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1950년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자들과 거부자들과의 충돌을 시작으로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후 WCC(세계교회협의회)라는 에큐메니칼리즘(교회일치주의)을 놓고 2차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교권주의자들과 반교권주의자라는 새로운 전쟁을 선언함으로서 분단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감리교는 재건파와 복흥파가 한치없는 대결을 이어갔으며, 성결교 또한 WCC와 NAE지지자측으로 양분되어 결국 다른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침례교는 미국 남침례교회의 지원으로 새로운 도약의 길을 꿈꾸었지만 교권주의자들의 전횡에 맞선 대립은 분열이라는 종점에 도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 감리교의 재건파와 복흥파 1945년,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남부대회(교권주의)에 불만을 품은 지도자들이 독자적인 교회설립을 선언하며 퇴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감리교 “재건파” 이규갑, 변홍규, 전효배, 권성집, 구성서, 김광우 목사, 윤성범, 이봉구, 이찬용, 장시화, 라시행 목사들은 동대문교회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롭게 “기독교조선감리교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5년 12월17일, 위원장 이규갑 목사 명의로 감리교회 재건을 선포하고 1946년 4월5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교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중부,동부연합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중부연회는 이규갑 회장, 김영렬 서기, 동부연회는 변홍규 회장, 라사행 서기를 각각 선출하였습니다. 1948년 1월22일, 동대문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동부, 중부연회를 개최하며 재건선언문을 채택하였습니다. 재건파는 자신들이 감리교의 적통을 이어받은 계승자라고 선포하며 일제시대 청산을 요구하였습니다. 재건파는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 주님의 개혁적인 감리교회로서 교회와 복음의 순결성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일제의 시녀역할을 해온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감리교단을 부정하고 그 이전의 감리교전통을 계승하며 개혁과 재건을 주장하였습니다. 1948년 1월2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제4회 총회(재건총회)를 개최하여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습니다. 1946년 4월7일, 강태희, 방훈, 박창현, 김응태, 박연서, 박만춘, 김희운 목사 등 “복흥파”는 “기독교조선감리회복흥신도대회”(수표교교회)를 개최하였습니다. 4월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재건파에 의해 유산되자 5월2일, 중앙교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복흥준비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941년 3월10일, 총회에서 가결된 감리회의 헌장 변경안이 폐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건파가 결의없이 연회를 해산하는 것은 장정25단을 위반한 것이라고 복흥파는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복흥파는 1946년 6월11일, 제9회 중부연회를 중앙교회당에서 개최하여 연회장 강태희 목사, 서기 박창현, 김희운 목사를 선출하였습니다. 이틀후인 13일에는 제9회 동부연회를 개최하여 연회장 신공숙 목사, 서기 김경환 목사를 선출하였습니다. 3개월후인 9월6일, 중앙교회당에서 “복흥파특별총회”(복흥총회)를 개최하여 감독 강태희 목사, 서기 김희운 목사를 선출하고 9월11일, 감리교인들에게 보내는 문건을 발표하였습니다. 재건파는 일제시대 부역교역자들(복흥파)의 완전한 퇴진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복흥파는 죄의 청산문제보다 신앙부흥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켜 나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총리원과 신학교가 분리되었고 상호 교권확장을 위해 교회쟁탈전이 난무하였습니다. 감리교 평신도모임에서 재건파와 복흥파의 합동을 촉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1947년 1월7일, 종교교회에서 재건-복흥 합동총회를 개최하였으나 복흥파 지도자들이 총회임원을 독식하면서 재건파 지도자들이 또 다시 퇴장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1947년 2월3일, 재건파 홍현설, 변홍규 등 목사 40명, 평신도 56명은 진실규명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복흥파의 교권주의가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한 친일파 19명의 교역자를 추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제말기 교회와 목사관을 매각하여 일제에 국방헌금으로 헌납하되 전체 금액의 50%만 헌납하고 나머지 50%의 행방을 알수가 없습니다.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합니다” 1948년 1월14일, 재건파는 동대문교회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고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였습니다. 1949년 2월7일, 감리교는 “통일전권위원회”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통합논의를 전개하였습니다. 