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8-2편] 고통을 받아들이면 부활한다.(aka.레벨업) |
이름지어진 세계는 파편화되어있다.(ft.연기맵그리기) | 번뇌를 공감하라 | 공감 = 자비(51:40)
0:06
우리가 본래 의식인데 미혹당해서 현상계로 떨어져서
현상계에서 '뭐가, 무엇이 나인가?' 하다가
몸을 나라고 동일시 해서 이제 에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에고는 뭘 하느냐면, 에고가 뭘 제일 잘하느냐 하면,
보세요, 이 세상에서 몸을 나라고 하면 그 몸을 나라고 하는 순간
몸 아닌 것은 남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분별이 벌어진다.
동일시의 가장 큰 핵심은 부분을 동일시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나라고 하면 나 아닌 것이 생긴다.
죽비가 있으면 죽비를 죽비라고 하면
나머지는 죽비가 안 되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동일시는 분별을 일으킨다.
분별은 언어를 낳는다. 이 말도 이해되지요?
지금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분별은 항상 '나'가 생기고 '남'이 생기고
그리고 남을 또 분별해서 좋은 것, 나쁜 것, 이렇게 계속 분별해 나가면,
그래서 가장 하여튼 가장 기본적인 것이 우리 같으면, 수행하는 사람한테는
수행하는 사람들 같으면 예를 들어서, 누가 조금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누가 못했나 이런 식으로 또 분별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좀 많이 한 사람들은 수자라고 부르고 그리고 수행 못한
사람은 중생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중생하고 수자를 또 분별한다.
수행자들은 그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모든 것이 이렇게 에고가 생기는 순간부터 에고는 분별을 하고
그리고 재밌는 것은 한 번 분별하는 것을 에고는 이름을 붙여요.
그래서 선입견을 만들어 버려. 어떤 사람, 어떤 사람.
그래서 지금 여기서도 에고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나름대로 다 이렇게 이렇게 관념을 지금 씌워 놓았다.
사람만 그런게 아니고 뭐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러시아 하면
관념이 생겼지 않나요? 우크라이나 하면 생겨 있고,
저 같으면 뭐 스페인 하면 좀 구체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 일본, 중국, 하여튼 모든 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름이 이름으로 안 끝나고 그 밑에 고정관념이 주렁주렁
이렇게 붙는다 이거예요.
분별을 하고 어느 세계를 만드는 것이 에고의 특징이다.
그리고 분별하면, 분별해서 안 끝나지요.
분별해서 안 끝나고, 좋다 나쁘다가 딱 달라붙는다.
좋다 나쁘다, 사랑하고 미워한다, 또 가지고 싶다, 또 저거는 안 봤으면
좋겠다, 이제 그것이 벌어진다 이거예요. 여러분 그렇지요?
그런 걸 가지고 에고는 먹고 산다. 에고가 그걸 통해서 자기가 존재한다.
그게 지금 우리가 지금 완전히 그러고 있다 하는 거 인정을 해야 해요.
인정 안 되나요? 여러분 안 그러세요? (답 - 그러지요.)
그래서 이 분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에서
정말 분별을 극복하는 거는 이번 장에, 현상에서 벗어나기에서
현상의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분별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가장
핵심 기재이기 때문에 톨레가 여기서 좀 이야기를 많이 해놨어요.
그게 뭐냐면, 현실 수용이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 말은, 여러분 일상에서의 수행을 어떻게 합니까 할 때,
일상에서는 현실 수용이 정말 이게 수행의 가장 핵심이에요.
4:23
현실 수용은 뭐에요?
현실 수용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인연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래서 최근에 인사동 선방에서, 안방에서 이걸로 해가지고
같이 이제 참선을 하잖아요. 한 번에 한 4~50명 들어오시던데,
그러면 그렇게 일상에서 앉아보면 그때 이제 각자 안방에
딱 앉으면 바깥의 인연은 조용해졌죠.
그렇잖아요?
참선하려고 혼자 딱 앉으면 그러면 이제 바깥의 인연은
조용해지는데 안에 인연은 더 시끄러워지거든. 혼자 앉으면.
그러니까 지금 예를 들어서 수행자가 좌선을 딱 하면 훨씬 더
생각과 또 혼침, 졸림이 더 많이 일어난다. 오케이?
예,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요?
그래서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오다가 이렇게 질의응답이 있고 하다가
"최근에 최근에 이제 혼침이 많습니다.
어떻게 앉았다 하면 하면 좁니까?" 이렇게.
"그래서 또 멀쩡하다가도 앉으면 또 잡생각이 또 이렇게 많이 납니까?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는 질의응답이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분별해서 분별의 습관이,
앉으면 그 습관에 의해서 분별했던 것이 막 일어난다.
그렇게 우리가 짐작이 되잖아요?
