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기, 그리고 기껍게 계속하기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를 읽고
“외롭다”, 고 말한다.
외로운 느낌이 없다.
“외롭지 않다”, 고 말해본다.
조금 외로워진다.
가만히 있는다.
몹시 외롭다.
어쩌면 뱉는 순간 불확실해지고 마는 말. 말은 나의 외로움을 온전히 말하지 못했다.
언어뿐일까. 인간도, 인간이 꾸리는 삶도 참 모순덩어리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베르 까뮈가 〈부조리의 시론〉을 펼쳤던 것은.
존재의 부조리, 그중에도 언어의 부조리함에 대해 천착했던 또 한 사람의 작가가 있었다. 사뮈엘 베케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했든 결코 충분하지도 충분히 부족하지도 않았다
-《몰로이》
사뮈엘 베케트(1906~1989)는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단편소설과 희곡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를 작가로 인정받게 한 것은 희곡 작품들이다. 대표적 희곡으로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들 수 있겠고, 그 밖에 《Happy Days》, 《게임의 종말》, 《왔다 갔다》 《그때》 등 다수가 있다. 한편 장편소설을 비롯 시, 비평문, 라디오 드라마, 시나리오 같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난 것은ㅡ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ㅡ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였다. 그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무(無)이다. 왔다 갔지만,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의미한 인생을 의미 없어 보이는 말들의 나열과 반복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다스러운 한편 절제된 대화들. 그의 희곡 작품 대부분이 그랬다.
문득, 이런 쓸데없는 듯 쓸 데 있는 절제된 대화들은 어느 시점, 어느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 근원이 궁금해졌다. 장편 소설을 검색해보았다. 베케트의 수다가 “과잉과 포화를 통해 언어를 파괴하고 말들에 가해진 폭력을 통해 침묵을 얻어내려는 목적”이라는 철학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말처럼, 어쩌면 베케트의 희곡 속 절제된 언어 또한 과잉된 언어의 결과물이고, 그 과잉된 언어가 혹 호흡이 긴 장편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발간되기 전 소설들을 살펴보았다. 첫 장편 소설로는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이 있으나 사후에 출간되었으니, 1938년 영국에서 출간된 영어판 《머피》가 공식적인 첫 장편소설이 되는 셈이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하면서부터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 1951년에 장편 《몰로이》 《말론 죽다》를 프랑스에서 출간했다.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3부 연작이지만, 마지막 작품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에 쓰이고 출간되었기에 나는 《몰로이》와 《말론 죽다》에 보다 관심이 갔다. 세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쓰였기에 《고도를 기다리며》 속 절제된 언어들이 그 두 편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몰로이》를 택하게 된 것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일러 메타소설, 소설 자체에 대한 패러디라며 호평을 하였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니라 소설 쓰기에 대해 쓴 작품으로 소설의 전통적 형식, 즉 스토리, 섬세한 인물 묘사, 정확한 시공간, 논리적 전개 등 목적론적 글쓰기를 파괴해버린 초현실적이고 획기적인 작품이라 했다. 그 획기적 스타일이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메타소설이라 하니 작가로서의 언어, 표현에 대한 고찰이나 고뇌가 담겨 있을 듯해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 작품이 메타소설임을 짐작게 하는 것은 서두 부분이다. 화자는 일주일마다 자기에게 돈을 주고 원고를 가져가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 짓을 그만두고 싶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뭘 위해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글을 쓸 만큼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도 한다. 일주일마다 오면서 그 사람들은 전에 자기가 넘겼던 원고에 알 수 없는 표기들을 해서 되가져오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명색이 작가로서 일정 부분 공감이 되며 다음 전개에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뭐지?’. 아무리 고정된 소설의 틀을 깨어버린 것이라지만, 맥락 없고 지루하고 비약적이고 난해하기만 한 문장들…. 처음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났을 때를 기억나게도 했다. 읽기를 포기하고 밀쳐두기를 수차례.
심란한 마음에 바깥을 내다보다 생각에 빠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 그러다 화다닥 깨어나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쓸데없고 두서없고 맥락 없는 생각들. 밀쳐두었던 《몰로이》가 생각났다.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책을 집어 들고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내 생각의 흐름을 돌이켜보니 한결 읽기가 편안해졌다. 스토리나 구성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공간을 넘나든 글. 작가 초년 시절에 좋아했다던 초현실주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그림자가 엿보이기도 했다.
