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다선일여 부경다회 품차 후기 입니다.
오늘 부경다회엔 금원님, 호접몽님, 사랑초님. 소영님, 정인님, 영인님, 꼬꼬마님, 돌꽃님, 명월(남천)님, 시크릿님, 저 딸기아빠 이렇게 총인원 11명이 참석 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다회는 금원님의 운남 차산방문의 얘기를 들으면서 시작 하였습니다.
이번다회는 올해 이른봄차 품다 를 주제로 시작하였습니다.
1. 이무마흑 고차수 모차
이무마흑 모차 (사진빌려옴)
이무마흑 세차후 엽저
이무마흑 탕색
이무마흑 우리고 난후 엽저
햇차는 공히 7g씩 투차 하여 진행 하였습니다.
오늘의 첫시음차는 이무마흑고차수로 시작되었습니다.
금원님이 내려 오실때 7g씩 분배하여 내려 오셨다하여 공히 7g 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세차를 마신 엽저를 보니 햇차의 느낌이 가득 합니다.
아직은 쇄청의 맛이 남아 있다고 하십니다.
세차물을 마셔 봤을때 풋풋한 향과 함께 풍부한 향이 넘쳐 납니다.
첫차의 기대감이 커집니다.
역시나 이무마흑입니다.
첫차에서 나오는 풍부한 향과 부드럽움
7g을 투차했음에도 고미가 거의 느껴 지지 않고 시원한 맛이 입안가득 채워줍니다.
2012년 이무마흑에 비해 좀더 좀더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느껴지는것 같습니다.
2. 남나산 반파채 고차수 모차
남나산반파채 모차 (사진빌려옴)
남나산 반파채 세차후 엽저
남나산 반파채 탕색
남나산 반파채 우리고 난후 엽저
두번째 차는 남나산 반파채 고차수 입니다.
남나산 차왕수는 아니지만 차왕수 근처의 반분채 계곡 끝자락 차원의 모차라고 합니다.
세차후 개완에서 피어 오르는 향이 코끝을 자극 합니다.
짙은 난향이 넘실거립니다.
세차한 차를 마셔보는데도 남나산 특유의 단맛이 느껴집니다.
첫차를 마십니다.
이무마흑향과는 전혀 다르지만 좋은 난향이 구감을 자극합니다.
난향이 지나고 단향과 단맛이 입안가득 퍼져 옵니다.
주변분들의 반응또한 좋습니다.
공통적으로 단맛을 많이 강조 하시네요!!1
여기서 남나산에 대해 잠시 적어 봅니다.
남나산 (南糯山)
남나산 (南糯山:1,850m)은 행정구역으로는
맹해현 격랑화합니족향 남나산촌(勐海县格朗和哈尼族乡南糯山村)이다.
현지의 도로 사정이 매우 좋아 접근성이 편리한 차산중의 하나이다.
맹해현 인민정부 소재지에서 214번 도로를 따라 약24Km가면
합니족문화원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편 남쪽 산길로
약 8Km 더 가면 남나산이 나온다.
남나산 서쪽 주변에 형성된 마을인 남나산촌(南糯山村), 다왕촌(茶王村),
반파노채(半坡老寨), 반파신채(半坡新寨), 아구노채(丫口老寨), 아구신채(丫口新寨),
다의채(多依寨), 수하채(水河寨), 석두신채(石头新寨)、석두1대(石头一队),
석두2대(石头二队),등에서 고차수 모료라는 대수야방차가 생산되고
남나산촌위원회(南糯山村委会)관할 지역인 향양채(向阳寨), 고랑채(姑娘寨),
영존촌(永存村), 이전촌(尔滇村)、죽림촌(竹林村), 간달촌(赶达村), 통달촌(通达村),
남달촌(南达村), 다원신촌(茶园新村), 신락촌(新乐村), 출과1대(出戈一队),
출과2대(出戈二队), 연산촌(连山村), 부신촌(富新村), 신로촌(新路村), 조양촌(朝阳村)
에서도 남나산을 상표로한 재배 보이차가 대량 생산되고 있다.
