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01
주촌면 천곡리 '이팝나무' 꽃 무성하면 한해가 등 따시고 배불러
소재지: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885
2020.12.18 노거수 탐사 2차/ 김해시 관내노거수 1번, 천연기념물 제307호
12월 16일 초선대를 먼저 보고 갔더니 늦은 시간이라 어두워 오늘 다시 가다.
밑둥을 보니 500년의 세월이 느껴진다.
오래오래 잘 살아내기를 희망하다.
사계절의 이팝나무 모습을 다 보고싶다.
나무는 오랜 세월을 말해주 듯 밑둥은 거의 썩어서 위 내용중 나오는 것처럼 외과 수술을 했지만 단아하게 마을을 지키며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 307호다.
자료를 삭제해서 다시 올립니다.
노거수이야기 01 주촌면 천곡리 ‘이팝나무’
꽃 무성하면 한해가 등 따시고 배불러 |
가야의 고도, 역사문화 도시 김해. 가야연맹은 김해에 자리 잡은 금관가야가 맹주국이 되어 영남일원을 경영하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아쉬운 것은, 고분만 열면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지는데도 정작 김해에서 출토된 국부보는 단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이다. 국보 제 275호인 기마인물형토기가 있지만, 가나마 발굴시기나 장소가 분명하지 않아 '전傳 김해출토'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에 비하면, '자연사의 국보'격인 처년기념물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김해에는 제185호와 307호 등 두 점의 천연기념물이지정되어 있다. 앞의 것은 한림면 신천리, 뒤의 것은 주촌면 천곡리 있다. 둘 다 이팝나무라는 점이 이채롭다. 무성한 가지마다 쌀밥이 그득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 약 20m까지 자란다. 암수 딴 그루, 꽃은 5월경 새 가지에서 원뿔모양의 꽃자루에 핀다. 암술은 1개, 수술은 2개이다. 니암나무, 니팝나무, 뻣나무 등의 다른 이름이 있고, 꽃모양이 수실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소수流蘇樹 , 입하 무렵 꽃이 핀다고 입하목立夏木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는 죽은 이의 관에 넣어주는 쌀인 육도미六道米를 대신한다고 육도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팝나무는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옆으로 뻗은 가지 위에 핀 꽃이 그릇 수북이 담은 하얀 쌀밥처럼 보인다 하여 '이밥나무'로 부르다가 음이 변해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說이다. 이보다 애틋한 전설도 있다. 옛날 경상도 어느 고을에 민며느리로 시집온 나이 어린 새댁이 있었더란다. 시아버지 기일이 돌아와 쌀로 제삿밥을 짓게 됐는데, 친정이 찟어지게 가난해 쌀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뜸이 제대로 들었는지 걱정이 된 새댁이 밥알을 조금 집어 맛을 보다가, 마침 부엌을 지나던 시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제사상에 올릴 메밥을 훔쳐 먹었다는 구박을 견디다 못한 며느리는 며칠 후 뒷산에 올라 목을 매고 말았다. 이듬해 봄,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가 솟더니 희고 소담한 꽃이 가지 가득 피어났다. 사람들은 죽은 며느리의 한이 이밥 같은 꽃으로 피어났다고 믿어,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하기야, 보릿고개를 경험한 50대 이상의 세대들이라면, 어린 시절 한 그릇의 쌀밥이 얼마나 대단함 호사였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쌀밥은 궁중과 왕실에서만 먹을 수 있었기에 조선시대 들어 '이씨李氏들의 밥'이라는 뜻으로 '이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이 잇을 정도니 오죽할까. 꽃 만개하는 5월 8일 동제洞祭 봉행 5월 중순 절정을 맞는다는 이팝나무의 개화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주촌면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휴일인 5월 5일 어버이날에 맞춰 '이팝나무제'를 지낸다"는 전갈이었다. "꽃이 어따ㅓ냐?"고 했더니 만개했다는 대답이다. 이팝나무가 있는 천곡리 천곡마을은 주촌면 소재지이다. 김해시내에서 외동고개를 넘어 곧장 가다보면 만나는 천곡천 건너, 면사무소와 농협, 파출소, 우체국이 모여 있고 이팝나무는 마을 안쪽 언덕배기에 섰다. 시간 맞춰 현장에 당도하니 마을 주민들이 제사 준비에 분주하다. 이팝나무 앞의 정자도 따로 친 차일도, 왁자지껄 잔칫집 분위기다. 돼지고기 삶는 구수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천곡리 이팝나무는 수령이 약 5백 년, 키 17m에 지표면의 둘레는 약 7 m 에 달한다. 땅 위 50cm쯤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가슴 높이 둘레는동쪽 가지가 4.2m 서쪽 가지가 3.5m쯤 뒤쯤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가슴 높이 둘레는 동쪽 가지가 4.2m 서쪽 가지가 3.5m쯤 된다. 원래는 속이 비어 커다란 공동空洞이 만들어져 있었으나 김해시가 외과 수술을 시행해 속을 채우고 죽은 가지도 일부 잘라내는 등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팝나무는 천곡마을뿐 아니라 천곡리 전체의 수호목 역학을 하고 있지만 당산나무는 아니다. 따라서 제향祭享도 당산제가 아닌 동제洞祭의 성격이다. 