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咸安은 경상남도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남쪽은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최고봉인 여항산(艅航山‧해발 770m)과 방어산(防禦山‧530m) 등 높은 산지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이 서로 만나 낮은 지대를 이뤄 남고북저南高北低의 특징을 갖는다. 함안은 지리적으로 내륙과 해안으로의 이동이 편리해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이자 요충지였다. 강이 주는 풍요로움과 외부로의 우수한 접근성은 오랜 기간 형성‧발전된 함안 전통문화의 원동력이다.
군북 동촌리 26호 고인돌
군북면 동촌리에는 석교천변의 평야 지대를 따라 27기의 고인돌이 열을 지어 분포해 있다. 그중 26호 고인돌은 평편한 덮개돌의 윗면에 398개의 홈 구멍(알 구멍‧性穴)이 새겨져 있어 특히 주목된다.
알 구멍은 전남 보성군의 한 고인돌 발굴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진 바 있다. 이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에서 새긴 것으로 생각되지만, 별자리를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말이산 고분군의 남쪽에 위치한 말이산 35호분 앞에는 고인돌의 덮개돌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홈 구멍과 함께 동심원도 새겨져 있다.
가야리 유적
가야리加耶里 유적은 왕궁과 관련된 지명과 함께 ‘아라가야 왕궁지’로 구전되어 온 곳이다. 1587년 기록인 <함주지咸州誌> ‘고적조古蹟條’에 고국유지古國遺址(옛나라 가야국의 옛터)로 기록돼 있다. 2018년 4월, 토성 벽 일부가 확인돼 유적의 실체가 드러났다. 발굴 조사 결과, 판축版築(백악‧석회‧자갈 같은 자연 재료를 사용해 기반‧층‧벽을 건설하는 기술)된 대규모의 토성 벽, 군사적 성격의 내부 시설 등이 확인돼 아라가야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함안군수 정구鄭逑(1543~1620)가 1587년 편찬한 <함주지>는 현존하는 최초의 읍지로 여겨진다. 함주咸州는 오늘날 경남 함안을 가리킨다.
여러 가야를 주도한 아라가야
함안은 아라가야의 옛 도읍지로, 변한의 작은 나라였을 때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6세기 중엽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로, 상당한 수준의 정치‧문화적 발전을 이뤄냈다.
아라가야는 현재의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진주‧의령의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광활한 분지와 넓은 해안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이, 남쪽에는 진동만이 있어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에 유리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아라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4세기 전후에 더욱 성장한 아라가야는 5세기 무렵에는 말이산 고총고분高塚古墳을 조성할 정도로 정치적 발전을 이뤘다.
아라가야는 여러 가야국들로부터 ‘형님의 나라’로 불렸을 정도로 가야를 대표하는 국가였으며, 특히 우수한 토기와 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고대 한반도 남부의 발전을 주도했다. 가야 전기에는 금관가야, 후기에는 대가야와 함께 전기와 후기 통틀어 여러 가야국들을 이끌었다. 여러 가야국들을 대표해 백제‧신라‧일본 등과 외교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아라가야의 여러 이름들
아라가야는 함안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가야국의 가장 친숙한 명칭이다. 아라가야는 여러 역사서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또는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에는 아시랑국阿尸良國‧아나가야阿那加耶‧아라阿羅, <삼국지>에는 안야安邪, ‘광개토왕 비문’에는 안라安羅, <일본서기>에는 아라阿羅‧안라安羅,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시랑국阿尸良國‧아나가야阿那伽耶‧阿那伽倻로 기록돼 있다.
특히 안라安羅는 당시 기록인 ‘광개토왕 비문’에서 확인된 것과 함께 <일본서기>에서도 30여 차례 언급됐는데, 몇 차례 사용되지 않은 다른 이름과 대조된다. 같은 나라가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된 것은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시 쓰인 나라 이름과 의미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나라 이름을 ‘아라’ 또는 ‘안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며, 그 의미는 큰 나라, 아래 나라, 알 나라, 나(우리)의 나라, 물(강) 이름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말이산 고분군
말이산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아라가야의 6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함안의 대표적인 고대 유적이다. ‘말이’는 순우리말인 ‘마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두머리’라는 의미다. 이를 보아 말이산의 어원이 아라가야의 왕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말이산은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한다. <함주지> ‘고적조’에 ‘우곡리 동서쪽 언덕에 고총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말이산 고분군이다.
말이산은 함안의 가야분지에 위치한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북으로 약 2km 정도 길게 뻗은 중심 능선과 이로부터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 능선이 있다. 고분군은 구성의 중심과 가지 능선에 열을 지어 서 있으며, 이 때문에 보는 이에게 ‘산 위의 산’이라는 경외의 느낌을 준다.
