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마티네영상음악회
2010년 4월 7일(목)오후2시30분~4시30분 진행 : 유혁준(고양아람누리 공연기획팀 차장, 음악칼럼니스트)
신(神) 앞에서 바흐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천사들이 모이면 언제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길 것이라는 것을. 카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은 정말 천사들의 숨소리 같은 티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모차르트를 흔히 바흐와 베토벤 두 거인 사이에 낀 꼬마요정, 아니면 영원한 신동(神童)으로 간주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모차르트는 그 두 거봉(巨峰)의 그늘에 가려 그 존재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드높은 준봉 사이의 깊은 계곡에서가 아니면 꽃 필 수 없는 청초한 꽃이 만발하고, 그러한 계곡에서가 아니라면 흐를 수 없는 아름다운 선율이 있다. 허나 그 선율의 개울은 노상 즐겁게 흐르는 듯 하지만, 거기에는 심산(深山)의 고독과 우수가 짙게 깔려 있음을 어찌 놓치랴. 그의 작품에서는 극히 친근하고 쉽고 얼핏 듣기에는 아무런 고뇌의 흔적도 없이 그저 쾌활하기만 들리는 음악이 많아, ‘즐거운, 너무나 즐겁기만 한 음악’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에는 분명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차르트의 바로 그런 면을 좋아하고 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모차르트는 그의 천재가 빛날 때보다는, 어렸을 때 날렵한 새끼 원숭이처럼 곳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곡예연주를 보여주었을 때 더욱 열광적인 갈채를 모았다.” 고 롤랑 마뉘엘은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를 끝내 그렇게만 생각하려 한다면 우리는 영영 모차르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해맑은 음악 속에 흐르는 처절한 슬픔 모든 음악가가 영주나 군주 또는 교회에 종속되어 있었던 시대에, 그는 그 굴레를 벗고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던 최초의 음악가였다. 직장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사육(飼育)되고 있으면 최적의 생활은 보장되고 적어도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우유를 짜내기 위해서는 굶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음악가들이 그런 사육에 길들여져 있었을 때, 모차르트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했다. 음악가로서 자유직이 확립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사육을 거부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 모험과 자유의 대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안한 생활과 굶주림이었다. 모차르트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편지를 통해서 엿볼 수 있지만, 그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보다는 그의 침묵에서 우리는 한층 그의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한 번도 생활의 승리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하기만 했던 것일까? "세속적인 행복과 예술적인 승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예사이다. 그러나 참다운 창조자는 비록 세속적인 불행을 겪을지라도 예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감이야말로 창조자의 존재를 가득 채워주는, 그리고 지상의 어떤 행복과도 견줄 수 없는 고귀한 체험이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이 말하고 있듯이 모차르트는 비록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해도 예술이라는 그 고귀한 영혼의 세계에서는 항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했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비탄에 잠겨 있을 때조차도 그는 결코 울부짖거나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언제나 명랑하고 경쾌한 듯이 보여, 사람들은 흔히 그의 음악은 달콤하고 즐겁기만 한 것으로 오해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의 표면적인 즐거움 속에는 얼마나 깊은 오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눈물이 방울진 채 웃음짓고 있는 얼굴처럼 아람답고 감격스러운 모습은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언제나 해맑게 흐르면서도 그 밑바닥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우수의 그림자로 인해 우리를 순수하고 황홀한 슬픔으로 이끈다. 그리고 가장 슬플 때조차 즐거운 듯이 웃을 수 있는 예지를 길러주기도 한다. “아름답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게......” 