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사준비와 치목
집을 짓는 순서 중 제일 먼저 할 일이 좋은 집터를 잡는 일이다. 집터는 대개 지관을 불러 좌향(坐向)을 보는데, 이 때 집 주인이 될 대주(大主)의 운세와 함께 마을의 산세와 지세를 보며, 오목하고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여 주위보다 약간 높으면서 전망이 확 트인 곳이 가장 이상적인 집터로 본다. 따라서 방위는 주로 동향, 남향으로 앉히는데 마을의 지세에 따라 좌향이 정해진다.
집을 지으려면 집지을 나무와 땅을 마련해야 하는데 목재는 건조가 필요한 부재로서 중요한 재료이므로 미리 구입하여 가공해야 한다. 특히 한옥은 현장 조립성격이 강하므로 잘 건조된 부재를 치목하고 미리 마름질한 뒤 현장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재를 현장에 잘 쌓아 두어야 한다.
한옥의 재목으로는 소나무를 가장 많이 사용하며 밤나무가 흔한 지방에서는 기둥을 밤나무로 사용하기도 한다. 밤나무는 지네가 모여드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무의 내구성이 강해 목조집의 기둥으로 많이 쓰인다.
특히 대문이나 사립문 기둥을 밤나무로 만들면 도적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미신도 있다. 기둥은 나무가 서있던 대로 위와 아래를 반드시 확인하고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귀신(木神)이 발작하여 집안에 동티가 난다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재미난 풍속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오히려 기둥을 거꾸로 세워야 나무귀신이 놀라서 오히려 잡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갓기둥만 거꾸로 세우며 보기둥이나 안기둥은 똑바로 세운다, 또 기둥 중에 상기둥을 세울 때에는 식구 중 운세가 맞지 않는 사람은 절대 보아서는 안 된다는 미신도 있다.
그리고 헌집(舊家)의 재목을 사용할 때는 다른 구가의 재목들과 함께 섞어 사용해서는 안되며 구가의 재목과 새 재목을 혼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구가의 재목으로 집을 지을 경우라도 필히 마룻대는 새 재목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안채를(위채) 뜯어다 행랑채(아래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행랑채를 뜯어다 안채를 짓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안채를 뜯어다 행랑채를 짓는 것은 재목의 강등(降等)을 의미하므로 목신이 화를 내지만, 행랑채를 뜯어다 안채를 짓는 것은 행랑채의 승격을 의미하기 때문에 목신이 좋아한다고 한다. 이 밖에 선박이나 사찰에서 사용했던 재목은 가재목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고사목, 벼락 맞은 나무나 단풍나무 등도 사용하지 않는다.
공사는 대개 추운 겨울철과 장마기인 여름철을 피해 봄이나 가을에 시작한다. 집터와 좌향을 잡고 나면 택일을 하는데 택일은 땅을 파는 개토(開土 터 닦는 일)와 주추를 놓는 정초(定礎), 기중을 세우는 입주(立柱),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上樑), 입택(入宅) 등의 순으로 날을 받는다.
2. 개토와 토신제
개토는 집터를 닦기 위해 처음 땅을 파는 일로서 택일하여 지신(地神)에게 먼저 고사(告祀)를 지낸 후 일을 시작해야 동티(흙이나 돌을 잘못 다루어 지신의 노여움을 사서 받는 재앙)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고사는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주는 목욕재계하고 정성들여 제상을 준비한다.
제수로 쓰이는 물건으로는, 계란 1개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밥 한 그릇, 마른명태, 술 한 잔을 차려놓고 엎드려 절을 하며 개토를 선고한다.
그런 후 동서남북 사방으로 술을 한 잔씩 땅에 붓기도 하고 소금을 한줌씩 뿌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무사고를 기원하며 집에 불이 나지 않고 잡귀가 들지 못하게 부정을 치기 위함이다. 고사(텃제)를 마치면 곧바로 집터를 고르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때도 대주의 운세에 맞는 방향부터 땅 파기를 시작한다.
