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도인을 찾아온 키 작은 학생
효봉스님이 용화산 토굴에 머물던 1952년 가을이었다. 십여명의 수좌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삼매에 빠져있는 도솔암에 한 어린 학생이 찾아들었다. 가을 해가 서산으로 막 기울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인기척을 듣고 방문을 연 것은 보성스님이었다.
'누구를....찾으시는가?'
'아, 예. 이 절에 계시다는 도인스님을 만나뵈러 왔는데요?'
'도인스님이라니? 그렇다면....효봉노스님을 만나뵙겠다구?'
'예, 그렇습니다.'
'우리 노스님은 이 절에 아니 계시네.'
'그럼 어디 계신지요?'
'오던 길을 되돌아 가다가 오른편 산길로 쭉 올라가면 토굴이 있는데, 그곳에 계시네.'
작달막한 키에 예쁘장하게 생긴 학생은 곧 보성스님이 일러준대로 산길을 달려 숲속을 헤쳐나가기 시작하였다.그는 산속을 두루 헤멘 끝에 효봉스님이 머물고 있는 토굴을 찾아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방문이 열리며 한 노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학생의 얼굴은 금새 환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로, 누굴 찾는고?"
'예, 저... 이 절에 계시다는 도인스님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에이끼, 이녀석!"
효봉스님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예에?'
"이 토굴에는 나 혼자밖에 없거늘, 길을 잘못든 것 같으니 어서 내려가거라."
'아, 아닙니다, 스님. 저는 이 토굴에 계시다는 효봉도인스님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뭐라구? 효봉을 만나러 왔다...?"
효봉스님은 새삼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길을 잘못 찾은 학생이거니 했던 것이다.
"넌 대체 어디서 온 아이던고?"
'예, 저는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읍에서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효봉스님이 이르자 학생은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
'예에?'
"이 방으로 들어오란 말이다."
방안에 들어선 학생은 넙죽 엎드려 절부터 하고 효봉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았다.
"중학생이더냐?"
'아니옵니다, 고등학생입니다.'
"허허, 그래? 고등학생이라고? 몇 학년인고?"
'졸업반 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이 통영까지 왔는고?"
학생은 수학여행을 온 길이었다. 그러던 중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지키던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용화산 도솔암에 기면 도인스님을 만나뵐 수 있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허허허...., 그 어떤 노인이신지 실없는 소리를 하셨구먼. 어린 학생한테 응? 허허허"
'그 그럼, 바로 노스님께서 효봉도인스님이신가요?'
"내가 바로 효봉은 효봉이다마는 도인축에는 들지 못하느니라."
'아이, 아닙니다요. 그 노인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스님께서는 도통을하셔서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허허허허, 그래 넌 도인이라고 그러니까 머리는 하얗고 수염도 하얗게 늘어뜨린 산신령처럼 생긴 노인을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그렇지?"
'..... 예.'
"허지만 이 늙은 중은 네가 보다시피 하얀 머리칼도 없고, 수염도 없고 그저 나이들어 늙은 중일 뿐이니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 저, 스님?'
"왜 그러는고."
'...... 절에서는 대체 어떤 스님을 도인스님이라고 그러시는지요?'
" 어떤 스님을 도인스님이라 하느냐? 절에 들어와 머리깎고 공부를 많이 해서 도를 깨달으면 화낼 일이 없어지고 근심걱정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일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으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신 스님을 도인이라고 하는 게다."
'스님, 저도 그 도인되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허허허허.. 올해 네 나이 몇살인고?
'열 여덟입니다, 스님.'
"학교 마치고 부모님 허락받고 오면 공부하게 해 줄 것이니 오늘은 그만 내려가거라."
박완일(朴完一), 인사를 하고 급히 산길을 내닫는 박완일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효봉스님의 눈에는 일종의 확신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공부하는 여러 대중들은 들으라!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니,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허물이 아니로되, 깨달음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착각하여 기고만장하는 것은 만고에 씻기 어려운 죄업을 짓는 것! 이는 마치 남의 재산을 빚으로 얻은 자가 백만장자가 되었노라 큰 소리를 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고.....!"
바야흐로 용화산 도솔암에도 효봉스님의 할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동안거가 끝난 어느 봅날, 일년전 토굴에 들렀던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박완일이었다.
"부모님 허락은 받고 왔느냐?"
'그건, ...저...
"부모님 모르게 집을 나왔으렷다?"
'새벽에 담을 넘었습니다.'
순간, 효봉스님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담을 넘어 출가하는 것은 어쩌면 구도자들의 공통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부처님도 새벽에 황궁의 성벽을 넘었고, 효봉스님 자신도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잠든 꼭두새벽에 담을 넘어 출가했던 것이다.
박완일은 토굴에 머물며 나무도 하고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
"허허, 너는 어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고?"
'원 참 스님께서두....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야 소나 말이나 그러는 거지요.'
"무엇이라구? 소나 말이나?"
잠에서 덜깬 효봉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는고? 시키는대로 하는 거야 소나 말이 그렇다구?"
'그렇지 않습니까, 스님? 사람이야, 해야할 일은 시키기 전에 알아서 해야한다고 배웠는데요.'
"해야할 일은 시키기 전에 알아서 해야한다?"
'예, 하온데 왜 그러시옵니까 스님?'
" 아, 아니다. 거 불을 너무 많이 지피면 방바닥이 뜨거울 것이니라."
'예, 스님. 적당히 지피고 끄겠습니다.'
"중노릇 하기가 쉬운 줄 아느냐?"
박완일은 고개를 들었다.
'..... 아, 아닙니다.'
"나무하고 불지피고 설겆이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어디 그뿐이겠느냐. 토굴 속에 들어앉으면 하루에 한 끼로 견뎌야 하고, 제대로 공부를 하자면 허구헌 날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만 참선을 해야하느니라......"
' ....... '
"그래도 머리깎고 중이되고 싶으냐?"
'예.'
박완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 번 중이 되면 벼슬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부자도 못된다. 그래도 머리를 깎고 싶으냐?"
'예.'
젊은 박완일의 대답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효봉스님은 눈을 돌려 도솔암 토굴에서 바라보이는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다음날이었다.마침내 효봉스님은 가위와 삭도를 가져오도록 일렀다.
"완일아."
'예, 스님.'
"너는 이제 머리를 깎아 내 상좌로 삼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이야."
'예, 스님.'
젊은 박완일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큰 이변이었다. 그동안 원명이나 보성수좌는 구산스님의 상좌로 삭발출가했는데, 뒤늦게 찾아온 나이어린 박완일을 큰스님 당신의 상좌로 삼겠다는 것이었으니, 이렇게 되면 박완일은 구산스님의 아우가 되는 셈이었다.
원명과 보성수좌에게는 세속의 촌수로 따지면 숙부가 되는 것이요, 불가에서는 사숙(師淑)이 되는셈이었다.
"원명아."
'예, 스님.'
"이 아이, 완일이의 머리는 원명이 네가 깎아주어라."
'예, 스님.'
삭발이 끝나자 효봉스님은 박완일에게 사미십계를 설하고, 법명을 지어내렸다.
"이제 박완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 일(一)자, 볼 관(觀)자, 일관이라 할 것이니,부처님의 제자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열심히 수행정진 해야할 것이야."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효봉스님은 새롭게 얻은 제자 일관사미와 함께 도솔암의 작은 토굴에서 다시금 무자화두를 들고 참선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계속)
첫댓글 인재를 알아보시는 효봉스님...넋 놓고 사는 제 자신 부끄럽습니다. 잘읽고 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