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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1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공군 창설 20주년 기념, F-4D (팬텀)
1969년 도입 이후 '미그기 킬러'로 불리며 한반도 상공을 지켜온 F-4D 팬텀 전투기가 41년 간의 임무 수행을 마치고 퇴역했습니다.
공군은 오늘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제11전투비행단에서 F-4D 퇴역행사를 개최하고 F-4D 도입과 함께 창설됐던 제151전투비행대대를 해체했습니다.
F-4D 팬텀기는 북한 공군에 대한 우리 공군력의 열세를 극복하는 계기가 됐던 7~80년대 공군 주력 전투기로 모두 80여대가 도입됐고 최근까지 20여 대가 운용돼 왔습니다.
공군 11전투비행단은 F-4D 팬텀기의 퇴역이후 최신예 전투기인 F-15K 60대를 내년까지 도입해 핵심 전력의 세대 교체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YTN 2010-06-16 16:51
http://search.ytn.co.kr/ytn_2008/view.php?s_mcd=0101&key=
201006161651282946&q=%C6%D2%C5%D2
2007 - 북송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사망
이인모 [1917.8.24~2007.6.16]
1993년 3월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사망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6월 16일 사망했다.
이 씨는 북송된 후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일컬어졌고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생일날 병원에 입원 중인 이 씨를 찾아 격려하고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으며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도 수여했다. 양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이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에서 태어나 6.25 발발하면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일선 종군기자로 낙동강 전선으로 남하했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입산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다가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그는 59년 1월 만기 출소했지만 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다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76년 만기가 지났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88년 10월까지 복역했다.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 Antonio Meucci 2003년 5월 28일 발행
2002 - 전화기의 발명자는 안토니오 메우치라는 사실을 미국 의회가 인정
“전화기 발명자 벨 아니다”
전화기의 발명자는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1808~89·사진)라는 사실을 미국 의회가 인정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17일 보도했다.
미국 하원은 16일 표결을 통해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한 ‘텔레트로포노’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 특허를 획득했음을 인정했다. 그 동안 역사학자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 등을 상대로 메우치가 전화기 발명자임을 설득해왔다.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메우치는 미국 뉴욕 부근의 스태튼 섬으로 이주한 뒤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1860년에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좀더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 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에 1년짜리 특허를 신청했지만 3년 뒤 특허를 갱신하지 못했다. 1876년에 그와 연구소를 함께 사용했던 벨이 전화기 특허를 내고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해 큰 돈을 벌자 그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대법원이 벨의 사기혐의를 인정함으로써 승리를 눈앞에 뒀으나 1889년 그가 숨지자 재판도 중단됐다.
미국 의회의 표결 결과가 알려지자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의 부정이 바로잡혔다”며 “벨이 부와 명성을 누린 배신자임이 마침내 드러났다”고 환영했다.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한겨레 2002-06-17
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1/2002/06/007100001200206172139114.html
-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방북 '98.6.16~23 (공중전화카드)
1998 -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소떼 방북
[어제의 오늘]19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소떼 방북
ㆍ남북관계 해빙 이끈 큰걸음
1998년 오늘 오전 임진각. 화환을 목에 건 황소 옆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17살 때 강원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사연을 회고하는 83세 노신사의 주름진 얼굴에서 벅찬 감회와 설렘이 느껴졌다.
정 회장은 이날 북한에 제공할 소 1차분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십대에 실린 소들이 오전 9시22분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다. 정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민간 차원의 합의를 거쳐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통해 민간인이 북한에 들어간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정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향후 10여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마지막 냉전지역인 한반도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소떼의 모습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 ‘전위예술’의 총감독인 정 회장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의 방북은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에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고, 50년 가까이 그리운 가족과 헤어져 있던 실향민들도 설레게 했다. 정 회장은 6월23일까지 8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북측과 금강산 관광 개발사업 추진 등에 합의했다.