3. 정초
터다지기가 끝이 나면 지관(地官)이 정해 놓은 좌향에 따라 도편수(집을 짓는 총책임자로 목수의 우두머리다)는 기둥을 세울 자리에 주춧돌을 놓게 된다. 이때 지관은 패철을 놓아 기둥 중심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그 위에 열십자(+)로 기둥의 중심축 자리를 표시한다.
이렇게 초석 놓을 자리를 정하게 되면 도편수는 규준틀을 세우고 실을 띄워 기둥 놓일 자리를 정하고 초석 중심에 먹을 놓아 십반을 그려놓는다.
이와 같이 기초를 만드는 건축적 행위는 집안에 새로운 성주신의 잉태(孕胎)를 위해 어머니를 상징하는 땅(穴)에 아버지의 씨앗(生命)을 의미하는 주추를 박아 성주신을 잉태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4. 입주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입주라고 부른다.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초석에 그려진 십반과 기둥 하부에 목수가 먹선 놓은 십반을 맞추어 세우는 일을 말하며 기둥이 수직으로 잘 세워졌는지 도편수는 사게부리(추)를 내려 다림을 보게 된다.
수평과 수직이 맞으면 기둥에 버팀 목을 대고 기둥머리에 창방을 연결하게 된다. 이렇게 작업이 진행되면 기둥머리에 보와 도리, 포작을 얹음으로서 건물의 구조틀이 만들어지게 된다.
입주 역시 지관으로부터 택일(擇日)을 하여 시행하는데 기둥을 세우는 과정은 수태(受胎)된 성주가 모태(母胎) 안에서 발육하여 뼈대를 갖추는 과정으로 정상적 골격을 갖춘 성주 출산을 위해서 기둥 수직 세우기는 매우 중요하다.
5. 상량제
기둥과 보가 얹히면 지붕틀을 꾸미게 되는데 지붕틀은 서까래를 얹을 수 있도록 짜여진 지붕구조를 말한다. 지붕틀을 마감하는 마지막 작업이 바로 종량 마룻대를 올리는 작업인데 이로써 구조체는 마무리되고, 다음부터는 벽을 치고 마루를 놓는 등의 내부 공사가 진행된다. 따라서 상량을 올리는 일은 큰 사고 없이 구조체 공역을 마침으로써 큰 고비를 넘겼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공사일정의 중요행사가 된다.
주인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떡 ? 과일 ? 술 등을 준비하고 돈이나 피륙도 갖추는데, 이날의 제물들은 목수가 모두 갖게 되므로 상량일을 목수의 생일이라고 한다. 상량식을 할 때 대목(목수)은 정시에 상량을 할 수 있도록 기둥위에 보와 도리를 얹은 후 대공을 세우고 마룻대를 미리 준비하여 의식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대주가 성조운(成造運)이 들었는지를 알아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가족 중에 운이 맞는 사람을 대주로 삼아 택일하여 상량 시(時)를 정해 의식을 행한다.
대주와 상량 일시가 정해지면 의식이 시작되고 상량문(上樑文)이 쓰인 마룻대를 상량할 위치에 놓고 그 앞에 제상을 차린다. 제상에는 돼지머리 또는 명태와 밥, 흰시루떡, 삼색 과일, 술, 돈 등의 제물(祭物)을 차려 놓고 향불을 피워 정해진 대주가 두 번씩 3회 절을 한다.
대주의 절이 끝나면 아들, 손자들도 차례대로 절을 올린 다음 부어 놓았던 술을 마룻대에 뿌리면서 자손대대로 무병장수하며 가정의 화목을 빈다. 절이 모두 끝나고 나면 돈과 광목, 명태, 실, 쌀(쌀은 종이봉지에 넣음)을 마룻대에 매어 상량을 한다.
상량 때 집주인의 성주(집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조상신)를 모셔다 “대주가 새집을 지었으니 아무 탈 없이 집을 잘 지켜 달라”는 뜻으로 목수가 창호지를 접어서 기둥머리에 흰 실타래로 묶어 놓기도 한다. 상량의식이 모두 끝나고 나면 대주는 마을 주민들을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목수는 상량일을 종도리 하단이나 보 바닥에 적어 넣는다. 경우에 다라서 상량문을 적어 부재사이에 껴 넣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한옥문화의 중요한 한 형태이며 역사의 기록이 된다.