《몰로이》는 1인칭 시점 소설로, 1부는 주인공 ‘몰로이’가 어머니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2부는 그 몰로이를 찾아 떠나는 ‘모랑’이라는 사립 탐정의 여행 과정을 그리고 있다. 1,2부 모두 여정(旅程)을 묘사한 글인 셈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화자의 입을 통해서만 살아나는, 무생물 또는 배경물에 가깝다. 2부는 1부에 비해 어느 정도 스토리와 맥락이 있어 읽기에 좀 수월한 편이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은 여전해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몰로이에게 쓰기를 강요했던 ‘목소리’나 모랑에게 보고서를 쓰라 명령했던 ‘목소리’가 모두 주인공 내면의 소리 또는 분열된 자아이거나 대중, 독자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1,2부는 모두 결미가 서두로 되돌아오는 도돌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금 전 내 생각의 흐름과 같다고나 할까. 시작하고 돌아오고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몰로이》는 혼돈의 연속이다. 화자가 방금전 했던 말을 부인하는가 하면 알았고, 보았고, 들었던 것도 의심 또는 부정해버리거나 착각, 환상화해 버린다. 몰로이나 모랑이 경험한 모든 것이 불확실, 불가지(不可知)의 연속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결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는 것,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 뿐이다.
작품이란, 글쓰기란 대부분 허구요 허상일 수밖에 없다.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글쓰기인데, 그 기억 속에 있는 시간, 공간,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듯 확실하지도 질서정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케트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어떤 것인 양 말하는 것이다.(《와트Watt》)”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불확실한 것, 불가지한 것들을 근사치로 그럴듯하게 엮어내는 것이 글쓰기라는 얘기다.
《몰로이》의 또 다른 주제는 ‘실패’ 혹은 ‘실종’, ‘무화(無化)’이다. 몰로이는 어머니 집을 찾아가는 데 실패하고 모랑은 몰로이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소설의 서두에서 몰로이는 이미 어머니 집에 도착해 살고 있었고, 누가 자기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다. 또 모랑은 몰로이를 찾기 직전에 명령에 의해 출발했던 곳, 집으로 되돌와버린다. 그리고 서두에 서술했던 것을 부정하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결과적으로 몰로이의 어머니 집 찾기 여정과 모랑의 몰로이 찾기 여정은 실종, 무화되고 만다. 쓰인 흔적은 남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몰로이와 모랑이 겪은 실패는 그들의 정체성 찾기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정의 목적이 결국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 찾기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로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헛갈려 사용하는가 하면, 모랑은 점점 몰로이를 닮아간다. 결과적으로 몰로이의 어머니화, 모랑의 몰로이화와 같은 혼돈만 남는다. 이런 정체성 모호의 원인을 번역가 김경의는 ‘상호주체성’ 때문으로 본다. 주체는 이미 그 내부에 자신이 기억할 수 없는 외부적 존재와의 관련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글이 상호텍스트성을 가지듯,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느 부분 타인화가 되어 간다는 점에서 보면 수긍이 가는 해석이다. 몰로이와 모랑의 정체성 찾기 실패는 베케트 자신의 정체성 찾기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베케트는 자기 자신을 극도로 고통스런 상황으로까지 몰아넣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정체성에 대한, 존재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감히 실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패는 예술가의 세계요, 실패로부터 움츠리는 것은 유기이다.”
앙드레 뒤트와ㅡ유감스럽게도 신분을 파악하지 못함ㅡ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왔다는 이 말은. 작가에게 있어 실패는 피해야 할 경험이 아니라 창작의 필수 과정임을 깨우쳐준다. 실패할지언정 작가는 쓰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몰로이와 모랑의 실패는 그 경우의 수를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몰로이》에서 베케트가 보여주고자 한 또 다른 주제는 ‘언어의 한계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베케트는 침묵하기 위해 말을 쏟아놓는다고 한다. 언어가 결코 진실을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는 것이다. ‘뭘 하는지,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이 형벌보다 더 혹독한’ 글쓰기. 그래서 그는 ‘일단 더럽히고 깨끗이 쓸어버리는’ 쪽을 택한다.
나는 그 희망들을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나서 뭉게뭉게 일어나 반짝이게 하고 매혹적인 수많은
장식으로 꾸며지게 놔두었다가, 그다음에 혐오의 빗자루를 크게 휘둘러 쓸어버리고 내 안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것들이 더럽히려고 했던 그 빈 공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몰로이》)
모랑이 “자정이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고 서술했던 서두를 “그때는 자정이 아니었다. 비가 오고 있지 않았다.”는 부정으로 끝맺음해버린 것도 이제껏 기술했던 말들이 헛소리였음을, 그래서 깨끗이 지워버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지이다. 하지만 침묵은 이내 말로 포화된다. 일말의 희망에 기대어 다시 쏟아 내보지만 헛수고다. 헛수고임을 알면서도 기댈 도리밖에 없는 언어라는 존재. 이것이 언어의 한계성이고 부조리다.