3월28일, 재건파와 복흥파는 양측의 조직을 백지화하고 원칙적인 합동을 결의하였습니다. 미감리교 존스 선교사가 내한하여 첨예하게 대립된 양측을 조정하고 1949년 4월26일, 정동제일교회에서 동부연회장에 전효배 목사, 중부연회장에 김유순 목사를 각각 선출하였습니다. 4월29일, 통합총회를 회집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로 명칭을 변경하며 김유순 목사를 2년 임기의 새로운 감독에 추대하였습니다. 5월1일, 지난날의 모든 것을 일괄타결하고 5월23일, 주일을 “통합기념주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서부연회는 통합총회에 참여를 보류하였습니다. 6.25전쟁은 감리교의 재건사업을 다시한번 더디게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김유순 감독과 총리원 임원들이 납북되자 위기의 감리교는 1950년 7월10일, 부산 경남도청앞에 임시총리원 사무실을 개소하고 당면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1951년 11월1일, 무어 감독(Bishop Arthur J.Moore)이 사회를 본 부산 장로교 중앙예배당에서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회원 263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부연회장 류형기, 동부연회장 조신일, 서부연회장 이진구 목사를 선출하였습니다. 11월2일, 총회원 66명은 2차에 걸친 투표에서 류형기 중부연회장을 감독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류형기 목사는 평북 회천 출신으로 일본 아오야마 고등학부를 졸업하고 웰치 감독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하였습니다. 1923년,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에반스톤 게렛신학교와 보스톤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류형기 목사는 성경비평학과 역사비평학을 수용하고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는 진보적인 신학자였습니다. 류형기 목사는 성서십강, 신약개론, 구약개론, 성서주해, 성경사전을 저술, 번역하였습니다. 일각에서 류형기 목사가 1941년 9월, 혁신교단의 정춘수 감독에 의해 교직에서 파면당한 사례와 장정 105단에 규정된 연회 정회원 6년자격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감독자격 시비가 일부 있었으나 류형기 목사의 화려한 이력과 활발한 저술활동과 비상사태인 점을 감안하여 수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전쟁이 종료된후 미국감리교는 대대적인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송하여 전후복구지원에 주력하였습니다. 복구와 구제를 관장한 스톡스(C.D.Stokes), 기독교세계봉사회(CWS) 아펜젤러(H.D.Appenzeller), YMCA대표 피치(G.Fitch), 그리고 쇼(서위렴), 앤더슨, 쥬디, 스피츠카이트, 페인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지원하였습니다. 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와 세계선교부는 전후복구비로 100만달러를 지원하여, 서울과 대전 감리교신학교, 원주기독병원, 세브란스병원, 연희대학교, 숭실대학교 복구지원에 30만달러를 지원하고, 23개 지방회의 복구에 70만달러를 사용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수많은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40개의 고아원을 별도로 설립운영하고 선명회, 아동복리회가 고아원 운영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1953년 7월27일, 부산임시 총리원이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구 총리원에서 재출발하였으며, “요한웨슬리탄생 250주년 기념”과 “감리교선교70주년” 기념행사를 전개하였습니다. 1951년, 감리교회는 345구역, 453교회, 87기도처, 교역자536명, 남자교인15,120명, 여자교인30,596명 등 45,716명이었던 것이 1955년, 639구역, 853교회, 165기도처, 교역자983명, 남자교인41,284명, 여자교인69,835명 등 111,119명으로 성장하였으며, 1957년, 감리교회는 726구역, 946교회, 160기도처, 교역자1,101명, 남자교인47,100명, 여자교인76,660명 등 123,76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감리교신학교는 해방후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가 접수한 신학교를 재 접수하고 1946년 1월, 변홍규 박사를 교장으로 개교하였습니다. 1948년 5월28일, 재건파와 복흥파가 분열하면서 복흥파는 서울신학원을 설립하고 방훈 목사를 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재건파와 복흥파가 1949년, 재통합된 후 서울신학원이 냉천동 감리교신학교로 통합되었습니다. 1959년 2월26일,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감리교신학대학”은 10월10일, 5,240만환으로 웰치기념 강당을 준공하고 2층 규모의 기숙사를 완공하였습니다. 1954년부터 진행된 지방신학교 설립계획은 5월, 대전제일교회당에서 남자 46명, 여자 16명 등 62명의 학생으로 신학전수과를 설치하였습니다. 1956년, 감리교대전신학원에서 전수과를 모집하였고, 1957년 5월1일, 정부로부터 정규신학교로 인가 받아 감리교 대전신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1958년 3월, 이호운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후 1959년 8월 대전 목동지역에 신학교 교사를 준공하고 대전시 용두동 11,360평과 함께 신학대학으로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2) 호헌파와 류형기파의 분열과 재통합 감리교의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은 1950년 11월1일, 부산에서 납북된 김유순 목사의 후임으로 류형기 목사가 감독에 선임된 후 다시 재점화 되었습니다. 