특히 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곳에 소호촌위원회(苏湖村委会)가 있는데
관할 마을의 명칭이 남나산촌 마을의 이름과 같은 반파채(半坡寨), 석두채(石头寨),
아구신채(丫口新寨), 로 같은 마을 이름의 차가 생산되고 있어서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격랑화합니족향(格朗和哈尼族乡)에는 3곳의 고차원이 있다고 조사되었는데
남나산고차원(南糯山古茶园), 파사촌고차원(帕沙村古茶园), 파진촌고차원(帕真村古茶园)이다.
남나산고차원(南糯山古茶园)의 다원 면적은 약12,000묘이며
맹해현의 전고차원 면적이 46,000묘 이기 때문에 남나산 고차원이
고차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보이차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남나산 고차수는 반파채(半坡寨) 주변에 있다.
반파노채차수1호(半坡老寨茶树1号)는 해발 1,563m에 있고 수고(树高)는4.9m정도 이고
운남보이차종(Camellia sinensis var assamica)이며 수령은 약800년 되었다고 한다.
반파신채차수1호(半坡新寨茶树1号)는 해발 1,701m, 수고(树高)는약4m,
반파신채차수2호(半坡新寨茶树2号)는 해발 1,652m, 수고(树高)는 약4.7m이고
모두 철조망을 둘러친 보호수로 채엽이 금지되었다.
고차수의 차성과 맛과 향기가 잘 육종된 맹해대엽종 재배차밭의 면적은
격랑화합니족향(格朗和哈尼族乡)지역만 49,403묘(亩)로
맹해현 전체(245,000묘)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다원의 넓이는 2005년 실사자료지만 인민정부의 신농촌 건설 계획이 잘 진행되어
2011년 현재는 대략 30%정도 확장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만송 고차수모차
만송 세차후 엽저
만송 탕색
만송 우리고난후 엽저
3번째 차로 만송고차수를 마십니다.
만송??? 처음 들어보는 차산지 였습니다.
근데 모차가격이 노반장보다 두배정도 더 비싸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싸다고 하니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 하며
기대감을 가지고 시음을 시작 합니다.
비싸다고 해서 그런지 세차한 차맛이 매우 달게 느껴 집니다.
남나산반파채도 달게 느껴졌는데 남나산보다도 더 단맛이 풍부한것 같습니다.
제대로 기대감을 가지고 첫차를 시음 합니다.
맨먼저 단향과 단맛이 넘쳐 납니다.
화려한 향도 풍부하게 느껴 집니다.
와 맛있다 란 말이 나오더군요!!!
단맛이 3~4번째 가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량감까지 더해져서 청량한 단맛이 혀끝을 감쌉니다.
5~6번째 로 가면서 단맛이 줄어 들면서 청량감이 확 다가오는것이 참으로 좋은 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비싸기도 하지만 맛있는 차가 왜 유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송이란 곳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이무의 6대차산중에 의방차구에 들어가는 만송은 황제에게 진상하는 공차를 만들던 지역입니다. 현재도 노반장 모차가격의 두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니 그 이름값도 대단합니다. 만송 고수차의 봄차 생산량은 20kg내외로 그 양이 아주 적습니다. 많은 차수들이 문혁시기에 베어졌고 이후 농민들이 화전을 일구면서 차수들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왕자산 산기슭에는 베어진 차수에서 다시 가지가 나와 자라는 차수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의방지역의 차들은 차의 향이 아주 좋습니다. 고매하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것 같습니다. 만전이 후운이 좋고 넉넉한 품격의 차라면 의방은 곧곧하고 고매한 품격을 가지고 있지요 그렇지만 후운이 짧아서 후운까지 갖춘 의방차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 만송은 넓은 의미에서 의방차구에 들어갑니다. 의방에서는 좀처럼 찾기힘든 깊은 후운 탕의 점력이 대단하면서 고매한 향과 조용한듯 하면서 입안이 꽉차는 구감이 훌륭한 차입니다.
