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 건국 과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지요. 고구리의 건국 과정은 백제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구리가 요동의 解氏 왕조와 감숙성과 섬서성 산서성 그리고 하남의 고씨 왕조의 결합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백제 역시 온조 계보의 왕조와 구태 계열의 왕조가 결합된 역사가 존재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온조왕 계열의 夫餘王朝와 仇台로 시작 되는 百濟王朝는 구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好太王 碑文의 기록에는 溫祚王 夫餘를 東扶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隋書의 기록에 東明의 먼 後孫인 東扶餘의 王 尉仇台가 百濟를 건국햇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온조왕으로 부터 위구태 까지의 나라 이름이 東扶餘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隋書는 백제의 건국 군주를 부여왕인 구태라고 기록 하고 있으며 백제라는 이름으로의 건국 연대는 238년 공손연이 사마의의 토벌로 "멸망한 후"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앗기 때문에 백제 초기 역사가 혼란을 거듭하는 것이지요. 溫祚로 시작되는 부여왕조의 역사는 고구리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朱蒙(주몽)이라는 뜻은 중국식으로 풀이 하면 "어리석다'라는 뜻임 있으며 '붉은 망또를 걸친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蚩尤天王의 蚩尤라는 뜻 역시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中共은 몽골을 蒙古라고 부르지요. 蒙古란 "옛 부터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高朱蒙의 高는 성씨를 뜻하는 것이 아나라 최상위 즉 "하늘"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天"이라는 한자는 "자연적 하늘"이라는 의미 입니다. 하지만 "高"라는 글자는 "形而上學的인 '하늘"이라는 뜻의 글자 입니다. 예컨데 한족들의 첫 임금인 劉邦을 漢 高祖라고 하지요. 즉, 高라는 글자는 '최상위에 있다" 라는 뜻의 글자 입니다. 추모왕의 성씨를 고씨와 解氏라는 설이 엇갈리지만 필자는 추모왕의 성씨는 해씨일수 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주몽은 부여 解慕漱(해모수)의 자손이며 고구리 消奴部 출신의 解氏 입니다. 消奴部의 위치는 산서성 南西쪽이며 훗날 遼西라는 地名 입니다.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桂婁部 귀족 출신의 女人으로 보입니다. 桂婁部의 위치는 지금의 魯나라 鄒城 일대로 보여 집니다. 추모왕 이후 고구리의 5대왕 까지 모두 解氏이며 고구리와 함께 夫餘에서 나왔다는 온조의 본래 성씨가 해씨이며 온조는 추모왕의 또 다른 아들이라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추모왕의 외할아버지는 河伯이며 하백은 "황하를 다스리는 물의 신"입니다. 따라서 鄒牟王과 溫祚王은 황하의 근처의 영역에 존재하던 임금들이라는 것의 기록으로 들어가 보도록 허겠습니다. 추모왕에 관해서는 필자의 글에서 수없이 밝혀 왔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온조왕의 실체를 밝혀 보도록 하지요. 일단 백제 초기 즉 온조왕 시대의 都邑地 였다는 慰禮城(위례성)을 설명하는 대한민국 위키백과의 설명을 보도록 하지요. 위례성(慰禮城)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다. 한강을 기준으로 하여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으로 구분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의 서편에는 배와 나루터, 동편 일대에는 군사훈련과 민가 마을, 그리고 길쭉한 사성(蛇城)으로 쌓여져 있어 이 성벽이 이어져 숭산(崇山)에 이르렀다." 위례성은 당시에 한성(漢城)으로도 불렸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정하기 전에 잠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북한산 동편의 우이천 유역이나 중랑천 유역으로 비정된다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백제의 건국 초부터 475년까지 그 수도였다. 