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2
한반도의 통일과 분단 과정에 대한 일 고찰
나종혁
진로연구소 소장
21세기 한반도의 통일 및 분단 과정은 독일식 경제 흡수 통일과 베트남식 군사 흡수 통일,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사례들에 기초한 통일 과정이 대비되거나 적용되어 왔다. 한국의 통일은 독일식 통일에 근거할 것이 당연하고, 북한의 통일은 베트남식 통일에 근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도 베트남식 통일인가는 확실치 않다. 북한의 경제력이나 국력 그리고 군사력 등이 베트남식 통일에 이르지는 못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독일과 베트남식 남북한 통일 방식은 한반도의 독특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하나의 유일한 통일 방식으로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이후의 경제 회복이 더디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는 추세이고, 코로나 이후의 미래도 무엇이라고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확실성이나 모호성으로 특징지어 지는 시대적 전환기에 한반도의 통일과 분단 과정에 대해서 한 가지 고찰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
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은 우선적으로, 1953년 7월 27일 한국전 휴전 이래 남북한의 평화 체제 유지, 1995년 3월 9일~2006년 5월 31일 사이 실시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대북한 경수로 지원사업, 1998년 11월 18일~2008년 7월 13일 사이 실시된 현대그룹 주관 금강산 관광 프로그램, 2004년 12월 15일~2016년 2월 10일 사이 실시된 한국의 중소기업 공동 주관 개성공업지구 프로그램이 북한의 통일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대북한 경수로 지원 사업은 함경남도 신포 금호지구에 경수로형 원자로 발전소를 건립하려 했지만, 미국에서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개발 중이라는 보고서가 발표되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북한의 핵실험으로 추정되는 실험들이 진행되면서 경수로 사업이 중단되었다. 개성공업지구 프로그램은 군사적 분단 과정과 중복되면서 개성지구가 남북한의 군사분계선에 근접하거나 군사분계선을 넘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중단되었다.
케도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 개성공단 사업 등이 이렇게 종료되면서, 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은 군사적 분단 과정으로 접어들었다. 1953년 한국전 이래로 북한의 군사적 분단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이 2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1999년 6월 북한군 경비정이 서해 이남 연평도 부근에 침범하여 한국군 해군 고속정과 충돌하고 사격을 가했다.
3년 후인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당시 북한군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한국 해군 고속정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2002년 6월 사건은 서해교전이라고도 불린다.
2009년 11월 10일 서해 북방한계선 이남 대청도 부근에서 북한군 해군 경비정과 한국군 해군 고속정 사이에서 북한군 경비정의 서해 이남 침범과 이어지는 남북한 해군 교전 사격이 있었다. 이 사건은 제3차 서해교전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부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 천안함이 북한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당시는 키리졸브-독수리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진행되던 때였다. 천안함 침몰은 애초에 원인 불명이었으나, 2010년 4월 4일 한국 정부 민군 합동조사단에 의해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군의 어뢰 공격이라고 발표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으로, 북한군이 서해 이남 대연평도에 포격을 가했고, 한국 해병대가 대응 반격했다. 한국전 휴전 이래 한국의 영토 내 민간인을 공격한 북한군의 최초의 도발이었다. 11월 23일 오전 한국 해병대가 대규모 사격 훈련을 했으며, 훈련 종료 10분 후에 북한군이 대규모 포격전을 가했다. 한국 해병대는 이에 대해 대응 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을 북한군이 한국군에 끌려가는 것으로부터 북한군이 한국군을 리드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분석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 남측에서는 전쟁 도발 행위라는 비난이 일었다. 11월 28일 서해상 한미 연합 훈련이 최대의 규모로 4일 동안 시행되었다. 12월 20일 연평도 부근 서해상에서 한국군의 단독 포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훈련 실시 전부터 논쟁이 일었고, 훈련 후에도 핵전쟁의 우려가 일었다. 2010년 12월을 기점으로 북한군은 도발 책임은 남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2020년 9월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이 있었다. 한국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이 소연평도 부근 해역에서 신발을 선박에 남기고 실종되었다가, 북한 등산곶 해역에서 북한군의 집중 사격으로 불에 탄 채로 사망했다. 공무원이 타고 있던 무궁화호에 실종자의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가 남겨져 있었으며, 가족들은 월북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사실상 무궁화호 선상에서 실종되어 실종 신고가 있었고, 북한측 선박이 실종자를 접촉했으며, 북한군 단속정이 원거리 사격을 가했으며, 방독면과 방호복을 착용한 북한군이 실종자 시체에 접근해 기름을 뿌리고 불태웠다고 추정되었다. 북측은 황해도 강령군 금동리 연안으로 북측 영해로 실종자가 부유물을 타고 침입했으며, 북측 선박의 신고로 북한군 경비정이 접근해 신분 확인을 요구했으나 한국인 모 씨라고만 말하고 답변을 거부해 2발의 공포탄을 쏘고, 더 접근해 실종자에게 10여 발의 총격을 가했으며, 10여 미터 접근해 확인 끝에 실종자는 부유물 부근에 없었으며, 많은 혈흔이 발견되었고, 부유물은 소각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최종 월북 실패로 인한 피격 사건으로 종료되었다. 공무원 월북 시도에 대해서 월북 가능성이 없다는 가족 측 주장과 정황상 월북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대립되었다.