만송촌(曼松村)은 운남성(云南省) 서쌍판납(西双版纳) 맹랍현(勐腊县) 상명이족향(象明彝族乡) 만장촌위회(曼庄村委会)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산구(山区)이다. 향정부(乡政府) 동쪽에 위치하며 촌위회(村委会)에서 12.00 km,향정부(乡政府)에서 12.00km 떨어져 있다. 해발고도는 900.00m,연평균기온(年平均气温) 27.00 ℃,연강수량(年降水量) 1,700.00mm로서 다엽(茶叶) 등의 농작물(农作物)을 적절히 재배하고 있다. 촌 전체는 하나의 촌민소조(村民小组)에 의해 관리되는데,농호(农户) 33호(户)에 향촌인구(乡村人口)는 186인(人)으로서,이 마을은 빈곤촌(贫困村)에 속하며,차농(农民)은 주로 양식 위주로 수입을 얻고 있다.
만송(曼松)은 이족(彝族) 촌락(村落)인데,현지인들은 스스로를 "향당족(香堂族)"이라 하는데 이들은 라오스에서 이주해 온 극목인(克木人: Khmus)의 후예라 한다.
만송채 인상(曼松寨印象)
만송(曼松)은 원래 의방구(倚邦区) 제일향(第一乡) 관할 구내에 속하였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만송노채(曼松老寨)에 거주하던 향당족(香唐族) 주민들이 차를 잘 재배하여(善种茶) 만송차(曼松茶)의 품질이 뛰어났으므로 공차(贡茶)의 반렬에 올라 “매년 공차 100담을 실어보내다(年解贡茶100担)”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차(贡茶)로 이름을 얻어 그 명성이 널리 퍼졌다. 청대(清代) 공차(贡茶)의 연원(源头)과 유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2006년에 필자는 처음으로 만송신채(曼松新寨)를 찾았는데, 신채(新寨)는 해발 900m에 위치하여 32호(户) 170여명의 촌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주로 향당족(香唐族)으로 칠년 전에 만송노채(曼松老寨)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도광(道光) 연간(1821~1850)의 《보이부지(普洱府志)》에는, 보이차(普洱茶)는 옹정(雍正) 13년(1735)부터 의방토천총(倚邦土千总)이 구입의 책임을 맡았으며 (조당재(曹当斋) 이후 사(土)를 총(总)으로 변경), 의방(倚邦)의 만송차(曼松茶)가 황제(皇帝)의 전용차로 지정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청대(清代) 황가공차(皇家贡茶)에 대한 극도의 호기심에서 필자는 2006, 2009, 2010년 세차례에 걸쳐 만송(曼松) 현지를 실제 답사해 보았다.
풍속(风俗):만송(曼松)의 주된 민족은 이족(彝族) 중의 향당족(香唐族)으로, 다른 고차산(古茶山)에 있는 차농(茶农)들이 손님을 극진히 맞아주는 습속과는 달리,만송(曼松) 현지인들은 낯선 손님을 보면 긴장하고 외부 사람과의 교제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천(四川), 석병인(石屏人)의 후예가 비교적 많고,아이들은 아주 총명하며,필자가 다녀보았던 차산 중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是我去过的茶山里最爱读书的).
