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프로메테우스의 꿈 강 신 해
김신구는 아파트에서 골목길을 나와 도봉산으로 올랐다. 초가을 아침의 산은 삽상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늘 따라 아들 민석이 얼굴이 계속 눈 앞에 어른거렸다. -고슴도치가 양이 되어야 하는데…….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숲속 길로 접어들었다. -잘 있는지? 상태가 좀 좋아졌는지? 벌써 두 달째 전화도 오지 않았지? 내가 가지 않으니 이놈이 토라진 게 아닐까? 그 날 밤 한밤중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신구는 눈을 부비며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다급한 음성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가 본데. 그래도 내게 전화를 했으니 그리 나쁜 편은 아니겠고. “그래, 민석이냐? 민석아!” 신구는 언제나처럼 정겨운 음성으로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 죽이고 싶다. 야, 이 놈아! 왜 나를 낳았나! 이 개새끼야! 지금 탈출했다 말이다. 탈출했다고! 아무도 못하는 탈출을 내 혼자 했어요. 탈출이 뭔 줄 알기나 알아요!? 어디서 탈출했는지 말해 줄까? 지옥으로부터 탈출! 탈출이란 말야…….” 민석의 음성은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민석아, 민석아, 그래 그래, 계속 얘기해라. 거기가 어디냐?” “딸깍!” 전화는 끊어졌다. 신구는 비록 욕설이지만 아들의 음성을 오랜만에 듣고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래, 많이 좋아졌구만. 활기가 넘치고 생기가 넘치니. 전에는 늘 다 죽어가는 시래기 같은 음성이었는데.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닐까? 탈출이라니? 꽉꽉 닫힌 마음의 벽이 흐무러졌다는 말일까? 아니면 요양병원에서 나왔다는 말일까? 요양병원에다 전화를 내어볼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제 에미에게만 대들었는데? 내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러지? 신구는 담배를 물었다. 아들 민석이의 건강이 나빠지고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한 담배였다. 이제는 하루 두 갑을 태우는 골초가 되어버렸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드리고는 내뱉으며 벽시계를 바라봤다. 그 때 댕! 댕! 두 번을 쳤다. 또 전화가 울렸다. “민석이냐? 거기가 어디냐?” “야 임마! 민석이라고 부르지도 말라. 내 있는 곳 알아서 뭐 할래? 바보 같은 게 내 병도 못 고쳐 주면서. 내게 해 준 게 뭔데! 민석이라고 불러? 매일 승진! 승진! 하고 외쳐대더니 그래 이사가 되고 나서 하늘에라도 올라갔단 말인가? 어디냐고 물을 수 있어? 그럴 자격이 있냐 말이야! 난 니놈의 아들이 아니야……돈 있으면 20만원만 부쳐! 왜 대답을 안 해? 나 같은 놈을 낳았으니 그 죄 값으로 돈을 부쳐야 해. 온라인 통장은 전에 불러준 것 그대로 하면 돼. 지금 당장 부치라구! 알았어!” “딸깍!” 전화는 또 끊어졌다. 신구는 오랜만에 아들의 생기 찬 음성을 두 번째 듣고는 담배를 끄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소주병을 꺼냈다. -생기 찬 음성. 약 복용을 중지했기 때문일까……잠은 잘 잤는지? 탈출을 했다니? 밖에 나왔다는 말인가? 돈을 부쳐달라고? 어디다 쓸려고? 신구는 소주 두 잔을 마시고는 즉시 요양병원에다 전화를 내었다. 직원은, 민석이가 하도 전화하기를 원해서 허락했더니 전화하고 자기 방으로 방금 들어갔다고 했다. 돈을 왜 부쳐달라고 하는지를 물었더니 책을 사려고 그런 모양이라 했다. 신구는 더욱 기뻤다. -책을 읽으려 하다니! 확실히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어. 좋아진 게 틀림없어. 직원 김 선생은 덧붙이기를, 한 열흘 간 약을 하도 안 먹을라 해서 그대로 두었더니 상당히 예민해졌다고 했다. -그래 그랬었구나.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생기가 돈다! 약을 먹지 않고 치료하는 길도 있겠지? 자연치유의 방법? -지난 5년 동안 계속 약을 복용했지 않았느냐? 그 탓에 차분했고 생기는 없었는데. 어쩌다 며칠 간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생기는 도는데 눈에 핏발이 서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고, 그랬었지. 의사의 지시대로 약을 복용하는 것만이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 신구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모종의 기쁨과 희망이 용솟음치기도 했다. 신구는 사흘 후 아내와 함께 아들이 있는 가평의 요양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매달 첫 일요일은 면회를 갔지만 지난 두 달은 회사 일로 아내만 갔었다. “약을 안 먹었다 그랬지요? 강제로라도 먹인다고 알고 있는데……요양병원에서 데리고 가라고 할지 모릅니다……이제 나는 민석이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걔가 무섭기도 하고.” 아내의 음성은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 맥 빠져 있었다. 신구는 고개만 끄덕이었다. “방법이 없잖아? 되는 대로 사는 거야. 당해서 못 당할 일이 있겠소? 데리고 가라면 데리고 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돌볼래요? 회사도 안 나가고? 난 이제 감당할 수가 없어요……민석이하고 같이 있다간 한 달도 못 가서 내가 죽을 거요. 묻는 말에 답 안 하면 답 안 한다고 구박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심부름시키고. 며칠만 약 안 먹으면 더욱 심해져서 날 주먹으로 때리고…….” 아내의 음성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신구는 바싹 메마른 목을 침으로 축이며 조용히 차를 몰았다. 차가 북한강 도로를 달릴 때쯤 아내는 멍청히 눈을 감고 있었다. 