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김남웅의 시세계
재생한 체험의 시학 그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현대시 창작에서 삶의 궤적(軌跡)에서 획득한 체험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법(詩法)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테크닉으로써 자신의 인생 체험이 가장 중요한 시적 주제로 발현되고 있다.
그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살아온 체험은 시 창작에서 한 이미지로 현현되다가 시적 상황과 주제로 연결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 인간들이 소유한 칠정(七情)에서 그 정서나 사유(思惟)의 지향점을 취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희노애락(喜怒哀樂) 애오욕(愛惡慾) 중에서 어떤 한 부분이 지금 그 시인이 착목(着木)한 사물이나 현실적인 관념의 중심에서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현상을 체험적 시론이라는 이름으로 성행(盛行)하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흐름은 대체로 이와 같은 칠정의 범주(範疇)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 없이 자신의 정서의 향방(向方)이 현실적인 실재(實在)의 상황이 연결될 때 한 편의 좋은 작품이 창조되는 것이다.
여기 김남웅 시인의 작품을 대하면 그가 연약한 내면에서 용암(鎔巖)처럼 솟아오르는 강렬한 열기를 느끼게 한다. 그는 다음 작품 「자화상」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이 살아온 열정은 이제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새벽녘
코빼기가 뻘개 산비알을
헤매이다
돌아온 놈
심한 고열
이 고뿔
잃어버린 세월의
살 두어 점
하얀 가제도
묻어나던
내
영혼
뒤안길의
흰 달무리
여기에서는 ‘잃어버린 세월’과 동시에 생성하는 영혼의 이미지가 엷은 미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김남웅 시인이 간구(懇求)하는 청순한 이미지의 융합으로 자존(自存)의 형상이 시적으로 승화하면서 창출해낸 ‘뒤안길의 / 흰 달무리’라는 ‘자화상’을 스스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작품 「행복」전문에서도 ‘밤의 지하철 / 행복을 실어 나르는 전동열차가 / 마침내 들어오고 있다 // 온종일 줄지어 섰던 내게도 / 이젠 차례가 오려는가 / 어둔 밤을 헤매이던 내 영혼들에게도 /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 램프 불을 밝히며 / 희미한 당신의 손을 잡는다.’는 어조(語調)와 같이 ‘영혼’에 대해서 경외(敬畏)의 언표(言表)가 많이 등장함으로써 그가 기원하는 존재의 인식이 명징(明澄)하게 현현되고 있다.
지금
내 영혼의 삭막한 황무지에
삽질소리 들린다
부지런한 농군의 소 모는 소리
바리새인 같은 삶을 쟁기질 한다
사두개인 같은 믿음에 객토를 한다
돌짝밭을 일구어 씨를 뿌린다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는다
나는 되도록 잠재우고
새로이 되살게 한다.
다시 그는 작품「개간(開墾)」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혼’과 의 교감은 ‘나는 되도록 잠재우고 / 새로이 되살게 한다.’는 결론에서 우리는 그의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지속해온 ‘찬송과 기도’의 열정이 비로소 ‘삭막한 황무지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작품「애드발룬」전문에서도 ‘어젯밤 꿈에 나는 / 큰 봉을 잡았다. / 무지개를 타고 / 천사의 춤을 추었다. / 하아얀 영혼을 꺼내어 / 잘 포장을 한다. / 1943년 5월14일 생 / 이놈, 김남웅이 이놈을 / 띄운다.’는 시적 전개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하아얀 영혼’이 바로 ‘1943년 5월14일생’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어조는 ‘바리새인 같은 삶을 쟁기질 한다 / 사두개인 같은 믿음에 객토를 한다’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어조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착실한 크리스챤이라는 신앙인의 시적 자세로 작품을 형상화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김남웅 시인은 영혼의 찬미에서 다시 기독시인의 겸양으로 돌아간다. 그의 작품「은혜(恩惠)」중에서 ‘푸른 십자가가 / 동산 가득히에 불을 혀네 / 빛나는 형상 / 여호와의 말씀이 곳곳에서 / 불기둥을 이루우네’로 시작하는 이 ‘은혜’는 ‘야곱의 우물이 솟고 /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에까지 / 줄기를 이루우네’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푸른 십자가’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은혜’에 보답하려 하고 있다.
진물이 나고 부스럼
헌데가 많던 애덜
열이 나고 골치가 아프고
곱불을 앓던 애덜
그런 모든 병앓이들에사
당신은 은혜로 풍성하시네
가나안 혼인집의 빈 여섯 독
술 떨어진 내 항아리에조차
당신은 찾아오시네
일곱 남편을 두었던 이 우물에조차
당신은 찾아와 샘물을 터뜨리시네
콸콸 터뜨리시네 은혜로
가득 넘치게 터뜨리시네.
그렇다. 김남웅 시인의 뇌리(腦裏)에는 ‘당신’의 은혜로 가득차 있다. 이 세상 삶에서 아픔이 있거나 가난하여 고통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로 / 가득 넘치게’하는 삶을 구현하려는 고뇌와 화해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우리집」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는 요단강에 나가 머리를 감고
/ 아내의 등을 밀어주었다 /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 하늘나라에 등록을 했다’는 언지가 바로 그의 신앙생활과 직결하는 진실이다.
