 6세무렵부터 활발해져서 12세기에서부터 13세기에 걸쳐서 필리프 2세·루이 9세 시대에왕권을 강화하여, 영국왕 존과 싸워 승리하고 숙원인 프랑스 내의 영국 왕령을 찾았고,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필리프 4세 때에는 교황을 굴복 시키고, 권력도 증대하여행정기구의 정비와 함께 사실상의 국가통일이 처음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성왕(聖王)으로 불리는 루이 9세(Louis IX : 1226∼70)는그가 두 살 때 부왕 루이 8세가 죽고, 그의 모후인 불랑슈(Blanche)가 왕으로 행세하는중에 4세 때 왕위에 올랐으나 오랫동안 모후의 섭정기를 거쳐 1242년 그가 단독으로약 30년간 프랑스를 지배하였는데, 그를 "정의의 왕"이라고 할만큼 모범적인군주였다고 합니다.

정의에 입각한 평화, 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한 왕으로서,카페가의 역대 왕이 확대한 왕령(王領)을 계승하였고, 봉건제후 영내에 국왕직속의관료를 두어 국가적 기관을 정비하여 중세 프랑스의 집권적 왕정을 완성하였습니다.

자력구제권(페데)를 대폭 제한하여 국왕 직속의 재판소가파를로망(Parlement)이 라는 중앙 사법관청으로 성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영국과의싸움을 종결시켰습니다. 여러 국왕과 제후 사이의 평화수립에 조정자 역할을 다하였으며,두 차례의 십자군(7회, 8회)을 일으켰다가 원정 도중에 사망했으나, 이 시기에 프랑스는서유럽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의 기마상필리프 4세(Philippe IV는카페왕조의 제11대 왕(1285∼1314)으로서, 단려왕(端麗王:le Bel)이라고도 합니다.

국내 교회령(敎會領)에 대한 과세문제가 발단이 되어,로마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일대 분쟁을 일으켰는데, 교황이 군주에 대한 교황권의우위를 주장한 데 대하여, 1302년 최초로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로 구성한 삼부회(三部會)를소집하고 국내를 결속시켰는데, 이 삼부회가 프랑스 의회의 출발이며, 아나니로 교황을급습하는 강경수단을 취하였습니다.

마침내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김으로써, 교황의 바빌론(혹은아비뇽) 포수(捕囚)시대(1309∼77)를 열었습니다(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교황권 쇠퇴에서상세히 얘기하겠습니다). 또, 1307년 템플 기사단의 해산을 명하여 전재산을 몰수하고,유대인·롬바르디아인 등의 외국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박해정책을 취하였습니다.

(3) 영국(England)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영국에 노르만왕조를 성립 시킨후(1066),중세 영국의 기초는 앙주가의 플랜태저넷왕가(Plantagenet, House of : 1154~1339)에서이룩하였는데, 이 왕조는 프랑스의 앙주가에서 들어온 헨리 2세를 시조로 하며, 플랜태저넷이라는이름도 이 왕가의 문장(紋章)인 게니시타(genista:라틴어 플란타게니스타)에서 유래한다고합니다.

헨리 2세는 프랑스왕 필리프 2세에게 패배해서 프랑스의봉토를 많이 잃긴 했지만, 멧돼지처럼 힘이 세었고, 대식한(大食漢)은 아니지만,창조주의 실수(?)로 생겨난 굉장히 큰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기 드문 학자였고대단한 정력가였다고 합니다. 교회재판권을 제한하고, 중앙 행정기구와 순회재판제도를 강화하여 왕권을 확대하려 하였으나, 만년에 그의 두 아들, 즉 장남 사자심왕리처드 1세와 막내 무지(無地)왕 존이 등을 돌리고 장남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2세의 연합군과 프랑스에서 싸워 패하고 사로잡혀가서 죽었습니다.