일반적으로 서울 몽촌토성, 풍납토성 및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중 한 곳으로 비정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세력은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에 정착했다가, 낙랑, 말갈 등 북쪽으로 부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한강과 남한산 사이의 이 지역(현 서울 송파구, 강동구 및 하남시 서부)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설명을 하지요 왜 이렇게 慰禮城이 종잡을 수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일 까요? 그리고 온조왕 시대에 위레성이 도읍지였을 까요? 그런데 우리 향토사학에서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의 稷山邑을 慰禮城이라고 주장하면서 온조왕의 사당을 천안시 주관으로 건립하기도 합니다. 도데체 천안시는 무슨 근거로 온조의 慰禮城이 천안에 존재 햇다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稷山(직산)初都설에 입각한 地名입니다. 즉, 온조왕이 나라를 건국한 최초의 도읍지가 稷山(직산)이라는 것입니다. 천안의 稷山이 그토록 오래된 마을 이라는 것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천안의 직산의 역사가 정말 紀元前 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 할 만큼 유구한 것일 까요? 고개가 갸웃 거려 지며 믿기 어려운 대목 입니다.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보면 예외 없이 대륙에 동일한 지명이 존재하지요. 그런데 반반도의 지명들은 그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考證 되는 것은 "거의 없다"라는 것이지요. 한반도의 지명이 대륙으로 이동된 것일까요? 대륙의 지명이 한반도로 이동한 것일 까요? 이것은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慰禮城은 위구태가 백제를 건국 할 때의 도읍지 입니다. 우리 식민사관자들이 헷가리는 부분이 이 부분 입니다. 즉, 온조가 세운 나라를 百濟로 생각하기 때문에 온조왕의 도읍지를 위레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온조왕의 나라 이름은 東扶餘이며 百濟라는 이름으로의 건국은 위구태 입니다. 그런데 우리 식민사관자들은 韓半島의 慰禮城을 설명하면서 河北 慰禮城과 河南 慰禮城으로 구분합니다, 지금의 한강이 "河"라고 불리웠다는 말 아닌가요? 한마디로 역사의 기본도 모르는 미친 소리 입니다. 河는 黃河의 하류를 자칭하는 固有名詞的 漢字 입니다. 즉, 河가 접미어로 붙는 하천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외 없이 역사적으로 황하와 관련이 있는 하천입니다. 식민사관자들은 위례성의 성벽이 嵩山과 이어져 있다는 기록에 따라 지금의 하남시 검단산을 백제의 嵩山이라고 주장하지요. 분명한 것은 위례성은 河南이라는 곳에 존재하며 嵩山과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라 식미사관자들은 지금의 하남시 동북쪽에 있는 검단산을 고대 백제의 숭산있다고 비정을 하고 숭산의 서남쪽인 지금의 서울 강동 지역을 위례성이 잇었던 지역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던선이 있는 땅을 하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하남은 일본이 식민사관적 지명으로 만든 이름 입니다. 지금의 하남 땅은 조선 후기 까지 경안으로 불이우던 땅입니다. 본래 河南이라는 땅 이름은 "황하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강이 그 어느땐가는 河라고 불리웟다는 말인가요? 즉, 경기도 河南 이라는 지명은 대륙하남의 짝퉁이며 식민사관을 완성하기 위해 만든 역사적 실체가 없는 지명입니다. 온조왕의 初都 稷山은 아래 지도 위치에 존재하는 지명 입니다. 山西省 稷山의 위치 위 산서성의 서남쪽 땅은 稷山은 遼西라는 땅이며 "夫餘의 故地" 입니다. 이 땅은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나라를 세운 初都 입니다. 주몽과 온조의 生沒 연대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만 주몽은 부여의 해씨 왕조의 적통이며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隋書 기록의 東明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지목할 수는 없지만 동명이라는 이름은 부여왕조와 관련이 있는 이름인 것만은 분명 합니다. 수서의 기록으로 위구태는 동명의 먼 후손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東扶餘는 부여의 후예 국가라는 것이며 東扶餘의 왕 위구태는 公孫燕의 공손도의 딸과 결혼을 통해 결혼 동맹관계 였습니다. 