신구는 아내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처음 민석이가 발병했을 때 아내와 주고받던 얘기를 떠올랐다. -당신이 못 이룬 꿈 자식에게 이루게 하려고 법대에 보냈고 그 바람에 아들이 고시병에 걸렸지 않소. 고시병은 합격만 하면 절로 낫는데, 네 번이나 실패를 했으니……. -아니야. 그보다 김 교수와 숙이 때문이야. -김 교수와 숙이 때문이라고요? 당신 때문이 아니고? 민석은 대학 3년부터 4번이나 고시에 실패를 하자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 숙이가 나타났다. 숙이는 전에부터 사귀어오던 여자 친구였는데 민석이가 오직 고시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몇 해 동안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결별이라는 뉘앙스가 풍기고 있었다. 민석은 병역을 연기하기 위해 대학원에 적을 두었다. 신구는 아들에게 고시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면서 고시를 포기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교수가 되는 길을 모색해 보라고 했다. 양순한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로 박사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공 담당 김 교수는 민석이를 면접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이유는, 고시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학문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받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숙이 때문에 상심해 있던 민석이는 박사과정에도 못 들어가게 되자 매일 술만 마셨다. 이제 서너 달 후에 입대하는 길뿐이었다. 설마 나이 스물다섯이나 되는 데다 일류대학을 나왔으니 한 달쯤 쉬다 보면 스스로 길을 모색하겠거니 생각했다. 두 달째로 접어드는 늦봄,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는 전에 하지 않던 주사(酒邪)를 해댔다. 단순한 주정이거니 생각했는데 그 다음 날도 같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은 술이 깨고서도 헛소릴 해댔다. 어머니가 놀라 물었더니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프다고 했다. 머리를 두 손으로 짓누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온 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웠다. 다리에는 바르르 경련까지 일어났다. 신구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와서 아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내과에 가서 응급조치를 했다. 정신신경과에 가보라고 했고 담당 의사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조사하고는 신경쇠약 초기 증세 같다며 약 처방을 내렸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일주일 후 다시 오십시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라고 했다. 의사의 말대로 조금 기가 꺾였지만 조용했다. 그런데 친구 만나기를 좋아하던 민석은 그 후 사람 만나기를 꺼렸고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약을 안 먹은 지 사흘이 되자 약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지 민석이는 며칠 간 잠을 자지 않았다.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고 얼굴은 새파랗게 긴장되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닷새쯤 후에는 황제나 된 듯이 어깨에 힘을 주고 두 팔을 벌려 고함쳤다. -이놈들아!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 쾌심한 것들! 나를 몰라주다니!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있을 뿐인데. 왜들 이렇게 굽실거리지 않느냐! 내가 지존이야, 지존이라고! 그리고는 식탁에 있는 물 컵을 집어 바닥에다 던져 와장창 깨어 버렸다.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한 것 같이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신구 부부는 아들에게 사정사정하여 다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처방전을 받아 약을 탔다. 횡설수설 말을 해대어 누가 볼까봐 겁이 덜컥 났다. 신구는 아들을 조용한 외진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달랬다. 아내가 타 온 약을 즉시 먹였다. 반시간이 지나자 민석은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신구 부부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정신병? 광증? 이 일을 어쩐다? 무슨 이런 일이? 신구는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여 멍청하게 벤치에 퍼질러 앉아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우리 민석이가 미친 거 아니오?” “그래 미쳤으면 좋겠어요?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소? 이때는 당신이 미워 죽겠다. 미워 죽겠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 날 이후 신구는 아들에게 걸었던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깨가 축 처져버렸고 직장에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해외출장도 포기했다. 아내는 넋이 빠진 듯 멍청히 있을 때가 하루에도 여러 번이었다. 신구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현기증과 두통은 머리의 상처 때문이라 하면서 약 복용과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석이 발병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도 없었다. 