다음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와 동맹하여 부왕 헨리2세를 죽게하여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전쟁과 모험을 너무 좋아해서 재위기간 10년중 영국에 있었던 것은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제 3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유럽 인들의 성지순례 길을 확보하고, 귀국 도중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게 사로잡혀많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 났습니다. 귀국 후 노르망디 문제로 프랑스의 필리프2세와 전쟁 중 사망하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부자간 형제간의싸움을... 우리들의 기준에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지저분한 감이 있어서 무엇이라고표현하기 조차 힘든 것 같습니다.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우 존(Jhon)이 영국왕이되었는데, 그는 냉혹하고 잔인하였으며, 암살을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였고, 교수형을구경하는 것이 그의 오락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왕 헨리 2세가 이 아들을 무척사랑하여, 언젠가 존을 앞에 두고 "내 땅은 이미 너의 형들에게 나누어 주었기때문에 너에게는 줄 땅이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래서 無地王이라고불렀다고도 하고, 그의 치세기간 많은 영토를 잃었기 때문에 失地王이라고 부르기도합니다.

그의 형 리처드 1세가 부왕 헨리 2세와 싸움이 일어나자,처음에는 아버지 편에서 형을 공격했으나, 아버지가 불리해 지자 재빨리 등을 돌리고형에게 붙었는데, 그 공(?)으로 존은 리처드 1세의 즉위로 아일랜드를 얻고(1189),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를 왕위 계승자로 만들고,왕위 계승자인 조카 아아더(당시 3세)를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었으며, 독일에 사로잡힌형 리처드 1세의 포로 기간을 연장 시키려고 음모를 꾸몄으나(1193), 리처드 1세가다음해에 귀국하자 존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영지를 다 잃었다가, 몇 달 뒤 형의 환심을사서 영지를 다시 찾고(1195), 리처드 1세가 프랑스에서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1199)

즉위 이듬해(1200) 존왕은 프랑스에 봉토를 가지고있던 신하의 약혼녀 이사벨라를 빼앗아 왕비로 삼자 이 신하는 그의 주군 프랑스의필리프 2세에게 호소하였고, 필리프 2세는 그의 법정에 존을 소환했으나 이에 불응하자,그의 프랑스 내 봉토를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따라서 두 나라간의 숙명적인 싸움은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존이 패배하여 프랑스 내의 영지를모두 잃었으며, 캔터베리대사교의 서임(敍任)문제로 교황과도 대립하여 인노켄티우스3세로부터 영국에서 성무 금지령을(1208), 다시 이듬해에는 파문을 당했습니다. 1213년에는영국을 통째로 교황에게 바치고, 교황의 봉건신하가 되어 사면을 받았으나, 프랑스의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쳐들어 가기로 했습니다. 이 때 영국의 귀족들이존의 실정과 중세(重稅)에 진저리를 내어 종군을 거부하자, 단독으로 용병을 모아출전했으나 부빈 싸움에서 필리프 2세에게 패배했습니다.

패장으로 영국으로 돌아오자 영국의 귀족들은 캔터베리대사교의지휘하에 일제히 반기를 들고 있었는데,... 원저궁에서 템즈강을 따라 그 하류의런던 쪽으로 50 Km 가량 떨어진 러니미드((Runnymede)에 가서 국왕 존은 귀족들을만나고, 그들이 요구하는 특허장을 허용, 이에 의해서 1215년 7월에 대헌장(大憲章)이라고번역되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원문은 불문법이 였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된이 문서의 내용은, 봉건귀족들의 새로운 요구라기 보다는 구래(舊來)의 관습적인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특권의확인, 지방관리의 직권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 1조 교회의 자유, 제 2, 3, 43조 상속(相續)료제한,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軍役代納金)·어용(御用)금을 부과하지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봉신(封臣)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감금할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헌법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헌장을 발표하여 위기를 수습한 존왕은 다시 인노켄티우스3세 교황에게 대헌장은 강제로 발표되었다고 강조하고 그 무효의 선고와, 반란을지도한 캔터베리대사교와 귀족들을 파문에 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래서 국왕과 그 신하들 간에는 다시 전쟁 상태가야기되었는데, 존왕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제 61조 대헌장의 실행을 감시할 25인의귀족위원회 구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존왕이 우세했으나 그 결말을 보지못하고 죽고, 그의 아홉 살의 어린 아들 헨리 3세(Henry Ⅲ : 1216~1272)가 즉위하여10년 이상 모후인 이사벨라가 섭정하면서 귀족들과 타협이 이루어져 문제의 61조를비롯 왕권에 불리한 조항들이 대강 제거되지만 대헌장 자체는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존(John)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여러 나라에서 가장흔한 남자 이름으로, 원 뜻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의 은혜"라고 합니다.영국에서는 존이 다른 나라에서는 장(Jean:프랑스), 요한/요하네스(Johann/Johannes:독일),이반(Ivan/Evan:러시아), 조반니(Giovanni:이탈리아), 후안(Juan:에스파냐) 등으로불리며, 잭(Jack), 조니(Johnny/Johnnie)는 그 애칭이고, 여자 이름으로는 조안(Joan),조안나(Joanna), 제인(Jane), 재니트(Janet)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후 영국왕명에서 존이라고 사용한 군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헨리, 에드워드,리처드, 윌리엄 등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존왕의실정과 명예롭지 못한 치적에 대한 이미지가 그 후손들 역시 반갑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헨리 3세는 20세의 성년이 되어 모후의 섭정(攝政)에서친정(親政)을 시작하였으나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은프로방스의 엘리너(Eleanor)와 결혼하였고(1236), 그의 누이 엘리너가 프랑스에 봉토를가진 레스트백(?arl of Leicester)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ior)와 비밀히 재혼하여,왕실 내에서는 그의 어머니, 처, 매부(妹夫) 등이 모두 프랑스 사람들이 였기 때문에외척의 세도가 영국의 왕정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국 귀족들의 민족 감정과 결부되어 왕과프랑스 출신 총신(寵臣)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 귀족들은 다시 단합해서 왕에게 옥스퍼드조례(Provisionsof Oxford) 29개조를 강제로 승인케 하였습니다.