공손도는 자신을 "遼東의 王이다" 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공손연은 요동(지금의 山東半島)의 나라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38년 公孫燕은 曹魏의 司馬懿에게 토벌을 당하고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때 공손연과 동맹관계 였던 東扶餘 역시 공손연의 멸망 과정에서 함께 토벌을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따라 위구태는 稷山을 버리고 河南 嵩山의 西南쪽인 慰禮城으로 이동을 하였고, 이곳에서 百濟라는 이름으로 건국하는 것이며 도읍지를 위례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식민사관적으로는 慰禮城과 漢城을 동일시 하지요. 하지만 漢城은 근초고왕이 고국워왕을 전사 시키고 돌아와서 도읍지를 遷都를 하는 것이며 이렇게 천도한 도읍지가 漢城 입니다. 이 漢城은 阿利水의 남쪽이라고 하며 한성은 阿莘王 때에 광개토 태왕에 의해 함락 당하고 광개토 태왕의 아들 고려 태왕 때에 개로왕이 아차산성에서 참수를 당하며 사실상 百濟는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때 백제는 웅진성으로 옮기는 것이며 잠시 웅진시대를 지나 聖王 때에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를 하면서 나라 이름을 夫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稷山에 관한 문헌 자료속으로 들어가 봐야 겠군요. 직산 제원루터 위치 관련 문헌사료
(가) 서거정 제원루기(1477년경 추정)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稷之客舘東北隅)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다면 당연히 한양에서 출발햇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거정이 영남이라는 곳을 지나 간 모양인데 직산을 지나게 되엇던 것이지요. 대륙의 嶺南이란 "秦嶺山脈의 남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천안의 향토 사학자들께서는 嶺南이라니까 경상도 嶺南을 생각 하신듯 하네요? 왜냐하면 직산을 천안 근처라는 믿음으로 해석하신 듯 합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濟源’ 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즉, 제원이라는 지명은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는 것을 서거정은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백제의 근원이 되는 도읍지는 濟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 드리지요. 연러분은 서거정이 明나라로 사신으로 가면서 지금의 한양에서 천안 방향으로 明나라를 간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河南 濟原의 위치 또 다른 기록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1498∼1554)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백담선생문집 4권(栢潭先生文集卷之四, 1670년) 차직산제원루운(次稷山濟源樓韻) 蒼茫籬落暝煙橫。 창해의 아득한 밤안개는 울타리가 되고 자 이제 구본령의 백담집에 나오는 시의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지요. 蒼茫은 滄 "滄"은 조조의 滄海의 그 하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창해가 한반도와 연관 시킨다면 조조가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왔었다는 말인가요? 故國興亡感客情。 옛 나라의 흥망을 객정으로 한스럽다. 汴水空餘西苑樹。 변수의 서쪽동산 수목은 비어 있는데 변수의 汴(변)이라는 글자는 오직 변수 만을 표현하기 위한 고유명사적 漢子 입니다. 변수는 대한민국의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천 입니다. 중화인민공확국의 위키백과의 汴水(변수)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하지요. 汴水,也称汴河,古代河流名称,为通济渠的一部分,主要部分位于今天的河南省开封地区境内。 汉代河南荥阳县西南索河《汉书·地理志》作卞水,《后汉书》始作汴渠。魏晋之际, 汴渠自荥阳东循狼汤渠至今开封市,又东循水,获水至今江苏徐州市转入泗水一道, 成为当时从中原通向东南的水运干道 즉, 汴水(변수)는 길게 설명 할것도 없이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하천이며, 하남 開封(카이펑)지구 내에 있는 하천이며, 강소성 서주시에서 泗水와 합쳐 져서 회수로 흘러 드는 하천이라는 것이지요. 金陵唯有石頭城。 금릉에 오직 석두성이 있도다 금릉이란 동오의 도읍지인 建業을 말하지만 동오의 도읍지가 建業(건업:남경))일 수 없다는 것을 필자의 전 글에서 증명해 보였습니다. 東明舊緖雲俱滅。 동명이 옛날에 나라를 시작햇으나 나라는 남아 있지만 임금은 죽었으며 여기서의 東明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 합니다. 