민석이 나이 서른. 5년 동안에 아내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고, 아내는 두통에다 협심증에다 관절염에다 우울증까지 걸려 더 아들을 돌볼 힘이 없었다. 5년째 되던 이른 봄, 민석이 자주 집을 나갔다.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면 답을 하지 않다가 불쑥 고시시험을 처 두었는데 미친놈들이 채점을 잘못해서 명단에 들지 않았다며 고함을 쳐댔다. 신구 내외는 아들의 횡설수설에 아직도 고시의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 병은 낫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들을 요양병원에 맡기게 됐다. 의학박사인 원장은 정신병에 대한 한국의 권위자로 말년을 사회봉사에 바치겠다는 각오로 깊은 산골에다 병원을 지었다. 민석이를 요양병원에 데리고 간 첫날 원장은 몇 가지 질문과 테스트를 하고 난 후 하고 싶은 예기를 해 보라고 했다. 신구는 아들의 병에 대해 메모한 쪽지를 꺼내어 차근차근 말했다. -남들이 자기에게 뭔가를 빼앗아 가지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기 아래 종속되어 있고 남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는 천재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들과는 대화도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 대인기피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온갖 불평을 널어놓고 때로는 대들고 구박하고 어떤 때는 과격한 행동까지 하고 있습니다. -과격한 행동이라니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주먹질이나 기물 파괴 같은 것……. 신구는 아들이 제 에미를 주먹으로 머리를 구타하여 실신시켰으며 그로 인해 병원에 일주일이나 입원한 사실은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평소 성격은 어땠어요? -아주 착했습니다. 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한 둘만 사귀었지요. 집착심이 강한 편이고……. -일상생활은 어땠어요? -불규칙적입니다. 잠자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낮에는 잠을 자는 경우가 많지만 잠은 불과 두세 시간만 잡니다. 낮은 그런 대로 조용하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데, 밤에는 마치 자기 세상인 듯 마구 설쳐댑니다. 고슴도치가 낮에는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먹이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원래는 순한 양과 같았는데……. 원장은 낮은 소리로 ‘고슴도치! 야행성!’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민석의 얼굴을 보면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는 듯 초조한 표정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깊이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런 골똘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증오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부모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잘 돌보아 주었다면 지금은 법관이 되어 있을 것인데 부모가 자식을 돌보지 않아 자기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원장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간의 치료 방법에 대해 묻고는, 약은 어떤 것을 복용했으며 복용하지 않았을 때의 증상과 복용 후의 증상의 차이와 지금이 전보다 더 심해졌느냐고 물었다. -양약으로는 노란색과 갈색의 신경안정제를 아주 소량 복용했습니다. 주로 리치움이라는 약을 복용했습니다. 한약도 복용하고……아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습니다. 이제 아내도 지쳐 우울증까지 걸려 있습니다. 아들에게 너무 시달려 온갖 병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원장은 병의 원인이 외인성이나 내인성보다는 심인성에 기인한 것 같으며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 곧 완치될 것이고, 비교적 가벼운 환자로 오래 걸리지 않아 정상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1년 동안 그냥 맡겨 주시면 책임지고 건강을 회복시켜주겠다고 했다. 요양병원을 나올 때 원장은 정신병은 무엇보다 가족의 끝없는 관심과 보살핌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강조했다. 신구는 차를 몰아 경춘가도에서 왼쪽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반시간이나 달려 조용한 산골짜기에 위치한 요양병원에 이르렀다. 원장을 만나고 점심 식사 후에 민석이를 면회했다. 신구는 면회에 앞서 아내에게 절대로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얼굴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민석은, 바쁘실 텐데 아니 오셔도 된다며 그런 대로 요양병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부모님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민석의 말이 다 끝나자, 신구는 잠은 잘 자느냐? 밥은 잘 먹느냐고 물었다. 전에처럼 낮은 잘 지내는데 밤에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민석은 이 곳 요양병원에 들어오게 된 날부터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감독에게 반항만 해댔다. 가끔 공포에 휩싸여 벌벌 떨며 자기를 죽이려고 어떤 악마가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면서 약은 거절했다. 