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도가 해야 하는 말 “나이 나이 우 우”
마태복음 5장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율법을 완성하심
산상수훈 5장은 팔복을 말씀하신 후에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10계명의 뒤의 다섯 계명을
네 개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 5장의 뒷부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의 계명을 말씀하시고,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을 맹세와 관련하여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헛맹세와 거짓말
사람들이 헛맹세, 거짓 맹세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진리로 보지 못하기 때문, 어두움을 빛으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
헛맹세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이끄시는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서원과 하나님의 맹세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맹세하고, 그 맹세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맹세가 되셔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언약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그 말씀을 언약으로, 진리로 받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인간적인 헌신과 노력과 열심을 내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열심을 이루시고,
당신의 맹세를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맹세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헛맹세하지 않는 삶,
즉 하나님의 서원과 하나님의 맹세를 실현하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3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원문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에이미 데 호 로고스 쉬 나이 나이 우 우 호 데 페릿소스 후토스 에크 호 포네로스 에이미
(에미미 호 로고스) 너희의 그 말은 ~이다.
(쉬 나이 나이 우 우)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페릿소스 후토스)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에크 호 포네로스 에이미) 그 악한 말이다.
나이 나이 우 우
하나님의 맹세와, 하나님의 서원이 이루어지는
현실 속에 있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말을 하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말이 그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면 “나이 나이 우 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이”이라는 단어는 “불변화사”로 “예, 그렇다,”등을 의미합니다.
사용된 용례를 보시면 이렇습니다.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예” 하는 자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맹세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를 통해서 진리의 말을 받은 성도는
그 진리를 말하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나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해야 하는 말은 “그렇습니다.” 혹은 “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하는 자
“우”는 “~아니다, ~아닌”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역을 통해,
율법의 내용이 그 안에서 완성된 성도에게서 나와야 할 것은
자신들의 맹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한 그 복음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경계를 넘어서는 것)
악(포네로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완성된 율법
이렇게 우리가 그러한 것을 그렇다고 말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
우리 안에서 완성된 율법의 내용이 진리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예수가 우리 안에서 완성하신
율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악을 행하는 이유
38절 이후의 말씀은 우리가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는
율법의 말씀을 다시금 설명해 주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의 율법적 선악구조와
인간의 본성과 양심으로 읽으면 그냥 율법의 행위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로 완성한 그 진리의 말로 해석하지 못하면,
인간의 맹세, 인간의 행위, 인간의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런 예수님의 인간애 적인 말씀,
마치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갇혀 있는 성인군자적인 말씀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다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수가 완성하신 말씀(율법을 완성하심)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은 악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착하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두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예수가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세상에서 그 율법을 완성하는 진리가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결론으로 말씀 드리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율법을
그 진리로 완성 하시느냐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행하고 노력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적하다는 단어는 “안디스테미”인데
“~에 반대하다, 대항하다”의 뜻인 “안티”와
“서다, 언약을 세우다”의 뜻인 “히스테미”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스테미”(대적하다)는 “~의 반대편에 서다”라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반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하나님 편으로 건너오는 것이라 했습니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했고,
그 대적하는 자의 고유명사를 “사탄”(대적자)이라고 했습니다.
대적하다는 것은 반대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명령을 통해서 언약을 설명하심
이 땅에 육체를 가지고 율법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편으로 건너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대적하고,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탄인데,
내가 너희를 대적하지 않을 거야!
너희를 내편으로 만들 거야! 라는 구원의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악한 자인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고,
자기편으로 만드시겠다는 구원의 언약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말씀도 같은 원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은 “덱시오스”입니다.
왼편은 오역은 아니더라도 의역이 되었는데, 그냥 반대편 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우리의 오른쪽 뺨을 때릴 때
그와 싸우지 말고 왼편도 돌려 되는,
그런 착한 마음으로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냐면 뺨을 맞았습니다.
마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오른 쪽이 죽어 왼쪽을 살림
오른 쪽 즉 진리의 편에 있는 예수를
그 반대편에 있는 인간들이 때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오른 쪽으로 맞아 죽어야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너희가 살아 날 수 있다는 복음의 언약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른 쪽에(진리) 있는 예수가
왼쪽에(비 진리) 있는 우리에게 맞아
우리가 오른 쪽으로 진리의 편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른 편 뺨을 치거든에서 “치다”가 “라피조”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어군을 중심으로
구약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출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애굽이 재앙을 받아 이스라엘이 됨
구약성경에서 애굽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구원 받은 성도의 옛 자아,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율법 아래, 율법의 종으로,
율법의 이원론적 선악구조로 있었던 우리의 옛 자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애굽의 율법으로 살고 있었던 우리의 옛 자아가
열 가지(열 가지 말씀) 재앙을 받아 죽고,
그 재앙 속에서 살아난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것으로 성도의 구원을 예표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무너지고 새 자아가 새워짐
이 때 반드시 어떤 것이 있었냐면, 율법의 애굽이 재앙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재앙을, 하나님이 친다, 하나님이 때린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애굽의 율법으로 살고 있었던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재앙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재앙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구원의 교리가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나는 그 재앙과 상관없이 예수가 대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래 받았어야 하는데,
내가 받아야 할 재앙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으니? 감사하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재앙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 인생 속에서
율법의 선악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받은 재앙은 내가 받는 재앙의 모델이고 샘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애굽으로 살고 있는 나, 율법의 나가 그 말씀의 재앙으로 죽어가는 것을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진리 전쟁)
속옷과 겉옷, 오리와 십리
이러한 말씀은 진리의 편에 있는 예수가 죽어서
반대편에 있는 우리를 진리의 편으로 옮기신다는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옷과 겉옷, 오리와 십리, 구하는 자와 꾸고자 하는 자, 원수와 박해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만을 증언하고, 그의 사역을 선포하는 언약의 책입니다.
우리가 그 언약으로 구원 받아 진리에 대해서는 네 그렇습니다.
비 진리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자
그래서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형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를 거짓 맹세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고,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게 하는 것과, 서원한 것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 드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안에 일어난 이 복음의 사실,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 하나님 반대편에 사탄으로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 편으로 이끄시는 이 복음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인 율법을 완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인 교회가 세워짐은 진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