그럴 때 답은 뭐냐면 현실 수용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번뇌를 완전히 없애 가지고
완전히 멸진에 들어간다든지 또 혼침을 완전히 없애 가지고
아주 깨어 있는 걸 강조한다든지 그걸 목표로 참선을, 좌선을 한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선정삼매를 추구한다. 오케이?
그런데 현실은 안 그렇다.
그래서 아 이거 제발 좀 1시간 참선하면서 1시간 동안 좀 오롯하게
깨어 있고 싶은데 너무나 뭐 소란해서 힘들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라는 이제 질문을 당연히 하겠죠?
그래서 그때 이제 드린 말씀이 뭐냐면 번뇌하고 또 졸리는 거 혼침,
여기 수행자한테서 요 두 가지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것이 현실이다 이거예요. 현실이다.
그러면 지금 분별을 하는 분별에 따라가면 그건 나쁘니까
번뇌하고 졸리는 것은 나쁘니까 없어야 되고
오롯하게 깨어있는 선정삼매는 좋으니까 그거를 추구해야 되고,
여기에 그대로 지금 에고가 일으키고 있는 그 에고의 전략이
그토록 수행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거다.
이 자각이 생겨야 된다는 거죠.
7:46
그래서 여러분, 놀랍게도 참선하면서 번뇌랑 싸우는 것이 참선이죠.
안 그래요? 아니다 이거죠. 참선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참선은 있는 대로 찾아오는, 이 현실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인연이
나쁘다고 해서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된다 이거죠.
좋은 거라고 해서 추구하지 말고.
그래서 번뇌는 오는 대로 다 받아주는 거에요.
잘 놀다 가라고, 그리고 나의 터에서.
제가 비유를 그렇게 했거든요. 호텔 주인이라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인생은 호텔이고, 나는 호텔 주인이라고.
호텔 주인이 조는 사이에 에고가 지배인인 에고가, 에고는 제 마음에
드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마음이 안 드는 사람은 자꾸 거절해.
깨어 있는 것만 받아들이려고 하고 이런 번뇌는 쫓아내는 거에요.
근데 손님들은 그러면 약이 올라서 자꾸 자꾸 더 와.
그게 지금 보통 저지르는 실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주인이라면 에고한테 맡기지 말고,
지배인한테 맡기지 말고,
주인이 깨어서 있으면 주인 입장에서는 손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아 그래야 돈을 벌지. 인생이 얼마나 풍요롭게 될까요?
내 에고는 딱 자기 좋은 것만 있어 가지고 그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거죠.
그래서 주인이 깨어서 번뇌도 받아들이고 혼침도 받아들이고.
혼침도 수행하다가 깜빡깜빡 졸면 얼마나 개운한지 몰라요, 솔직히 말해서.
한 번씩 탁 졸 때 흰 줄이 쫙 지나가거든요. 조용하면서 졸아보세요.
흰 줄이 착 지나가면서 딱 알아요.
한 생의 업이 녹는구나. 그 깜빡 조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맑아지는지 모르거든요, 실제로.
그러니까 막 안 졸려고 막 애쓰고 또 존다고 막 물리치고 싸우려고 하면
그러면 완전히 거꾸로 하는 거에요. 에고에 놀아나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 내가 호텔 집의 주인이라면 이 손님도 받아들이고
저 손님도 받아들여 가지고 풍부하게, 그런 말 있잖아요.
예전에 도둑놈을 사랑방에, 옛날에 어떤 큰 부자가 사랑방에 모든 사람을
열어놓고 다 받아들여서 이렇게 잘 대접을 했더니 그중에 도둑놈도 있었고
뭐도 있었고 뭐 그랬거든요.
근데 이 주인이 무슨 봉변을 당해 가지고, 유명한 고사에요.
그 희귀한 담비의 털을 도둑맞은 거에요.
그걸 이제 국가건데 자기가 가지고 보관하고 있다가 그걸 이제
도적 맞아 가지고 위기에 처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소식을 듣고 그 와서 놀고 먹던 사랑방의 손님 중에서
또 귀신 같은 도둑이 있어 가지고 도로 또 훔쳐온 거에요.
그리고 뭐 하여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툭 나타나 가지고
일을 처리해 주는,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그 나라에 재상까지 올라가거든요.
유명한 고사에요. 중국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손님을 좋은 손님만 받아가지고는 클 수가 없는 거에요.
이런 손님, 저런 손님 다 우리가 참선할 때 딱 앉으면 온갖 손님들이 오는 거에요.
별 생각을 다 나지 않나요? 진짜 별의별 생각이 다 나지 않나요?
그것들을 다 물리치지 말고 받아들여 주는 거죠.
그러면 걔네들이 대접을 잘하면 흔적 없이 싹싹 또 가거든요.
그래서 지금 현실 수용이 지금 우리가 좌선하는 입장에 비유해서
설명을 했는데 좌선할 때 그렇게 찾아오는 것처럼 이 바깥 세계는
또 바깥 세계 또 온갖 인연이 또 얼마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다 찾아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굳이 좋은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12:07
그런 부처님 설화에도 있잖아요.