요양병원에서 주는 약은 청산가리와 같은 것이어서 먹으면 바로 직사한다고 생각했다. 닷새를 물만 먹고 식사를 거절했다. 원장은 하는 수 없이 물에다 진정제를 타서 먹게 했다. 보름이 지난 후부터 민석은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운동도 하고 가벼운 병원 일도 하면서 요양병원 생활에 차츰 적응해 갔다. 그러나 별 것도 아닌 것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여전했다. -원장은 왜 내게 잘 대해 줄까? 그보다 먼저 저놈은 천성이 선한 놈일까? 악한 놈일까? 생긴 모양이 링컨 대통령 비슷하게 닮았으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산골에다 병원을 차려 늙바탕에 고생을 사서 할까? 무슨 목적이 있겠지? 링컨은 민주주의와 노예해방을 위해 인생을 걸었는데, 저 사람은 과연 환자 치유를 위해 인생을 걸었을까? 그보다 저 놈이 왜 내게는 특별히 잘 대해 줄까? 내 인상이 좋아서. 아니야. 그럼 내 학벌을 보고? 아니야. 그럼 아버지 때문에. 그럴 거야. 아버지가 원장에게 특별히 아들 잘 봐 달라고 돈 봉투를 방문할 때마다 주는 모양이지. 아버지도 원장도 개새끼! 그런 돈 있으면 고아원에다 후원금으로 내지. 멀쩡한 나를 여기 가두어 놓고. 개새끼들! 돌대가리 같은 놈들! 멀쩡한 나를 가두어 놓다니. 바보들이 천재들을 병신으로 만드는 세상. 이 세상은 대지진이 일어나 깡그리 없어져야 돼. 일주일에 한 번씩 병실을 둘러보는 원장이 어제는 내 보고, 많이 좋아졌구만 언제쯤 책을 읽을 수 있겠나? 책을 읽겠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나? 이런 잡소리를 했지. 내가 책을 읽을 수 있으면 고시공부를 하지. 민법, 형법, 헌법, 상법, 영어. 형법 때문에 세 번이나 골탕을 먹었지. 망할 놈 망할 놈의 형법, 형법이……. 민석은 여섯 달 후에는 책이 읽고 싶다고 요청했다. 민석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요청했다. 처음엔 그냥 책장만 넘기다가 건성으로 몇 장을 읽다 마다 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는 다 읽었다. 책을 다 읽은 날 오후 민석은 그리스 신들을 떠올렸다. -그리스 신화에는 어떤 신들이 있었지? 한번 읊어 볼까? -제일 먼저 올림포스의 지배자 제우스……바다의 신 포세이돈, 제우스의 아내요 결혼의 신인 헤라…거품으로 떠돌다가 아름다움과 사랑의 신이 된 아프로디테… 지혜의 여신 메티스, 인간 중에 가장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 그리고 또 어떤 신들이 있었나? 하늘의 신 우라노스, 땅의 신 가이아, 운명의 여신 클로트, 매력적인 신 프로메테우스, 그는 지혜의 신으로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고 제우스신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산속 나무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형벌을 받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지. 프로메테우스는 죽게 되어 있지만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라나? 내가 프로메테우스에 가깝구만. 아니 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야. 프로메테우의 꿈은 뭘까? …탈출! 현실로부터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는 것. 그럴 거야. …그리고, 저승을 지배하는 저승의 신 하데스, 상업의 신 헤르메스, 추남인 대장장이 헤파이토스…태양과 의술과 음악의 신 아폴론, 전쟁의 신 아레스…이제 그만 하자 그만 해… 이들 신 중에 누구가 가장 마음에 들지? 내가 만약 이들 신 중에 하나가 된다면 어떤 신이 될까? …무어니 해도 하데스가 최고야. 하데스…머리에는 몸을 감추는 요술 투구를 써서 인간에게 전혀 보이지 않고 시커먼 이륜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릴 수 있고…인간들이 죽어 어디로 갈까 갈피 못 잡을 때 노자를 받아 강을 건네주고, 미운 놈은 지옥으로, 마음에 드는 놈은 천당으로 보내주는 하데스, 하데스가 좋아.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비통의 강인 아케론 강을 건너야 하고 그 다음으로 증오의 강인 스튁스강을 건너야 하고 맨 나중에는 망각의 강인 레떼강을 건너야 벌판이 나오지 않나? 강마다 노자를 받는 사공이 있으니 그것들을 시켜 노자를 두둑히 받아 거부가 된다? 하데스가 최고야…하데스는 괴물같이 생긴 털보. 그런데 강을 건네주는 털보 사공은 고집쟁이라는데 받은 배 삯을 내게 주지 않으면 어쩌지? 죽여버리지. 그러면 누굴 사공으로 만드나…아프로디테나 아프로디테의 딸 에로스를 뱃사공으로 만들면 되지…그런데, 제우스신이 용서해 주실까…그러면 대장장이 헤파이토스를 불러 무기를 만들고 아레스 신을 불러 전쟁을 일으키지? 제우스신이 먼저 알면 어쩌지?……. 이런 생각하면 무엇 하나? 나의 상태가 어떤가를 스스로 진단하고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생각해야지……빨리 건강해 지는 길 그게 내가 할 일이다. -3년 전 열흘 동안 약을 먹지 않았을 때 그때 나는 반쯤 발광을 했었지.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고. 나는 목숨 걸고 한 달을 약 먹지 않고 견뎌내었지. 정신공황 상태가 되면 자그마한 외부 자극에도 긴장하게 되고, 특히 속이 상해서 종일 굶으면 긴장과 이완의 조절이 전혀 되지 않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머리회전이 빨라 많은 생각을 동시 다발적으로 하게 되지. 그리고 그럴 때는 가끔 천리안을 가진 도사처럼 모든 사람의 미래가 내다보이고, 사실 그건 나중에 보면 완연 엉터리요 나의 일방적인 생각인데……정신적 공황이 오면 더러 미친 행동을 하게 되지. 전혀 남의 얘기는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 얘기만 하게 되고. 아버지에게 마구 대들기도 했지. -아버지! 난 아이큐가 160이어요. 천재가 썩고 있어. 너무 억울해……왜 사람들은 나를 존경하지 않고 나를 백안시하는지를 모르겠어. 아버지도 날 깔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부모 탓입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모두들 병신 같은 인간들이 출세하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천재인 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니……이노무 세상! 