소떼 방북으로 ‘햇볕정책’으로 불리던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해 11월18일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됐고,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어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남북 민간교류는 외국인 투자를 늘리면서 외환위기 극복에도 기여했다.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던 당시 금강산을 오가던 관광선의 모습은 한반도 정세를 우려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소떼 방북 11년이 지난 현재 남북간의 긴장은 유례없이 높아져 가고 있다. 대북강경책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고, 개성공단도 존폐위기에 몰렸다. 작고한 정 회장이 중절모에 흰색 코트를 곱게 차려입은 채 군사분계선을 넘던 장면도 우울한 빛깔로 퇴색해가고 있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15 18:08: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6151808515&code=100100&s_code=ap005
(참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10월 27일 2차로 소떼와 함께 방북하였습니다. ^.@)
1992 -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6월 16일 가진 1차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중인 장거리 전략핵무기를 2003년까지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폐기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끝에 1991년 타결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START에서 정한 양국의 전략핵탄두 보유 상한선은 미국 9천8백86개 소련 1만2백37개였는데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보유 상한선을 미국 3천5백개, 러시아 3천개로 다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양국 정상은 또 가장 가공할 무기인 중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다탄두 ICBM을 폐기키로 합의했으며 이와함께 테러 위험 국가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는 범지구방어망 구축작업을 함께 연구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합의된 전략핵무기 감축은 두 단계로 나눠 이뤄졌는데 1단계에서 양측은 보유 핵무기를 ICBM 1천2백50기 중형미사일 6백5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2천2백50기 등 3천8백∼4천2백50개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2단계에서 양측은 보유상한선이 1천7백50개로 제한되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IBM)을 포함, 각각 3천∼3천5백개의 핵탄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조선
198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모국 폴란드 방문
교황의 자리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덟 차례의 고국 순방(1979, 1983, 1987, 1991, 1995, 1997, 1999, 2002년)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민주화 정착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교황의 존재는 때로는 민족의 상처를 보듬는 인자한 아버지였고, 때로는 가차 없이 잘못을 꾸짖는 엄중한 스승이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폴란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조국의 땅이 내게 선물한 신앙과 문화, 역사의 토대, 그리고 그 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기억들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특히 폴란드어는 내게 특별한 의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무언가를 써야 할 때는 폴란드어로 씁니다. 나는 온갖 시련과 박해를 받아온 폴란드 민족 가운데서 당신의 대리인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은총과 신비』(1996) 중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국제지역정보 제9권 5호(통권 142호) 2005. 5. 1)
/segero.hufs.ac.kr
- Fritz Lang, Igor Stravinsky, John Muir, Wernher von Braun
1977 - 독일 태생의 로켓과학자 브라운(Braun, Wernher von) 사망
브라운 [Braun, Wernher von, 1912.3.23~1977.6.1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거리 탄도미사일 'V-2'를 발명한 독일 출신 로켓 연구가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가 1977년 오늘 65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브라운 박사는 나치 독일의 몰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의 기술부 부장으로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 이후에는 나사(NASA), 즉 미국항공우주국에 소속돼 아폴로 계획을 위시한 우주개발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YTN
1977 -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1977년 6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선임됐다. 브레즈네프는 이로써 당과 국가의 양 쪽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를 해임한 이래 개인지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 서기장과 수상, 최고회의 의장을 각각 분리, 트로이카 방식에 의한 집단지도체체를 유지해 왔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사망한 1982년까지 스탈인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을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 국제긴장 완화와 평화공존 이른바 '브레즈네프 노선'을 추진해 왔다. /조선
1976 - 남아공 ‘소웨토 봉기’
[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남아공 ‘소웨토 봉기’
총성이 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 소년이 양팔에 무언가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진작가 샘 은지마는 본능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몇 시간 뒤 은지마의 사진은 현지 신문인 ‘더 월드’ 1면에 실렸다. 소년이 들고 있었던 것은 헥터 피터슨. 경찰의 총에 맞은 12세 소년이었다. 축 늘어진 피터슨을 안고 있는 소년의 눈에는 분노와 비탄이 서려 있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훗날 ‘소웨토 봉기’로 불린 학생 시위는 1976년 6월 1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흑인 빈민가 소웨토에서 시작됐다. 1만5000여 명의 흑인 학생들이 자기들에게만 아프리칸스어(Afrikaans)를 쓰도록 강요한 백인 정권에 맞서 거리행진에 나섰다. 이 언어는 17세기 네덜란드계 백인이 이주하면서 전파한 말. 흑인들에게는 ‘차별과 억압의 상징’이었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말을 듣지 않자 총을 쏘았다. 피터슨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동료 학생이 피터슨을 병원으로 옮기는 순간을 포착한 게 은지마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그러나 이 봉기를 시작으로 1976년 한 해 동안 약 700여 명의 흑인 학생과 주민이 숨졌다.
‘소웨토’란 말은 현지어 같지만 사실은 ‘사우스 웨스턴 타운십(South Western Township)의 약자. 겉 다르고 속 달랐던 당시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소웨토의 비극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991년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는 소웨토 학생들이 봉기한 6월 16일을 ‘아프리카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소웨토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으로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와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를 배출한 ‘관용과 화해의 발상지’로도 기억되고 있다.