이런 의식을 거쳐 지붕이 구성되는데 지붕의 짜임은 벽체나 바닥과 더불어 건축공간을 구성하고, 외부로부터 비 ? 눈 ? 이슬 등을 비롯해 온도 ? 습도 ? 음향 ? 일광 ? 바람 ? 시선 ? 외적 등을 차단하는 기능을 갖게 되므로 벽체와 같이 시각적으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 형상이나 마감재료가 건축물 외모에 큰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고, 한옥의 처마구조는 한국 건축 특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6. 입택(집들이)
집이 완성되었다면 손 없는 날을 길일로 정한 후 집들이를 한다. 각 지방 풍습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조왕솥(부엌에 있는 솥 중에서 주로 밥을 짓는 솥이다.
조왕이란 부엌을 맡은 신을 말하며 부엌의 모든 길흉을 관장한다)을 제일 먼저 가져간다. 이때 솥 안에 흰시루떡(백설기)을 만들어 넣어 옮기는 지방도 있고, 불씨가 담긴 화로를 넣어가는 지방도 있다.
새집에 이삿짐이 도착하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조왕솥을 내려놓고 고사(절)를 지낸다. 그 다음 입택 시간에 맞추어 솥을 부엌에 걸고 밥을 지어 조왕신께 고한 후 술과 음식을 마을 주민들에게 대접한다.
그리고 세간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놓게 되면 제일먼저 조상을 모시는 의례를 행한다. 안방 북쪽 상인방 밑에 조상신을 좌정시킨 후 음식을 차려놓고 새집으로 이사 들었음을 알리며 가족들의 수복을 빈다. 다음으로 성주신과 잡신들에게도 집안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한다.
1) 기둥과 주두 2) 추녀걸기 3) 서까래 4) 서까래 걸기
5) 도리 얹기 6) 종도리 얹기 직전 7) 종도리 얹기 완료 8) 솟을 합장 완성
◈ 한옥의 재료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한옥과 흙
▶ 기와
기와는 개와(蓋瓦)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古史考)"에 "하(夏)나라때 곤오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 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때 사용된 기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낙랑시대(樂浪時代)라 불리는 삼국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다. 이때에는 평기와(平瓦) 처마에 아직 와당(瓦當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연화(蓮華)무늬의 원와당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기와는 주로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전통성을 살려 소용돌이꼴 무늬에 특색이 있는 다양성을 보였으나 백제에서는 간소한 연화무늬가 주류를 이루어 남조(南朝)의 강한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구려 ? 백제의 유적에서 평기와의 처마 끝에 지압(指壓)무늬(손끝으로 누른 무늬)가 발견된 것은 처마평기와(軒平瓦)가 와당으로 발전하는 원초적 형태다.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 ? 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물끊기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 댄다. 전자를 착고(着高), 후자를 부고(付高)라 하며, 그 위에 마루장을 3∼7겹 덮고 최상부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마루의 양 끝에는 용두 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 전돌
전돌은 주로 벽돌무덤, 궁궐 및 사원 건축에 이용되었는데 그 종류나 쓰임새, 모양이 다양하다. 전돌은 용도에 따라 무덤 전돌과 탑 전돌 등으로 구분된다.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 전돌, 삼각 전돌, 능형 전돌(陵形塼), 이형 전돌로 구분되고 문양의 유무에 따라 민무늬 전돌과 무늬 전돌로 나뉘기도 하며, 글씨가 새겨진 명문 전돌도 있다. 무덤 전돌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확인되며, 공주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것이 대표적인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유적에서 발견된 연꽃무늬와 글씨가 있는 전돌은 무령왕릉에 쓰인 전돌들과 비슷하여 주목된다.
