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대한민국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명목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시(실질적)
중화민국,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천지는 창바이현 관할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바이산시(실질적)
높이:
2,744m(2,750m) (병사봉 / 장군봉)
산맥:
장백산맥, 마천령산맥, 태백산맥, 백두대간
각국표시:
한국어: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
영어: Mountain Paektu(마운틴 픽투) (북한식 · 표준)
Mountain Baekdu(마운틴 빅투) (남한식)
Baekdusan Mountain(백두산 마운틴) (남한식)
Mountain Baitou(마운틴 바이터우) (중국식)
Mountain Changbai(마운틴 창바이) (중국식)
만주어: 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ᠢᠨ(golmin šangiyan alin) (골민 샨기얀 알린)
개요:
백두산(白頭山)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한과 중국 국경에 있는 화산으로 화산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성층화산, 활화산, 초화산에 속한다. 한반도에서 모든 산의 '조종산'이다. 봉우리는 총 16개로 최고봉은 해발 2,744m인 병사봉(兵使峰)으로 북한 지역에 있으며,[5] 각 봉우리 정상 사이에 칼데라 호수인 천지를 품었다.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특징:
백두산의 높이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 북한, 중국 세 나라가 해발고도를 재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측정한 방식이 현대보다는 부정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 아는 2,744m는 일제강점기 때 측량한 값이다. 인공위성을 활용하기 전에는 높이가 알려진 곳에서 삼각 측량으로 높이를 쟀기 때문에 현대적 기준에 따른 측량한 결과와 비교하면 오차가 있을 수 있다.
해발고도와 구분되는 기복량(起伏量)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높이 차를 말한다. 범위를 1km2로 하여 한반도 전역의 기복량을 비교하여 백두산의 기복량은 2,505m라고 밝힌 논문이 있다.
세계에서는 37,473번째로 높은 산이다. 량강도 삼지연시와 중국 지린성 사이에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상으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치며, 천지(용왕담) 전역은 혜산군 보천면 관할이다. 중화민국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 천지는 창바이현 관할.
한민족의 영산으로, 지금도 한국의 국가와 북한의 국가에 모두 등장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중요시함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을 설명하며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 기준이자 신앙대상으로서 백두산을 꽤나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평양)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에는 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우리나라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영조실록 43년[1767] 윤7월 신축).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125위안으로 비싸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로, 신라 명주 오대산을 백두산의 줄기로 소개하는 기사가 2차례 등장한다. 『고려사』 세계와 성종 10년(981)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전 기록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편이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한다.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추정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에서 보듯 19세기까지도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 모양이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백두산 이외에도 장백산을 혼용했다. 용비어천가에서도 장백산이라고 언급하며 '백두산'은 별칭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온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 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졸본부여라 하면서 졸본을 요동 인근으로 비정했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다. 부여, 옥저, 신라,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는 동시에, 이승휴 자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요하 근처의 무덤을 현지인들이 '부여 부마 대왕의 무덤'이라고 증언하는 것과, 요하 인근을 부여의 땅으로 기록하고 부여가 후조선의 후예라고 기록한 가탐의 기록을 실어놓아 요하 일대와 백두산을 부여 영토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단군 문서 참고.
북한의 평양 단군릉 발굴 및 개건과 남한 이승만 정권의 단기 사용, 대종교의 단군 숭배와 백두산 성역화, 단군 동상 설립 등이 한국인의 단군 숭배를 보여준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특히 청나라에서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렸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갼 알린(Golmin Šanggiyan Alin)'을 번역차용한 것으로, 요나라, 금나라 시기부터 쓴 이름이다. 이러한 명칭은 9개월 가까이 눈이 쌓인 특색 있는 산정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즉 현대 중국이 사용하는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니다. '장백산', '백산'은 우리나라가 백두산을 지칭하며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0세기 무렵부터는 중국에서 대부분 장백산, 백산이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도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많이 불렀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지금의 백두산이란 명칭은 그 전에도 쓰이긴 했지만 조선 말기에나 빈도가 높아진다.
일본 NHK에서 북한 측의 협력을 얻어 백두산 일대의 식생을 50분짜리 자연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백두산은 그야말로 '희고 긴 산'이다. 한국측 미디어에서 대개 백두산 천지를 그려내는 데 비해 이 다큐는 삼지연 일대의 자연을 담고 있어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백두산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
영어권에서는 백두산이란 이름을 중국식으로 읽어서 'Baitou Mountain'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편 '밝달뫼'라는 명칭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른바 순우리말 달의 이름이라고 도는 이름 가운데 10월이 하늘연달(개천절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단 공식 표기는 북한의 표기인 Mt. Paektu.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은 병사봉(兵使峰)이다. 북한에서는 장군봉이라고 하는데, 장군봉이라는 작명을 한 사람은 김정일. 1963년 8월 백두산 방문 때 백두산 최고봉 이름이 병사봉임을 알고 "수령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군님이신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병사봉일 수는 없다. 장군봉으로 고치게."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항간에는 원래 이름이 장군봉이었는데 일제가 비하할 목적으로 병사봉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정작 일제가 붙인 이름은 대정봉(大正峰)이었다.
그런데 백두산의 병사봉은 병사(兵士)가 아니라, 지금의 사단장-군단장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줄여 말하는 것이다. 남북한 모두 더 이상 한자를 널리 쓰지 않는 이상 동음이의어 표기의 오해 여지가 있을 수 있기에 아예 명확한 의미인 장군봉으로 바꿨을 수도 있으나, 여기에 김일성의 항일투쟁 우상화를 반영하였으므로 차후 통일되면 표기 변경과 관련하여 고민해 봐야 할 듯하다.
북한의 계급 중 상류층인 핵심게층 중에서도 최고위 계층을 "백두혈통" 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동참했고,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끝까지 숙청되지 않고 함께한 측근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지칭한다. '백두혈통'은 혈연 관계에 의한 혈족 개념보다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전통을 함께 공유하고 계승하는 정치사상적 혈통에 가깝다.
한국의 육군 보병 사단 중 제21보병사단은 백두산 부대라는 별칭이 있다.
특징, 볼거리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폭포에서 이도백하를 흘러 송화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
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장백폭포는 현재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높이가 68m이고 여름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에서 얼음과 눈속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매우 장관이다.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악화폭포는 그 높이가 50m이고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백두산내 온천은 해발 1,756미터 이상 되는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30여곳이 있다. 그 가운데서 천지내에 두개의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개의 분수구가 있다. 최고 수온은 82도에 달하여 이 온천물
에서는 달걀도 삶아진다. 백두산 지역은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그 원인은 해양과는 거리가 가까우며,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이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 강수량이 1,340.4mm이며, 연 강수일수는 209일쯤 되고, 특히 우기는 7,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되지 않는다.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7.3도이고 극단적인 최저 기온은 -44도이다. 9월 초순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온통 겨울 설원으로 변한다. 계곡엔 눈이 매우 두껍게 쌓여 이듬해 7월에도 채 녹지 않은 눈을 볼수 있다. 서풍이 강한 백두산은 연 평균 풍속이 초속 11.7m에 달하고 8급 이상의 폭풍 일수는 267일이나 된다. 폭풍이 가장 많은 달
은 12월로서 29일쯤 되고,최대 풍속은 초속 70m가 넘을 때도 있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은 키가 작은 관목류와 초본들이 자라는 고산대로, 산악툰드라 지대이다. 이곳에 자라는 초본류는 두메자운·담자리참꽃·바위돌꽃, 눈속에서 꽃이 피는 노란 만병초 등이다. 이 지대는 특히 꽃이 피고 씨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짧아서 7~8월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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