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을 주님 영광 위하여
저는 52년 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영세를 하였고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학교로 통하는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시절, 아버님이 별세하시고 저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더불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앞길을 열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바라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한 저는 전공공부는 물론, 외국어 습득에 전력하였고, 각종 과외활동과 학우들과의 친교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누구보다 앞서길 바랐고 그만큼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통역 장교로서 군 복무를 마치고 대기업 무역부에 입사한 후에는 제 자랑 같지만 상하 동료 직원으로부터 매우 능력있고 전도유망한 사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제 나이 스물 여덟 때, 지금의 제 아내 크리스티나와 혼인성사를 받고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대기업 무역부에서 실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저는, 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중소기업으로 옮겼습니다.
몇 개월이 안 되어 경영진은, 저의 능력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짧은 동안에 저는 진급을 거듭하였습니다.
여러 동료들의 시기와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리석게도 저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았고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형제, 친척들과 친구들은 저를 인정하고 축복하였으며 무한한 기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가 당연히 받을 만한 것이라고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강한 의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나 될 수 있다고 자신 만만했던 그 때, 출세가 눈앞에서 곧 잡힐 것 같았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때에 하느님은 저에게 그리 대단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1981년 겨울,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저는 천하를 얻은 듯한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82년 3월 25일, 제 운명을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날은 회사 동료 사원들과 함께 아들의 백일잔치를 벌인 다음날이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많은 양의 상품을 수입해가는 일본인 바이어가 저희 계열회사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어에 능통한 사원이 없어 본사 사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사내에서 그 자격을 갖춘 사람은 저로 지목되어 결국 제가 그 바이어를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강남의 어느 호화로운 룸살롱에서 일본인 바이어와 술좌석을 끝낸 저는 밤늦게 택시를 타고 피곤한 몸을 뒷자리에 누이고 살풋 잠이 들었습니다.
통금이 임박한 택시는 총알처럼 질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극히 짧은 순간, 제 몸에는 날카로운 충격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강북 쪽에서 오던 자가용이 잠수교 중간쯤에서 미끄러져 제가 탄 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사고 현장에 달려온 교통경찰은, 경찰생활 십여 년에 그렇게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하였고, 순천향 병원 의사는 제가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당시 제 상태가 어떠했는가는 막내 여동생 마리아가 쓴 병상일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제 동생의 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1982년 3월 25일
새벽 0시10분, 순천향 병원 중환자실에 오빠가 입실하다. 온몸에 깁스를 하고, 산소 마스크를 쓰고, 수혈을 한 다음, 링게르 주사를 맞다. 심전도를 비롯한 각종 테스트 기구가 오빠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
많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와, 혼수상태의 오빠를 걱정하고 돌아가다.
3월 26일
개신교에 다니는 외사촌 언니께서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가족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다. 하느님만이 오빠를 살리실 분이다.
4월 16일
사고가 난 지 오늘로 23일째다.
외사촌 언니께서 오빠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중, 오빠의 얼굴에 웃는 표정이 지어지며,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제 오빠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착실히 따르며 우리 가족 모두 하느님의 참다운 가족이 되어야겠다.
오늘같이 이런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4월 27일
사고가 난지 34일째다.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눈을 뜨라고 하자 오빠는 왼쪽 눈을 뜨고, 손을 잡으라니까 손을 잡았으며,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다. 글씨도 서툴게 쓰기 시작하였다. 오빠 친구인 한의사로부터 어렵게 구한 웅담을 석 돈이나 받아 복용하기 시작하다.
5월 13일
오늘은 사고가 난 지 50일째다.
오후 6시. 오빠가 목사님을 따라 말을 하기 시작하다. 첫마디는 '아멘!'이었다. 모든 기억이 생생한 듯하였다.
이상이 제 동생의 일기입니다.
형제자매님들은 이 일기를 통해 당시 제가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는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후 엎드리기 시작하였고 죽을 먹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이 무렵 같은 병동에 있는 자매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 날 자매님은 `묵주의 9일기도`책을 주시면서 저희 부부에게 계속 기도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목사님이 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저와 아내 크리스티나가 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휠체어를 타야만 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중심을 못 잡기는 하였지만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해 9월 12일에는 묵주기도 책을 주신 자매님의 안내를 받아 사고 후 처음으로 가회동 성당에 갔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미사참례를 하며 저는 감격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님의 품에 안긴 저의 모습은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끌고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속된 말로 가장 잘 팔리던 시절, 1981년 일년 동안은 가장 중요한 미사조차 참례 않고 살았습니다.
영세한 지 이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리고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 부부가 혼인성사를 받았음에도, 또한 저희에게 귀한 자식을 선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부부는 까마득히 주님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교통사고는 세속 일에 눈이 멀어버린 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는지요?