이 조례에는 왕정을 감시하기 위한 15인 위원회 설치,외국인 총신 추방, 왕의 권력 제한, 귀족 중심의 과두제(寡頭制) 실시의 규정 등을포함하고 있었는데, 이의 시행을 두고 교황(Alexandros Ⅳ), 프랑스국왕(Louis Ⅸ)등이 개입하여 영국 귀족들은 왕당파와 개혁파로 분열하고 내전 상태로 돌입하게되었습니다.

이 때 프랑스에서 다시 건너온 왕의 매부 시몽은 개혁파에가담하여 왕당파를 류우이스(Lewes) 싸움에서 이기고, 헨리 3세와 왕자 에드워드1세를 사로잡아 옥스퍼드조례를 다시 승인하게 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1264. 6 ~65. 1)에 영국의 각 도시와 주(州)의 대표들을 포함한 귀족회의가 개최되었고, 이것이영국의회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헌장이 발표되어 영국인 의식이 표면화되었고,옥스퍼드 조례가 승인되고, 영국식 의회가 등장하여 이것이 구체화 되자, 귀족의자녀교육에서 프랑스어 보다는 영어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국사에서두 가지 큰 의미가 있는데, 영어가 공통어가되어 국민의식을 일깨웠다는 것과, 이로인해서 기사단과 앵글로 섹슨계의 지주층이 융합하여 영국 특유의 상류사회 젠트리(Gentry)를형성하였는데, 이 젠트리가 양모산업과 지방행정, 지방자치를 주도하고 이 후 영국발전에 원동력이 되였습니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1세(Edward I : 1272∼1307)는흔히 긴다리 에드워드(Edward Longshanks)라고도 하는데, 왕자 시절에 시몽 드 몽포르의반란으로 1264년 헨리 3세와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다음해에 시몽을패사(敗死)시키고 부왕의 지배를 회복하였으며,

즉위 후에는 강력하고 유능한 국왕으로 이름을 떨쳤고,여러 가지 입법을 단행하여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치세(治世)는봉건제도 해체의 초기에 해당하며, 그에 따른 왕권의 신장, 국가기구의 정비 등에서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는데, 우선 법제(法制)의 정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발달해온관습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법률을 많이 제정하였습니다.

또 입법·사법·행정의 기능이 분명하지는 못하였지만분리되기 시작하였고, 국왕재판소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고, 그가 소집한 모범의회(1295)는의회사 전형을 이루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웨일스를 정복하고 이어서 스코틀랜드를공격, 진중에서 죽었습니다.

이 후 영국은 에드워드 2세를 지나 에드워드 3세 때에프랑스의 카폐왕조가 단절되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자 그 왕위계승권 문제로 양국간에는다시 지루한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되었습니다.

