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학맥이 끊기다, 정개청鄭介淸(1529~1590)
생애 : 중종 24년(1529) 당대에는 한미하고 가난했던 훈도인 아버지 세웅世雄과 어머니 금성나씨錦城羅氏 사이에 장남으로 나주의 금성산 아래 대곡동大谷洞에서 태어났고, 중년에 나주의 곡강촌曲江村(현 나주시 동강면)으로 이거하였으며, 1567년 이전에 현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濟洞(당시 무안현 엄담의 윤암輪巖)에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문하에서 공부하여 이문異問을 얻었고, 점점 학문에 심취하여 영주산瀛洲山(금강산)의 절로 들어가 유학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약학․산수․역학․전진법戰陣法․가무歌舞 등 참으로 넓은 학문의 경지를 닦아 오묘함을 해득하였다.
선조대왕도 그를 아꼈으며,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알고 영의정 박순朴淳이 8도도원수에 천거하는 등 많은 재상들이 그를 천거하였으나 곡성현감谷城縣監 8개월 재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숙배만 하고 돌아왔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질과 성품에 따라 가르치되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게 한 연후에야 가르침을 그쳤고, “도道를 쌓는 것을 부富로 삼지 재물로써 부를 삼지 말 것이며, 덕德이 성盛하는 것을 귀貴로 삼지 벼슬로서 귀를 삼지 말 것이며, 인仁을 얻음이 영화榮華이지 높은 벼슬이 영화가 아니며, 구차히 이利를 구하는 것이 욕辱이지 곤액困厄은 욕이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윤암정사에서 강학의 문을 열자, 전국에서 수백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는데, 제자들이 모여들어 이룬 마을이 불암佛岩과 정동亭洞이며 지금도 ‘제자거리’라 부르고 있다. 현달한 제자로는 나덕준羅德峻(나주사람, 현감)․나덕윤羅德潤(나주, 감찰)․안중묵安重黙(보성, 직장)․최홍수崔弘守(화순, 별좌)․조수홍曺守弘(화순)․오익창吳益昌(무장)․나덕원羅德元(나주, 현감)․송제민宋濟民(광주)․배명裵蓂(무안)․나덕현羅德顯(나주)․유양柳瀁(영암)․정식鄭湜(무장, 현감)․정인鄭寅(정시 문과, 장령)․김세규金世奎(화순)․윤제尹濟(함평)․조봉서趙鳳瑞(나주)․안기현安基賢(보성)․나덕수羅德修(나주)․정지함鄭之諴(좌랑)․남이공南以恭(남양주, 판서)․화천정花川正 이수붕李壽鵬(왕실) 등이다.
정개청의 인품에 대하여 유성룡柳成龍은 ‘호남 사람 가운데 더욱 명망이 있으며 학술과 행검行檢으로 자임自任했다’고 하였으며 윤선도尹善道는 ‘동방의 진유眞儒로 이황李滉에 버금간다’고 하였으며 당대 명상 박순朴淳은 ‘주자朱子 정자程子 뒤의 한사람이다’고 하였다.
정개청은 ꡔ수수기隨手記ꡕ 9권, ꡔ변례편성變禮編成ꡕ 2권, ꡔ우득록愚得錄ꡕ 3권(부록까지 4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에 무고로 연루되었을 때 장서와 저서를 금오랑이 압수해 갔다. 왕이 저서를 본가에 돌려주라고 하였으나, ꡔ수수기ꡕ(역사, 약학, 산수, 전진법, 가무 등이 실렸을 것으로 봄)와 변례편성은 중도에서 분실되고, ꡔ우득록ꡕ만 전해져 1689년(숙종 15) 4월에 왕명으로 등진謄進하게 하여 1692년에 간행되고, 1703년에 부록 1권(상․하)이 속간되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각판 일부와 인쇄본 몇 질이 전해오고, 1988년에 국역본이 전남향토문화총서 35집으로 출간되었다.
정개청은 학풍學風 관계로 정철鄭澈과 소원하게 지냈고, 서인 계열의 질시에 의해 기축옥사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국청에 서게 되었으며,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누명은 벗었으나, 진정한 절의와 청담을 일깨우기 위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이 ‘배절의排節義’ 논설이라 지목되어 1590년 6월 함경도 경원의 아산보阿山堡에 유배되었고, 국문 받을 때 상처가 악화되어 7월 26일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사후에 당인黨人 아닌 당인이 되어 동서당쟁에 말려들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광해조에 세워진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자산서원紫山書院이 다섯 번 뜯기고 세워지는 영욕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이현석).