같은 해 11월 초, 사고 발생 여덟 달 만에 저는 퇴원을 하여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저를 위하여 한 달 간에 걸쳐 계속 기도하러 오신 레지오 단원들의 기도와 권유에 따라 저희부부는 1983년 봄 성령 세미나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미나 2주 때 가르침을 하시는 자매님이 친정 동생이 아파 시댁에 와 있던 중에 시어머니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를 사랑하게 하여 주십사하고 꼬박 3일 기도를 한 다음 시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 저도 3일기도를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미나 3주 때 은사와 열매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가르침을 하시는 수녀님으로부터 9은사 외에도 여러 가지 은사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9은사 외에 다른 은사를 청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미나를 받고 집에 돌아온 저는 사고 후 가족이 철야기도 때 목사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성경책을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
맨 첫 표지에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 주님위해 크게 쓰임받는 삶이 되길 빌며...'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은 제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삶은 바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저의 삶은 온갖 세속의 물질생활과 출세지향적인 인간적인 생활에만 더 큰 가치를 두는 삶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일들에 연연하며 많은 시간과 비중을 두고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으로 안타까운 자책감이 엄습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잠을 깨자마자 저의 입에서는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 주님위해 크게 쓰임받는 삶이 되길 비옵나이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일어서면서, 화장실 가면서, 양치하면서, 세수하면서, 식사하면서 똑같은 기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온종일, 그리고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이 성령세미나 매일묵상 3주 3일째였는데 묵상내용이 <사행2,1-4>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묵상 중 저는 이상한 언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크리스티나를 불러 심령기도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심령기도를 하며 저에게는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빨리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하던 중 저도 모르는 말로 갑자기 제 입에서 이상한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제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였으며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굳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감격에 겨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습니다.
1983년 신정동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 영명축일 11월 30일을 맞이하여 영적 선물로 저는 십자가의 길 365번을 봉헌한 후, 일과표를 작성하여 그에 따라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일과가 얼마나 바빴던지 길을 가면서, 목욕탕에서, 이발소에서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식사 때에도 가족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중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984,5년에는 신문이나 TV를 볼 시간도 전혀 없었습니다.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 아내가 저에게 꼭 고시 공부하는 사람 같다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동생 마리아의 방문 앞에 붙어있던 <필립비 1,21>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씀이 바로 저에게 해당되는 말씀처럼 여겨졌습니다.
매일 구약성서 석 장과 신약성서 한 장 이상씩을 읽어 1983년에서 1985년까지 구약성서를 3번, 신약성서를 5번 읽었고, 저와 저희 집안에 베푸신 주님의 크신 사랑에 알맞는 성시 28군데를 시편에서 발췌 암기 인용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시편 구절들을 인용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
죄 많은 저를 택하시어 죽은 저를 살리시어
사랑을 가득 부어주신 자비로우신 아버지,
지난날이 눈에 선합니다.
주님의 은덕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손수 베푸신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시편 143,5)
제가 오늘이 있다는 놀라움,
저와 저희 집안에 베푸신 그지없이 크옵신 사랑,
이 모든 신비들
그저 주님께 감사합니다.(시편 139,14 참조)
"주님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이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이 목숨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며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주님의 크신 사랑
만방에 모두 전하리이다.
기름지고 맛있는 것 배불리 먹은 듯
제 입술 기쁘고 제 입이 흥겨워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앉거나 서거나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주님 생각,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 생각 뿐,
저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몸은 행복합니다.
이 몸 주님께 포근히 안기면
주님 오른팔로 온전히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시편 63,3 -8 참조)
야훼님,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하옵니다.(시편 104,24)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사옵니다.
세어보면 모래보다 많고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사옵니다.(시편139,17-18)
주님께서 저를 택하신 것은 제가 무슨 능력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직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거저주신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을 베풀어 주시옵니까?
저는 감히 하느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
이러한 크신 사랑은 정말 부당하옵니다.
부당한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으니,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당신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사오리까?
(시편18,49 참조)
야훼 하느님,
이 마음 다 바쳐 감사드립니다.
몸소 저와 저희 집안에 베푸신 그지없이 크옵신 사랑
남김없이 빠짐없이 모두 전하리이다.
당신 생각에 그저 기쁘고 즐거워
더없이 높으신 분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높이 찬양하리이다.
(시편 9,1-2 참조)
그 즈음에 신정동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이 주일미사 강론 중에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오래도록 저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이웃, 특히 저의 가족, 아내와 아들을 통하여 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일어서면 아들은 얼른 저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었고, 제가 지팡이를 짚고 현관을 향하면 아들은 먼저 달려와 운동화를 챙겨주곤 하였으며, 제가 운동을 하고 방에 앉아 있노라면 아들이 제 발바닥이 더러운 걸 보고 '아빠 지지'하며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저에게 변기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합니다.
제가 변기 위에 걸터앉으면 아들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제 발에 비누질을 하고 말끔히 닦아줍니다.
이것은 아들이 고작 두 살 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주님께서 손수 저의 발을 씻어주시는 듯이 느껴졌고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의 발을 씻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겸손을 저에게도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도 시간에 아들 친구들이 놀러오면, 아들은 친구들에게 '아빠, 기도!'하면서 친구들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또 제가 외출 전후에 성모님께 꼭 인사를 드렸는데 어쩌다 제가 잊은 경우에는 아들이 성모상 앞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하여 제에게 인사 안 드린 사실을 깨우쳐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성서귀절을 오묘히 주셨습니다.