현상(现状) 및 변천(变迁):06년에 갔을 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나 현재에는 전기가 들어와 있으나 촌장(村长) 집에만 위성TV가 한 대 있었다. 05년 경,광동(广东)의 한 사업가(老板)가 만송촌(曼松村)의 대부분 토지에 대해 30년 사용권을 조차하여 차나무와 고무나무를 심어 키우고 있다. 당시 호당 수입은 3~5만원(万元)이었으나,그 후에는 (임대해 줄) 토지도 얼마 없고 따라서 수입도 얼마 되지 않아 현재 만송촌 촌민들의 생활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만송(曼松)에 백년 이상되는 고차수(古茶树)는 70 그루를 넘지 않으며,산량이 극히 적어,09년 봄에 필자가 만송(曼松)에 갔을 때 듣기로는 고수(古树) 춘차(春茶)의 산량이 15kg 정도라 하였으며,10년의 고수(古树) 춘차(春茶)는 17kg으로,현지 가격이 kg당 2000~3000원(元)이었다. 만송(曼松)의 고수차(古树茶) 원료 가격이 너무 비싸고, 산량이 극히 적은데다,삼림 중에서 야방(野放) 상태로 생장하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만송촌(曼松村)의 촌민들은 누구나 모두 채엽할 수 있으므로,만송촌(曼松村)의 촌민들은 집안 사람 외에는 비록 친척이나 이웃에게도 고수차(古树茶)의 생장지를 알려주지 않으며,특히 외부 사람에게는 만송고차수(曼松古茶树)를 보여주러 데려가지도 않으며,또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와서 채엽하는 것도 막고 있다. 필자의 경우 06년부터 매년 의방(倚邦)에 가 보고 있지만 2010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설 속의 만송고차수(曼松古茶树)를 볼 수 있었다. 필자는 07년부터 만송(曼松)의 아이들 중 네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주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은 이미 경홍(景洪)의 고등학교를 거쳐 곤명(昆明)의 한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비록 학비가 대단히 비싸나 계속 장학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 만송(曼松)의 아이들이 진학하도록 장기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 온 필자를 만송의 촌민들도 상당히 신뢰하게 되어 2010년에는 현지의 초등학교 교사(이 여교사의 여동생 진학 시에도 필자가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현지인들의 수입이 너무 적어 초등학교 교사라 하더라도 가족을 경홍(景洪)의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어려운 형편이다)의 안내를 받아 만송(曼松)의 청대(清代) 황가고다원(皇家古茶园) 유지(遗址)로 가서 실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현재 만송고수차(曼松古树茶)의 문제는 과도한 채엽으로서,2010년 조춘(早春) 채엽시에 네그루가 고사하고 만춘(晚春) 채엽시에도 한그루가 고사하여 이와 같은 추세를 고려한다면 5년만 지나면 만송공차(曼松贡茶)는 역사적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품종(品种):다 자란 만송공차(曼松贡茶)의 엽편(叶片)은 엽맥(叶脉)이 8쌍(对)으로 표준적인 중엽종(中叶种)이다.
가공(工艺): 대부분의 가구에서는 채엽량이 몇량(수백g) 정도 밖에 되지 않고,가장 많이 따온 집이 4kg 정도였다. 각 과정마다 아주 세심하게 가공하고 있었으며 태운 것은 없었다. 가공하는 양이 너무 적어 집안에서 쓰는 냄비를 사용하다보니 이따금씩 약간의 잡미가 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만송차(曼松茶): “의방(倚邦)의 다엽(茶叶)은 만송차(曼松茶)의 맛이 가장 뛰어나,만송차(曼松)를 마시면서 의방산(倚邦)을 바라본다라는 말이 있다.”;“황제가 5대차산 중의 만송(曼松) 다엽(茶叶)으로 공차(贡茶)를 만들도록 지정하고 여타 촌채의 다엽(茶叶)은 모두 필요없다고 하였다. 만송(曼松) 다엽(茶叶)은 질후미미(质厚味美)하여,그 맛이 달콤하니 입에 잘 맞고(其味甘香可口),마신 후에는 정신이 맑고 깨끗해(饮后神志清醒) 지므로 여타 차산의 차농(茶农)들은 모두 함께 돈을 추렴하여 만송다엽(曼松茶叶)을 구한 후 이를 황제에게 공납(貢納)하였다.”;“의방공차(倚邦贡茶):역사적으로 황제들은 각 차산(茶山)들이 매년 조정(朝廷)에 한차례 다엽(茶叶)을 납품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공차(贡茶)라 하였다. 그 양은 연간 100담(担: 50kg)에 이를 정도로 많았는데,이를 모두 사람이나 말로 곤명(昆明)까지 운송하였으며……역사적으로 곤명시(昆明市)에는 만송차(曼松茶)를 파는 점포나 상점이 없었는데,이는 그 값이 비싸고 또한 공차(贡茶)는 모두 만송차(曼松茶)로 지정되어 있었으므로 각 차산의 농민들은 모두 균등하게 돈을 내어 만송다엽(曼松茶叶)을 통일적으로 구매한 후 이것으로 공납(贡纳)을 대체하였는데 이에 따라 5산 차민(茶民)의 부담이 대단히 컸다.”(《판납문사자료선집(版纳文史资料选辑)》4,45쪽)
개인적인 소견으로 만송공차(曼松贡茶)의 가장 큰 특징은 첨윤(甜润)으로,마실 때 입안이 달콤하고(喝的时候口里很甜),목에서 넘어갈 때에도 단맛을 느낄 수 있어(喉头很甜),꿀물을 마시는 것 같으며(象喝蜂蜜水),차기가 아주 충분하면서도 따사로와(茶气很足又暖),조금만 마셔보면(只要喝一点点),바로 몸에서 열이 나(身体就会发热),여타 차산의 차와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라(是其它茶山远远比不上的),진정한 황실의 차맛이 난다( 真正的皇家的味道出来的)고 생각한다.