은지마는 지난해 6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이 든 건 플래카드였습니다. 총이 아니었죠. 그러나 경찰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어요. 첫 총성은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전에 들렸어요.”
소웨토 봉기, 그 중심에는 은지마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동아닷컴 2007-06-16 03: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616/8455022/1
1970 - 에스토니아 작곡가 헤이노 엘러(Eller, Heino) 사망
엘러 [Eller, Heino, 1887.3.7~1970.6.16]
Heino Eller (7 March 1887 – 16 June 1970) was an Estonian composer and composition teacher.
Eller was born in Tartu, where he took private lessons in violin and music theory, played in several ensembles and orchestras, and performed as violin soloist. In 1907 he entered the Saint Petersburg Conservatory to study violin. From 1908 to 1911 he was a law student. In 1920 Eller graduated from the conservatory renamed to Petrograd Conservatory.
From 1920 to 1940, Eller was a professor of music theory and composition at the Tartu Higher School for Music. During this time he formed the Tartu school of composition, which gave rise to many composers, including Eduard Tubin.
In 1940 he became a professor of composition at the Tallinn Conservatory and taught there until his death in 1970. He was named a People's Artist of the USSR in 1967.
Eller was a legendary teacher of composition. The school he formed in Tartu counterbalanced the so-called Tallinn school headed by Artur Kapp. Eller’s pedagogical talent is versatile. The list of his pupils offers the best proof of this: each of them has created a distinguished original style
http://en.wikipedia.org/wiki/Heino_Eller
- V. F. Bykovski and Bostok-5 - V. V. Tereshkova and Bostok-6
1963 - 소련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 세계최초로 여성 우주비행에 성공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 1963년 6월 16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당시 26세)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
테레슈코바가 1인승 우주선 ‘보스토크 6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장시간의 우주여행이 남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을 태운 ‘보스토크 5호’를 이틀 전에 발사, 그녀와 함께 비행하도록 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무중력 상태를 실연(實演)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후 3시30분부터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스토크 6호는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19일 오전 11시20분쯤 지구에 착륙했고, 보스토크 5호는 81바퀴를 돌며 119시간6분 동안 우주에 머무는 신기록을 달성한 뒤 같은 날 오후 2시쯤 지구로 돌아왔다.
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소련에서 6번째, 세계에서 10번째의 우주비행사가 된 테레슈코바의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조선
1960 -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60년 6월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전날 15일에 미-일 신안전보장조약과 관련해 발생한 유혈충돌에서 여학생의 희생에 의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조선
1958 - 헝가리의 정치가, 총리 너지 임레(Nagy Imre) 처형
너지(노디) [Nagy Imre, 1896.6.7~1958.6.16]
헝가리의 정치가.
1956년 혁명정부 총리가 되어 독자노선 확보에 힘쓰다가 목숨을 잃었다 (→ 헝가리 혁명).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기 전까지 자물쇠 수리공 일을 배웠다. 러시아군에 붙잡힌 뒤 공산당에 입당, 적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1929년 모스크바로 가서 농업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1944년까지 머물렀다. 그뒤 소련이 점령한 헝가리로 돌아와 전후의 정부수립을 도왔고 1944~48년에 몇몇 각료직을 거쳤다. 농민의 복지를 옹호하는 확고한 태도 때문에 1949년 공산당 정부에서 쫓겨났지만 공개적으로 자기 주장을 철회하여 다시 공산정부에 복귀했다. 1953~55년 총리를 지냈으나 독자노선으로 말미암아 축출되었고, 그뒤 교직생활을 했다.
1956년 10월봉기 당시 반소주의자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실패로 끝나버린 봉기의 마지막 날 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서방세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모스크바의 속임수로 피신해 있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서 나왔다가 루마니아로 강제 이송되었으며 송환된 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브리태니커
1954 -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블룸즈데이' 행사 시작
[역사속의 인물] 재임스 조이스
오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는 큼직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블룸의 날(Bloomsday) 페스티벌. 블룸은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1882~1941)의 '율리시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율리시즈'는 유대계 광고 외판원인 리오폴드 블룸과 그의 육체파 아내인 소프라노 가수 마리언 블룸, 젊은 아마추어 예술가 스티븐 디덜러스가 1904년 오늘, 하루 동안 일상생활에서 겪는 심리세계를 시간대별로 나타낸 작품이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그리스명 율리시즈)에서 형식을 빌려온데다 상징어와 독백이 난무하는 글이어서 무척 어렵다.