제가 1983년 일과표를 작성하여 주님과 하루를 보내게 되었을때 주님께서는 <필립비1,21>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다.'라는 성서귀절을 주셨고,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 직전에는 <갈라디아2,20>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성서귀절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1984년 봄 두 살 반 된 아들을 통하여 저의 발을 씻어주실 때 <요한 13,14>의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저에게 겸손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 전에 주님께서는 <로마서5,20>의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라는 성서귀절을 주셨었는데 내가 죄많은 너를 용서하고 많이 사랑해 주었으니 네가 용서받은 만큼 나를 사랑하라고 1986년 신정동본당 신부님 주일미사 강론을 통하여 <루가7,47>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아내로 인하여 가정에 평화가 오고 아내가 눈이 나쁘신 어머니께 큰 글씨로 된 성경을 사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잠언18,22>의 '아내를 얻는것은 행복을 얻는 길, 야훼께서 주시는 선물이다.'라는 성서귀절을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주님께서는 저에게 많은 성서귀절을 주셨습니다.
저의 기도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시성되기 직전의 한국순교복자 103위 각 위를 호칭하며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기도 하고 저의 치유를 지향하며 매일 묵주의 기도 5단, 십자가의 길, 15기도 등을 꾸준히 바쳤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간구에 주님께서는 저를 조금씩 조금씩 고쳐주셨으며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저를 완치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육신의 치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1985년 7월 말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2박3일의 피정에 참석하였는데, 그 피정에서 제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제가 좋아하는 기도나 묵상이 이웃의 생각이나 이웃이 원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동안 저는 기도에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우리 가족의 뜻을 존중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가족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아침에 동생들 출근시키랴, 집안 청소하랴, 그해 태어난 둘째 아이 돌보랴, 기저귀 빨래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저는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무언가 우리 가정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방 이불과 요는 제가 개어 옷장에 얹었습니다. 방도 제가 쓸었습니다.
1985년에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생활을 이끌어가기가 어려워지자 그 해 가을 아내는 세를 놓았던 점포 문방구를 인수받아 직접 경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일을 보아야 했으므로 집안일에 손이 더욱 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기저귀는 제가 개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우 열 개 정도의 기저귀를 개는 데 처음에는 한 시간도 넘게 시간이 걸렸으나 나중에는 20분으로 줄었습니다.
저는 기저귀를 개면서, 이불을 개면서, 방을 쓸면서 주님 은혜를 되새기며 끊임없이 주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제가 크리스티나를 도울 수 있게 되자, 부부가 함께 있으면서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는 일이 자주 생기고, 생계유지도 여전히 어려워 아내는 남대문 새벽시장 옷가게에 점원으로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옷 장사는 아내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주님께 크리스티나에게 알맞는 품목으로 영업을 옮겨 주십사하고 한동안 계속해서 온 마음 다해 기도 한 후 악세사리 점포로 자리를 옮겼고, 미래를 준비하며 점원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아내가 받는 점원 월급으로는 세금과 보험료, 은행 이자를 내면 돈이 없었기에 제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 수학 과외비를 생활비로 충당할 때였습니다.
이때 마땅한 점포자리가 나와 아내 크리스티나는 보증금을 주고 월세로 점포를 얻어 영업을 하였는데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마침 악세사리 점포주인이 점포를 팔게 되었습니다. 점포를 사고 싶은 자리였으나 우선 점포를 계약할 계약금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니 칠순 잔치를 뷔페에서 치르고 축의금으로 비용을 충당하고 남은 돈 가운데 일부인 100만원을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돈으로 점포를 계약하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처제가 돈을 빌려 주어 마침내 그 점포를 사들였습니다. 그 후 1993년, 집을 새로 짓느라 은행에서 융자받은 돈까지 모두 상환하고 지금은 일산 46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하여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 가정에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저희 부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는 1991년 5월부터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12년 동안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과목을 전문으로 과외지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아직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말이 부족한 저에게 학생들을 맡겨주셔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데 대해 주님께 감사하면서 매일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고 성모님께 묵주기도와 삼종기도를 드렸습니다. 은총을 받은 덕분으로 학생들 성적이 많이 올라가 어머니들이 고마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을 산 지도 어느덧 22년이 흘렀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저를 살리시어 영육을 치유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가족은 고통 중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생겼을 리 없고 이와 같이 주님의 큰 사랑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 육신의 고통을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기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제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에 있어서나,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 과외지도를 했을 때에 있어서나, 가족과의 일치, 두 아들 교육문제 등 생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미사성제와 성체에서 은혜를 받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아내 크리스티나가 저 대신 가계를 도맡아준 덕분입니다.
당신은 죽었었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셨으니 주님의 것이요, 따라서 가계는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주님의 일만 하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항상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과 천상의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육신의 불편함은 완치되지 못하였지만 금년 9월에 제대한 큰아들과 고3인 작은아들 이렇게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으며 어머님과 아내와 함께 사랑으로 일치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 저의 처지 그대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작은 일에 감사하고 적은 일에 충실하며 차근차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