날짜는 원래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밤이었으나 10여 년 전 양력 5월 8일 오전으로 바꿨다. 외지로 나간 자녀들이 고향을 찾아오는 어버이날이어서, 자녀들에게 마을 풍속을 대물림해 주기에도 좋으리라고 판단한 어르신들의 배려였다. 제례祭禮는 강신降神과 초初 . 아亞 .종헌 終獻순으로 진행되고, 초헌과 아헌 사이에 주민들의 기원을 담은 축문을 읽는다. 집안에 허물이 없고 부정을 타지 않은 주민이나 이장, 면내 기관장 등이 돌아가며 제관이 되고, 제수는 주민들이 비용을 추렴해 아들딸을 고루 낳은 다복한 가정에 맡겨 준비한다. 제례를 진행하는 집례는 대개 마을의 원로인 한상준(75)씨가 맡고 있다. "이밥나무님, 올해도 풍년 들게 해 주시고 우리 천곡마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무탈하고 무병하게 해주시고......, " (여기서 부터 한자는 생략합니다.) 머리를 조아린 제관관 주민들의 어깨 위로, 축문 읽는 소리가 이어진다. 제례를 주관하는 주민들은 60~70대 노인들인데도 축문을 "유세차 모월 모일......," 식의 한문투 대신 우리말로 풀어 써서 더욱 정겹다. 꽃이 많이 맺히면 한 해 농사 풍년 풍년과 무병장수,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은 어누 곳의 둥제든 한결같지만, 천곡마을 이팝나무제의 풍년기원은 의미가 좀 더 각별하다. 이팝나무는 예로부터 한 해 농사의 흉풍을 알려주는 예지목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이팝나무는 4월 중순에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해서 5월 상순에 만개합니다. 때가 되면 노인들이 앞마을로 건너가 멀리서 이팝나무를 보고 한 해 농사를 예측했지요. 꽃이 만개하면 풍년이 들고 꽃세가 약하면 흉년이 든다고 했는데,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어요. " 강상문(53)씨는 생존했다면 올해로 107세가 됐을 선친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었다면서 '농사 예보'는 어긋난 적이 없다"로 말했다. 이팝나무가 주민들로부터 더욱 믿음을 얻은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였다. 그 해 봄, 남쪽 가지는 시름시름하고 북쪽가지에만 꽃이 만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침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이팝나무가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예고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이듬해부터 예사롭지 않은 심정으로 이팝나무를 관찰하게 됐다고 한다. 나무를 세 층으로 나눠 각각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농사를 예측한다든지 윗부분이 시들하면 가뭄을, 아랫부분이 지나치게 무성하면 홍수를 걱정하는 식이다. 나무 전체에 꽃이 골고루 피어도 송이가 성글면 알곡이 많이 달리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이팝나무 하나로 전국의 농사를 예측하거나, 개화실태가 북한의 남침을 경고한 것으로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팝나무가 그 마을의 흉년이나 가뭄을 예고해 준다는 설은 황당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팝나무의 개화기인 5월은 모내기철과 맞물린다. 특히 이팝나무는 농경지 근처나 개울가 등에 잘 자라는, 물을 좋아하는 수종이다. 따라서 이팝나무가 꽃을 활짝 피운다면 그 해 봄은 비가 넉넉했다는 뜻이고, 모가 쑥쑥 자라 풍년이 들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에 형성된 천곡마을 천곡리 학봉산(119m)의 나지막한 자락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마을 서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아침이면 햇살이 마을 집집의 마당을 지나 마루까지 밝게 비추고, 산자락 어디를 파도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아늑한 마을이다. 천곡의 우리말 이름인 '새미실'은 마을이 우물터를 중심으로 형성됐음을 알려준다. 마을의 유래가 된 우물은 학봉산 끝자락의 '뒷새미'와 마을 입구의 '앞새미' 등 두개, 공장들이 들어서 여기저기 지하수를 파는 바람에 앞새미는 고갈되었지만, 뒷새미는 여전히 물이 솟는다. 뒷새미는 겨울에는 김이 오르고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데다 물맛도 더 없이 좋다고 주민들은 자랑한다. 아쉽게도 수량이 넉넉지 않아 지금음 보호시설을 만들어 잠가두었고, 이팝나무 앞에 판 지하수를 마을의 식수로 쓰고 있다. 이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선사시대로 추정된다. 천곡리 산 107 일대 천곡패총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농경지로 변한지 오래여서 본격적인 학술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다양한 패각과 함께 무문토기 계통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뒷산의 천곡산성도 마을의 오랜 역사를 뒷반침 해 준다. 자연지형을 이용, 경사가 심한 능선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성곽의 흔적이 가야시대 산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유사』는 가락국의 생활상을 "사람들은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고 적고 있다. 