어느 집에 똑똑 하니까 문을 여니까 절세미녀가, 흰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나타나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해서, 늘 공덕녀예요, 공덕녀.
공덕녀가 인도에서 이름이 뭐지? 그 지금 인도의 최고 갑부 이름이 그 이름이에요.
인도에서는 공덕녀라고 번역을 했는데 공덕녀가 아주 절세미녀에요.
그리고 그 사람만 나타나면 온갖 행운과 재물이 그저 쏟아지는 거에요.
그래서 얼른 모셨다고, 조금 지나니까 또 똑똑한데 열어보니까
까만 옷을 입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그래서
기겁을 하고 이 사람만 오면 나쁜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흑암녀라고 그래요.
놀래가지고 안 된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가 조금 전에 한 명 들어가지
않았느냐고, 누나라고 누나, 우리 둘이는 항상 같이 다닌다고.
거절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 누나가 나온다고.
그렇게 얘기한 거에요.
이것은 인도에 있는 하나의 설화인데,
항상 같이 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자기한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이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 따라온다 이거에요.
항상 같이 온다. 따라온다.
아무튼 여러분, 제가 지금 쉽게 현실 수용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게 실제로는 진짜 어려운 거에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런 수행, 저런 수행보다 앉아서 뭘 하고
하는 것보다 솔직히, 정말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좋은 일 나쁜 일들을
내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러분 지금 이 순간밖에 없잖아요.
지금 이 순간이 그 모양으로 나온 거잖아요.
근데 모양으로 나온 세계는 항상 공덕녀와 흑암녀가 같이 있는 거에요.
그게 법칙이에요. 현상의 법칙, 현상은 상대적이에요.
그러니까 쪽 빼먹을 수 없어, 한 쪽만.
받아 들여야지 전체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항상 분별의 습관을, 분별을 이기려면 분별은 전체를 나누어서
좋다 나쁘다 해가지고 한 쪽만 피하는 거잖아요.
요 습관을 이기려면 다 받아들여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분별심을 내가 약화시키려면, 나한테 있는 분별심을 약화시키려면
구분해서 한 쪽은 받아들이고 한 쪽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그것이 분별력을 기른다.
그럼 수행이라는 것은 정말로 싫은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좋은 것은
너무 쫒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것의 이름이 이상이고
싫은 것의 이름이 현실이 된 거에요, 지금은.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이상을 추구하고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무시하는, 희생시키는,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게 많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래서 이 현실을 수용한다 이 말은 진짜 진검 승부의 수행이에요.
그래서 그 사실은 제가 유튜브에서 하도 좋은 영상을 봐가지고
오늘 혹시 여건이 되면 빨리 수업 마치고 같이 보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럴 시간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 유튜브에서 뭐라고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지금 8번에서 고통의 의미예요.
고통의 의미가 뭐냐면 고통의 의미, 인생에서 고통의 의미,
모든 인간이 고통을 거절하는 거에요. 고통이 흑암녀에요.
고통의 의미는 뭐냐면 거절하는 그 습관을 고쳐주려고.
인생에서 고통이 왜 찾아오는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려면, 우리가 성숙해지려면
전체를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래야 전체하고 하나가 되는데
우리들은 좁아 터져 가지고 좋다 나쁘다가 너무 분명해서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데
싫은 것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통이라는 거에요.
13:46
분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문제에서 정말 분별을 극복하는 거는
이번 장의 현상에서 벗어나기에서,
현상의 꿈에서 벗어나기에서 분별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가장 핵심 기재이기 때문에 톨레가 여기서 좀 이야기를 많이 해놨어요.
그게 뭐냐면, 현실 수용이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 말은 여러분 일상에서의 수행을 어떻게 합니까? 할 때,
일상에서는 현실 수용이 정말 이게 수행의 가장 핵심이에요.
현실 수용은 뭐에요?
현실 수용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인연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16:43
인생에서 고통이 왜 찾아오는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려면, 우리가 성숙해지려면
전체를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래야 전체하고 하나가 되는데 우리들은 좁아 터져 가지고
좋다 나쁘다가 너무 분명해서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데
싫은 것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의 고통이 찾아오는 의미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서
이 전체가 되는 깨달음이 일어나는 그것을 우리한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고통이 찾아온다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한 번, 우리가 한 번 봤잖아요.
그러니까 그 죽음에 이르는 고통일지라도 받아들였을 때
부활이라고 하는, 부활의 의미는 전체로서 부활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부분을 우리가 거절하는 그 못된 분별심,
이것이 치유되는 핵심은 고통의 수용이에요.
왜 우리가 현실을 싫어하는가?
현실에는 고통이 있어서 싫어하는 거에요.
지금 만약에 우리가 진짜로 진지하게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케이 하고 한 번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분별이 사라지고 항상 전체를 품을 수 있는 그런 폭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지금 분별이 현실 수용이다, 할 때
이 현실을 수용하는데 현실의 핵심은 고통인 거에요.