더러운 세상! 부모가 증오스럽다구요. 증오스러워, 정말로 미워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요……. 이렇게 한참 동안 고함치다가 스스로 지쳐 조용해지고 미안해서 눈물 흘리고, 그러면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럴 때도 있다, 괜찮아,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하며 날 위로했었지. 어쩌다 이런 몹쓸 병에 걸렸지……정신적 공황, 다음엔 동시다발적인 상상, 그 다음엔, 부모에게 욕설과 더러운 세상에 대한 저주, 때로는 과격한 행동, 눈물 또는 심한 두통……. -어릴 때,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내 공부 방 열쇠 서랍 열쇠 학교의 사물함 열쇠 자전거 열쇠, 옆구리에 주렁주렁 열쇠를 달고 다녔지. 학교 갔다 오면 텅 빈 집, 혼자서 빵과 과자와 라면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지. 매일 가공식품만 먹은 탓에 내 몸의 생체리듬이 깨어졌어. 특히 머리가. 한때는 워낙 많이 먹어서 뚱뚱보가 되었는데 뚱뚱보라고 굶겼으면 좋았을 것을, 살 뺀다고 약을 먹여 몸은 전과 같이 보통이 되었지만 그때 이미 내 머리는 망가졌어. -아니야 난 부모의 잘못된 DNA를 갖고 태어났어. 모두가 부모 탓이야. 부모가 왜 날 낳았는지. 어머니 망할 년! 아버지 개쌔끼! 둘 다 죽이고 싶어……대지진이 일어나 이 세상이 깡그리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불바다 불바다가 되어 너도 타 죽고 나도 타 죽고 그래 다 죽어라 죽어. 짐승도 물고기도 곤충도 나무도 풀도 다 죽어 없어져라……아니면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어 다 죽어버려라. 노아의 방주도 뒤집어져라! 온 세상이 다 없어져라 없어져라고……. “무얼 중얼거려! 김민석! 왜 여태 식사를 안 했어? 뭐하고 있어? 또 개똥철학 하냐?” 민석은 감독의 고함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온 천지가 물바다가 되는 거야, 온천지가 불바다가 되는 거야. 아니야 나만 살아야지. 어떻게 나만 살 수 있어. 그거야 간단하지……. 감독이 작은 곤봉으로 어깨를 쿡 찔렀을 때에야 움칠 놀라 감독을 바라봤다. “뭐 했어? 무슨 생각했어? 여태 식사도 하지 않고?” “연구 좀 하느라고.” “연구? 어서 밥이나 먹어!” 민석의 건강은 차츰 좋아졌다. 1년이 지난 후에는 독방에서 합방으로 옮겨졌다. 셋이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마흔 살의 전직 교사였고 또 한 사람은 쉰 살의 목사 출신이었다. 교사는 가벼운 정신분열증으로, 목사는 신경쇠약으로 들어왔다. 민석은 목사에게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전직 교사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다. 가끔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했다. 민석은 외롭지 않았고 단전호흡을 따라 한 결과 마음이 더욱 안정되었고, 무슨 얘기든지 두 사람에게 할 수 있어서 전보다 상태가 호전되었다. 교사 출신은 보호자만 튼튼하다면 집에서 자가 치료를 하는 게 최상이며 사실 가능하다면 양약은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관계의 병에는 잠을 잘 자면 그것으로 완치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숙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자기는 단전호흡법으로 숙면하는 훈련을 한 결과 이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밖에 나가면 기공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해 질 거라고도 했다. 다음해 교사와 목사가 퇴원했을 무렵, 원장은 신구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고 했다. 퇴원 때 원장은 서울에 있는 병원을 소개해 주며 메모지와 병력카드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아직 직장 생활을 하거나 공부를 하지 말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약은 계속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신구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완전 치유하는 길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면서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후 민석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늘 방에만 있었다. 가끔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있었다. 책도 읽고 집안 청소도 했고 어머니와 함께 시장도 갔다. 그런 대로 가정에는 기쁨이 찼다. 맥 빠졌던 어머니의 음성도 수년 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시집간 민석이 누나 정희도 찾아왔다. 신구는 아들이 고슴도치에서 이제 순한 양이 되었다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서너 달 동안 민석은 한 번도 신경질을 내거나 사리에 맞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으며 자주 웃기도 했다. 그 몇 달간 신구는 요양병원의 원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으며 온 세상이 기쁨으로 충만한 듯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퇴원 후 여섯 달이 되는 늦가을 저녁, 민석이와 같이 공부하던 단짝인 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한 잔 사겠다며 나오라고 했다. 영수는 다섯 번째 도전하여 성공했고 지금은 검사로 근무하고 있음을 민석이는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야, 성북동 너희 집에 찾아갔더니 이사를 했더군? 