조이스의 얘기다.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뒀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무척 바쁠 것이다. 이것이 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날 아일랜드인들은 밀짚모자와 조끼, 긴 스커트를 입고 샌드위치, 와인, 기네스 흑맥주를 먹으면서 블룸의 행적을 좇는다. 그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통독한 사람이 드문데도 소설 속의 특정일을 축제화할 수 있는 발상이 놀랍다. '상술'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대단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니겠는가.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09년 06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6944&yy=2009
1947 - 제 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상하이[上海]서 개막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국제연합경제사회이사회의 산하기구인 지역경제위원회.
약칭으로 ESCAP이라고도 한다. 1947년 3월 국제연합총회의 권고와 국제연합경제사회이사회의 결의로 ECAFE(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태평양 제도의 국가들이 가맹하고 경제개발뿐만 아니라 사회개발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게 되어 1974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개최한 제30회 ECAFE 총회에서 현재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ESCAP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의 경제발전 지향, 회원국 및 타지역과 경제협력 촉진을 위한 통계·정보의 수집·조사·연구, 경제사회이사회와 관계 각국에 대한 권고 등을 주로 논의한다. 매년 1회 가맹국 도시에서 총회를 개최한다. 총회는 최고의사결정기관이며, 그 하부기구로 사무국과 운수통신·무역·통계·사회개발·인구·천연자원·산업·주택·기술·경제계획·농업개발 분야 위원회, 상주대표자문위원회·내륙국특별위원회가 있다.
2000년 현재 정회원국 51개국, 준회원국 9개국이며, 한국은 1954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사무국은 타이 방콕에 있다.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의 지역위원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네이버
1940 - 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발췌)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5월 독일군의 공격이 있은 후 당시 프랑스 정부의 수반인 폴 레노는 페탱을 부총리로 임명했으며, 6월 16일 당시 84세였던 페탱 원수는 새 내각을 조직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랑스군의 패배를 지켜본 '베르됭의 영웅'은 휴전을 요청했다(→ 비시 프랑스).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비시에서 소집된 상하 양원은 페탱에게 '국가 원수'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군이 전국토의 2/3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페탱은 독일에 협력해야만 침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수많은 전쟁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휴전 협정으로 침략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에서 페탱은 '일·가족·조국'을 모토로 한 정부를 수립했다. 기질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보수적인 그는 정부가 프리메이슨의 지부들을 해산하고 유대인들이 일정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피에르 라발 총리가 주장한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정책에 반대하여 1940년 12월 라발을 해임하고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그의 후임으로 앉혔다. 그런 다음 페탱은 중립과 유예를 원칙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실시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비밀리에 특사를 런던에 파견하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만나 히틀러 군대가 북아메리카로의 자유통행을 거부하도록 촉구했으며, 주(駐) 비시 미국 대사 윌리엄 레이히 제독과 1942년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페탱) /브리태니커
1924 - 중국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개교 (교장 장제스)
1924년 6월 16일 황푸[黃埔]군관학교가 개교했다.
정식 명칭이 ‘육군 군관학교(陸軍軍官學校)’ 즉 육군 사관학교인 이 군사학교는 광둥[廣東]성 황푸[黃埔]에 세워져 통상 ‘황푸군교’, ‘황푸군관학교’로 불리었다.
손문은 국공합작 후 혁명수행을 뒷받침할 자체적 무장역량을 건설하기 위해 코민테른과 공산당의 협조를 얻어 중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교육기관인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손문은 개교식 연설에서 중국에서 혁명이 지지부진한 것은 진정한 혁명 무장세력이 없고 광대한 인민의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당을 개조하고(국공합작을 지칭), 당의 군대를 양성, 공농(工農)정책을 추진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황푸군관학교의 설립취지는 첫째 혁명 무력과 민중의 결합, 둘째 혁명무력의 인민무력화라고 밝히고 이는 황포군관학교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푸군관학교 설립은 이해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의되었으며 3월 입학시험 등을 통해 350명의 학생과 예비학생 120명을 선발했다. 개교식에는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을 포함한 교관 및 학생 500명이 참석했다.
초대 교장은 국민당의 장세스[蔣介石]였으며 정치부 주임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황푸군관학교는 일본 군대제도를 참고하였으며 국민당의 완전한 통제 아래 혁명 이론교육을 중시하였다. 훈련기간은 10개월 이었으며 교장은 국민혁명군 군장(軍長)을 겸하였다.