나. 군주 이외의 지배 세력들

(1) 로마가톨릭교회와 교황

교황권의 전성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1250년을고비로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황의 세력이 강했을 때도 막상 교황권의 본거지인로마에서는 흔히 귀족 당파의 괴뢰(傀儡)라고 불렀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로서는법보다는 항상 주먹이 가깝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군왕 보다는 가까이 있는로마귀족 당파에 영향을 더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언제 군대를 이끌고 쳐올지 모르는 황제라는존재가 버티고 있을 때는 매사에 근신을 하지만, 황제라는 대립(對立)이 사라지자,13세기 후반의 교황선거는 이 도시 귀족 당파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수개월 혹은수년간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교황파(Guelf)니 황제파(Ghibellin)니 하는 것은 이미 옛이야기에 불과하였고, 각자의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교황권에도 왕권에도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는 불신이 팽배하여,교황의 도시 로마조차도 정치적 독립을 획득해서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어떤 강력한 권력과 제휴(提携)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프랑스의 왕권을 지지하고그를 후원하여 그런대로 필리프 3세나 샤를 1세의 치세 기간에는 그 권위를 지키고있었으나 이들이 죽고, 필리프 4세가 즉위하여 교회재산에 대한 과세와 성직 서임권을행사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하자, 전과는 사정이 훨씬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로마의 명문출신으로 교회법학자 였던Benedetto Caetani가 교황으로 선출되어(1294.12)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VIII:1294~1303)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교황권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필리프 4세의교회정책에 반대하고, 1296년 교황청에 허가없이 성직자들에게 과세하지 못한다는클레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를 발표하여 필리프 4세에게 정면 도전하였습니다.

필리프 4세가 여기에 맞서자 불리함을 느끼고, 다시이를 수정하여 타협을 시도하였고, 교황의 사절로 파미에르의 사교를 필리프 4세에게파견하였습니다.

아시시의 문사절로 온 파미에르의 사교가 안하무인격으로 너무 건방지게 굴자 이에 필리프 4세는 역겨움을 참을 대로 참다가, 드디어1301년 그를 체포하고 대역죄와 이단의 혐의를 씌워 교황에게 성직 해임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의 성직자 전원을 로마에 소집해서필리프 4세를 상대로 "들어라, 사랑하는 아들들아(아우스쿨타 필리:AuscultaFili)"를 발표하고 필리프 4세의 부당함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1302년 4월에 노트르담에서 성직자, 귀족, 평민의 삼부회(Three Estetes)를 소집하고,교황의 탄핵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반년 뒤 교황은 독일측의 지지를 기대하면서또 하나의 유명한 교칙 "단 하나의 성스런(우남 상탐:Unam Sanctam)"을발표하자, 이에 프랑스측에서는 왕과 고문들이 루우브르궁에서 비밀 회담을 가진다음 교황을 이단 및 매관의 혐의로 고발하고 폐위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303년 9월 7일 프랑스왕의 고문인 로마 법학자 기욤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는 심복 부하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들어가 로마교외의 아나니(Anagni)에서 피서 중이던 교황을 급습하여 감금하고 퇴위를강요하였습니다(아나니 사건).

이에 교황은 순교(殉敎)를 각오하고 협박에 굴하지않자, 아나니의 지도자들이 반프랑스 폭동을 일으키고... 노가레는 겁을 먹고 달아났고,교황은 무사히 로마로 귀환하였으나, 분을 참다 못하고 그의 지병(持病)인 결석(結石)이악화되어 1개월 뒤에 죽었습니다. 그 자신이 교회법 학자였고 초기 르네상스의 장려자였지만,교황권은 그 이후로 쇠퇴하여 갔고, 1309년 클로멘스 5세는 교황청을 로온강 가의아비뇽(Avignon)으로 옮겨 이른바 바빌론의 포수(Babyronian Captivity of Papacy)가시작되어 이 후 1377년 까지 교황은 본거지 로마를 떠나 여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2) 사제(司祭)와 수도승(修道僧)