눈물어린 첨도(泪水的甜度):꿀물을 마시는 것 같은 만송공차(曼松贡茶)는 만송(曼松)의 촌민들에게 결코 꿀같은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는데,청대(清代) 말기에 이르러 공차(贡茶) 부담이 너무 과중해 져서,약 300담(황실에 100담,기타 각급 관리 요구 수량 200담),현재의 도량형으로 하면 9톤(1담이 50kg으로 본문 내용대로 환산하면 15톤) 이상을 만송(曼松) 왕자산(王子山) 중심 8km의 차산에서는 실제로 감당할 수가 없어 차농(茶农)들은 대부분의 차나무들을 베어내거나 불질러 버렸으며,차나무가 있는 집은 이 때문에 도주하여 다시는 만송촌(曼松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42년, 이미 완전히 쇠약해진 의방(倚邦)은 다시 액운을 만나,유락산(攸乐山)에서 일어난 유락(攸乐) 봉기군이 의방(倚邦)으로 공격해 와서 전란의 불길이 3일 밤낮 동안 의방(倚邦) 가로를 태워,수백년 간을 거쳐 세워진 고진(古镇)과 이 곳에 있던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모두 잿더미로 바뀌었다. 이 재난으로 의방(倚邦)은 원기(元气)가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일어설 수가 없었으며,수백호의 인가(人家)들은 타향으로 옮겨가,적막하고 황량해 진 의방(倚邦)은 심산유곡으로 되어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의방(倚邦)에는 겨우 30호 정도의 객가(客家: 한 지역에서 4대 이상을 내려오면서 생활하는 토박이에 대해 3대 이내의 집안은 그 지역의 객가라 불러 왔음)가 있을 뿐인데 그 대부분은 차상(茶商)의 후예들로써 이들은 선조들이 일군 다원을 떠나려 하지 않고 지키고 있다.(만송(曼松)은 의방(倚邦) 고차산(古茶山)에 속한 하나의 마을(村)임)마셔보면 아주 달콤한 맛이 나는 만송공차(曼松贡茶)이지만 그 속에는 이와 같이 눈물어린 사연이 가득하다고 하겠다.
[출처] 만송채 인상(曼松寨印象)|작성자 심향
나름 만송에대한 자료를 찾아 볼려고 했으나 자료가 많지 않아서 많이 올리지는 못합니다.
만송이 유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가 무지하여 알지 못한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금원님이나 감야님이 알려 주시지 않을가 하는 생각 입니다.
4. 이무 괄풍채 고차수 모차
이무괄풍채 모차 (사진빌려옴)
이무괄풍채 세차후 엽저
이무괄풍채 탕색
이무괄풍채 우리고 난후 엽저
4번째 차는 이무괄풍채 고차수 모차입니다.
만송의 차를 마시고 난 직후라 아무리 이무괄풍채라 할지라도 좀 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금원님의 당당한 말씀에 혹시나 햇었지만
역시 혹시나 였습니다.
첫차를 마시니 맑은 청향과 함께 연한 고삽미 연한 단맛 연한향들이 어어러지기 시작해서
둘차로 넘어 가니 고미가 살짝 얼굴을 내밀더니
셋차로 가선 다시 단맛이 진하게 올라오고
넷차로 가면서 다시 어울러지는 참으로 버라이이어티 하고 조화를 이루는 차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내포성 또한 좋아서 즐거운 품차의 시간이었고 만들어져서 나옿 차가 기대 되었습니다.