1926년 중앙군사정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음 해 공산당 세력을 배제하였다. 난징[南京], 청두[成都] 등을 거쳐 1949년 대만으로 옮겨왔다.
대만 독립을 지향하고 있는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이 2004년 개교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계획을 밝히자 일부 원로 졸업생들은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로 기념행사를 갖겠다고 발표했다.
http://www.chinawatch.co.kr/chinawatch.php3?_Number=22686
1903 - 미국의 포드, 포드자동차회사 설립
포드 자동차 회사(Ford Motor Company)는 미국의 자동차를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며, 단순히 포드(Ford)라고도 한다NYSE:F. 포드는 1903년 6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가 설립했고 디어본에는 현재에도 포드 본사가 있다. 2004년 포츈 잡지의 매출액 기준에 의하면, 양대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크라이슬러 자동차와 토요타 자동차의 뒤를 이어 세계 3위의 자동차 회사이다. 그러나 수년 전만해도 포드는 제너럴 모터스에 이어 둘째로 큰 자동차 회사였다.
포드는 과거 거대 노동인력을 관리하는 방법과 자동차 제조공정의 방법을 개혁해 왔다. 제조공정의 연구 결과로 엘리 휘트니가 제안했던 교환가능한 부품을 사용한 최초의 일괄 작업 공정을 1913년 도입하기도 했다. 이 방식에 따라 자동차는 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어,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의 수많은 제조 기업들이 이 공정을 채택하여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사관계 역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1914년 당시 일반적인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이었고 임금은 일당 2달러 34센트였다. 그러던 것을 8시간 노동시간에 5달러를 지급하면서 노동자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 포드 자동차의 성공은 1908년 10월 포드 모델 T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이 자동차에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이 매겨졌다. 포드 모델 T는 1914년 50만대 이상 팔리면서 미국 전체 자동차의 반 이상을 포드 자동차일 정도로 포드 자동차의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모델이다.
현재 포드 자동차 회사의 최고 경영자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2세이다. /위키백과
1902 - 미국의 유전학자 매클린턱(McClintock, Barbara) 출생
매클린턱 [McClintock, Barbara, 1902.6.16~1992.9.2]
매클린턱은 1983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전학자이다. 코넬대학교에서 1927년 식물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주리대학교의 교수직을 거쳐, 1942년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뉴욕에 있는 콜드하버스프링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0~50년대에 옥수수 종자의 색변이 관찰을 통해 유전정보가 염색체상의 특정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러한 전위가 유기체의 생장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뒤이어 그녀는 전위인자들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을 진척시켰으나, 그 결과들은 당시의 통념과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인정받지 못했다. 크게 낙심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 강의도 그만둔 채 연구에만 전념했다. 분자생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그녀의 연구가 유전자의 기능 및 구성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3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상을 단독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브리태니커
"매클린턱이 발견한 전위인자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중략) 사람들은 처음에는 매클린턱이 미쳤다고 했고, 좀 지나서는 그것이 옥수수에만 국한된 특이한 현상이라고 했다. 좀더 지나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끝내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 칼 샤피로
1897 - 미국 매킨리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 체결
하와이 합병은 1900년 4월 30일에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한 사건이다.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였다. 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먼저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식이다. 이 방식은 나중에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주데텐 할양,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도 유사한 수법이다.
하와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미국과 극동을 잇는 중간 기지 역할을 해왔고, 1887년에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진주만(Pearl Harbor)을 미국 해군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와이로 이민온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외국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국수적인 헌법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하와이 혁명이 일어나서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라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 조약을 미국 의회가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하였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날짜가 1900년 4월 30일이다.
미국 합병 직후에는 준주(準州)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주(州) 승격운동이 활발해져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위키백과
[하와이 합병 역사]
1897.06.16 - 미국과 하와이공화국이 하와이 합병조약 체결
1898.07.07 - 미국 의회가 하와이 합병조약 비준
1900.04.30 - 하와이 합병, 미국의 준주(準州)가 됨
1959.08.21 -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
- Pierre de Coubertin
- Demetrios Bikelas
1894 - 근대올림픽 부활을 결정한 국제스포츠회의 개최 (16~23일, 소르본느대학)
쿠베르탱은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1889년 ‘프랑스 스포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올림픽 부활을 제창해 오다가 드디어 1894년 6월 16∼23일까지 열린 국제스포츠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올림픽 제의는 유럽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었고,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쿠베르탱의 건의에 따라 그리스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Dimitrios Bikelas)가 초대 IOC 위원장이 되었고 쿠베르탱은 사무총장에 머물렀다. 이들은 제1회 대회를 1896년 유서깊은 아테네(Athenae)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naver
1890 - 미국의 희극배우 로럴(Laurel, Stan) 출생
로럴(로렐) [Laurel, Stan, 1890.6.16~1965.2.23]
로렐과 하디 [Stan Laurel and Oliver Hardy]
할리우드 영화 최초의 뛰어난 미국의 희극배우 팀.
