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구한 하숙집과 런던에서의 근면한 생활
리틀 브리튼의 하숙집에서 인쇄소까지 너무 멀어서 듀크 가의 로마 성당 맞은편에 새 하숙집을 구했다. 이탈리아 식료품점 건물의 3층 뒤편이 내 방이었다. 주인 여자는 딸 하나를 데리고 하녀와 함께 살았다. 식료품점을 관리하는 점원도 하나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하숙을 했다. 주인 여자는 내 예전 하숙집에 내 성품을 알아본 뒤에 하숙비로 예전과 똑같이 일주일에 3실링 6펜스를 내라고 했다. 남자가 하숙생으로 있으면 든든하기 때문에 싸게 받는 거라고 했다. 주인 여자는 나이가 지긋한 미망인이었다. 아버지가 목사여서 개신교로 자랐지만 결혼한 뒤에는 남편을 따라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여자는 남편과의 추억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예전에 수많은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살았다ㅏ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찰스 2세 때부터 이어지는 그들의 일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통풍으로 다리를 절어서 방 밖으로 거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따금씩 말벗을 원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면서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라고 해봐야 생선 반 토막과 아주 작은 버터 바른 빵 한조각을 먹고 맥주 반 파인트를 둘이 나눠 먹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있어서 식탁은 풍성했다. 내가 항상 시간을 잘 지키고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니 주인 여자는 내가 계속 그 집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한번은 인쇄소에서 더 가깝고 일주일에 2실링밖에 안 하는 하숙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정도만 절약해도 꽤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하자, 주인 여자는 일주일에 2실링을 깎아줄 테니 옮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런던에 있는 동안 그 집에서 일주일에 1실링 6펜스로 지낼 수 있었다.
그 집의 다락방에는 일흔이 된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미혼인 그분은 세상과 거의 연을 끊고 살았다. 주인 여자 말을 들어보니 할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젊은 시절 수녀가 되기 위해 외국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생활이 맞지 않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영국에는 수녀원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수녀의 삶을 살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1년 생활비로 12파운드만 남겨놓았으며, 이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대부분을 쓰면서 자신을 죽으로 연명했고 불도 죽을 끓이는 데에만 사용했다. 할머니는 여러 해 동안 그 다락방에서 살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집의 주인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여서 할머니 같은 분과 함께 사는 것을 은총으로 여긴 덕에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신부가 매일 찾아와 할머니의 고해를 들었다. 하루는 주인 여자가 “할머니처럼 사시는 분이 무슨 고해를 그렇게 많이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도무지 얺어지지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할머니의 방에 딱 한 번 들어가볼 기회가 있었다. 할머니는 쾌활하고 예의 바른 분이었고 말도 재미있게 잘했다.
방은 말끔했고 가구라고는 침대, 십자가상과 책이 놓인 탁자 하나, 내게 앉으라고 권한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성 베로니카가 손수건을 펼쳐 들고 있는 그림 한 점이 난로 위에 걸려 있었는데, 그 손수건에는 신기하게도 피를 흘리는 예수의 얼굴이 나타난다고 할머니는 아주 진지하게 얘기했다. 할머니는 안색이 창백하긴 했어도 아픈 곳은 없었다. 적은 수입으로도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걸 할머니의 삶이 또 한번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와츠의 인쇄소에서 일하는 동안 와이게이트라는 똑똑한 청년과 사귀었다. 와이게이트는 부자 친척을 둔 덕에 다른 직공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다. 라틴어도 꽤 잘했고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았으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아이게이트와 그의 친구에게 강에서 수영을 가르쳐주었더니 두 사람은 두 번 만에 수영을 능숙하게 했다.
이 두 친구가 내게 신사 몇 분을 소개해주었다. 대학과 돈 살테로의 골동품을 보기 위해 시골에서 배를 타고 첼시에 온 사람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와이게이트가 내 수영 실력을 벌렸는데,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궁금하다며 재촉하는 바람에 나는 옷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다. 첼시 근처에서 블랙프라이어까지 헤엄치면서 물 위아래를 오가며 온갖 묘기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아서 신기했던지 무척 재미있어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헤엄치는 걸 좋아해서 프랑스 작가 테베노의 책에 나와 있는 동작과 자세를 관찰하고 연습했다. 나중에는 거기에 따라하기 쉬우면서도 우아하고 매끄러운 동작을 만들어 첨가했다. 나는 그 기회에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주를 보여주었고 사람들의 칭찬에 한껏 우쭐해졌다. 공부하는 것이 비슷했고 수영도 배우고 싶어 했던 와이게이트는 이 일로 나와 더 가까워졌다. 어느 날 와이게이트는 현지 인쇄소에서 일을 해 경비를 조달하면서 유럽 전역을 여행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솔깃해졌다. 하지만 그즈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던 데넘 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데넘 씨는 나를 말리며 펜실베니아로 돌아갈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자신도 곧 돌아갈 거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사람 좋은 데넘 씨에 대한 한 가지 얘기를 해야겠다. 데넘 씨는 예전에 브리스톨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다행히 채권자들과 합의 해 빚을 정리한 그는 곧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열심히 장사에만 매달린 끝에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재산을 모았다.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영국에 돌아온 데넘 씨는 예전 채권자들을 불러 대접하면서 그처럼 너그럽게 빚을 탕감해준 것을 감사했다. 채권자들은 식사 대접 외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첫 번째 요리가 치워졌을 때 그들의 접시 밑에는 갚아야 할 빚과 이자를 합한 액수가 적힌 수표가 있었다.
