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 vs. 유럽철학
(동북아에는 실체적인 철학이 아예 없었던 이유)
본 카페지기 이재원의 글(2024.4.7.일요일)
대학학부의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과 안에서 중국이나 불교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교수들을 보면 뭔가 기분이 나빴다. 내가 동아시아인이고 동아시아의 전통을 받고 자라고 있었으나 도저히 이들을 철학교수로 볼 수 없었다. 그냥 유학이나 불교를 생계유지의 사상으로 공부하는 자들로만 보였다. 철학과에서 떼어내고 싶은 자들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부산 동래에서 길을 가다가 돈을 주고 구입한 철학입문용의 연푸른 보라색이 감도는 노란 책갈피의 책자에 있는 것으로 철학에 대한 문답을 보게 되었는데, 철학입문의 어느 순수한 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철학교수에게 물었다. 아시아의 철학에 대한 문의였다. 그러자 그 교수의 첫 답이 아시아에는 철학이 없다고 하였다. 물론 바로 나온 대답이 아니었다. 어느 오후, 학교 연구실에서 짧지만 한참을 생각하고 묵상한 후에 한 말이었다. 그런 말은 철학교수동료들에게는 차마 못하고 순수한 학생의 장래를 위한 본인의 고언(苦言)이었을 것이다. 물론(勿論) 그에 대한 학생본인의 가치적 판단은 그 학생이 철학적 성장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라도 스스로 구축해야 할 길고 긴 과제인 것이다. 만약 그 철학교수의 가르침대로 간다면 국내대학의 철학과에서 기생(寄生)하고 있는 유학자나 불교철학자들과는 사생(死生)을 건 싸움을 정년의 그날까지 음양으로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도덕교사를 하면서 모교의 교육대학원(1991.3.1.~1993.8.31.)과 교원대대학원(1994.3.1.~1997.2.28.)에서 철학교육전공으로 석사를 받았다. 모교의 교육대학원에서는 불교철학의 나가르주나의 중론철학으로 논문을 필하였고, 교원대에서는 플라톤의 수리철학으로 논문을 필하였다.
나가르주나를 공부하면서 불교철학의 3대 맥을 알게 되었다. 구사론과 중관과 유식이다.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유클리드와 소크라테스의 본질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質料)와 형상(形相)까지 수리철학적으로 접목하여보았다. 구사론과 중관, 유식을 보니 이건 동아시아인의 사고가 아니고 오히려 유럽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 다르면 인식이 매우 어렵다. 자연적이 아닌 작의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날 공부 해 봤자 겉도는 것이다.
밀양에서 6년간 도덕교사로 있으면서 주 5일로 저녁마다 사서삼경 등 유학을 서당에서 수학(受學)을 한 관계와, 별 욕심이 없이 석사학위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모교의 교육대학원에서 유학전공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공자의 인(仁)에 대한 논문을 필(畢)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유학전공교수의 정년 후임을 모교에 재직 중인 철학교수들이 좌우 진영을 나누어 서로 자기 쪽의 사람으로 후임을 정하려고 학기 내내 싸움을 하다 보니 유학전공교수가 공석(空席)이어서 하는 수 없이 불교철학으로 본의 아니게 논문을 필하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 등으로 논문을 필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나의 학부 졸업 후에 온 모교의 철학교수들과는 나의 논문지도교수를 할 만큼의 인연이 없었다. 그래도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하필 그 당시에 독일 남부의 뮌헨대학에 가 있었다. 지도교수가 정하여지고 난 후에 와서 하는 수 없이 나의 재학 마지막 학기에 독일 니체의 생철학을 수강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언필칭 말은 상아탑(象牙塔)의 대학교수사회인데, 이건 뭐, 좌우의 진영싸움의 전장(戰場)터 같았다. 내가 당시로 9년 전에 학부(學府)를 나올 때는 출신대학별 내용상 연고(緣故)싸움이었는데 이제는 좌우의 이념대립으로 표면상까지 변질되어 있었다. 이때 사제(師弟)간의 관계는 다급(多急)한 고열(高熱)에 시멘트 녹듯이 교묘하게 바로 붕괴되고, 출신별 연고나 정치적 계파 싸움이다. 이는 교수들의 잘못이 전혀 아니다. 신의 섭리(攝理)에 의한 이기적 유전자 탓이다.