모차르트의 리허설에서 브루너 발터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자주 했다는 이 말 속에는 모차르트의 온갖 것이 함축되어 있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웃고 있는 자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오래전에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귀족 출신의 장교와 곡예단원이었던 여인, 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에 쫓겨 마침내 죽음으로 휘몰리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자기네의 절박한 사정도 망각한 채 그지없이 아름다운 사랑을 불태우면서 오직 순간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때로는 나비를 뒤쫓고, 때로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강에서 고기를 잡거나 딸기를 찾아 헤매면서도 그들은 항상 행복하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전개될 때마다 그 배경의 아름다움, 그들의 밀도 높은 사랑, 그리고 절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부각시키면서 모차르트의 음악(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코 아름다움에만 취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듯이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애써 웃으려 하는 그 처절성이, 그리고 깊은 파토스가 언제나 잔잔히 깔리면서 우리를 오열케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했던 그들은 그들이 한때 즐겁게 나비를 뒤쫓던 숲으로 간다. 남자 주인공 섹스틴은 사랑하는 마디간을 껴안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녀를 쏠 수 없어 힘없이 총부리를 내리고 만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결단을 촉구하면서도 나비가 날아오자 저도 모르게 그 나비를 뒤쫓아간다. 그녀는 자기네들의 죽음도, 모든 시름도, 그리고 굶주림도 잊은 채 갖가지 야생화로 뒤덮인 들에서 나비를 따라 껑충거리다가 마침내 그 나비를 잡는다. 허나 다음 순간 그녀는 그 아름다운 포로를 놓아주기로 한다. 두 손을 공중으로 추켜들어 나비를 막 날려주려고 했을 때의 그녀 모습은 천사라 해도 그토록 티 없이 맑을 수는 없으리만큼 아름다웠다. 바로 그 순간 총성이 울린다. 그래도 그녀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어린이 합창단의 맑은 노래가 흐르면서 엔드 마크가 나올 때까지 화면은 여전히 그녀의 웃는 얼굴로, 나비를 자유로운 세계로 날려주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은 채 관중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 어떤 비극적인 상황도 가장 드높은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속화시켰던 마디간의 그 황홀한 모습이야말로 모차르트의 음악 바로 그것이었다. 모차르트가 들려주는 최상의 음악은 언제나 그렇다. 내면의 세계가 아무리 처절했을 때라도 그것을 신비의 베일로 가려둔 채, 표면에서는 죽는 순간의 엘비라 마디간처럼 그 티 없이 맑은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장님이 아니라면 누가 그 베일 속에 가려진 깊은 비애를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인가? 아니 장님들은 의외로 많다. 언제인가도 라디오에서는 어느 음악 해설자가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아름다운 악상이 넘쳐흘러 펜을 들기만 하면 그 악상이 절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즐겁기만 하다.”고 엉뚱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오랫동안 장님이었다. 베토벤이 거센 불길과 같고 바흐가 흐르는 물과 같다면 모차르트는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활활 타오르는 촛불과도 같다. 그리고 표면적인 화사함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어둠을 비춰주는 그 신비의 베일 속, 그 깊숙한 바탕에 깔려 있는 비애의 샘을 마실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비감(悲感)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때이른 체험에서만 생겨났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길을 잃어 먼 천국에서 잘못 이 지상에 떨어졌던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그 깊은 애수를 그는 타고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2.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영국 왕실 학술원에서 1764년부터 5년에 걸쳐 모차르트를 관찰한 다음 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바링턴의 보고서’에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여덟 살의 모차르트는 영국인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세익스피어와 동등한 천재다.” 이 천재 모차르트는 악기 사용에 있어서도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모험으로 대변혁을 일구었다. 그 가운데 클라리넷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인지해 클라리넷이 교향악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악기로 부상시켰다. 오보에를 클라리넷으로 대치한 교향곡 39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교향곡 40번은 후에 클라리넷을 따로 첨가시키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1789년 클라리넷 5중주를 발표했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1791년 대작 ‘마술피리’를 작곡한 직후인 10월 독주악기가 들어가는 협주곡으로서는 마지막으로 클라리넷 협주곡, K.622를 발표했다. 후배 작곡가도 이를 본뜬 것이었을까. 최후의 작품으로 클라리넷 소나타를 쓴 것은 기막힌 우연이다. 인생의 황혼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색을 가진 악기 클라리넷. 모차르트는 클라리넷 5중주도 그랬듯이, 같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당대 제일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절친한 친구 안톤 슈타들러(Anton Stadler 1753-1812)에게 헌정했다. 