5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포장지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병면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탕색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탕색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 우리고 난후 엽저
5번째 차는 햇차만 계속해서 마시다 보니 부담이 되실거 같다는 금원님 말씀에
숙차를 선택하셨는것이 1993년 대리남간차창 토림패 봉황타차였습니다.
올해로 20년이 넘어서는 차로 깨끗이 보관되었슴을 병면과 탕색으로 알수가 있겠습니다.
마셔 보면 더더욱 알실수 있겠죠!!1
맑은 탕색을 보면서 군침이 삼켜지고 첫차를 마시자 노차의 풍미가 느껴지면서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집니다.
숙차의 회운에 따라오는 맛은 30년이 지나면 노차의 맛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제손이 이차가 있다면
그때까지 남아 있을까가 문제일것 같네요!!1
좋은차 맜난차였습니다.
6. 1985년 맹해차창 녹인숙병
1985년 맹해차창 녹인숙병 병면과 맹해차창 80년대 내비
1985년 맹해차창 녹인숙병 탕색
6번째 차는 일명 85녹인숙병입니다.
금원님의 평가로는 보관이 떨어지는 차품이라고 설명하시면서 차를 우리셨는데
뭐 저야 늘 좋다라고 생각 합니다.
좀 아쉽다면 뒷맛이 급하게 떨어진다는 것 말고는 전 좋았습니다.
탕색은 물론이고 맛또한 노차의 풍미를 여실히 보여 줫습니다.
아주 실험적인 요소가 많은 차일수도 있겠습니다.
7. 문혁이후 70년대중반 숙전차
문혁이후 70년대중반 숙전차 병면
문혁이후 70년대중반 숙전차 탕색
문혁이후 70년대중반 숙전차 진하게 우린 탕색
문혁이후 70년대중반 숙전차 우리고 난후 엽저
저녁식사전 7번째 차로 70년대 중반 숙전차를 마셨습니다.
금원님이 무슨 차냐고 물으셨는데
전 생차로 보고 60년대 후반 70년대 초 문혁전차라고 얘기 했네요!1
70년대 중반 초기 숙전인데 숙차의 맛이 없이 오래된 생차의 느김을 받았습니다.
노차의 풍미가 진하게 올라왔습니다.
노차의 맛을 쫓아 연한 단맛이 따라오는걸 느꼈습니다.
좋은 차는 언제 마셔도 좋은것 같습니다.
8. 2012년 애뢰산 천가채 야생아포차
애뢰산 천가채야생아포차 (사진빌려옴)
애뢰산 천가채 야생아포차 세차후 엽저
애뢰산 천가채 야생아포차 탕색
애뢰산 천가채 야생아포차 윌고 난후 엽저
저녁식사후 마신차는 2012년 애뢰산 천가채 야생아포차 입니다.
1년 정도가 지난 야생아포차 입니다.
첫차의 향은 야생차 특유의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향이 올라 옵니다.
많은 제다법이 개발되면서 정확한 구분이 없어졌지만
백차로 구분되어질것 같은 아포차입니다.
계속해서 즐기기에는 좀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가끔씩 마시는 별미로는 참으로 좋은것 같습니다.
저녁식사후 마시니 입안이 깔끔해지고 텁텁한 맛이 싹 가십니다.
아래는 북경에서 다선일여 회원분들중 가장 먼서 품차하시고 후기를 올려주신 여일님의 품차 후기중에서 잠시 빌려 왔습니다.
최근에 마신 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아포(紫芽孢)였습니다. 아포차(芽孢茶)는 글자 그대로 싹을 품은 차입니다. 예전엔 아포차(牙包茶)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알아보니 아포차(芽孢茶)가 맞네요. 싹을 품고 있으니 아직 트지 않은 거죠. 트지도 않은 싹으로 만든 차를 차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모금만으로도 봄기운을 느끼기에는 이만한 차도 없을 성싶습니다. 아포차 중에서도 자색이 도는 아포로 만든 것이라 자아포차라 합니다.