홀쭉이 역할을 맡은 스탠 로렐은 무성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서커스·뮤지컬·연극·보드빌 등에 출연했으며, 1926년 뚱뚱이 역의 올리버 하디를 만나 짝을 이루었다. 하디는 미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노래와 보드빌 공연을 하다가 1913년부터 희극 무성영화에 출연했다.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시각적 유머가 언어적 유머로 바뀌자 무대에서 훈련된 이 2인조의 인기는 급속히 올라가 1920~40년대에 걸쳐 200편 이상의 익살스런 희극영화를 찍었다. 로렐은 덤벙대고 쉽게 풀이 죽는 성격의 순진한 역할을 맡아 뚱뚱하고 성미 급한 하디의 상대역을 했으며, 하디는 카메라에 애써 참는 듯한 응시의 눈길을 던지는 것으로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이들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진무구하고 어리석은 행동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상황을 뒤얽힌 재난의 상황으로 바꾸어놓기 일쑤였다. 이들의 걸작영화는 대부분 할로치영화사의 레오 매캐리 감독이 제작했는데 매캐리는 1926년 두 사람에게 2인조로 활동하도록 설득한 장본인이었다(→ 로치). 대표작으로는 〈웃게 내버려두어라 Leave'em Laughing〉(1927)·〈뮤직 박스 The Music Box〉(1932)·〈서쪽 저 멀리 Way Out West〉(193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84 -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등장
[책갈피 속의 오늘]1884년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등장
놀이공원에서 가장 줄을 길게 서야 하는 놀이기구는 십중팔구 롤러코스터다.
전 세계 모든 놀이공원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히트 상품’인 롤러코스터가 놀이공원에 등장한 지 124년이 됐다.
1884년 6월 16일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코니아일랜드의 한 놀이공원에서 첫선을 보인 롤러코스터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스위치백 레일웨이’로 불린 이 롤러코스터는 라마르쿠스 톰슨이 탄광 열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3년에 걸쳐 만들었다.
큰 벤치처럼 만들어진 열차는 상승과 하강을 몇 차례 하며 15m 높이의 탑 두 개 사이를 오가도록 돼 있었다.
최고 속도는 시속 9.7km였고 트랙 길이는 180m로 이용 요금은 5센트였다.
요즘 롤러코스터와 비교하면 높이는 5분의 1, 속도는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됐지만 이 롤러코스터는 첫 운행을 시작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즉각 놀이공원 사이에서 롤러코스터 설치 경쟁이 벌어져 1900년이 됐을 때는 미국 전역에 수백 개의 롤러코스터가 설치돼 놀이공원의 대표 놀이기구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대박’ 행진이 계속되자 톰슨은 1896년 뒤늦게 자신이 고안한 롤러코스터의 디자인을 특허출원했다.
한편 롤러코스터의 짜릿함을 맛본 사람들은 더욱더 자극적인 롤러코스터를 원하게 됐고 놀이공원들은 이 같은 욕구를 적극적으로 풀어 줬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27년 코니아일랜드의 한 놀이공원에 등장한 ‘사이클론’이라는 이름의 나무 롤러코스터다.
최고 속도 시속 97km, 최고 높이 26m인 사이클론은 오늘날까지 운행되는 가장 오래된 롤러코스터다.
2005년에는 미국 뉴저지 주 잭슨의 식스플랙 놀이공원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고 빠른 롤러코스터가 등장했다. 이 롤러코스터의 최고 속도는 시속 206km이며 최고 높이는 138m이다.
국내에서는 1973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들어선 청룡열차가 최초의 롤러코스터였다.
나무 롤러코스터도 올해 에버랜드에서 첫선을 보여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동아닷컴 2008-06-16 02: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616/8590530/1
1878 - 프랑스의 정치가, 사회주의자 토마(Thomas, Albert) 출생
토마 [Thomas, Albert, 1878.6.16~1932.5.7]
프랑스의 정치가, 정치 지도자, 역사가.