작곡가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연주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알게 해주는 예이다. 모차르트는저음, 중음, 고음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클라리넷의 정점을 최대한 살렸다. 최저음의 울림을 살려 고음과 대비시켰으며 오케스트라도 작품 전체에서 독주악기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루어 단순한 기교 위주의 협주곡으로 전락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했다. 일반적인 Bb조가 아니라 A조 클라리넷을 사용한 것도 특별한 점이고 그것은 g단조와 함께 모차르트가 가장 선호하는 조성이었다. 그리고 최만년의 작품이면서도 관현악의 절제가 상당히 돋보인다. 두 대의 플루트와 두 대의 바순은 목관편성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중음역에서는 호른 2개가 들어가고 이를 현악기가 보충한다. 이것이 전부다. 오보에, 클라리네스 트럼펫, 팀파니 등의 악기는 보이지 않는다. g단조 교향곡에서 트럼펫과 팀파니를 배제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면서도 표현할 것은 다 표현하는... 무려 13분에 달하는 1악장 ‘알레그로’. 모차르트의 웬만한 교향곡 1악장보다 긴 359마디의 장대한 길이다. 얼마나 이 곡에 주의를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1주제는 참으로 소담하다. 아니 고답적이다. 2주제는 1주제와는 다른 숨이 긴 딸림조로 등장한다. 독주 클라리넷과 관현악과의 대화는 갈등이 아니라 화합이다. 서로를 배려해야만 순정한 음악이 나올 수 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잔상이 머리를 스친다. 그 고즈넉한 아프리카의 풍경이 2악장 ‘아다지오’와 너무도 합일한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것’ 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말은 바로 이 악장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모차르트가 인류에게 선물한 가장 멋진 음악 중의 하나이다. 마른 눈물이 눈시울을 붉힌다. 모차르트의 굴곡 많았던 삶의 단편들이 누적되는 동안 슬픔은 클라리넷의 목소리로 더욱 치밀어 올라온다. 3부로 된 가곡 형식이다. 클라리넷이 이토록 가슴을 에이게 하는 악기인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저음부의 음향은 더욱 그렇다. 길게 내뱉는 한숨으로 ‘아다지오’의 행렬은 종결한다. 새가 지저귄다.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의 맑디 맑은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노래한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바라다 본 시가지만큼이나 여유롭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이다. ‘론도’는 클라리넷을 위한 형식으로 착각할 만큼 딱 들어맞는다. 가볍고 경쾌하며 음역과 리듬이 대비되며 때로 유머스럽기까지 하다. 새는 땅에서 위로 솟구쳐 하늘로 비상한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달려가는 클라리넷의 모습이 풍경화를 그린다. 후반부에 분산화음으로 오케스트라와 겨루는 클라리넷의 달리기는 참으로 싱그럽다. “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입니다. 이땅위에 꿈을 꾸고 있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필 방랑한 꿈이라니요! 평화로운, 달콤한, 상쾌한 꿈이라고 해야지요!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꿈들이 존재한다면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저의 생을 참아갈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께 천 번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1778년12월 1일 ” 천 번의 입맞춤은 음악으로 그대로 전해져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우리는 모차르트가 매일같이 퍼붓는 천 번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클라리넷 협주곡에서 한숨지으며 샘솟는 모차르트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삶의 고단한 의미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연주시간 약 30분/ 레오폴트 블라흐의 협연에 의함) - 영화 <Out of Africa> 중 한 장면 3. 재미있는 옷 갈아입기 – 크로스오버, 그 위대한 지평 편곡(Transcription)은 서양음악 태동기부터 자행되어온 가장 매력적인 ‘바꿈질’이었다. 자신의 곡을, 혹은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포장을 달리해 재배열하는 것은 손쉽게 얻은 전리품이요, 때로는 원곡 이상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파로디(Parody)'라는 이름으로 고된 작업 속에서 개작을 거듭한 바흐의 편곡은 어디 하나 어색한 것이 없이 빛을 발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또한 편곡의 명인이었다. 베토벤의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에 의한 7개의 변주곡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1막에 나오는 파파게노와 파미나의 이중창을 편곡한 것이었는데 대선배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차 있다. 20세기 들어 편곡은 이제 대세였다. 그 선봉에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있었다. 그는 감히 대(大)바흐의 경건한 음악을 19세기 후기 낭만의 대편성 오케스트라용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1930년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의해 시도된 이 작업은 처음에는 경박하기 그지없다 하여 청중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앙코르에서 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아가며 최고의 히트곡으로 탈바꿈하며 20세기 바흐 대중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이른다. 