하여튼 그래서 뭔가 부족하여 교원대대학원까지 가서 다시 철학교육으로 교육학석사를 필하였는데, 철학교육보다는 교원대 특성상 도덕교육과 윤리학만 한자가 섞인 한글로 된 참고도서로 잔뜩 공부하고 온 셈이었다. 가서 보니 초등도덕전공교사들도 같이 수강을 하였는데 아무래도 언어적 원전(言語的 原典)이 난무(亂舞)하는 철학은 도태(淘汰)되기 마련이다. 교원대학교는 교원양성의 목적대학이고 국세(國稅)로 운영하는 국립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몰라서 그런지 교수들의 좌우의 대립까지는 내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이든 목적대학은 대학원이나 산하 연구소 등이 즐비(櫛比)하게 있어도 그냥 대학구색용에 불과하다. 이미 학생들은 모두가 다 학문을 하기 위해 입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노선(精通路線)의 학문과는 담을 쌓고 시작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교수 따로, 학생 따로인 것이다. 졸업 즉시 직장에서 당장 필요한 신입(新入) 직업인 양성학교로 몸과 마음과 정신이 학문과는 따로 노는 것이 목적대학이다. 교수부터 학문에 뜻이 없는 학생을 무시하고 자신의 심도 있는 강의를 하면 곤란하니, 난도 있는 교내 논문은 기대 밖일 뿐이다.
하여튼 철학에서의 언어적 원전이란 매우 중차대하다. 바로 학습자의 사고(思考)를 결정(結晶)하여 결정(決定)지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모교에서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대부분 원전(原典)으로 공부한 셈이다.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영어와 독일어, 설해(說解) 한문과 고대 산스크리트어와 원시불교 팔리어 등등이다. 7:3으로 유럽철학이 7이라면 유학과 노장사상과 불교가 각각 1/3로 합하여 3이다. 황하의 유학과 양자강의 노장과 인도의 불교는 각자가 너무나 태생부터 이질적이라서 상호 조합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였다. 종족도 서로 다르지만, 말도 다르고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서로 다르다.
그러면 왜 동아시아에서 태고의 학문적 사상적 원류를 가진 유학과 도학을 내가 다 알지도 못하면서 경원시(輕遠視)할까? 깊게 들어가면 바로 그건 내가 공자나 노자를 두 날개로 품은 대륙의 짙은 계열의 황색중국인이 아니라 유전학(遺傳學)의 생체 체질적으로 보다 더 북방의 하얀 눈(雪)의 시베리아 전통몽골계의 샤머니즘의 후예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卽) 중국과 우리는 원초적으로 완연(完然)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상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말이다. 그래서 타국(他國)의 이질적인 사상으로 여겨다보니 보다 더 인류의 중심철학을 위해 철학과에서는 이런 사족(蛇足)들을 떼어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면관계로 이런 것은 생략하고 다음만을 철학적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영어의 Be동사와 독일어의 Sein동사와 불어의 être동사를 보자. 이들의 단어들은 'A는 b이다'식의 존재에 대한 현상적인 서술을 함축하는 말로, 그들은 그에 대한 언어적 표현을 일상적으로 매일 하고 산다. 하지만 우리의 동아시아의 언어에는 불가시적인 존재를 한마디로 함축하여 표징(標徵)하는 말이 18세기인 근세까지는 아예 없었다. 즉 그 어디에도 본질과 현상에 대한 분리적인 인식사고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개념의 부재로 사고(思考)에서 식(識)은 없고, 있다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화(化)는 모습으로 늘 보기 때문에 상(常)으로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상(常)과 상(相)은 다르다. 전자가 시공(時空)이라면 후자는 바탕(質)이다. 그러니까 사상과 문학과 역사에서도 자기 반성적인 목적론의 변증논리가 없고, 과학적 객관의 진화론적 기계론과 상대적인 주관론의 화학론도 없는 것이다. 화(化)라도 비(非)발전론으로 순환불변적인 생로병사의 동일성만 거듭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은 예수님의 개신교의 기독교인이 되어 기도(祈禱)를 하더라도 독일 등 개신교 유럽인들은 실체적인 신(神,God)에게 본인의 영혼을 위하여 내면적인 기도를, 목사가 설교 중이라도 조용하게 홀로 하지만, 특히 한국의 아시안들은 자신의 일신(一身)과 자기 집안의 길흉화복의 복됨을 위해 예수님을 신명적(神明的)인 신당(神堂)의 교회의 신(神,God)으로 보고 열광적인 기도를 집단적으로 소리내어 외치면서, 교단에 서서 무당처럼 특유의 교회곡소리로 외치는 목사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크게 단체로 남들이 다 알게 몸짓까지 하면서 드리는 것이다. 달라도 이해불가로 한참 다르다.