근데 왜 고통이 찾아오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을 물리치면 좁아터지고
받아들이면 우리가 부활하는 이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고통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 그 고통의 의미를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되면
정말 깊은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분별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게 좋든 싫든 현실을 거절하지 않고 수용을.
그런데 어려워요. 현실 수용은 진짜 어려워요.
그래서 하는 말이, 재밌게 제가 이제 같이 보려고 하는 영상에서,
젊은 사람들은 게임을 하나 봐요.
그래서 게임 할 때 보면 레벨업을 하잖아요.
단계, 단계 올라가는데 우리 인생이 게임 같은 거다 이거예요.
우리 지금 게임 하러 왔다. 왜? 레벨업을 하려고.
그런데 이 레벨에서 한 레벨에서 다음 더 높은 레벨로 레벨업을 할 때는
항상 그 레벨에서 그 차원에서 제일 막강한 적이 나타났는데
그 ‘보스몹’이라고 한다. 그랬네요. '보스몹'이라고.
나이 든 사람은 모르죠. 젊은 사람들은 다 알아요.
‘보스몹’이라고 하는 악당이 나타나서 그걸 물리쳐야만이
그 다음 단계로 지나가 올라가는 거에요.
근데 그 '보스몹'이 지금 우리가 인생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미운 놈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화상이 지금 평생 동안 싸우고 있는,
이 배우자가 '보스몹'이라는 거에요.
왜 나타났는가, 왜 그렇게 지어졌는가?
내가 그 사람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한 번 이겨보는가.
그 사람을 한 번 진짜 지혜롭게 받아들여 보는가.
그걸 통해서 내가 레벨업이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하는
이야기는 알고 보면 선택해서 왔다는 거에요.
그런 환경을 게임 하려고 그리고 또 그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 우리는 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의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지지고 볶고 고통해도 실수는 아니래요.
현상계에서 그럴 뿐인 거지, 그것도 착각인 거지
실제로는 물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유롭게 게임한다는 거에요.
실제로 게임 내용은 다르잖아요. 그죠?
게임 밖의 인간하고 게임 속의 내용의 세계하고는 다르잖아요.
그거랑 같은 거에요 사실은.
근데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게임 하러,
게임 세상에서 들어온 거야.
왜 고통이 있는가? 성장하려고.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음 단계로 레벨업을 해야
고통을 받아들이는 게 사실은 수행에서의 최고 중요한 점이에요.
제일 어려운 점이기도 해요. 상황 이해되세요?
그래서 한 번 봅시다.
톨레가 여기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 하꾸인 선사,
학은이라고 일본의 18세기쯤 오래 되지 않아요.
근데 지금 일본의 선불교는 하꾸인 선사가 만들어 놓은 거에요.
그리고 하나 하나 공안을 풀어가는 방식도 하꾸인이 확립해 놓은 거에요.
지금 일본의 임재종의 모든 수행의 토대는 학은 선사에요. 한자로는.
하꾸인이 이제 있는데 그 하꾸인에 대한 많은 일화가 남아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지금, 마을 처녀가 애를 낳아 가지고, 추궁을 당해 가지고,
누구 애냐 하니까 하꾸인 스님이라고 해가지고 부모가 화가 나서
그 애를 맡겼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가 하고 받아들였다는 거에요. 그러다가 또 그 다음에
오면 또 그런가 하고 있는 대로 현실을 물리치지 않고.
기가 막힌 거죠. 자기는 아무 상관 없는데,
근데 그 처녀가 두려워서 모면하려고.
그러다 나중에 이제 진짜 애기 아빠가 나타나서 그래서 결혼시키면서
애기를 찾아갈 때 또 그런가 하고 그냥 내줬다는 거 아니에요.
그 사이에 이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가 현실을 수용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근데 정말 수행자라면 그렇게 한다는 거죠.
이게 수행이라는 거죠.
그래서 지금 알고 있는 거 하고 무슨 선정을 경험한 거나 그런 게 아니고
그 약하고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내가 현실 수용하는 가의 문제,
현실에서 내가 진짜로 하는가,
이 수행의 힘이 현실로 드러나는 가의 문제에요.
그게 훨씬 백 배 천 배 더 중요하다.
이제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보면서 결국 그런가 앞에는
그 크리슈나무르티 이야기가 나오면서 한 줄만 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하지 않는다. 앞에요.
그 중간에 보면
어느 날 크리슈나무르티가 정색을 하고 말을 했는데
무슨 말했느냐, 저한테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비밀입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인다, 이겁니다.
여기에 비밀이라는 거에요. 수행의 끝이 이거예요.
여러분,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게 자비에요.
자비도 사랑이나 자비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게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게 자비이고 그게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는다.
이 하꾸인 선사, 하꾸인 선사랑 똑같이 일본에 크게 일본 선불교를 일으킨
그 선사 중 한 명이 다꾸앙 선사라고 있어요. 다꽝(우리가 먹는 ㅎㅎㅎ)
택암 선사. 택암 선사가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편지를 남겼어요.