김남웅 시인에게서 다시 읽을 수 있는 시적 상황과 그 배경은 시간성과 동행하는 정감의 재생이다. 이러한 상상력(imagination)의 재생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직유 혹은 은유와 같은 비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더구나 현대시들은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서 과거에 체험된 그 무엇이 시적 동기가 되고 언어의 감촉(感觸)과 함께 심상(心象)의 세계로 몰입하면서 적절한 이미지를 창출하게 된다.
이렇게 재생한 이미지들이 바로 김남웅 시인의 연작시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우선 작품 1 전문을 읽어보자.
옛날에 나 배 아프면 굵은 소금 먹었다 장광에서 모래알 같은 왕소금을 한 움큼 움켜다 주시던 엄마 소금을 먹여 놓곤 배를 썩썩 밀어 주시던 엄마
아버지는 내 삼눈을 잡는다고 아침 일찍 웬 사내끼를 꼬아 나를 목살이 하곤 뒷간 문 앞에 매놓았었다 땅에다가 내 얼굴 내 눈깔을 그려 노시고 왜놈 낫을 팍 꼽으시었다
할머니는 열심히 빌기를 잘하셨다 큰손주놈 이놈을 끔찍이도 아셨다 어쩌다 열이라도 높다 싶으면 건더기 하나 없는 죽을 쑤어 무어라 지껄이시며 곧잘 풀어 내버리셨다
아아 그 어머니 그 할머니 다 어데 가시고 다 어데 가시고 어째 이런 옛날 이야기만 이렇게 살아 남아서 이 비인 밤을 비이빙 돌고 있는지 아무래도 오늘밤엔 울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최명재 선생이 영어로 번역(「Once upon a time 1」)해서 외국에서도 많이 읽히는 작품인데 시적 화자(話者-persona)로 엄마,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등이 ‘큰손주놈’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시법이다.
어찌보면 우리들 모두의 애환이며 정한(情恨)이다. 그는 결론으로 적시한 ‘아아 그 어머니 그 할머니 다 어데 가시고 다 어데 가시고 어째 이런 옛날 이야기만 이렇게 살아 남아서 이 비인 밤을 비이빙 돌고 있는지 아무래도 오늘밤엔 울 것만 같다.’는 어조로 회상과 현재의 관념이 만감(萬感)으로 교차하면서 흐느끼는 인본주의(humanism)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시대상이나 삶의 여건들이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가족간의 사랑이 바로 화목한 가정에서자라는 큰손주놈에게 베풀어진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 불알 친구 놈들 중 짭뿌리 시계짱 마찌노꼬 새꼬란 놈들이 있었다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유산이랄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러준 왜놈 이름들였다.
스물세 살에 동네 구장 보시던 우리 아버진 용케도 창씨(創氏)하지 않아 존경이 간다 가마니 순업교사로 양평 땅까지 지도검사를 다니실 때는 왜놈 아새끼들이 보기 싫어 일부러 술을 한 말씩 잡수셨단다 그리고는 술을 잡수신 그만큼은 울으셨단다 아직도 그 술은 깨지를 않으신단다
--「10.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전문
질마재 우리 웃집에 성근네가 살고 있었다 그 윗집에 달형이네 그 옆으로 수환네 창환네 봉재네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대포 껍데기로 만든 썰매를 타러 뒷골 논빼밀 갔다 그렇게 신날 수가 있었을까 그 썰매타기가
아아 그런데 그만 이게 무어냐 논빼미 한 가운데서 큰떼기를 잡아 논두렁에 불을 놓고 옷을 말리다간 그만 바지가랭이를 다 태워 버렸다
검정광목 솜바지를 다 태워버리고 불알 근처까지 훌랑 태워버리고 밤이 늦도록 집엘 못 들어가던 생각이 난다 엄마 얼굴이 놋대야만큼 크게 떠올랐다 달형네 집에서 죽을 얻어 먹었었다.
--「13.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전문
이 작품 10에서는 ‘고향 불알 친구 놈들 중 짭뿌리 시계짱 마찌노꼬 새꼬란 놈’의 일본식 이름의 친구들이 있었고 ‘스물세 살에 동네 구장 보시던 우리 아버진 용케도 창씨(創氏)하지 않아 존경’했다는 스토리가 눈길을 흡인하고 있다.
또한 ‘왜놈 아새끼들이 보기 싫어 일부러 술을 한 말씩 잡수셨단다 그리고는 술을 잡수신 그만큼은 울으셨단다’라는 어조에서 우리는 가슴 찡한 공감의식을 유발하고 있다. 일제침략기를 겪은 아버지의 회상에서 우리 민족적인 애상(哀傷)이 한으로 재생하고 있다.