다만 고구리와 백제는 아주 오랫동안 동명의 적통이 누구인지를 가리기 위해 왕을 죽고 죽이는 역사를 씁니다. 南漢遺墟草自平。 한수남쪽 언덕은 평지가 되어 풀만 남았구나 한수란 長江의 최대 지류 입니다. 却賀聖朝隆祀典。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사전에서 성조의 훌륭험을 溫王千古永流聲 온조왕의 은덕을 영원히 노래 하겠노라 황하의 하류는 큰 비만 오면 위 지도에서 보듯이 엄청난 변화를 보이면서 수 많은 雨路(빗 길)을 만들어 내지요. 위 지도는 그 흔적이 크게 남은 물길이지만 크고 작은 물길(雨路)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지요. 濟라는 글자는 濟水를 나타내는 固有名詞的 글자 입니다. 또 한번 제수의 역사를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의 설명을 보도록 하지요. :“济水,古水名,发源于今河南,流经山东入渤海。现在黄河下游的河道就是原来济水的河道。 제수, 옛 물 이름.지금의 하남에서 발원하며 산동을 경유하여 渤海로 들아간다. 현재 황하 하류의 하도는 원래 제수의 하도이다 . 지금의 하남제원 산동의 제남 제양 제저 제종이라는 이름에서 이름을 얻엇으며 제원은 제수의 발원지라는 이유로 이름을 얻었다. 中国古代的四大河流之一济水现在已难觅踪影。 즉, 濟源이라는 이름은 濟水의 발원지라는 이유로 얻어진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济水,又名兗水,据传发源于中国河南省济源市西北,济源也因此而得名。 제수, 다른 이름으로는 연수이며 중국 하남성 제원시 서북에서 발원하며 제원이라는 이름은 제원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수와 연수의 이름이 겹치는 이유는 청나라 때 제수의 물길을 연수와 합치면서 제수와 연수의 이름이 大靑河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山东段俗称大清河。 대청하는 산동의 속칭이다. 济水在古时独流入海,与江水(长江)、河水(黄河)、淮水(淮河)并称华夏“四渎”。 제수는 고대에는 다른 하천을 만나지 않고 단독으로 북해로 들어 갔으므로 장강, 황하, 회수와 함께 화하4독으로 불리웠다. 즉, 고대의 제수는 단독 하청이었으나 지금은 연수와 합해진 하천이라는 것이지요. 清朝咸丰黄河大改道后,黄河由济水入海,济水流经的城市济源市、 청나라 때 황하 대개도후 제수는 황하로 들어 가게 되는 것이며, 제수의 흐름은 제원시->제남시->제닝시->제양현을 지난다. 고대의 제수는 단독으로 흐르는 단독 하천이 였으나 청대에 수로를 정비 하면서 황하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며 그 흐름의 방향은 제원시와 제남시, 제닝시 그리고 제양현을 지난다는 것입니다 제수의 흐름은 아래 지도의 역사 깊은 도시를 통과 하지요. 하남 제원시 산동성 제남시 산동성 제닝시 즉 제수는 하남 제원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산동성 제남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흐르다가 산동성 제닝시를 지나 남사호로 흘러 들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땐가 그 방향이 바뀌어 연수와 합쳐지는 것이지요. 강태공의 齊나라와 백제 온조왕의 영토는 제원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온조왕의 위례성은 제원 일대에 존재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濟源과 훗날 근초고왕이 고구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遼西와는 황하만 건너면 되는 것이며 바로 요서 땅에 稷山이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온조의 후손인 근초고왕이 요서에 진출하는 이유가 백제의 初都인 稷山을 차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 였을 까요? 또 하나는 강태공의 齊나라는 하남의 제원 부근에 존재 하던 나라 엿음을 알 수 있고 제수와 연수가 엮여 지듯이 제나라의 위치가 연수 지역으로 이동 되는 역사 조작의 프레임이 설정 되는 것이며 연나라는 북쪽으로 이동되는 역사 조작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따라서 요동이라는 지명 역시 연나라의 위치 이동과 함께 지금의 랴오닝 반도로 이동 되는 역사 조작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글 서두에서 보았듯이 갈피를 못잡고 한반도 여기 저기를 전전하는 온조왕의 위레성을 한반도에서 넣으려다 보니꺼 위레성은 오늘 이 순간에도 제자리를 찿지 못하고 유랑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동아사아의 지명은 여기 저기서 같은 이름이 나타 나지만 고대 동아사아 하천의 이름은 固有名詞的 漢字의 특성 때문에 다른 곳에는 적용 할수 없는 것임애도 불구하고 식민사관자들은 놀라운 마법으로 중국의 하천이 오늘날에는 한반도를 근거도 없이 떠돌게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