그래서 돌아가면서 제자들에게 편지를 주면서
"너희들이 정말 큰 일을 당했을 때 열어봐라, 그때 열어봐라."
하고 그걸 남기고 갔거든요. 유명한 실제 있었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택암 선사가 제자들한테 정말 큰일이 생기면
그때 열어봐라, 하고 편지를 남기고 갔어요.
실제로 돌아가신 지 한참 뒤에 큰 일이 생겨 가지고 다들 모여 가지고
의논하니까, ‘그 편지를 열어보자.’ 큰 문제가 생겼는데 그래서 열어보니,
“걱정 마라, 될 일은 된다. 걱정 마라.”
그러니까 지금 이 수행한 사람들이 결국은 뭐 하는 건가.
걱정이 없다는 거에요. 수행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수행하면 문제가 안 되는 거잖아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말씀이,
문제의 해결은 거기에 대한 솔루션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성숙해져서 문제가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진정한 문제 해결이다.
그런 말 한 번 드렸잖아요.
그것처럼 이 공부는 걱정이 없어지는 거다. 왜냐?
내가 커져서 내가 전체하고 소통한다면 어떤 일이든 전체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전체를 만약에 신이라고 부른다면 어떤 일이든 신의 일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일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마음이 넓어져야지 수행인 거지,
그냥 이렇게 이론을 알고 뭐 그런 것은 힘이 없는 거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돼요. 그죠?
그래서 선사 이야기를 한 번...
< 선사는 거짓에든 진실에든 나쁜 소식이든 좋은 소식이든
그런가, 하고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반영했다. >
그러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냥 그런가,
하고 받아들였다.
< 그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 이 순간 이 취하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간 드라마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갑자기 뜬금없이 처녀가 ‘당신 애기요.’ 하고 화를 내면서
그 아버지가 탁 맡겼을 때 그런가, 하고 받아들였다.
< 그에게는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하며 이 순간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
아, 이거 참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있는 것은 이 순간이고 이 순간은 있는 그대로예요.
그리고 여러분, 있는 그대로의 특징은 완강해요. 안 변해요.
굉장히 완강해요. 힘이 세요. 현실은 힘이 세.
그걸 내가 바꾸려고 한다. 그게 인간의 고통인 거에요.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는 일어나는 사건을 자기화 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피해자도 아니다.
지금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그에게 어떤 힘도 미치지 못한다. >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 일이 없다.
인자는 무적이다. 이런 말 있잖아요.
인자힌 사람한테는 적이 없다 이거예요.
이때 인자의 뜻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적이 없다.
< 일어난 일에 저항하려고 할 때만 그 일에 좌우가 되고
당신의 행복과 불행을 세상이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참 이런 이치가 참 깊은 이치인데 실천은 어렵습니다.
우리 함께 이런 걸 배웠으면 노력을 진짜 해야 될 것 같아요.
자, 그래서 현실 수용, 현실 수용의 극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Not my will (나의 뜻이 아니라)
But Thine (당신의 뜻대로) be done. (이루어지소서.)
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게 현실 수행의 극치다. 그것이 부활을 가져왔다.
그런 점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다음에 분별하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에고의 분별에 의해서 이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안 되고
'이름'들의 세계가 돼요.
불교에서는 명색이라고 부르는 것.
이름 명(名)자가 붙는 것.
이름들의 세계는 네이밍을, 네이밍이 이름을 붙일 때는
그 이름 뒤에 선입견이 다 붙어 있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그대로 실상을 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붙여 놓은 이름을 대하고 있다, 이해되세요?
항상 이렇게 그 이름의 막이 있는 거에요.
말이 이름이지 이름을 다른 말로 하면 관념이에요.
관념의 막, 항상 관념을 세워 놓았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사느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산다.
돼지 눈에는 돼지 세계가 만들어져 있고,
부처 눈에는 부처 세계가 만들어져 있다.
왜냐면, 돼지 눈에는 그에 따른 딱지를 붙이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입견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을 대하고 있다. 이해되나요?
우리가 꽃 하나도 제대로 보기 어려워요. 요즘 무궁화 많이 피잖아요.
이번에 비 오는 날 창덕궁 가가지고 들어가는 입구에 무궁화가 막 피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정말로 처음으로 보는 느낌, 보통 때는 무궁화 하면
무궁화라고 하는 그게 먼저 눈을 딱 이렇게 하기 때문에 자세히 안 봐요.
한 마디로, 아, 무궁화, Ok, 하고 지나가 버리는 건데
그때는 비가 하도 많이 오고 여러모로 좀 새로워서 자세히 보니까 되게 아름답데요.
그렇게 놓친다는 거에요. 많은 것을.
네이밍 때문에. 이름 때문에.
31:55
여러분, 의식도 마찬가지예요.