무늬 전돌은 부여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8종의 무늬 전돌이 대표적인 예로서 산경(山景)무늬, 귀형(鬼形)무늬, 반용(蟠龍)무늬, 봉황무늬, 연화와운(蓮花渦雲) 무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전돌들은 조각 수법이 매우 세련되었고, 화려한 의장(意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군수리 절터에서 출토된 상자모양 전돌이 있다. 이러한 무늬 전돌은 6∼7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으며, 백제미술의 부드러움이나 세련됨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 한옥과 소나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두 주고 가는 소나무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는 적송(赤松)아러 뷸리기도 하는데, 이는 소나무의 껍질이 붉고 가지 끝에 있는 눈의 색깔도 붉기 때문이다.
소나무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중생대의 삼첩기 말기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1억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나무의 솔은 상(上). 고(高). 원(元)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무 중의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소나무는 한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대들보를 올린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쳐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걸 막는다. 산모는 소나무 장작불로 지은 밥과 미역국을 먹고 그 불로 따뜻해진 온돌방에서 조리를 했다.
송판(松板)으로는 가구를 만들었으며 솔가리는 불쏘시개로 썼다. 음식에도 소나무는 빠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식재료다. 한민족은 솔잎으로 만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를 담아 마시기도 했고 꽃가루로 송화주(松花酒)를 빚고, 새순을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를 즐겼다. 구황이 들 때는 소나무 속껍질 인 송기(松肌)를 벗겨 떡도 만들고 죽을 쑤어 먹기도 했고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솔잎으로 차를 다려 마시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고 송이버섯은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
소나무 껍질에 홈을 파서 송진을 모아썼고, 소나무 뿌리를 건류(乾溜)하여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으며,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송연(松烟)으로 먹(墨)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승들은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송낙(松蘿)을 쓰고 다녔으며, 양반들은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산림처사들은 송도(松濤)와 송운(松韻), 즉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다. 소나무의 푸른 빛깔인 송취(松翠)와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던 선비가 한둘이었을까. 생을 마친 뒤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민족은 태어나서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던 것이다.
한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닌 소나무는 민족의 정서와 기질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건축분야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소나무는, 오두막이든 초가삼간이든 솟을대문 세도가의 아흔아홉 칸 저택이든, 구중궁궐 크고 작은 권부의 대궐이든, 건축재로서의 국가 존립의 한 기틀을 형성했다.
특히 궁궐을 지을 때는 오직 소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 폭이 좁으며 강도가 크고 잘 뒤틀리지 않으면서도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진이 빠지더라도 나무가 견고해져 마른 후에도 갈라지지 않는, 목재중의 목재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 한옥의 구조와 기능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안채와 안방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된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 외에는 남성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들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여 있었다.
2. 사랑채와 사랑방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는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방으로 남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며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과 가까운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 외에도 독서, 예술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 또한 발달하였다.
또한 금욕적 유교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 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장농과 책장, 문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중상류의 주택에는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시고 각 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最尊位 가장 높은 조상) 앞에 놓았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들은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다.
4. 행랑채
한옥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의 격을 지어 배치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 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 행랑채를 따로 마련하였으며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하였다.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였다.
행랑이란 대문 양쪽 또는 문간 옆에 있는 방을 말한다. 집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큰집에서는 행랑채를 길게 짓고 방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원래 이를 행랑이라 한다. 행랑에는 대개 노비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이들은 행랑아범, 행랑어멈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행랑을 창고로 쓰이기도 하였다.
5. 별당채
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는 별당이 집의 뒤, 안채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었다. 결혼 전의 딸들이 기거하는 별당은 초당으로 불리었으며 또한 결혼 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다.
6. 곳간채
곳간채는 오래 저장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중상류층의 주택 중에서도 부유한 집안은 수십 칸 규모의 주택에서 살았으며 이들 칸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곳간채가 별도로 마련되었다.
7. 대청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 앞의 너른 마루를 대청이라 한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한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놓으면 대청은 열린 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分閤門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에 있는 것을 안대청이라 하며 사랑채에 면해있으면 사랑대청이라 한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있어 엄밀히 말하면 실내라고 할 수 없다.
대청 중앙에 떡 버티고 서서 아랫사람에게 분부를 하는사람의 위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대청은 웅장감을 강조하였다.