지금은 어디 살아? 네가 보고 싶다. 대학로로 나와.’ 민석은 지금은 만날 수가 없다며 나중 자기가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 날 저녁 민석은 한잠도 자지 않았다. 새벽녘에 심상치 않은 기미를 챈 아버지가 민석의 방에 들어갔다. -아버지, 그 영수 놈은 개새끼라고요! 약 올리려고 자랑이나 해대고? 재수 좋아 합격했으면 좀 겸손한 줄 알아야지. 개쌔끼! 개쌔끼! 날 만나러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오기만 해 봐라 칼로 배를 찔러 죽이고 말 거야! 죽여버린다고. 친구!? 친구!? 좋아하네. -그래, 그 친구 싫으면 만나지 않으면 될 거 아니냐? 너무 남을 증오하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 민석아! 마음을 느긋하게 먹도록 해라. 신구는 애원하듯 아들을 달랬다.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욕설은 반복했다. -망할 새끼! 칵 죽이고 싶다……. 그 날은 기어코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민석은 한숨도 자지 않았으며 계속 무언가를 중얼중얼 입속말을 하면서 증오심에 불타는 눈동자로 가끔 욕설을 해댔다. 아버지가 출근해 버리자 어머니는 안절부절 견딜 수가 없었다. 낮이 되어도 민석은 안정되지 않았고 계속 고함을 쳐댔다. 저녁에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들어가 조용히 달래며 약 먹기를 권유했지만 약을 받아 바로 던져버렸다. 민석은 새벽녘에야 지쳐 까무러쳐 잠을 잤다. 2년 동안의 요양병원 생활에서 상당히 좋아졌는데 다시 전과 같은 증상이 재발하자 신구는 다시 요양병원을 생각했다. 요양병원에 다시 아들을 맡기고 돌아오는 날 아내는 강변에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아내는 강둑에 앉아 펑펑 통곡을 했다. 신구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한 시간 후 아내는 신구를 바라보며 한숨 섞어 하소연했다. “무슨 팔자로 자식이 저런 병에 걸렸는지? 민석이와 둘이 죽어버리면 당신이나 마음 편히 살 것인데……그리고 내가 죽어 우리 민석이가 낫는다면 얼마나 좋겠소?” “무슨 그런 망을! ……지난 몇 달은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않소. 그런 병이 갑자기 낫겠소. 그래도 건강해질 희망이 있지 않소. 마음 다부지게 먹고, 내가 직장 그만 두고 우리 민석이 건강하도록 노력해 보겠소.” 신구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강물은 푸르게 출출 저렇게 흘러가는데, 저기 즐겁게 드라이브하는 부부들도 많은데, 우리는 지난 8년을 지옥에서 살지 않았소. 여보! 나 이제 견딜 힘이 없어요. 민석이 병 낫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소.” “어허! 그런 약한 소리 하면 안 되오. 우리가 건강해야 민석이 병을 치료할 수가 있지 않소.”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놓고는 친척들이 물으면 고시 공부하러 산으로 들어갔다고 하고……자식 때문에 모임이란 모임은 다 빠져 버렸고 친척들과 전화도 끊어버렸고……이게 어디 사는 겁니까?” 아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 저 물에 빠져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를 터인데…….” 울먹이며 말했다. 해가 져서야 아내는 눈을 닦으며 일어나 집에 가자고 했다. 신구는 하나 뿐인 아들, 아버지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누가 돌보아주겠나 하는 생각에 정년 3년을 남겨놓고 회사에서 물러났다. 담배도 끊고 남은 생애를 아들의 건강을 위해 바치기로 했다. -늘 약을 먹어야 하고, 생기 없이 목숨만 살아 무엇을 하나? -종손으로 서른이 넘었는데 장가도 못 가고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는 신경관계가 약해서 그렇겠지만, 유전인자에 의한 것 보담 심인성이라고 하니 자연치유가 가능할 것이다. 신구는 행여를 생각해서 자신의 가계와 처가의 가계를 모두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신구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원인과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아들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를 했고 이번에는 정년을 몇 해 남겨두고 회사를 물러나지 않았는가? 공기 좋고 산천이 수려한 시골로 이사 가서 생활하면 더욱 좋아질 것이 아닌가? 신구는 그 즈음 자연치유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고 크게 고무되었다. -약을 먹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사의 말에 의하면 대개의 정신 질환자들이 약을 기피하며 심지어 약 복용이 싫어서 요양병원이나 정신병동을 탈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 민석이 경우도 그렇겠지만, 조금은 경우가 다른 것 같고……자기의 몸이 스스로 약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 거야. 객관적으로 민석이가 약을 먹지 않았을 때는 조금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 생기가 돌지 않던가? 그 생기가 지나치긴 하지만 생기가 돌아야만 병이 나을 게 아닌가? 생기! 생기가 있어야 한다……약을 복용하면 조용하지만 축 처져 아무 일도 못 할 것이니. 그건 임시 조치 일뿐이다. 자연치유가 최고다. 자연치유! 약 안 먹고 건강하게 되는 길……약을 계속 복용한다면 장가도 갈 수 없는 게 아닌가? 막연히 세월이 가면 절로 나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요양병원에서 나오게 하여 함께 시골로 가서 맑은 공기와 전혀 농약이 없는 자연의 식품을 먹고 알맞은 운동을 하면 낫지 않을까? 일이 년만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푸근하고 느긋하게 가지게 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한다. 또한 식욕을 증진시키기 위해 매일 규칙적인 운동을 하게 하고 그리고 심할 때는 약을 조금만 복용하게 한다. 