이 아포차는 천가채(千家寨) 야생 고차수의 아포로 만든 겁니다. 애뢰산의 천가채는 차나무의 고향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합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된 2700년 야생 차왕수를 포함해 천 년이 넘은 차왕수만 1000여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오래 전에 고사하여 흔적만 남은 혁등산 4000년 차왕수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최고의 야생 고차수 군락지가 바로 천가채입니다.
9. 포랑산 하개고차수 모차
포랑산 하개고차수 세차후 엽저
포랑산 하개고차수 탕색
포랑산 하개고차수 우리고난후 엽저
9번째로 마신 차는 포랑산 하개고차수 입니다.
이번에 새로 가져오신 햇차입니다.
첫차를 마시니 청량감과 함게 약간의 고미가 느껴집니다.
그 고미를 지나고 나니 단맛이 따라오네요!!
둘차부터는 난향과 화향이 진하게 올라 오면서 좋게 느껴집니다.
뒤에 오는 민트향이 마시고 난후의 입안을 가득채웁니다.
10. 포랑산 노반장 고차수 모차
포랑산 노반장 모차 (사진빌려옴)
포랑산 노반장 고차수 모차 세차후 엽저
포랑산 노반장 고차수 모차 탕색
포랑산 노반장 고차수 모차 우리고 난후 엽저
10번째 차로는 노반장고차수 햇차입니다.
이번 맹해쪽에서 일기가 달라서 바로 차산에서 구하진 못하고
아시는 분을 통해 소량의 모차를 구한것이라고 합니다.
이전 노반장에 비해 약간 어린잎들이 많습니다.
첫차를 마시니 고미도 아니고 단맛도 아닌 쌉쌉한 삽미가 먼저 느껴 집니다.
그리고 그뒤에 조금씩 단맛과 쓴맛이 느껴집니다.
마시고 난뒤엔 민트향이 올라옵니다.
제가 느끼기엔 좀 부족하다란 느낌과 삽미가 왠지 불편합니다.
제가 아직 차력이 짧아 노반장의 차맛을 잘 모른다는것이 정답이겠지요!!
하지만 노반장답게 마시고 난뒤의 회운은 계속해서 올라 오는 것이 느껴 지네요!!!
11. 80년 노홍차
80년 노홍차 세차후 엽저
80년 노홍차 탕색
80년 노홍차 우리고난후 엽저
오늘 부경다회의 회향차로 80년 노홍차가 선택되었습니다.
보이차 30년도 대단 한건데 홍차가 30년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첫차에 홍차의 맛보다는 다양한 향과 맛이 느껴집니다.
다른 회원분들의 표현을 빌리면 노차의향 감초향 약향 삼향 여러가지가 썩여있는 향이 올라온다고 하시네요.
전 약향에 한표를 던집니다.
아마도 변화기 속에 있지 않나 하는 표현도 하시네요.
30년된 홍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보이차와는 다른 그렇지만 세월의 힘은 느낄수 있는 차입에는 분명 합니다.
어떤 회원님은 여기서 10년만 더 보관하면 완전한 약향이 될것 같다는 말슴도 하시네요
다름 회원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노홍차의 구입여부를 타진 하시기도 하셨는데요
제가 금액대가 만만치 않을것 같다고 운을 띄우자
금원님이 금액이 좀 높다고 하시네요!!1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가 생각 했는데 역시나 입니다.
구매의사를 표시한 회원님은 좋은 것을 즐기는데 금액대가 문제 겠냐고 하시면서
노홍차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셨습니다.
제가 홍차를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지
홍차를 좋아 하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금액에 상관없이 구입하실수 있다는것에 부러울 따름 입니다.
오늘 또 부경다회에서 좋은 경험을 한것 같아 뿌듯한 마음입니다.
노홍차를 마지막으로 부경다회의 모든 일정은 끝이 났습니다.
마지막 품다한 차들의 엽저를 한장에 담았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부경다회는 항상 즐거움과 새로움이 공존하고
물고문의 혹독함마져 배울수 있는 곳임에 행복합니다.
멀리에서 와주신 금원선생님 감사드리고
멀리타국에서 고생하시면서 좋은 차를 보내주신 감야님께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계절의 시작인 3월에 부경다회 회원여러분 건강 챙기시고 하시는일 모두 잘되세요!!^^
미흡한 시음기를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