학문세계 : 이중호․노수신에 이어 호남의 서경덕 학파의 대표자였던 정개청은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가 중년에 나주 곡강촌(현 동강면)으로 이거하였고 1570년경부터 무안 엄담淹潭 윤암輪岩(현 함평 엄다면 엄다리 제동齋洞)에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간 많은 재상들의 천거가 있어 교정랑청으로 불려가고 곡성현감 등에 부임하였으나 그 관직생활은 1년이 못되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나주와 무안 함평에 재지적 기반을 가지면서 강의계 등을 중심으로 학문을 가르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그는 예학과 역학 뿐만이 아니라 역사 천문 지리 의약 산수算數․복서卜書․덕공력德功力의 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박순에 의하여 왜적을 막을 수 있는 팔도도원수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은 매우 많아 이중호의 문인이었던 나사침羅士枕의 아들인 나덕명羅德明․덕준德峻․덕윤德潤 등과 그의 사위인 정식鄭湜․나세찬羅世纘의 손자인 나덕원羅德元․안응정安應鼎 문하이었던 안중묵安重黙․최경회崔慶會의 조카이었던 최홍우崔弘宇․유몽정柳夢井의 종질인 유양柳瀁․윤형정尹衡貞의 아들이었던 윤제 등 나주․화순․함평․보성 등의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평생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에 힘을 쏟아 공리와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詩가 전하고 있다.
千乘景公同草腐 천승 수레끄는 경공도 풀과 같이 썩는데
一瓢顔子柱天榮 한쪽박의 顔子는 하늘의 영화를 기둥삼네
是知仁義眞良貴 이로서 알겠느니 인의가 진실로 참되고 귀한 것을
莫道公侯謾姓名 공후를 말하여 성명을 오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그의 인품과 학식은 박순에게서 ‘주자 정자 이후의 단 한사람’이며 윤선도로부터는 ‘동방의 진유로서 이황에 버금간다’고 하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유희춘柳希春, 이이李珥 등도 그를 격찬하였다. 유희춘은 선생의 간절하고 깊은 함양涵養을 마땅히 여기어 후학의 사표로 권덕勸德을 하여 덕준 등이 이에 종사從師케 하였으며 이이도 또한 덕준 등에게 이르기를 ‘정모鄭某는 학행學行이 독실하여 가히 사람들의 스승이 될만 함으로 모름지기 자주 종유從遊하라’고 하였다.
그도 여타의 사림과 마찬가지로 선학禪學과 노장老莊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선학에 대하여 ‘선학을 하는 사람은 맨 처음부터 욕심을 막고 사색思索을 가다듬으며 걱정을 내쫓는 정신을 양성하여 형체를 떠나고 잡념을 떠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함으로 몸만 결백하게 할뿐이어서 … 그 마음이 세상의 임무를 싫어하고 번거롭게 여기며 직분을 버리고 청허淸虛함만 탐내어 사모하여, 성분性分을 멸각滅却시키고 손발을 제멋대로 두어 종일終日 아무 것도 하지를 않으며 스스로 고상하고 미묘함을 직접 끊고 능히 만사에 응한다고는 하나 하나의 사물이 면전面前에 다다르면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의 공功이 없어 일곱 번 엎어지고 여덟 번 넘어져 실심失心해 어떻게 조치할 바도 모르고 그 해가 미치는 바에 대해 세밀히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청정과욕을 교지로 삼고 있기에 시무에 아무런 대처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장학에 대하여서도 ‘심사心思와 지려知慮는 고허高虛하고 현묘玄妙하여 그 아는 바는 모두 실질實質이 없고 형체가 없어 가히 포착捕捉함을 얻지 못하고 그 말한 바는 모두 바람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가히 형용形容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고 하여 현실을 도외시하는 지나친 자연주의가 인간사회 내부의 질서와 윤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노장과 선학을 현실주의적 질서와 명분에 입각하여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리학을 본위로 하면서 철저히 주자를 신봉하지만 천문 지리 등의 실용학문에도 적잖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배불적 사상체계를 가졌음에도 불교에 대한 유생의 침탈은 용납하지 않았다. 무안 승달산의 목암木菴이란 암자가 공허空虛하였기에 강학의 장소로 하자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승려의 사옥舍屋을 강당으로 삼자고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온당한 것 같았으나 문득 재삼 생각해 보니 그 의견의 기상氣像이 특히 좋지 못함이 한두 가지가 아닐 뿐 아니다. 비록 승사僧舍라고는 하나 저쪽에선 수긍하지 않는데 우리가 강압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이익을 취하는 기상이며 여러 사람의 시주施主를 모아 강당을 짓는데 힘을 썼는데 한 가지의 공로도 없으면서 거처居處만 편히 하려고 했으니 염치없는 부끄러운 모습인데 도리어 불상을 옮기라고 크게 주장하니 그 기상이 장차 동몽童蒙을 양성함에 정당함을 찾아야할 터에 먼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보여줌이 옳은 일이라고 하겠는가? 사군자士君子의 행할 바 일을 생각해 보면 반드시 이와 같은 구차스런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 궁리수신窮理修身이 성인군자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 범인에게도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늘의 강충降衷은 본래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의 구별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하늘의 인간에게 내리는 치우침 없는 덕목 즉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기론에서도 ‘이理는 기氣없는 이理는 없으며 기氣는 이理없는 기氣는 없다. 그러므로 이理가 있는 곳에 기氣가 모여들며 기氣가 있는 곳에 역시 이理가 드러난다 … 이것이 소위 일이이一而二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의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면서도 ꡐ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 가까웠다. 주기설의 입장이면서도 이기일체설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주자의 서적이 깊고 간절하며 통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글이 한없이 넓고 크고 웅대하여 초학자가 이를 두루 보고 그 간절한 요지를 얻기가 쉽지 않으니 어리석은 내 생각으로는 병폐病弊가 되는 것이기에 나누어진 부문을 추출 기록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즉 주자의 학문적 고지에 도달하기 위한 입문서와 같은 「초학절요」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입문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주자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이었다. 