의식도 의식이라고 하는 네이밍 때문에 진짜 의식은 놓치는 거에요.
이게 알음알이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알음알이를 내지마라 할 때
그 알음알이가 네임이라는 뜻이에요.
의식조차도 본질인 의식조차도,,,
제가 다른데 가서 특강하면 여러분~, 하니까
예, 이 향기 뭡니까?
다들 배운 게 많아 가지고 한 말씀씩 다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바로 불교대학 나오고 뭐 이런 공부 저런 공부 한 그분들이
뭡니까? 할 때, 탁탁 내뱉는 말 때문에 진짜는 그 뒤에 가려져버려요.
이해되나요?
왜냐하면, 불성입니다. 한 분이 ‘불성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럼 불성입니다, 하고 아는데 진짜 불성을 알 생각을 안 할 거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다 이거예요.
불성이라고 하는 이름을 알면 진짜 불성은 알 생각을 안 한다.
그러면 이런 말 하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힘이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 때문에 공부가 그래서 멈춰져 있다.
그래서 그거 알아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여러분, 상황이 이해 되시지요?
의식을, 우리가 본질을 그렇게 하는 것처럼 알고 보면 세상만사를 그러고 있다.
나무 하나를 봐도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관념을 씌워 가지고
나무네, 하고 그냥 패스 해버린다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신비를 놓치고 사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름들의 세계는 결론적으로는 파편화되어 있어요.
이것 저것 이렇게 해서 이름으로 구분되는 파편의 세계,
이름들이 모여 있는 세계.
그래서 이거를 부수는 방법은, 이렇게 파편화된 세계를
부수는 방법은 부처님이 연기(緣起) 라고 했어요.
* 연기(緣起): 연기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상관관계의 원리이다.
연기설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멸한다.”
라는 불설(佛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 daum 백과사전
34:05
그래서 지금은 오늘 시간이 없어서 안하겠지만
숙제, 여러분 숙제 연기 맵 그려오기.
다음 시간에 A4 용지에다가 그려오세요. 다 숙제하세요 .
가운데다 뭘 하느냐.
A4 용지 가운데다가 동그라미를 딱 치고 김밥이라고 써요.
그러면 김밥이 무엇으로 연기되느냐,
김밥이 하나 성립하려면 김밥 안에는 김이 있겠네요.
밥이 있겠네요, 단무지 뭐 이렇게 있겠죠. 오케이?
그러면 단무지 나오면 단무지를 또 뭐로 되어 있어요?
무하고 색소하고, 소금 뭐뭐,,, 있을 거 아니예요?
밥은 또 뭘로 연기돼요? 쌀로.
쌀은 또 무엇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거 아시겠어요?
숙제가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실제로 그려보면
김밥에서 수없이 많은 연기가 일어난다. 이해되세요?
하나의 김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모여서, 따라서
하나 하나는 파편이지만 맵을 그려보면 이게 전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이해되세요?
그래서 만약에 연기맵에 조금 익숙해지면
피자, 피자에도 그죠? 뭐든지 할 수 있지요.
그렇게 하게 되면, 사과 해도 돼요. 사과 사과해도
한 알의 사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많이 있지요. 그죠?
이걸 해보면 사고가 계속 분별의 파편이 이어져요.
따로 있는 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의 사고 패턴이 분별을 했기 때문에
연기맵을 그려보면 이 분별을 치유하는 핵심 기재가
연기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것도 참 대단하다는 걸 우리가 알게 돼요.
그래서 첫 번째는 실제로 그려 보라는 거에요.
가운데 무엇을 놓아도 좋아요.
그러면 이게 한없이 뻗어 나가요.
도화지가 A4 용지 하나가 동그라미를 꽉 차게 돼요.
그러면 첫 번째 해보는 게 숙제고,
두 번째는 뭐냐면 동그라미 끝이 뭐냐?
이게 나가서 끝이 뭐냐, 해보세요.
지금 뭐 지금 해봤자 소용없어 해봐야 돼.
그래서 끝을 한 번 알아봐라. 고민해 보세요.
37:12
여러분, 애들한테 연기맵 가르치면 굉장히 좋아요.
연기맵을 그려보게 하면 사고가 입체적이 되고 종합적이 되고
이 분별 파편화된 우리의 관념들이 이어지면서 이 항상 뭘 봐도 무얼 봐도~.
자, 여러분, 인사동 선방을 써보세요.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집이 다 있잖아요.
그 한 명 한 명이 또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뭘 봐도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입체적으로 봐서
우주가 다 들어오는 무얼 봐도 그렇게 되는,
서로 또 연결되는 것도 그려보면 알아요.
그래서 우리의 사고가 분별을, 이름들의 세계, 분별들이 만들어 놓은
이름들의 세계를 치유하는 방식은 연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렇게 연기를 강조하는 거에요.