한편 베케트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등장인물을 불구화 혹은 부자유화한다. 이런 시도는 《몰로이》에서 싹이 트고 있었다. 몰로이는 목발을 짚는 불구자이고, 정상이었던 모랑 또한 후반부에선 몰로이처럼 목발을 짚는다. 이후 희곡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을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 《Happy Days》에서는 여주인공 ‘위니’를 처음에는 허리, 마침내는 목까지 흙에 파묻히게 하는가 하면, 《게임의 종말》에서는 주인공 ‘함’을 하반신 마비에 장님으로, ‘클로브’를 다리 불구로 설정하고 ‘함’의 부모는 항아리 속에 가두어버린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는 주인공을 아예 사지가 절단되어 몸통만 남은, 무생물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또한 ‘포조’와 ‘럭키’를 장님화, 벙어리화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오고 말 육신의 노화를 각성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여의 인간 혹은 부조리함으로 인해 비정상화되어가는 삶을 은유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조금만 더 가면 장님이 될 것 같다. (…) 또한 벙어리가 되고 소리들은 점점 약해진다. (《몰로이》)
아이러니하게도 베케트가 언어 선택을 번복하곤 했던 것도 ‘결핍’ 때문이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가 프랑스어가 익숙해지자 다시 낯설어진 영어를 선택한다. 평론가들은 그의 이런 번복을 ‘원시적인 언어’로 역행하라 한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미학가, 사상가1668~1744)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는데, 1929년에 쓴 그의 첫 비평문이 〈단테…브루노. 비코‥조이스(Dante…Bruno. Vico‥Joyce)〉인 점으로 보면 그런 추측도 가능해 보인다. 익숙한 언어가 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결핍된 언어,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의 순수함을 지켜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그는 영어 문장에 프랑스어식 표현을, 프랑스어 문장에 영어식 표현을 쓰는 의식적인 오류를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위를 혹자는 언어의 유희로 보기도 하지만, 그가 결핍을 부정적 요소로만 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작품 속 인물들을 불구로 만든 것도 결핍이 주는 순수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핍되고 모순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말하고자 하는 바도 온전히 말해지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을수록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그럼에도 계속해야 하는 글쓰기라는 작업. 작가라는 직업. 그럼에도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계속할 것이다.”(《이름 붙일 수 없는자》).
소설 《몰로이》는 소설 쓰기를 패러디하고 있지만, 우리 삶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들의 주제가 되는, 삶의 불확실성, 무의미함, 부조리, 무 등이 이 작품 속에 잉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쓰고 지우는 일처럼 삶은 일상의 반복이다. 하지만, 불확실함에도 확신을 향한 쓸데없는 노력을 반복하고,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 없는 말, 의미 없는 행동을 되풀이하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무로, 본래로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이 무모한 반복 행위를 계속해야 하고, 계속할 수밖에 없고, 또 계속할 것이다. 목까지 파묻힌 극한의 부자유 속에서도, 하여 곧 종말이 올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보이지도 않는 상대의 말 한마디에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는 미래완료형 긍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Happy Days》의 ‘위니’처럼, 무가 되는 그 순간까지 생존이라는 게임을 지속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한다.
알랭 바디유는 베케트의 문학에서 부조리와 절망과 허무만이 아닌, 어쩔 도리 없는 상황을 견뎌내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진리에의 희망’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나는 베케트가 부정적 사고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욕망’이나 ‘희망’ 때문이라기보다는, 회의(懷疑)나 관조(觀照)를 넘어선 초월적 사고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상성(日常性)에 대한 긍정과 수용, 그리고 존중이다. 베케트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드러나 있는 끝없는 ‘다시 시작하기’와 ‘계속하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계속하자. 마치 모든 것이 한결같은 권태에서 솟아난 것처럼 해보자. 채워보자. 완전히 까맣게 될 때까지.”
-《몰로이》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며》 속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목메게 기다리고 있던 ‘고도’는 이런 무한 반복 행위를 끝나게 해줄 죽음, 무(無)가 아니었을지. 그리고 그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가 정의한 ‘폐허’처럼 ‘영원한 사물들의 요지부동의 혼란’ 같은 게 아니었을지.
“그것은 끝난 세계이고, 그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그 종말이며, 그 세계가 시작된 것은 그것이 끝나면서이다.”라 한 몰로이의 독백처럼, 베케트의 무는 영원한 ‘다시 시작하기’를 품고 있는 카오스, 혹은 태극(太極)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天下萬物 生於有 有生於無)-노자 《도덕경》
베케트의 무한 반복 의지는 이런 우주 만물의 순환 이치에 순응하고, 기껍게 그리고 충실하게 도로(徒勞)의 과정을 치러내려는 수행(修行) 같은 게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