국제연맹 산하 국제노동기구의 초대 의장으로서 국제노동연맹이 채택한 협약을 비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파리의 유명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이 학교 장학금으로 러시아, 독일, 동지중해 지역 등지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사와 사회주의·노동조합주의·협동조합운동에 관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저술로는 〈독일의 생디칼리슴 Le Syndicalisme allemand〉(1903)이 있다. 1904년 사회당 기관지 〈뤼마니테 L'Humanité〉의 부편집장에 임명되었으며, 곧 프랑스 노동운동 내의 온건파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10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사회당 온건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 때 프랑스의 철도를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1915년 포술 담당 국무차관으로 일한 뒤 군수장관이 되었다(1916~17). 러시아에서 차르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어(1917. 4)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러시아 임시정부와 함께 군수품 생산에 관한 일을 했다. 이는 새로운 러시아 공화국과 협조를 유지하려고 하는 프랑스 노력의 일환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국제노동기구의 초대 의장으로 임명된 그는 이 조직의 영향력 확대와 국제노동법을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작업에 대한 집착 때문에 1921년 의원직을 잃었다. /브리태니커
1874 - 캐나다의 정치가 미언(Meighen, Arthur) 출생
미언 [Meighen, Arthur, 1874.6.16~1960.8.5]
캐나다의 정치가.
보수당 당수로 최연소 총리(1920~21, 1926)가 되었다. 미언은 매니토바 주 포르티지라프레어리에서 변호사업을 하다가 1908년 그곳에서 의원에 당선되었다. 1913년 법무차관이 되었고, 이어 로버트 고든 정부의 각료직을 맡았다. 1917년 보수당과 자유당 일부가 연립정부를 구성했을 때 내무장관이 되었다. 미언은 고든 정부에서 많은 논란이 되었던 정책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세계 문제에서 캐나다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총리로 재임하던 첫번째 임기 동안 그는 영일 동맹의 부활 반대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1921). 캐나다의 국가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주된 위협이 미국의 경제력이라고 확신했던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제창했다. 미언의 2번째 임기는 하원선거와 뒤이은 총선에서 그의 당이 패배해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자유당이 집권했을 때 미언은 야당 지도자로서 간헐적인 활동을 했다. /브리태니커
1846 - 255대 로마 교황 비오 9세 취임
교황 비오 9세(라틴어: Beatus Pius PP. IX, 이탈리아어: Papa Pio IX)는 제255대 로마 교황(재위: 1846년 6월 16일 ~ 1878년 2월 7일)이다. 세속명은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이다.
생애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해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세니갈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간질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치료되어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수학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성에 심취하여 예수회에 입회할 결심을 세우기도 하였다. 로마 고아원에서 사제 생활을 하던 중 교황청 사절을 따라 칠레와 페루를 순방하여 선교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로마에 돌아간 후 호스피스 일을 하던 중 스폴레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1840년 이몰라의 교구장으로 전보된 후 추기경이 되었다. 1846년 6월 16일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9세로 명명하였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선출을 환영하였다. ... /위키백과
1829 - 미국 아파치족 인디언 추장 제로니모(Geronimo) 출생
제로니모 [Geronimo, 1829.6.16~1909.2.17]
아파치족의 지도자. 인디언 이름은 Goyathlay ('하품하는 사람'이라는 뜻).
고향땅을 지키기 위해 자기 부족을 이끌고 미국의 무력에 대항했다. 아파치족은 수세대에 걸쳐 미국 남서부에 있는 자신들의 영토를 식민지화하려는 스페인과 북아메리카 백인들에게 저항해왔다. 제로니모는 1846년 전사단(戰士團) 회의의 일원이 되면서 선조들의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게 되었고, 멕시코의 소노라 및 치와와 공격에 가담했다. 1858년 어머니, 아내, 아이들 모두가 멕시코인들의 손에 죽자 그의 분노는 커졌다. 그후 멕시코인들에 대한 연이은 복수전에서 놀라운 용기·결단력·기량을 보여 전사단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874년 미국 정부는 4,000여 명의 아파치족을 애리조나 중동부에 있는 불모지인 산카를로스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전통적인 부족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배급 식량은 부족한데다 향수병에 걸린 이들은 제로니모를 중심으로 뭉쳤다. 제로니모는 이들을 이끌고 약탈을 감행하여 남서부 지역을 유혈의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1870년대초 애리조나 군관구 사령관 조지 F. 크룩 중령은 이 지역에 어느 정도 평화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들은 제대로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고, 제로니모의 부추김을 받은 수백 명의 아파치들은 마침내 인디언 보호구역을 떠나 백인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1882년 크룩이 다시 애리조나에 파견되어 인디언 토벌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1884년 1월 제로니모는 항복했으나 1885년 5월에 35명의 남자와 8명의 소년, 101명의 여자들과 함께 산카를로스 인디언 보호구역을 탈출했다. 크룩이 정예병력을 작전에 투입한 10개월 후인 1886년 3월 27일 제로니모는 소노라의 카뇬데로스엠부도스에서 항복했다. 그러나 제로니모 일행은 일단 미국 영토 내로 들어가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국경선 근처에서 도주했고, 그결과 4월 2일 크룩 사령관은 넬슨 A. 마일스 준장으로 교체되었다.