연기를 연기맵을 그려보면 우리가 진짜 거미줄처럼,
이게 그런 말 있잖아요. 인드라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인드라망, 인드라라고 하는 천신의 세계는 그물처럼 생겼다
근데 그물 코마다 구슬이 있다.
* 인드라망: 범어로는 indrajāla이다. 불교의 욕계(欲界)에 속한 천신(天神)들의
왕인 인드라, 즉 제석천이 머무는 궁전 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이다.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그물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 있고 어느 한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지고, 나아가 그 구슬에
비춰진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춰지며
이러한 관계가 끝없이 중중무진으로 펼쳐진다. - daum 백과사전
하늘에 천상세계가 펼쳐지는데 모양이 그물처럼 한 결의 그물이 아닌,
다양한 모양의 그물이 펼쳐지는데 그물 코마다 구슬이 있어 가지고
하나가 반짝이면 이 반짝임이 전체를 다 건드려 가지고 그 많은
그물코마다 다 같이 빛나고, 이해되세요?
우리 세계가 그렇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지금 연기 맵이라는 것이 그려보면 결국 그런 식의 모든 것이
따라서 하나만 울려도 전체가 울리는,
그래서 이거를(톡 톡 책상을 치는 소리) 이게 지금 우주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를 체감하게 되는,
왜냐하면 개체 하나 하나 하나가, 현상 하나하나가 본질이 드러나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러면 정말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 세계가 티끌 하나 하나마다 전부 다~.
왜냐하면 거기가 본질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튼,
연기맵 그려오기 됐나요? 해봐야 돼요.
머리로 그냥 이렇게 듣고 이해하는 거 하고 실제 그리는 거 하고는
달라요. 그려야 이런 세계가 치유가 돼요.
오른 쪽은 치유하는 이야기들이죠.
갈등은 좀 더 좀 줄여가면 갈등에 대한,
여러분, 이론들의 세계가 만들어지면 갈등이 생겨요.
왜냐하면, 나는 에고지요.
그리고 세계는 에고가 그려놓은 관념들의 이름으로
네이밍 붙여진 파편 안의 세계잖아요.
그러면 나는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 그래요. 좋다 나쁘다, 좋다 나쁘다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는 바로 취하고 버리고,
그런데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갈등이 일어난다.
40:34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알아차림이에요
내가 또 기존의 패턴대로 관념놀이를 해서 분별해서
관념놀이로 들어가서 좋다, 나쁘다 하고 끄달려 가고 있구나.
그것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
이게 지금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여러분, 그러면 이쪽은 지금 병이고, 나한테 지금 일어난 문제들이고
이쪽 라인은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이잖아요.
공부할 것 많지 않나요?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충분히 납득이 돼.
그러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지금 그려지는 거에요.
이 책을 읽다 보니까 정리가 이런 식으로 정리가 돼.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여러분한테는 지금 짧은 시간 안에 전달을 해야 되니까
지금 이렇게 압축을 해서 이렇게 도식이라 그럴까,
아무튼 이렇게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거에요.
7장이 지금 이렇다는 거에요, 7장의 내용이.
그러니까 형상의 꿈에서 깨어나기는 이런 식의 치유가
내가 하자는 거죠. 이게 수행이다 이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갈등은 알아차림이에요. 알아차림은 깨어있는 거잖아요.
깨어서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알아차리는 거잖아요.
알아차리면 벌써 안 끌려가요. 못 알아차리면 끌려가잖아요.
그러니까 알아차림을 이 툴레는 의식하기.
못 알아차리는 것을 무의식.
무의식 상태로 사는가, 의식 상태로 사는가.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가,의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의식은 못 알아차리고 그냥 바로 떡이 돼서
그냥 끌려가 버리는, 그 윤회, 그걸 내가 깨어서 알아차리자.
이거는 뭐 매 순간 순간이 수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42:46
그리고 마지막에 이제 갈등이 고통을 일으켜요.
근데 문제는 고통에 뜻이 있다는 거죠. 고통에 의미가 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가 다 자기가 잘난 줄 알아요.
그래서 고통이 없으면 그 자기 잘난 그것을 고치기가 진짜 어려워요.
안 그래요?
무엇으로 이 아상이~, 참 젠체 하잖아요, 우리는.
무엇으로 고치느냐, 그래서 고통이라는 것이 찾아온다.
근데 그 고통의 수용이 정말 어렵다는 거지.
이런 이치를 알아 가지고 여기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레슨,
교훈을 얻는다는 거에요.
고통은 결국에는 우리한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역행보살이다. 역행보살이다.
그러면 어떤 레슨인가 이거예요.
어떤 레슨인가를 봐야 되는데 유튜브에 이 말을 너무 너무 잘해놓은
유튜브를 발견해서 여러분과 같이 봤으면 제가 그랬거든요.
44:07
시간 없는 분들은 가셔야 되니까 말씀드리면 우리 모든 전체 공부
마음 공부의 최종 결론, 여러분 참선의 목적이 뭐예요?
여기가 인사동 선방이니까 참선의 목적이 뭐예요?