위와 같은 한국전 이래 근래 21세기 2000년 이후의 남북한 통일과 분단 과정을 북한의 분단 과정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논구의 결과로 북한은 케도에서 개성지구에 이르는 통일 사업을 종료하고, 통일에 대한 요구를 군사적 수단으로 제압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의 훈련에 대한 대응 조치로서 도발 또는 군사적 조치를 가했으며, 북한군의 도발이 아니라 한국군의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개성지구까지 성공적으로 남북한 군사분계선을 획정(劃定)하고 분단했으며, 그 이후의 한국의 접근은 군사적으로 조치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측 공무원의 월북 추정 피격 사건에 대해서는 9•19 군사합의 위반이 아니며, 북한군 규정에 따른 조치라는 입장을 표했다.
이후로, 남북한 관계는 문재인 정권 당시 남북대화와 남북 교류 무드가 있었으며, 남북한 인사의 방북과 방남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고, 더 이상의 교류 시도는 코로나의 발발로 전면 중단되었다.
향후의 관심사는 코로나 이후로 남북한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거나 진행될 것인가에 있다. 아무튼,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업지구 사업은 거의 동시에 종료되었으며, 더 이상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 안타까움이 일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은 몇 가지 남북한 합작 사업을 통한 독립적인 통일 도모와 그 이후의 군사적 분단 조치 및 군사분계선 획정 조치로 정의된다.
한국의 통일과 분단 과정
한국의 통일과 분단 과정은 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과 일치해서 동시적으로 진행되거나, 북한의 통일 및 분단 과정이 종료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통일과 분단 과정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지도 모른다. 북한의 통일 분단 과정이 독립적 성격으로 진행되었다면, 한국의 통일 분단 과정은 유연한 성격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분계선 획정 이후에도, 중소를 포함한 주변국들의 간섭과 개입이 지속되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한국은 그러한 간섭과 개입에 귀기울이지 않고, 미국과 일본 등 서방 세계를 기준으로 유연한 세계화와 영원(永遠)한 한반도를 위한 평화 회복과 복원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명박 정권의 남북한 분단 이후로,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에서 남북한의 관계 정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양 정권은 결코 북한식의 독립적인 분단과 군사 관계를 좌시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남북한 분단 관계의 단절적 요소를 회복하거나 복원하는 데 치중했으며, 또한 군사적 충돌보다는 남북대화의 회복과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남북한 관계의 회복과 복원 노력은 계속되어, 윤석열 정권에서는 자유(自由)의 회복과 복원을 국가적 목표로 삼고 있다. 자유는 멀리 해외나 멀리 지방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여기 이곳에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의 회복과 복원, 대화의 복원, 자유의 복원 노력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단절의 대가, 대화의 대가, 자유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단절과 대화와 자유의 대가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보고, 이러저리 헤아리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단절과 대화와 자유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능력과 노력이 중요하다. 아무리, 남북한 관계의 단절을 회복하고 대화와 자유를 복원하려 해도, 그것이 재정적이거나 금전적으로 보조되거나 보상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러한 복원이 가능하려면 실질적인 조치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남북한 단절 이후 자유 회복과 대화의 실질적 복원이라는 오랜 과정이 소요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통일 분단 과정은 사회적 이해도의 개선과 사회적 불의의 일소, 그리고 남북 관계의 신뢰도 회복과 평화를 위한 전 시민들의 연대적 합의 및 실천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간단하게, 남북한의 통일과 분단 과정을 검토해 보았다. 현 단계에서 남북한 관계는 정신적 분단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성의 회복이 선행되거나 선결되어야 한다. 또한, 남북한 관계는 통일과 분단에 대한 욕구를 청산하는 관계성의 회복으로 이행되거나 수행되어야 한다. 그다음에 자유가 가능한 것이며, 자유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다. 자유가 가능한 이후에야 비로소 대화의 복원도 가능할 것이다. 단절의 회복 절차가 있어야 하고, 자유가 가까이에서 복원되어야 하며, 그 모든 것들은 대화를 복원할 것인지 복원하지 않을 것인지로 판단되고 실행된다.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나 상태의 조건에서는 관계 회복도, 자유 복원도 불가능하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남북한 관계는 남다르게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역시, 남다른 방식으로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가 실현되고, 자유가 복원되고, 대화가 가능케 되기를 기대한다. 본 글은 남북한 통일 분단 관계에 대한 소고로서, 남북한 관계 회복과 재정립을 위한 문제 제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관계 재정립을 위해서는 남북 간의, 국민 간의 이해가 아주 많이 필요하고, 그로써 사회적 이해도가 개선되고 남북 평화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남북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제까지의 남북 관계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단정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한반도의 역사(歷史)라는 기차가 선로를 유유히 달려가거나 달려온다고 할 수 있다. 울어도 웃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똑바로 앉아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을 텐가, 자동차를 몰고 밖으로 나갈 것인가. 지금이 이론의 시대인가, 실천의 시대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남북한 관계 회복의 바로미터이다. <끝> <2024년 6월 13일>
* 참고 자료: 「연평해전」, 『민족백과』; 「천안함 파격 사건」, 『다음백과』; 「연평도 포격전」, 『위키백과』;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