다시 작품 13에서는 ‘질마재 우리 웃집에 성근네가 살고 있었다 그 윗집에 달형이네 그 옆으로 수환네 창환네 봉재네가 살고 있었다’는 상황 설정과 같이 정다운 이웃들이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촌락(村落)의 형태에서 전개되는 정의(情誼)가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동심의 세계가 재생되면서 자아를 인식하게 되고 다시 존재와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썰매를 타러 뒷골 논빼밀 갔다’거나 ‘논두렁에 불을 놓고 옷을 말리다간 그만 바지가랭이를 다 태워 버렸다’는 등의 추억은 아련한 정감일 뿐, 지금 21세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과거의 시간성에 묻혀 있다.
그래서 그는 ‘검정광목 솜바지를 다 태워버리고 불알 근처까지 훌랑 태워버리고 밤이 늦도록 집엘 못 들어’가고 결국 ‘엄마 얼굴이 놋대야만큼 크게 떠올라’ 꾸중을 들을 것이 염려되어 집에도 가지 못하고 ‘달형네 집에서 죽을 얻어 먹었었다.’는 스토리는 우리들 동시대적인 애환으로써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상황들에서 그가 진실로 투영하는 시법은 소꿉놀이에서부터 눈다래끼 치유법, ‘무당집 아덜놈’과 교유하던 일, 골목대장으로 군림하던 일, 그래서 ‘기집애들이 조올졸 줄 지어 내 옆으로 뒤로 따라 다’니던 일, 그리고 ‘소아지 소아지 어어루 소아지 어머소도 어루소 어아마 다아네’ 또는 ‘어마 아패서 자자구 압바 아패서 자자구 어어마 하수무 잠자구 압빠 주르무살 펴어지다’라고 아직 발음이 잘 되지 않는 어린애의 노래에 박수를 받던 일들은 이제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 그런데 이 어떻게 된 놈의 세상
오줌도 맘 놓고 못 싸는 세상
재미라곤 고추만큼도 없는 세상
차라리 두어 살 적 그 옛날로 돌아가 소문난 오줌싸개로 좀 모자라는 오줌싸개로 되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철저히 되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도로혀
그것이 도로혀 지혜가 아닐까 싶어서이다
--「3.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중에서
김남웅 시인이 탐색하는 시적 전개와 주제의 투영은 그가 재생한 상상력의 형상화이다.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리처즈는 시적인 소재에는 일상생활의 정서와 소재에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일상적이거나 보편성을 지닌 생활에서 소재를 찾는 것으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어 있어서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의 추억이나 지나온 기억에서 앞에서 말한 칠정과 상관함으로써 어떠한 이미지로 발현할 것인가는 그 시인이 지적으로 간직한 정서의 취향에 따라서 그냥 회상의 차원에서 머무는 산문이 될 수도 있고 혜안(慧眼)으로 응시(凝視)한 외적인 사물과 내적인 관념이 상호 융합할 때에는 좋은 한 편의 작품으로 창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는 ‘지혜’를 중시하고 있다. 그간의 많은 체험들이 한 편의 작품으로 승화하려면 그가 축적해둔 지혜의 문을 열어서 현실과 상충하는 심리적인 변화를 절묘하게 묘사해내는 시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워즈워스도 시는 모든 지식의 숨결이자 정수(精髓)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시인 조지훈도 ‘시란 지(智), 정(情), 의(意)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해서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그의 글 「영원과 고독을 위한 단상」에서 교훈적(敎訓的)으로 들려 주고 있다.
만나는 이들마다 보름달을 안고 있다
인사를 할 때마다 달은 높이 높이 떠오른다
온 몸뚱이에서 시퍼런 달 냄새가 난다
모두가 밝고 화안한 달덩이 얼굴들
잘 익은 인도 사과 향기처럼이 높푸르다
행복이 뚝뚝 떨어진다 좋아 죽겠다
온 시가에 사과의 향기가 속속 번진다
새콤한 사과의 뒷맛이 무지 이쁘다
--「 평택頌 」
홀연히 씨 하나이
이 따(地) 우에 떨어지다
문득 오요요 잎 나고
줄기 뻗어선 혼(魂) 내리다
불의 말씀 꽃 같은 당신
그 큰 섬광(閃光)
40만의 깁(繡)을 짓는
오오 그대 내 님 光明이시여
억만년에 길이
光明正大 하시라
--「광명頌」전문
이 두 편의 목적시는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광명시와 퇴임하기 전에 근무했던 평택시에 대한 송가(頌歌)라고 보여진다. 이렇게 특정한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 우리 시인들은 목적시의 형태로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도 많이 접할 수 있다.
김남운 시인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많은 시적 연상(聯想)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언젠가 때를 기다려 세상에 빛을 보는 순간 영롱한 진주처럼 빛나는 작품으로 승화하고 우리들은 그의 작품에 공감하면서 찬양할 것이다.
그는 ‘행복이 뚝뚝 떨어진다 좋아 죽겠다 / 온 시가에 사과의 향기가 속속 번진다 / 새콤한 사과의 뒷맛이 무지 이쁘다’는 어조와 같이 천진만만한 동심이 지금도 흘러 넘치는 순정과 순수의 심저(心底)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의 청순한 정서와 이미지 그리고 사유의 지향에 그의 시적진실을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