발병 4년째 되던 해 민석이가 고시 시험을 쳤는데 시험관이 채점을 잘못해서 합격 명단에 빠졌다고 하던 말이 갑자기 신구의 뇌리를 스쳤다. 그냥 상상으로 말한 것이라고 그때는 판단했는데, 과연 실제 시험을 쳤을까? 시험을 쳤다면……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신구는 민석이 모르게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원생 중에 한 사람을 찾아 확인한 결과 시험을 쳤는데 형법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고 했다. 신구는 그 연수생에게 민석이가 시험칠 때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더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행동이라니요?”하고 반문했다. 그 날 신구는 뛸 듯이 기뻤다. -그 까다로운 원서를 정상적으로 기입하고 시험도 정상적으로 쳤으니, 그리고 그 때는 약을 복용하지 않을 때이니……. 이른 봄밤 신구는 잠결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를 들었다. 신구는 잠을 깼다. 이 밤중에 누굴까? 민석일까? 민석은 요양병원에 있는데? 만약 민석이라면 문을 저렇게 점잖게 노크하지는 않을 것인데? 폰을 들자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민석이었다. “민석아! 민석이 아니냐! 이 밤중에?” “예, 저 민석입니다. 아버지.” 문을 열었다. 민석이는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서서 목례를 했다. “아버지, 밤중에 많이 놀라셨지요?” “어서 들어 와.” 신구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아버지, 요양병원에서 탈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이제 괜찮습니다.” 민석은 빙긋이 웃기까지 했다. 민석은 대학 입학식 때의 싱싱한 그 모습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신구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신구는 자신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꿈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쭈빗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무슨 이런 꿈이? 민석이가 나오고 싶어하는구나! -그래, 고슴도치가 순한 양이 될 날이 왔는지도 모른다. 신구는 다음 날 곧장 요양병원으로 가서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신구는 아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동해 바다를 둘러보았다. 바다나 강이 보이는 집에 오래 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어느 정신신경과 의사의 글 을 읽은 적이 있어서 인제와 홍천의 산골마을을 찾았다. 생각 밖으로 아들은 아주좋아했고 또한 건강했다. 어느 날 오후 길가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아들은 뭔가를 또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고착되었고 몸은 옴짝달짝도 하지 않고 얼굴은 샛노란 빛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지금 무얼 생각하느냐? 민석아! 저기 저 산 위의 구름, 참 보기 좋지? 민석아!” 민석은 요지부동이었다. 신구는 어쩔 수 없이 잠을 깨우듯 아들의 어깨를 흔들어 댔다. 그제야 아들은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면서 목 운동도 했다. “뭘 생각했어?” “십 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래, 어떻던가?” “법관이 되어 의젓해 져 있었습니다.” 민석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런 생각은 버리고 건강만 생각하자.” 신구의 말에 아들은 “예, 그러지요. 아버지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내린천 상류의 계곡 마을에서 며칠 쉬었다 가자고 했다. 신구는 여행 중에 아들 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고 몸도 건강해진 것을 느끼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여행에서 돌아와 며칠 쉬자 아들은 강원도 산골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신구는 아들과 함께 홍천과 인제를 다니며 머물 곳을 알아보았다. 내린천 상류의 계곡 마을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구는 빈 밭을 얻어 채소도 심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마루까지 두 시간 등산을 했다. 등산 때 민석이는 바위에 앉아 교사에게서 배웠다는 기공을 했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통일시킨다는 단전호흡을 했다. 아침 식사 후에는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했다. 저녁에 는 마당에서 간단한 체조도 했다. 아침밥은 아버지가 저녁밥은 아들이, 설거지는 함께 했다. 여섯 달 후 민석의 어머니가 왔다. 건강해진 아들을 보고 아주 좋아했다. “살다가 이런 때도 다 있는가!”하며 찌그러진 얼굴이 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등산을 가기도 했다. 신구보다 아내가 더 기뻐했다. 밤마다 선잠을 자던 아내도 코를 자연스럽게 골며 깊은 잠을 잤다. 신구는 잠자는 아들과 아내를 바라보며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구는 아들과 아내에게, 퇴직금으로 집도 사고 전답도 사고 해서 여기서 살자고 했다. 아내도 좋아했다. 아내는 십 년만에 얻은 행복이라며 좋아했다. 민석이를 혼자 남겨두고 두 부부는 서울로 와서 재산을 대충 정리했다. 아내는 너무 기분이 좋아 그런가 머리가 조금 어찔어찔 하다고 했다. 신구가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기분이 좋아 그럴 것이라 했다. 살던 집의 잔금 받는 날을 며칠 남겨놓고 아내는 새벽녘에 일어나 앉으며 “어, 어, 어찔어찔하고 정신이…….”