로마가톨릭교회의 거대한 조직에서 그 정점에 교황을두고 있다면 맨 아래에는 교구사제(priest:司祭)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신부(神父)라고 경칭해서 부르는 이들은 주교의 권위 밑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하느님의백성의 일부를 다스리고, 소교구의 신자를 거느려 봉사하는 성직자로서 농업이 주요산업으로 되어 있던 중세유럽에서, 일반 서민과 직접 대면하고, 서민들의 신앙에관한 여러 가지 문제, 즉 고해(告解), 세례, 혼인, 종유(終油), 매장 심지어는 죽은후의 운명까지도 맡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이해하게 되면 중세유럽사회를 아는데 큰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이나 주교, 수도원장에 관한 기록은 많으나이들의 기록은 교회기록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그들 자신들이 남긴 기록도 아주 적어서상세한 내용을 아는데는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교구사제 중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경우는 두 가지 인데, 학문적으로 아주 박식하고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남긴 경우와,반대로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해서 악명을 남긴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 못된소수의 사제를 통해서 전체를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의 행위에는공통적인 요소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대강의 윤곽은 잡을 수가있습니다.

우선 마을의 사제들 하면 목가적이고 서민적인 인상을풍기고 있지만 사실을 그렇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각 교구의 교회는 교회측에서 짓기도했지만, 세속 영주가 돕는 경우가 많았고, 이럴 경우 영주의 친척이나 심복(心腹)이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제는 마을의 성직자이면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영주이거나, 혹은 그와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고, 교회는 성새(城塞)에 버금 갈만큼 규모면에서 큰 것도 있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과 약탈로부터 방어하는 데에이 교회가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가끔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고외적에 대항하기도 했고, 사교로부터는 독립을 얻고자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12 ~ 3세기 교회를 괴롭히게 된 것은독립을 위해서가 아니고 무식(無識) 때문이 였다고 하는데, 세속영주가 건설한 교구교회의사제든, 완전히 교회의 지배를 받는 사제든 무식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이들은 인간의 영혼보다는 교구의 수입을 더 중요시하고, 교구에는 대리(代理)사제를두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을 치러야 했지만,시험이라는 게 라틴어 명사나 동사의 어미(語尾)변화 몇 개와 성가(聖歌) 몇 가지만알면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것은 일류에 속하고, 대개는 시험을치루지 않고 뇌물(賂物)이나 다른 교구의 사교로부터 승인 등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였는데,...사교가 이런 사제의 승인을 거부하면 사제후보자는 문제 해결을 대사교나 교황에게호소하고, 이렇게 되면 사교는 조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 교구의 성무(聖務)를 중단해야하는 규정 때문에, 이런 형편 없는 사제의 교섭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제들이 성무를 집전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고,이를 대행해주는 설교사란 것이 있어서 이들이 미사나 설교를 대행하였습니다. 그결과 12 ~ 3세기에는 이들 설교사들의 조합까지 생겨났고, 그들은 보수를 따라 어디든지갔으며, 몇 년 간 한 교구 사제의 일을 도맡아 봐 주는 설교단까지 생겨 났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사제들이 무식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수입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런 일을 귀찮게 생각하는 사제들도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3세기 초 파리 지방 공의회에서는 사교의승인없이 대리 설교사를 두지 못한다고 선언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실효를거두었지는 의문입니다.

악덕 사제 가운데는 허가 없이 임지를 이탈하거나속인과 다름없는 복장을 하고 의사, 변호사, 서기, 상업이나 금융업까지 겸해서 돈벌이에열중하였으며, 성직록, 교회소유영지, 건물등을 금융에 이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일이고, 내연(內緣)의 부부관계를 인정해 주고 비싼 수수료를 받았는가 하면, 죽어가는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수수료를 받았고, 매장이 끝나면 다시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빌어준다는 명목으로 수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대처(帶妻)를 금했지만 그것 역시 구호에 그쳤고여러 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린 사제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제의 타락은농노 출신의 사제가 많았던 남프랑스에서 특히 심했으나 북부 프랑스에서도 흔한일이 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높은 학식과 덕망 있는 사제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사람이 프랑스의 기느백(伯) 보드앵2세 밑에 있던 랑베르(Lanbert) 같은 사람이 였는데그는 영주 기느백을 중심으로 교구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수도회(ordo/congregatio)는 가톨릭교회에서 수도를목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단체로서,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공식단체로 인정을 받게되는데, 그에 속한 수사(修士)들은 각각의 수도회 회칙(회헌)에 따라 청빈·정결·순종등의 서원(誓願)을 한 다음, 그리스도와 닮은 생활을 함으로써 완전한 덕(完德)을쌓는 데 노력하고, 자기와 모든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생활공동체를영위합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은 스스로의 의지로, 하느님의 특별한부르심에 따라 3가지 서원을 지킬 의무를 지고 사랑하는 신에게 온전히 몸 바쳐 공동생활을영위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의 삶이 수도생활입니다. 성령(聖靈)의 감화로 완덕을쌓아 가는 사람들의 집단이므로, 수도회 전체로 보아도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교회전체를 위한 부름에 응하여 봉사를 해 왔습니다.