유학(儒學)이나 도가(道家) 역시 비귀신론(非鬼神論)으로 오로지 현세에서 먹고사는 전투적인 말들로만 가득하다. 이를 어길 시엔 공자는 물론 노자까지도 유명(幽明)을 달리해야한다. 심지어 노자(老子)까지도 도(道)에 대한 이야기로만 그의 저술을 고집(固執)으로 시종일관 채우면서도 ‘도(道)? 오부지수지자(吾不知誰之子)'라고 한다. 진짜로 무책임을 넘어 동일성의 추론에 대한 추상적 사고가 전혀 아예 없는 족속들이다. 그러니 공자가 논어에서 제 아무리 군군신신(君君臣臣)과 부부자자(父父子子)를 명기하여 암송케 해도 불리하다싶으면 직업윤리를 바로 버리고 삼국지(三國志) 형(形)의 배신(背信)이 주야로 여기저기에서 난무하는 것이다.
이렇게들 동아시아의 사고는 이념의 실체적 본질에 대한 추구가 없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실체를 일단 존재적으로 있다고 무조건 가정하고 자신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하는 유럽식의 철학(哲學,Philosophy)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종자가 없으니 그 싹도 당연히 없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언어생활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말을 뒤집을 수가 있으며, 이를 좌파 정치인들이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더 가관(可觀)인 것은 유럽덕분에 수학과 과학 등등과 함께 철학을 공짜로 탐지(探知)하고 나서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럽을 통째로 일부러 야만으로 곡해(曲解)시켜, 체계적인 사회과학도 하나가 없어서 자국 최고의 명문대학에서조차도 서구의 작품을 늘 베끼는 염치도 없는 주제에, 보이는 학문과 깊이 있는 사상은 다르다면서, 본인도 해독(解讀)이나 진위여부(眞僞與否)가 불가(不可)한 고서(古書)나 옛것을 드러내면서 사상적으로는 무조건 그래도 아시아가 내용과 역사와 전통적으로 서구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것도 대학별로 교수들이 각자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면서도 아직 무엇이 여전히 부족한지 세계적인 첨단학계에서는 단 한명의 글로벌 석학도 옳게 배출 못하는 형편에서 말이다. 매년 성과(成果)를 통계로 하여 발행하는 금세기의 유명한 인문이나 자연계열의 석학명부를 자세히 바라. 아사아인은 거의 없다. 간혹 있어도 그 안에서는 2진 그룹이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대학의 철학과에서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래서 비교철학도 아예 경시(輕視)하게 되었다. 비교할 것을 비교하라는 것이다.
철학은 누구나 공부는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유교 문화권의 동북아,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밑바닥의 아래 의식에 그의 행위를 결정하는 샤머니즘적 체질도 있고하여, 그 연유(緣由)로 선천적으로 본체론에 대한 정신적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다른 분야는 별도로 하더라도, 인간 본연을 위한 정치나 철학에서만큼은 논문은 열심히 대학 등에서 생계유지형으로 먹고살기 위해 부단히 작성해도, 서구(西歐)나 전대(前代)의 것을 보고 일회용(一回用) 종이에 짜집기로 그냥 순간의 생각을 바탕으로 보기 좋게 실적 제출용으로 흉내내어 베낀 것일 뿐이다. 그의 실제적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한 것이 다 혹시(或是)나 하는 기대(期待)가 가능(可能)한 도야(陶冶)의 문제(問題)가 아니고, 역시(亦是)의 타고 난 질적(質的)인 수준(水準)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