1953년 3월18일, 대전총회에서 류형기 목사의 재선문제를 놓고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재건파와 복흥파의 연합할 때 감독의 임기를 4년에서 2년으로 개정하였기 때문에 류형기 감독은 재선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친미성향의 류형기 감독을 활용해 미국 선교부의 지원을 바라는 총리원과 한국교회의 상황이 재선여론을 형성한 것이었습니다. 1954년 3월16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총회는 친류형기와 반류형기의 대립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친류형기 성향을 가진 평양 성화신학교 출신자들의 “성화파”가 교단내 주요직을 잠식하는 가운데 충남지역 김응태, 변홍규, 엄재희, 박설봉 목사 등 반류형기파는 총리원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논쟁을 심화시켰습니다. “선교불사건”은 재건파와 복흥파의 논쟁을 극대화시킨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신생사를 경영하며 재정운용경험이 풍부하였던 류형기 감독은 미국교회 원조비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무역업에 조달하였습니다. 당시 인플레이션과 재정악화로 인하여 1953년 2월15일, 정부는 긴급통화조치령을 선포하고 통화개혁을 단행 원화를 10대1로 하고 달러 환율도 60대1로 평가절하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7월17일, 외환이채중지의 긴급조치령을 선포하여 달러의 한국화환전이 제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하여 총리원 이사회 실행부는 “선교부 보조금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수익사업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정부물자수입판매로 인한 수익사업을 위해 원천무역공사(장명환장로)를 수입대행업자로 선정하여 무역업을 하게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일로 30,750달러의 손실을 보고 원천무역공사는 파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역업으로 3~4배의 이익을 취하려 하였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순수해야 할 교회가 세속적인 방법을 취하다가 오히려 큰 손실을 보았다는 명분으로 류형기 감독의 사퇴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회 총회에서 무어 감독의 설명과 양해로 문제가 봉합되며 감독의 임기가 2년에서 4년으로 개정되는 등 친류형기파의 승리를 예고하였습니다. 총투표 75표 가운데 62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류형기 감독의 재선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류형기파는 교구법 준수를 주장하는 목사와 평신도모임을 구성해 선교불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류형기 감독이 자진 퇴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반류형기파의 계속되는 충돌과 수많은 선교비를 잃은 류형기 목사는 교회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자진 사의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무어 감독이 류형기 목사를 변호하고 김활란, 황치헌 등 총리원 임원들이 가세하여 류형기 목사의 감독직은 계속되었습니다. 일단락되는 듯한 선교불사건과 류형기 감독에 대한 불신임은 엄재희, 정등운, 박설봉, 조화철 목사 등이 1954년 4월20일, 중앙교회당에서 조직한 “기독교대한감리회수습대책위원회”를 주축으로 재점화되었습니다. 교권주의, 일부 소수에 의한 교단독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호헌파는 1954년 7월, “호헌”감리교 연회와 총회조직을 본격화하였습니다. 1955년 3월1일, 충남천안에서 전국신도대회를 개최하고 “비상조치법”을 채택하였습니다. 3월3일, 감리교 정통성회복과 총리원의 부당성을 대외명분으로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신학교 교장에 이강훈, 전도국 총무 엄재희, 교육국 총무 조화철, 사회국 총무 이강훈을 임명하여 “호헌파 감리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감리교 연회가 호헌파 교역자들을 사역정지하거나 제명하는 등 강경태도로 돌아서자 교회의 재산권 분쟁으로 비화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울의 중앙교회, 만리재교회, 삼청교회, 수색교회, 동대문교회가 세상법정에 휘말리고 연회측 교인과 호헌측 교인들의 충돌이 발생하는 등 감리교의 분열은 위기로 치달았습니다. 이 사태로 류형기 감독이 사임하고 1958년, 32차의 투표 끝에 경기도 안산 김종필 목사가 감독에 선출되었습니다. 그후 호헌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통일전권위원회”를 조직하고 1959년 2월3일, 통일성명서를 작성하였습니다. 2월7일 서명에는 이호빈, 엄재희, 정등운, 안신영, 장세환, 고명균, 김광우, 맹기영, 마경일, 박설봉 목사가 참여하였으며 이로서 감리교의 2차 분열은 다시 통합의 길로 갔습니다. 1959년 3월1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동부, 중부, 남부 연합연회를 개최하여 4년간의 진통을 깨고 다시 연합과 통합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20만명으로 성장한 한국기독교의 3대교단 감리교회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많은 교훈과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목표가 아니라 항상 통합의 길을 모색하며 양보와 배려의 길을 선택하였다는 측면에서 장로교와는 다른 색채가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