여러분 뭐라고 생각하세요? 조금 막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좀 약간 참선이 깨달음이 목표다,
또 뭐 이런 식으로 약간 이론적인 데 치우쳐져 있어요
참선의 목적은 이론적인 게 아니에요.
어떤 어떤 구경의 경지 그런 게 아니에요.
참선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참선의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과 공감하기 위해서에요.
공감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자비라고 해요
그러니까 참 그 보리심이라고 표현하는 것.
참선의 목적은 이 세상 모든 것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뭐가 약한가. 공감 능력이 약해요.
정말 공감 안 하고 사는 것 같아요.
이 세계가 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참선이 어떤 선정삼매를 뭐 체험하고 뭐를 체험하고
어떤 남들이 못 가는 어떤 그런 경지를 가고 하는 그것은
목적이 뭐냐면 그런 것들의 목적은, 그것이 최종 목적은 아닌 거에요.
45:57
자, 그런 것의 최종 목적은 결국은 지금 나한테서 일어나는 모든 인연을
내가 받아들여서 수용해서 감사하고 내가 사랑으로써 다 이렇게 흡수하기,
그게 최종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걸 우리가 항상 잊어 먹지 말고 공부를 하자.
그래서 고통은 무엇으로 치유하는가. 고통을 사랑해야 돼요.
핵심이에요.
46:30
고통을 그 '미녀와 야수'에서는 야수라고 부르는 거에요.
'미녀와 야수'에서 고통을 야수라고 불렀어요
이 야수는 어떻게 야수가 되는가? 원래 왕자였잖아요.
왕자가 어떻게 야수가 되는가?
찾아온 마귀할멈 같이 생긴 노파를 거절했기 때문에.
찾아온 게 뭐예요?
현실이라면, 현실은 항상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
그것을 왕자가 거절했거든. 자기 이 파티에 물 흐려진다고.
잘난 사람들만 있어가지고 거절했다고요.
그랬더니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이 그 노파가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왕자에게 철들라 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서
야수로 만들어서 그 야수가 언제 왕자로 다시 부활하느냐,
언제 부활해요? 미녀의 사랑을 통해서.
그러니까 이게 지금 우리가 모든 공부하는 것이
'미녀와 야수'라고 하는 디즈니랜드 영화 속에 사실 다 들어 있는 거에요.
우리가 야수가 되어 있다 이거예요.
왜 야수가 되었는가? 지금 찾아오는 손님을 내가
이 현실을, 내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지러져 있다.
벌 받아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찾아오는 손님을 받아들일 때, 사랑할 때 그때 나는
다시 왕자로 변한다. 그 교훈을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이 삶이라고 하는 이번 생이라고 하는
이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하기 위해서 그 고통이 보스몹이라고 하는
그런 막강한 상대를 나타났다.
내가 그 사람을 거절하고 물리치는 한은 통과 못한다는 거죠.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길을 열어준다.
지금 모든 것에 지금 이치는 결국엔 내가 얼마나 편협되게,
편협되게 좋다 나쁘다 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를 돌아보고,
그리고 뜻밖에도 우리 전체는 다 공통적으로
우리 삶에서 고통이 왔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고통이 우리를 공부시켜 주는 것이라는 거에요.
이 고통이 왔는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해결할까를 공부를 해보니까
아, 내가 지금 고통을 싫어하고 있고, 거절하고 있고,
미워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각한다는 거죠.
그래서 받아들여 주면 그래서 제가
그 수행에서도 번뇌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사랑해야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감해야지.
저도 저를 돌아보면 공감능력이 약한 거에요.
왜냐? 참선한다고 참선한 사람들은 다 때려치우고
그냥 올인 하는 그런 거, 그런 거에 많이 이렇게 좀 젖어 가지고
이 사회의 힘들고 약하고 이렇게 또 가치 없고 하는 것에 대한 공감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요. 이해되세요? 제가 그렇더라구요.
결국에는 진짜 공부는 그게 아니라 그런 경지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적나라한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얼마나 내가 공감해주고
받아들여 주느냐.
공감한다는 말 아시겠어요?
여러분, 번뇌를 공감해야 돼요.
그게 공부의 그냥 가장 핵심이에요.
우리는 공감 능력은 엄청 약해요.
이 마음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약해요.
어떤 무슨 지고한 이상을 쫒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잖아요. 우스갯 소리지만
절이나 교회 가서 봉사 잘하는 사람이 집에 가서는
뻗어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지금 그런 꼴이다 이거죠.
우리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자칫하면 그런 꼴이다 이거죠.
정말로 공부는 그게 아니다. 그것은 속은 거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을 내가 얼마나 열고 공감해 주고
관심을 주고 그런 우리 겸손하게 참선이 최고다 이런 거 버리고,
정말 수많은 좋은 가르침은 마음을 열고 종교 뭐 이런 거에
상관하지 말고 받아들여서 공부하면 좋겠다.
예,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