수도회는 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일정한 수련기간을겨쳐 행하는 서원(誓願)에 따라, 성식(盛式)서원을 하는 수도회(ordo)와 단식(單式)서원만을하는 수도회(congregatio)로 크게 나누고, 다시 생활양식과 목적에 따라 관상수도회(觀想修道會)와활동수도회(活動修道會)로 나누는데, 전자는 금역을 지키고 세속을 떠나 기도와 노동에만종사하며, 후자는 학교·병원 경영·사회사업·출판·포교 등의 활동을 하고, 이두 가지를 합친 중도형·절충형의 수도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이 주로 사제들로만 구성된 사제수도회,대부분이 사제가 아닌 수사들로 구성된 수사수도회 등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도승(修道僧)은 높은 담장에 둘러 쌓여 외부와 격리된체 기도와 노동 봉사등의 근엄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12 ~3세기에 와서는 그 양상이 많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수도원의청빈(淸貧)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어서 우리들을 의아(疑訝)하게만들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수도원에기진(寄進)하여 속세(俗世)의 영화(榮華)와 사후(死後)의 영혼(靈魂) 구제(救濟)를기원(祈願)하였고,....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된 수도원에서는 이를 관리할 만한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장의 취향에 따라 수도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등 재정상의 많은 허점을 보였다고 합니다.

11세기 까지만 하여도 수도원에는 십자가 외에는 별다른장식이 없었으나, 그 후부터는 귀족적인 사치가 수도원을 엄습해서 세속 못지 않은치장과 분에 넘치는 생활로 기도와 노동을 신조로 삼았던 본래의 정신은 먼 옛날의이야기가 되었고, 수도사들 역시 그 질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도원이 귀족적 시설이 되었다는 것은, 귀족은서민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수도원의 수준을 높이는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수도원에 들어오는 사람 가운데는 종교적인 열정(熱情)에 따라 귀족의 자제를비롯하여 선량(善良)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교회에 못다닐 정도의 불구자나세속에서 아무 쓸모 없는 폐인(廢人)을 데려다 가두어 두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엄격한 규율과 적막한 환경에 견디지못하고 환속(還俗)하는 자가 늘어났고, 이것이 다른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또한 사실입니다. 이 무렵 약탈을 일삼던 용병대에 수도원 출신 남녀가 많았다는것도 대개는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대학에서의 수학(修學), 각지의교회나 수도원에 보내는 사절(使節), 설교와 기타 용무등으로 수도원의 높은 담장을넘어 세속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졌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시대의 수도사들은세속적인 모든 일에도 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원의 퇴폐(頹廢)현상은 교구사제의경우와 비슷했다고 하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수도원 재정의 난맥과 안팎에서 벌어진소송(訴訟)을  들 수 있습니다. 세속으로부터 기진받은 막대한 재정수입을 두고,수도원장이 탐학(貪虐) 해서 재정상의 문제가 발생하면 곧 모든 문제가 얽히어 수도원내부의 대립이 이루어지고, 결과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스러워야 할 수도원에서 원장이살해되는 비극이 필리프 2세의 치세 기간 프랑스에서 여섯 차례나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리무생(Limousin)에 있던 한 수도원에서는공사(公私)에 관여하기 좋아하는 수도사들과 탐욕스러운 재산 관리단 사이에 12세기후반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약 70년간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런 것은 수도원의재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아무리 퇴폐했다고 할지라도 수도사가 교구의 사제처럼결혼을 할 수 없었던 욕구 불만이 원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그러나 한편에서는 12세기 모든 서구교회 수도회들의 유일한 회칙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회칙을 따랐고, 유럽이 문화적암흑기에 들어갔을 때,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고전문화를 연구하며 황무지를 개간하는등 정신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유산계급이 형성되는등, 사회적인 변화와 동시에 교회나 수도회가 큰 재산을 소유하게 되자, 가난한 서민층으로부터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 때 이탈리아의 아시시에 프란체스코회, 프랑스의 툴루즈에도미니크회와 같은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가 각각 교황의 승인을 받고 세워졌는데,