이는 19세기 멘델스존의 바흐 재발견에 맞먹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과의 만남은 어떨까? 21세기에 이른 지금의 음악은 극히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음악은 무조주의와 전위음악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는 한편 각 국의 민속음악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제3세계 음악은 ‘집시킹스’에서 보듯 팝음악 못지않은 인기몰이를 하며 승승장구하는가 하면 기존 대중음악은 록음악이 여러 분파를 형성하며 여전이 막강한 세를 과시하고 있다. 클래식과 팝.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둘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이 양분된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로 곱지 않은 시선을 주고받아왔으며 이는 음악의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모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새 조류가 떠오르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크로스오버는 원래 미국에서 특정 곡이 여러 음악차트에 동시에 등장하는 현상을 뜻했다. 듣는 관점에 따라 A라는 장르의 음악에 속할 수도, B라는 장르에 속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즈와 팝(록)음악의 공통분모를 가진 작품에 사용되던 크로스오버는 팝음악이 세분화되면서 각 장르를 아우르는 아티스트가속속 출현했다. 록과 컨트리, 블루스와 록의 크로스오버 등 각양각색의 음악이 탄생하며 아예 ‘재즈록’, ‘아트록’, ‘컨트리록’ 등 수많은 장으로 핵융합을 거듭하며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이에 따라 팝음악끼리의 크로스오버는 더 이상 색다른 것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슷한 의미로 ‘퓨전(Fusion)’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재즈와 록의 교차를 뜻하는 것에 한정시킬 수밖에 없으며 일반적으로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클래식과 팝의 만남. 이러한 크로스오버는 팝 아티스트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이나 칙 코리아의 건반연주는 이미 고전이다. 딥 퍼플의 존 로드는 화려한 오르간 연주를 선보였으며 스콜피온스는 아예 ‘클래식의 지존’ 베를린 필과 함께 ‘Moment of Glory’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클래식 연주자의 크로스오버는 굴다, 메뉴힌, 스톨츠만에서 시작해 도밍고와 파바로티까지 가세하며 점입가경을 이루었다. 클로드 볼링은 랑팔, 요요마, 주커만, 라고야와 같은 기라성 같은 연주가와 함께 아예 클래식과 재즈를 위한 창작의 세계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하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의 1회성 행사는 아무래도 2% 부족했다. 보다 적극적인 클래식과 팝의 만남은 역시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의해 그 서막을 열었다. 이는 영국 버밍햄 출신의 루이스 클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마추어 밴드에 기타를 치던 그는 리즈 음악대학에서 플루트 키보드 등의 악기와 작곡, 편곡을 공부하며 연마해 드디어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공전의 히트앨범 ‘Hooked on classics’를 내놓았다. 무려 800만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리며 클락을 일약 스타덤으로오르게 한 ‘Hooked on classics’는 3장의 앨범 모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순회공연에서는 10만 명의 청중을 모으기도 했다. 1985년 루이스 클락은 프로그레시브 록그룹 ‘르네상스’의 보컬리스트 애니 헤슬램과 함께 ‘Still Life’를 발표해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루이스 클락의 공적은 단순히 클래식음악을 팝스타일로 편곡한 것에 끝나지 않았다. 바로 비틀즈, 아바, 퀸 등 전설로 남은 팝아티스트의 명곡을 웅혼한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편곡해 음악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때로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때로는 첼로 협주곡으로 옷을 바꿔 입은 팝의 명곡은 그의 손을 거쳐 그대로 클래식음악으로 거듭났다. 루이스 클락의 크로스오버 행보는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의 그것과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철저한 원곡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전통의 클래식 옷을 입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중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런던 심포니, 뮌헨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가 크로스오버 음반을 다투어 내놓고 있지만 루이스 클락의 로열 필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감상곡 아바 ‘Dancing Queen’ ‘Chiquitita’ 셀린 디온 ‘My Heart will go on’ 퀸 ‘보헤미안 랩소디’, ‘Love of My Life’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제1막 중에서 ‘Belle’ 엔니오 모리코네 ‘넬라 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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