데넘 씨는 이제 필요한 물건을 잔뜩 싣고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상점을 열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자기 상점에서 일하면서 장부 정리를 하고 문서를 복사하고 상점 관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장부 정리는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또 내가 장사에 익숙해지면서 서인도로 가서 밀가루와 빵 등을 거래하게 해주고 그 밖에 돈벌이가 될 만한 장사도 알선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잘만 하면 번듯하게 독립시켜주겠다고도 했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그즈음 런던에 싫증이 난 데다 비록 몇 달이었지만 펜실베니아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이 그리워서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펜실베니아 돈으로 1년에 50파운드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서 합의했다. 사실 그때 식자공을 하면서 받는 돈보다 적은 액수였지만 대신 장래성이 있을 듯했다.
인쇄소를 그만두면서 이제 인쇄 일과는 영원히 작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새 사업에 뛰어들어 매일같이 데넘 씨와 함께 상인들을 상대하며 물건을 구입하고 배에 싣고 심부름을 하고 일꾼들을 시켜 문서를 발송하는 등의 일을 했다. 물건을 배에 모두 싣고 나니 며칠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 정말 뜻밖에도 내가 이름만 알고 있던 유명 인사인 윌리엄 윈덤 경이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와 그를 만나게 되었다. 윌리엄 윈덤 경은 어떻게 들었는지 내가 첼시에서 블랙프랑이어까지 헤엄친 일이며 와이게이트와 그의 친구들에게 몇 시간 만에 수영을 가르친 일 등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곧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면서 그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면 사례는 후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아들들이 아직 런던에 오기 전이었고 내가 그곳에 언제까지 있게 될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영국에서 수영 학교를 연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윈덤 경의 제의를 일찍 받았더라면 좀 더 런던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에 우리 부자는 윌리엄 윈덤 경의 두 아들 중 나중에 에그레몬트 백작이 된 아들과 중요한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겠다.
그렇게 나는 런던에서 18개월을 보냈다. 대부분 열심히 일했다. 연극과 책을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친구 랠프 때문에 가난뱅이가 되었다. 그 친구가 빌려간 27파운드는 돌려받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얼마 안 되는 내 수입에서 보면 굉장히 큰 액수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를 좋아했다. 사랑스러운 면이 많은 친구였다.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똑똑한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고 그들과 대활르 하면서 나 자신이 많이 성장했다. 그리고 책도 굉장히 많이 읽었다.
데넘 씨와 함께 상점을 운영하다
우리는 1726년 7월 23일에 그레이브센드항을 출발했다. 배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일기에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다. 그 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생 계획’인데,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그날 배를 타고가며 정리해놓은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세운 계획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지켜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다.
10월 11일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해서 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키드는 지사직에서 물러났고 고든 소령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평범한 시민이 된 키드 지사를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나를 보고 조금 쑥스러워하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갔다. 아마 리드 양을 만났더라면 나도 그렇게 쑥스러워했을 것이다. 리드 양의 친구들이 내가 보낸 편지를 보고 내가 돌아오기는 틀렸다며 그녀를 부추겨 로저스라는 도공과 결혼하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리드 양은 내가 없는 동안 그렇게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헤어졌다. 남편에게 또 다른 아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리드 양은 남편과 같이 사는 것도,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도 거부했다. 로저스는 훌륭한 기술자여서 리드 양의 친구들이 마음에 들어 했지만 사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빚을 잔뜩 지고 1727년인가 1728년에 서인도 제도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키머는 더 좋은 건물로 인쇄소를 옮기고 문방구와 새 활자도 많이 들여놓고 썩 쓸만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공들도 많이 둔 걸로 봐서 사업이 꽤 잘되는 것 같았다.
데넘 씨는 워터 가에 상점을 얻었고 우리는 그곳에 물건들을 채워 넣었다. 나는 부지런히 일했고 셈하는 법도 배웠다. 조금 지나니 물건 파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데넘 씨와 나는 한집에서 지냈다. 데넘 씨는 꼭 아버지처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살펴줬다. 나도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1727년 2월 초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한 살을 갓 지났을 때 우리 둘 다 병에 걸렸다. 나는 늑막염에 걸렸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던 터라 몸이 회복되자 이제 또 하기 싫은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데넘 씨는 오래도록 병으로 고통받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 그는 구도로 유언을 하면서 나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약간의 유산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나는 또 한 번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상점은 데넘 씨의 유언 집행인들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함께 내 일자리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