이들 수도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사상을 본받아가난한 생활을 자원함으로써 민중에게 참 그리스도 인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하나 수도원의 중요한 선행은 자선사업(慈善事業)으로서,클뤼니파나 시토파에 속하는 큰 수도원에서는 으레 여인(旅人)부와 자선(慈善)부를따로 두고,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행려 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는데,많을 때는 하루에 1만 5천개의 빵을 나누어 주고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수도원의 재정은 적자를 면할 수 없고,재정난에 몰린 수도원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고리대금업자까지 끼여 들어 파산하는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재정운영의 무 원칙은 수도원을 타락시키기도 하였고,파산(破産)을 몰고와 수도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례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현대사회에서도재정운영을 잘못하여 작게는 가정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회사가 망하고 국가의위기를 불러 오는 수도 있는데, 이것을 수도원의 경우에서 교훈을 구한다면, 부당한이득으로 챙긴 사람들의 재산을 헌납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소득재분배의차원에서 환영할 일이지만, 가난함을 스스로 이겨 내려는 의지가 사리지고 남에게의존하는 좋지 못한 풍조를 만들었다면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고볼 수 있습니다.

(3) 기사(騎士)들의 생활

기사 서임식기사(knight)란 중세 서유럽에서의무장기병전사(武裝騎兵戰士)를 말하는데, 점차 이것이 특정한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바뀌었습니다. 단순한 신분만으로 한정지우면 우리들의 봉건적 왕조사회에 있었던양반들, 즉 관료나 지주 층과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의 본업이 학문이 였다면 기사의 본업은전투가 핵심이 였다는 점에서는 엄연히 구별됩니다.   사실상 전투원은그 당시 영주(領主)·귀족과 거의 비슷한 사회적 범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기사의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왕·공작·백작과 같은 대귀족이 아닌 지방의소영주에게 흔히 기사의 칭호가 붙는 경우로서, 이와 같은 예는 11세기부터 출현하였고,둘째는 대 귀족이거나 소 영주이거나 간에 개인적 자격으로 기사라고 부르는 경우로서영예와 고귀한 신분을 갖춘 완성된 무인(武人)의 존칭을 뜻합니다.

기사가 귀족과 구별되는 것은, 귀족은 태어나면서당연히 귀족이 될 수 있었지만, 기사는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기사가 될 수 없었고,일반적으로 유소년기(幼少年期)부터 귀족 부인의 시중과 예의범절, 전투 참가와 무술단련,마구와 무구의 사용방법 등으로 일정한 기사수업기간을 거쳐 서임식을 치러야 비로소기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윤리가 가미되어 12세기 중엽부터13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성행하던 기사도와 귀부인 숭배를 주제로 한 설화문학의수 많은 기사도이야기(romans de cheval‎!erie)를 만들어 냈는데  이미 6세기경전설적인 영국 아서왕의 궁정에 모여든 원탁의 기사 이야기가 있고, 12세기 후반프랑스의 시인 C. 드 트루아가 샹파뉴 백작의 궁정에서 썼다고 하는 에렉과 에니드(Erecet Enide), 영국의 플랜태저넷(P1antagenet) 왕조의 시조 헨리 2세의 궁정에서 일하던H . 토마가 쓴 트리스탄과 이즈 이야기(1170년경), 독일의  H . von 아우에가기사 전설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를 썼고, V . von 에셴바흐는 파르치발(Parzival: 1210)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들 문학작품에서는 사랑과 무용담이 가필되어 흥미를더하게 하지만 실제 이 시기 대부분 기사들의 생활은 그렇게 로멘틱 하지도 못했고여인을 숭배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살던 성(城)은 성벽의 두께가 2 ~ 3미터나 되었고, 그 성벽에는 활 쏘는 구멍과 작은 창이 있을 뿐인데, 이것을 나무나쇠로 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부는 늘 어둑 컴컴하고 습기에 젖어 있었으며, 바닥은흙 위에 짚이나 풀을 깔았고 의자의 쿠션은 물론 없었으며, 그것도 딱딱한 긴 벤치였고,벽난로에는 굴뚝이 없었으므로 열은 그대로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 난로에 바짝다가서지 않으면 늘 추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성(城)은 생활보다는 대개 방어에 이용되었고,영지(領地)의 곳곳에는 살림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살림집은 대개 2층으로 되어있어서 아래층은 무기고, 창고, 감옥으로 사용하였고, 2층은 생활공간으로 외부와연결되는 통로를 두고 있었습니다.

