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 박이장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증조할아버지는 박한하(朴漢何)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박식(朴埴)이며, 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복재(復齋) 박양좌(朴良佐)이다. 어머니는 성산배씨(星山裵氏) 별좌(別坐) 배은(裵垠)의 딸이다. 둘째 아들로, 형은 남계(藍溪) 박이문(朴而文)이다. 부인은 충주박씨 참판 박응복(朴應福)의 딸이다. 선대는 한양에서 살다가 6대조인 개성판윤 박가권(朴可權)이 새 왕조 조선에서 내린 벼슬을 거부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고조할아버지 사맹공(司猛公) 박예손(朴禮孫)이 성주에서 지금의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로 이주하였다.
[활동사항]
박이장(朴而章)[1547~1622]은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내고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지제교(知製敎),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좌랑에 이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1595년(선조 28) 이조정랑,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599년(선조 32)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있을 때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선조 34)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兼侍講院輔德), 승정원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 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선조 36)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지춘추관사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p>
[학문과 사상]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였고, 23세에 덕산(德山)에 있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1572년(선조 5)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28세인 1574년(선조 7)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때 소재로부터 정학(正學)을 취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을 으뜸가는 공부로 삼았으며, 『내암집(來庵集)』의 「문인록」과 「부음정중수계안(孚飮亭重修契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명, 소재, 내암을 사사(師事)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44세 때인 2월에 정구(鄭逑), 문위(文緯)와 더불어 마암(馬巖)에서 심경(心經)을 공부하였다.
[저술 및 작품]
15세에 맏형 박이문을 따라 산당(山堂)[박양좌의 별업(別業)]에서 독서하면서 「침명금명(枕銘衾銘)」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28세 때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중양회서(重陽會序)」를 지었다. 30세 때에는 『관혼촬요(冠婚撮要)』, 34세 때 봄에 『정서절요(程書節要)』, 36세 때 겨울에 『육경여해(六經蠡海)』를 저술하였다. 52세 때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원지(水原志)』를 지었고, 59세 때 『영해지(寧海志)』를 완성하였다.
61세 때 현재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이르러 한훤당 김굉필의 묘(墓)를 배알하고 「선세묘지(先世墓誌)」를 지었다. 70세 때 봄에 순천박씨 족보의 연원인 『승평세고(昇平世稿)』를 편집하였고, 황고(皇考) 복재공(復齋公)의 행장을 지었으며, 주서(朱書)를 읽고 「자경시(自警詩)」를 지었다. 73세 때에는 『심경요의』, 75세 때 봄에는 『상재만록』을 지었다. 시문집으로는 『용담집(龍潭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25년(인조 3) 문간공(文簡公) 조경(趙絅)이 행장을 지었으며, 1678년(숙종 4) 사림들은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을 모신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하였는데, 이는 그가 옛날 성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자손들이 지금의 산청군 단계리로 이거하여 부조묘로 받들고 그 마을 앞에 정사를 건립하여 이름을 용담(龍潭)이라고 하였다. 용담은 본래 박이장이 거처하던 고령의 마을 이름이었으나, 「용담정사기(龍潭精舍記)」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 거주하기도 하고 우거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678년(숙종 16) 합천의 회산사(檜山祠)가 만들어지고, 1726년(영조 2)에 신도비명이 세워졌다.
단계당 권씨(丹溪堂 權氏)
나의 7대 조모이시고 산청 단계마을
순천박씨 입향조이신 단계당 권씨 할머니에 대한 글이 있어 옮겨 왔다.
단계당 권씨(丹溪堂 權氏)
없어질 뻔 했던 집을 일으켜 세워, 그 후광이 대단한 여자 군자에 단계당 권씨가 있다.
단계당 권씨는 숙종13년에 단성고을 단계리 집에서 태어났다. 동계 권도의 증손녀로 태어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로 된다.
성주고을 성사동으로 시집을 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북 고령군 운수면 유동으로 된다. 순천박씨 수륜선생(박가권) 후예에 홍문관 부재학에 오른 용담선생(박이장)이 있다. 용담 증손에 성주(聖胄)가 있다. 단계당 권씨가 성주공의 며느리로 되었고, 홍원(弘遠)의 아내로 된 것이다.
단계당 나이가 열여덟에 남편의 맏형(수원)이 스물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수원의 아내 정씨가 어린 아들 형제를 키우다 그 어린 것들을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정씨가 남편을 잃고 4년 뒤에 자결한 것이다. 이때 단계당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시아버지를 잃었다.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단계당 자신과 남편 그리고 어린아이 뿐이었다.
그로부터 8년 뒤가 숙종44년 무술년이다. 마을에 괴질이 돌아 남편을 잃었고, 아이들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단계당 자신과 네살된 상제 하나 뿐이었다. 이 때 단계당 나이가 서른두 살이었다.
단계당은 외아들 상제를 등에 업고, 손에는 가보 교지보자기를 들고, 친정마을 단계리로 들어간 것이었다. 단계리에 집을 일으켜 살면서 외아들 상제를 보고 이르기를 <너는 배우기 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쓰라, 그리하여 너의 맏아버지 뒤를 이어야만 우리 집이 일어나게 된다>라고 하고는 "아름다운 말", "착한행실"이 담긴 글들을 배달글자로 옮겨서 아들 상제를 가르쳤다.
외아들 하나를 큰집으로 바쳤으니, 자기 뒤를 이어갈 아들이 없다.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그 마음이 곧 도심이다.
손자가 셋이 나서 이르기를 <둘째손자 문혁이는 내 뒤를 이을지다.>라고 했다. 단계당 나이 65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손자 둘은 큰집으로 바치고, 손자 하나만을 자기 앞으로 삼았다. 별세 년에 태어난 손자 주경(뒤에 이름을 문검으로.)이 훗날에 진사시에 올랐다.
진사 후예 윤현이 용담선생 봉사손으로 되어서 단계리에 용담정사를 일으키고
부조묘를 일으켜서, 용담선생을 불천위제사로 받들게 되었다.
용담으로 말하면, 합천고을 암교촌집에서 태어나, 그 뒤 문과에 올라 벼슬살이가 시작 되었다. 느즈막에 고령고을 유동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용담에게는 터 밭이 없는 셈이다.
본거지가 없던 선생의 터를 단계리로 옮기게 되어서, 이른바 순천박씨 단계파를 이룩한 셈이다.
이런 일은 참으로 드문 일로 치부된다. 단계당 부인을 두고 여중군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담선생 기틀을 만든 이가 단계당 권씨였다는 말이다. 단계당의 후광이 길이 뻗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