대청의 바닥은 상류주택에서 서민주택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우물마루가 쓰였다. 대청의 구조를 보면, 마당에서 대청으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다. 댓돌에서 바로 올라서면 대청 앞쪽으로는 대개 앞 툇마루가 있다. 대청의 크기에 따라 기둥의 수가 다른데 보통 대청의 크기는 2칸에서 8칸까지 다양하다. 주로 사랑채에 설치되었던 누마루는 기단 없이 기둥위에 설치된 형태로 원두막처럼 마룻바닥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사방이 트인 노출공간이다. 누마루는 대청처럼 여름에는 문을 걸어 올려 주변의 자연의 운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겨울철에는 문을 닫아 한기를 막았다.
8. 부엌
불을 지펴서 각종 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며,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 하여 별채를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다. 부엌 바닥은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설계된 '온돌구조' 때문이다. 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 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두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 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다.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었으며 건넌방 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부엌에서 밥을 풀 때 오른손에 주걱을 들고 왼손에 밥그릇을 들고 푸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동향대문이면 밥을 안으로 푸는 격이어서 좋으나 혹 부엌 위치가 나쁘거나 대문 위치가 나쁘면 밥을 대문 밖을 향하여 푸는 격이 되어 살림이 헤퍼 망한다고 했다.
부엌살림은 안방마님의 감독 하에 있고 큰살림인 경우는 가사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킨다. 부엌에서 물일과 밥짓기, 국수 삶기, 국 끓이기 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반모(飯母)라 했고, 밥데기 혹은 부엌데기라고도 불렀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조리사라 할 수 있다. 또 찬간에서 찬물(饌物 반찬)을 만드는 사람을 찬모(饌母)라 하였다.
궁중의 안소주방(內燒廚房 왕과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는 곳)에서 보면, 찬모는 주방 상궁의 격이고 반모는 무수리의 격에 해당된다. 그 밖에 가사에 관한 다른 잡일을 하는 사람을 안잠자기 ? 또는 상직꾼(常直軍)이라 하였다.
매일 뒤주에서 밥쌀을 내 주는 사람은 안방 시어머니이고 며느리는 쌀을 받아 반모에게 넘기고 밥을 풀 때까지 모든 것을 관장한다. 며느리는 쌀을 씻어 솥에 안치는 것을 보고 찬간의 음식을 감선(監膳)한다. 모든 식구들의 밥그릇이 준비되면 며느리가 어른의 진지부터 지어 놓은 밥을 식성에 맞게 푼다. 원 가족의 밥을 푸고 나면 주걱을 반모에게 넘겨 다른 식솔 일꾼들의 밥을 푸게 한다.
9. 찬방
찬방 혹은 찬마루라고 불리는 공간은 오늘날 주택의 부엌방과 다용도실 정도에 해당하는 곳으로 반가나 중 . 상류 지방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엌과 인접한 공간이다. 찬마루는 부엌과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이곳에서 상에 올려 안방, 사랑방 등으로 내갔으며 간단한 음식은 이곳에서 조리하였다. 이곳에는 상을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 식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도 쓰였다. 불을 지펴서 각종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나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 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10. 장독대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의 자연환경은 음식이 잘 부패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 발효시키는 방법이 일찍부터 개발되었고, 젓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젓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였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었는데,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에 두었다. 또한 장독 하나하나에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하였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독대는 한국 가정의 필수적 설비로서 대체로 햇볕이 잘 드는 동편에 마련하는데, 대지가 넓은 집은 뒷마당에 만들고, 좁은 집에서는 앞마당에 만든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하였는데,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11. 우물
살림집에서 물은 필수적이므로 우물을 통해 얻는 지하수맥은 상당히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마다 있었다. 井자형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르레를 설치한 우물 옆에는 물확(돌로 만든 수조)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
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도 했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 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기도 했다
12. 뒷간
[출처] 한옥공부5 (합판목재 인테리어자재) |작성자 ggh20400
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실을 뽑아내는 틀)가 놓여 있다. 용변을 보기 전에 뒤쪽의 재를 일정량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 수세식보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