아낙들은 아침 들녁에 나가 풀을 뽑다가,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몸도 실힐 겸 마을 앞 개펄로 나가 조개를 캐기도 했을 것이다. 지질학계가 밝혀낸 '고김해만古金海灣'의 해안선에 따르면, 가락국 시대에는 지금의 천곡리 앞 선천들판 일대도 모두 바다였기 때문이다. 청주 한씨 충정공파 4백년 세거 천곡마을은 청주 한씨韓氏 충정공파 후손들이 세거해 온 집성촌이다. 청주 한씨는 고려 태조를 보좌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문하태위에 올랐던 한 란(853~916) 장군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원 뿌리는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북원 선우鮮于씨, 행주 기씨奇氏와 일족으로 친다. 4백년 전 천곡마을에 처음 터전을 잡은 이는 중시조의 22대손인 학보 한서룡 공이다. 이전까지 안산시 상록구 일대에 세거하다 서룡공이 전국을 주유한 끝에 천곡마을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학보공이 진사, 그 손자인 용복공이 무과에 급제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인물은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을 노인들의 문중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실제로 조선조 5백 년 동안 무려 6명의 왕비를 배출했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한명회, 동방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떨친 석봉 한 호,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지사, 우리말을 갈고 닦은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 등 청주 한씨 가문의 인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그러냐ㅏ 천곡문중은 학문은 학문을 닦되 자랑하지 않고, 어려운 이를 돕되 내세우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천곡마을의 산과 들에 동화되어 조용히 살아왔다. 기억할 만한 인물로는 15대 국회의원과 문민정부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낸 한이헌(64)씨가 있고, 14대 김해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한고희(63) 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주민들, “마을의 주인은 이팝나무” 같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의 경우, 주민들은 마을을 주거 공동체로 인식하기보다는 생활공동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자기 집안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긍지와 함게, 때로는 타성을 배격하는 '텃세'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천곡마을의 한씨 문중 노인들은 "마을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마한다. 자기네 문중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주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가져다 준 이팝나무야말로 마을의 ㅈ니정한 주인이라는 것이다. 천곡마을은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60여 가구 전체가 한씨 일문이었다. 지금은 24가구만 남아 외지에서 이사 온 주민들과 가족처럼 어울려 살고 있다. 아직은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지만, 천곡마을도 개발의 바람을 피해 가지는 못할 처지다. 이미 30개가 넘는 공장이 들어와 마을앞을 가렸고, 기름진 들녁은 선천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논밭이 모두 콘크리트 숲의 아파트단지로 변하고 나면, 해마다 풍년을 약속하며 주민들의 ㅈ어신적 지주가 되어 왔던 이팝나무는 할 일 잃은 노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게 될 지도 모른다. 다행한 것은, 날이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는 다른 노거수들과 달리 천곡리 이팝나무는 좀 더 가지를 펼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김해시는 이팝나무 앞의 마을 회관과 창고를 이전하고, 그 자리를 공원으로 가꾸기로 했다. 이팝나무가 선 언덕은 마을 진입로와 마주 보고 있어서, 앞이 트이면 드나드는 사람들과 저절로 마주 보게 된다. 그윽한 눈길로 동구 밖을 내다보며 "저 녁은 혼기가 찼으니 성가成家를 해야 할텐데......" " 저 노인네는 아프다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구나." 구시렁구시렁 마을 대소사를 챙길 이팝나무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글 참고자료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
『삼국유사』
나무의 밑둥이 거의 삭아가고 있는데 겨울눈이 잔뜩이다. 산쪽에서서 왼쪽 가지
산쪽에서 오른쪽 가지
어린 이팝나무다. 배롱나무가 있는 자리에 이 이팝나무가 있으면 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
배롱나무 자리에 대목을 식재했으면 더 좋았을 걸...대목이 아닌가.
이팝나무 동제를 올리는제단인가 보다. 꽃이 피었을 때 올린다고 한다. 2021년엔 동제를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