평시(平時)의 기사는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그들이 가장 즐겼던 것은 마상시합(馬上試合)인 토너먼트(tournament)였습니다. 지금은운동경기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이 토너먼트가 제 1회 십자군 원중 후 프랑스에서시작되어 유럽각지로 보급되었는데, 기사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시합이 였기 때문에,경기에 지면 말과 마구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몸 값을 지불한 후에야 자유의 몸이되기도 하였으며, 상처가 심하여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승자가 되면 수입도 괜 찮았고 용명(勇名)도떨칠 수 있었으므로 기사들에게는 전쟁 다음 가는 행사였으나, 일반인들은 좋은 구경거리로알았고,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기화로 해서 장사꾼은 돈벌이에도 재미를 붙였다고 합니다.이런 마상시합은 유력한 영주의 결혼식이나 그 아들의 기사 서임식 때에 곁들인 행사였으나,영국의 리처드 1세는 부하들에게 이 경기를 장려하고 경기가 열릴 때마다 과세(課稅)해서돈도 벌고 구경도 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빈도가 늘어나,2주일에 한 번 꼴로 이웃 기사 사이에 토너먼트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기사들이 토너먼트 다음으로 즐긴 것은 사냥이 였습니다.이때는 부녀자도 참가하여 매 사냥을 하였지만 기사들은 주로 사슴, 곰, 멧돼지 등을사냥하였는데, 짐승을 쫓다가 다른 사람의 영지에 침입한 죄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적지 않았으며, 작물에 피해는 입히는 짐승을 농민이 죽이면 살인죄로 몰아서 처형하는폐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농민 보다는 그들의 사냥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기사들의 식성(食性)도 대단해서 평소에도 소, 돼지, 양의 고기를 즐겨 먹었고, 포도주나맥주를 마시는데는 아주 큰 잔이 등장했으며, 사슴이나 멧돼지를 사냥하면 고기를네 등분하여, 한 끼에 한 등분씩 먹었고, 감미료(甘味料)는 벌꿀이 고작이 였기 때문에과자는 모양도 분량도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어마 어마한 식욕(食慾)으로 왕성한 에너지가축적되고.....토너먼트나 사냥이 없을 때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무장한 인형을 창으로찌르고 칼로 베는 등 색다른 운동(훈련)을 하였으며, 그럴 수도 없을 때에는 곰과싸우듯 개와 놀았습니다. 겨울이 되어 아무 곳에도 에너지를 소비할 곳이 없으면,고의로 정맥을 끊어서 피를 흘려 없앴는데 이런 것이 중세 기사의 건강 유지 방법이였습니다.

이들에게 체스 등의 오락도 있었고, 음유(吟遊)시인이나오케스트라를 초청해서 연예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이런 저런 것에 싫증이 나면 영주의최고 즐거움은 손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 였습니다. 이 때 그의 많은 딸들은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데, 정력이 넘치는 기사를 유혹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기사들은 매우 고자세를 취하면서 여인들의 구애(求愛)를 기피하기도 하였으나,...교회법에 따라 결혼한 정처(正妻)만 있으면, 첩을 거느리는 것은 교회에서도 묵인하였기때문에, 피임법을 몰랐던 당시로서는 수 십 명의 자녀를 가지는 것도 흔한 일이 였다고합니다.

중세 유럽의 대학, 연금술, 스콜라 학, 건축, 도시와상업 등  등... 이 회에서 마무리하고자 하였으나 쓸대 없는 말이 많아지다보니...다음회로 넘기겠습니다. 그리고 서양에 대해서 우리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역사적인 지식은 그 피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꾸만 말이 많아지는 것 이해하시기바랍니다.



쟈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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