따라서 그는 주자를 깊이 신봉하면서도 주자 자신의 이설에 대해 날카로운 해석을 하고 그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하고자 하였다. 주자는 처음에는 ‘ꡔ대학大學ꡕ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기본과 ꡔ소학小學ꡕ이 기본으로 삼는 덕성의 함양을 구분하였던 오류를 중년에 이르러 배움에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상호 의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설파하고 그러한 원인이 초년에 선학에 심취하여 마음을 안정하고 마음을 찾는 것을 주장하여 서책만을 고수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자의 이같은 전후의 소견이 다른 것을 이미 주자가 깨우친 만큼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덕성의 함양에도 처음부터 똑같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는 주자의 전후 논설이 다른 것에 대하여서도 주목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니 주자에 대한 신봉이라고 하더라도 ‘비판적’ 궁구를 하였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향약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가 47세 되던 1575년 2월 그의 문도에게 향약가입을 촉구하는 글에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성명을 조심스레 회복해야 할 것이니 그 간절함은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에 조리가 밝게 갖추어진 것만 같음이 없고 각각 사사私事의 마음을 도맡아 다스리고 끝내 능히 하나의 덕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또 「증손향약增損鄕約」의 두루 상세하고 간이함만 같은 것이 없으니’라고 하여 하늘이 부여한 성명을 회복하려면 소학과 사서가 필수적이며 사회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은 그 요체를 제시한 바 있으므로 향약을 실시하여 그에 가입할 것을 권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향약이란 ‘전지田地의 근본이 없고 한갓 사소하게 향약의 권고한 바에 경계만 한다면 귀머거리나 눈먼 사람에게 소리와 색깔을 살피게 하는 책임을 주는 셈이 되며 저울추를 버리고 물건의 경중輕重을 다는 셈이 되는 것’이라고 하여 그가 사는 땅과 경작하는 논밭을 근본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지방의 현장을 근본으로 삼아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향약을 덕업상권德業相勸․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고 하는 조목이 갖는 실용적 의미에 천착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는 정철 등이 무등산 자락에서 한 가단歌壇에서 사림을 흡수하면서 청풍명월을 노래하는 사풍에 대하여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정철의 이 같은 활동을 ‘주색에 창광倡狂하고 예법을 능멸하니 호남사람들이 언동을 마구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경계하는 것을 싫어하고 방사放肆함을 즐기는 자가 초목이 비바람에 나부끼어 쓰러지듯 쏠려 청담淸談을 종주宗主로 삼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이라는 논설로 이는 동한은 절의, 진송은 청담을 숭상하였던 폐단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대개 절의적인 사람은 그 마음이 천하를 높이 보고 한 세상을 거만하게 흘겨보아 예의의 법규를 벗어나고 성명性命의 올바름을 조촐히 하지 못하여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름이 있다하여 끝내는 군교群狡가 아울러 일어나고 신기神器를 사시邪視하게 되며 청담淸淡의 유類에 이르러서는 다만 이 파도를 따르고 흐름을 좇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부귀는 필요없고 빈천貧賤은 능히 잊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일변은 비록 청고淸高한 것 같으나 저 일변은 실로 권리를 부르고 재화를 받아드림을 면치 못하고 또 한 때 이를 사모하며 모효摸效한 자를 서로 이끌어 교허驕虛하고 부탄浮誕하게 하여 끝내 진기振起를 회복할 계책을 없게 하여 이로써 찬탈簒奪의 세력을 형성시킨다’
그는 절의와 청담이 실로 독선과 무례의 다름이 아님을 주장하였던 것이며 또한 소부 허유 식의 무책임과 노장의 허무 자연주의의 추종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실용을 중시하고 예법을 강조하며 거경居敬 궁리窮理를 주종으로 한 도학道學 지상주의자로서의 정개청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또한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있었다. 율곡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듯이 정개청도 1588년에 이미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이니 이 침입을 막기 위한 사전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도이장욕유변島夷將欲有變」의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선조는 당시 영의정이던 박순에게 “왜구들이 침입을 한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고, 박순은 “지리에 밝고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은 정개청 같은 사람이 좋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주고받은 사실이 대동야승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4년을 앞서 보는 정개청의 상소도 율곡의 ‘10만양병설’이 묵살된 것처럼 채택되지 않았다.
정개청의 「도이장욕유변」 상소문은 그의 저서인 ꡔ우득록愚得錄ꡕ 제3권에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그의 저서는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여 같은 남인들도 꺼려했다고 기록한 책도 있지만, 정개청은 당을 싫어하여 어느 편당에 들기를 꺼려하였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다방면에 밝은 당대의 대학자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취와 비판적이지만 철저한 주자신봉주의자인 정개청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 바로 ‘기축옥사己丑獄事’이었다(이종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