하더니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이르렀다. 아내는 전부터 아들에게 맞은 머리의 상처로 가끔씩 현기증을 일으켰지만 혼수상태는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완전 까무러쳤다. 신구는 아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아들의 건강 회복을 보고 좋아하던 아내가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뇌졸증으로 일주일 동 안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신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신구는 장례가 끝난 후 다시 인제 산골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집도 사고 얼마간의 전답도 샀다. 아내 없이 아들과 사는 날들은 하루 하루가 허망했다. 아들과 매일 뒷산 정상까지 두 시간씩 등산하는 것도 이젠 무리 였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무릎 관절이 저려왔다. 평지 길은 걸을 수 있지만 내리막 길이나 오르막은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자 서울 에 가서 치료를 하고 오라고 했다. 괜찮다고 해도 아들은 자기는 멀쩡한데 아버지가 걱정된다며 서울로 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신구는 또 다시 이놈이 야행성의 고슴도치가 되는 게 아닌가고 걱정했다. 하는 수 없이 서울로 간다하고는 아들이 사는 고개 너머에 방을 얻어 살았다. 신구는 마을을 둘러보며 전답을 살 궁리도 했다. 민석이 사는 마을의 사람을 만났더니, 약초꾼을 따라 종일 산 속을 다니며, 때로는 바위에 앉아 무슨 도를 자주 닦는 걸 보니 도사인 것 같다며, 아주 신수가 훤하다고 했다. -그래, 고슴도치처럼 산 속에 웅크리고 살면 어때. 건강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한 달 후 마을을 찾았더니 민석이가 사는 집의 이웃 영감이 아들이 큰일을 저질러 마을에서 쫓겨날 판이라고 하면서 그 일로 마을에서 회의를 연다고 했다. 신구는 너무 놀라 영감에게 사연을 물었다. 마을에 아이 둘을 데리고 사는 순이 엄마라는 과부가 있는데 그 과부를 산에서 민석이가 겁탈을 했다고 했다. 신구도 순이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나이는 민석이보다 두어 살 아래로 인상이 순해 보였다. 영감의 말은 둘이 서로 좋아서 그랬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정말 겁탈이라면 마을에서 쫓아낼 것이라 했다. 다음 날 신구는 아들을 만났다. “아버지!” 하며 절을 꾸벅 하고는 “아버지! 다리는 괜찮아졌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들은 대학 1,2학년 때처럼 아주 싱싱했다. 신구는 아들의 건강하고 밝은 표정을 보고 너무 기뻐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그래, 이제 됐어! 됐어!” 신구는 고함치듯 말하면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아버지, 어머님은 잘 계십니까? 같이 오시지 않고요.” “그래, 누나 집에 가 있다.” 그 날 저녁 신구는 순이 엄마와의 관계를 물었다. 아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약간 미안한 듯 얼굴만 붉혔다. 신구는 아들이 건강해진 것이 너무 기뻐 반 미친 사람처럼 허-허- 하고 웃어댔다. 아내를 생각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며칠 후 부자는 늘 다니던 산길을 올랐다. 산꼭대기에 오르자 등에 땀이 흠뻑 젖었다. 멀리 내린천의 계곡 물 한 자락이 맑고 푸르게 감돌며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좀 더딘 걸 보고 민석이 바위에 걸터앉아 좀 쉬었다 가자고 했다. “아버지 순이 엄마 만나 보았습니까?” “그래, 천성이 좋은 여자 같더구나. 너만 좋다면…….” 신구는 아들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 이 산골에 순이 엄마와 같이 살고 싶습니다.” “뭐. 뭐라고…….” 신구는 민석의 말을 듣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순이 엄마와……민석아……허허, 그래, 그래.” 신구는 일어나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민석아, 그래 자식도 낳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이 골짜기에 전답도 제법 사 두었다.” “……아버지, 순이 엄마가 내 아이 임신했습니다.” “임신!?” 신구에게는 그 말이 이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 신구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버지! 조심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신구는 발을 헛디뎠다. “아! 앗!” 민석이 고함치는 순간, 신구는 수십 길 아래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내가 죽으면 어때. 이제 살만큼 살았는데, 우리 민석이 건강해졌으니 그 이상 내가 바랄 게 뭔가. “아! 아! 아- 아…….”♠ -2005년 <계간문예> 겨울호에 발표 ----------------------------------------
|
첫댓글 *연재 마지막이어서 부산 소설가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작품을 게재해 봅니다.
*2005년,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시기. 그해는 오직 이 한 편만을 썼습니다.
이 단편은 청탁을 받고 3개월 동안 자료를 모으고 탐방하고 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이 글을 발표하고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자화자찬이 될지 모르지만 작품이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 게재했습니다.
단편읽기 작가의 말과, 25편을 게재한 후의 총괄 독후감은 내일 저녁에 게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