최후의 작전에서 5,000명 이상의 백인 병사와 500명의 인디언 보조 부대가 동원되어 여러 차례 제로니모 체포에 나섰다. 5개월 동안 약 2,647㎞를 추적한 끝에 이들은 소노라 산속에서 진을 치고 있는 제로니모 일당을 발견했다. 애리조나의 스켈리턴캐니언에서 열린 회담(1886. 9. 3)에서 마일스는 제로니모에게 플로리다로의 무기한 망명 후 추종자들과 함께 애리조나로 되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다시 한번 항복할 것을 회유했다. 그는 항복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제로니모와 그 일행은 중노동에 처해졌는데 1887년 5월에야 그는 가족과 재회하게 되었다. 1894년 오클라호마 준주(準州)의 포트실로 옮겨진 제로니모는 처음에는 '백인의 길을 걷고자' 하여 농사를 짓고 네덜란드계 개혁교회에 나갔다. 하지만 노름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후 다시는 애리조나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육군부로부터 자신의 사진 및 수제품을 전람회에 내다팔아도 좋다는 특별허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 S. S. 배릿에게 〈제로니모 : 자신의 이야기 Geronimo : His Own Story〉라는 자서전을 받아쓰게 했다. 도움이 될 만한 전기로는 오디 B. 포크의 〈제로니모 작전 The Geronimo Campaign〉(1969), 브리턴·데이비스 공저의 〈제로니모의 진실 The Truth About Geronimo〉(1951, 마일로 M. 퀘이프 편집)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762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출생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이재박의 작명탐구] 이름을 남긴 역사속의 큰 인물(다산 정약용)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는 사람 앞에서는 그 말이 무색해진다. 한 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찬사를 받을 만한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여러 분야에서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오늘날 천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미술뿐만 아니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 공학 등 여러 방면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준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천재가 비단 유럽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천재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경세유표(조선사회의 정치적인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 목민심서(현 제도 내에서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취지로 쓴 책) 등 일생 동안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의 축조기간을 단축시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설계했다. 활차와 고륜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장비들을 발명하여 성의 축조 비용을 절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부역을 시키지 않고 임금을 지급하는 모군만으로 성을 건설하여 백성의 피해도 줄였다. 그는 사상연구와 과학, 행정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의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의 원래 아호는 다산이 아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여 스스로를 ‘삼미자’(三眉子)라고 불러,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호로 사용하는 대인의 기질을 보였다.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나이 30대 후반부터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1801년에 일어난 신유교난(辛酉敎難) 때이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세 차례에 걸친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학문연구로 인하여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호전시키기 위해 정약용은 차를 즐겨 마셨다. 심지어 생을 마감할 때도 찻종지가 곁에 있었다 하니, 다산이라는 아호만큼 그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 같다.
꽉 막힌 불의(不義)의 시대를 올바르게 살다간 천재 다산. 그는 1762년 6월 16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관명을 가지게 되었다. 정약용의 위로는 약전, 약종, 그리고 누이가 있었다. 옛 작명방식을 보면 대개가 그러하듯 남자 형제들은 돌림자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이들 형제들은 약(若)자를 돌림자로 사용하여 삼형제가 남다른 재능을 보인 삶을 살았다. 다산의 이름인 약용은 토(土)의 기운이 강한 이름으로 그에게는 재성(財星)으로 작용하며, 재성은 부지런하고 적극적이다. 또한 융통성이 뛰어나고 인간관계가 원만하다. 한마디로 절망하지 않는 성격의 이름이니 불의의 시대를 살았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다
/매일신문 2011년 01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828&yy=2011
1592 - 임진왜란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조선군의 첫 승리)
임진왜란 해전 목록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거제시 옥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마산시 산호동) - 이순신
1592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카메이 코레노리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1597년 10월 16일(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고니시 유키나가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 요시토시 - 이순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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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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