말이산 고분군의 면적은 52만㎡로 단일 고분 유적으로서는 국내 최대급이다. 말이산 구릉의 주 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 능선의 꼭대기에는 대형의 봉토분이, 경사면에는 중소형의 고분군이 조성돼 있다. 이는 지형과 경관을 고려해 각 고분의 입지와 배치에 권력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아라가야 지배자 집단의 노력이 결과물이다. 그중 대형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중반~6세기 전반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37호분으로 지정·관리 중이다. 정밀 지표 조사 결과, 이들 봉토분을 포함해 약 1000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봉토가 확인되는 건 160여 기다. 말이산 고분군은 그 자체가 아라가야 지배자 집단의 거대한 기념물로 볼 수 있다.
말이산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호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이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창원대학교박물관‧경남연구원 등 여러 기관에 의해 수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발굴 조사 결과, 말이산 고분군은 널무덤(木棺墓)에서 대형의 덧널무덤(木槨墓)으로 교체되고,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6세기에는 돌덧널무덤(石槨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을 중심 구조로 하는 대형 봉분이 밀집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특히 1918년 일제에 의한 약탈적 발굴 조사 이후 100년 만에 이뤄진 말이산 13호분 발굴 조사에서는 가야 무덤 최초로 별자리가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돼 가야인의 천문 사상을 연구할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갑옷을 비롯한 말갖춤새, 꾸미개, 철제 무기류, 토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는데, 이 유물들은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아라가야의 수준 높은 문화와 활발했던 대외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말이산 고분군은 수준 높은 고대문화를 간직한 채 한반도의 주요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 제515호.
미늘쇠
아라가야의 사람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유물에는 새 모양 장식 미늘쇠와 오리 모양 토기 등 새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아라가야 유물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새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을 엿볼 수 있는데, 새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인간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늘이란 일종의 낚싯바늘 같은 갈고리를 뜻한다. 미늘쇠는 이렇듯 낚싯바늘처럼 보병이 적 기병에게 무기를 걸어서 말에 탄 적을 끌어내리는 데 쓰인 철기를 말한다. 한국의 미늘쇠는 대개 3세기 후반에 출현해 6세기 전반까지 신라와 가야의 대형 고분에서 발견되는데, 넓적한 판 가장자리를 따라 날카롭게 생긴 미늘이 붙어 있어 ‘가시가 돋친 날이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유자이기有刺利器’라고 부른다. 미늘쇠는 경상도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대단히 지역성이 강한 유물로 볼 수 있다.
특히 함안 가야읍 도항리 10호분과 13호분에서 발견된 미늘쇠들은 전면에 작은 구멍들이 많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여러 가닥의 실과 비단 등을 끼워 화려하게 나부끼도록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도항리 13호 출토 미늘쇠의 경우 몸체에 삼각형으로 투각이 되어 있는데 적에게 사용할 때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지금은 200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며 녹이 슬고 많이 삭았지만 당시에는 매끄럽게 빛나는 도신刀身과 더불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게 주조된 무구武具였을 것이다.
한국 미늘쇠 장식의 형태는 크게 궐수형蕨手形(고사리 문양), 갈고리형, 새 모양, 거치형鋸齒形으로 나뉜다. 함안 도항리 10호분과 13호분에서 출토된 미늘쇠는 새 모양이다. 함안 지역에서 발견된 4세기 미늘쇠는 신라와 가야 금동관의 입식이 내포하는 정신세계와 직접적으로 상통하며 장식적 머리쓰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로 보인다.
아라가야 토기
아라가야는 여러 가야 중 ‘토기의 나라’로 일컬을 정도로 토기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기원 전후부터 기와 질감의 와질토기를 생산해 왔던 아라가야의 도공들은 4세기에 접어들면서 토기 생산에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은 오랜 세월 남강의 범람으로 마련된 고운 바탕흙을 소재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지닌 토기들을 빚어낸 뒤 약 1000~1200℃의 고온에서 소성燒成이 가능한 오름가마(登窯‧경사면에 터널형으로 축조한 가마)에 넣어 단단한 도질토기陶質土器로 구워 냈다. 아라가야만의 독특하면서도 우수한 토기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토기는 주변으로 확산됐는데, 아라가야와 주변국 간의 정치·문화적인 관계를 추적하는 근거가 된다.
대표적인 토기로는 삿자리무늬 항아리(繩蓆文打捺壺)를 비롯해 굽다리 접시, 굽다리 항아리, 손잡이 그릇, 그릇 받침, 문양 뚜껑 등이 있다. 또 사슴, 집, 수레바퀴, 오리, 말, 등잔 등의 모양을 한 각종 상형토기들도 아라가야 토기의 아름다움과 세련미를 잘 보여 준다. 삿자리무늬는 갈대를 사선으로 엮은 모양을 가리킨다.
천제산을 중심으로 한 법수면 일대에는 아라가야가 토기를 생산하던 유적들이 많이 분포해 있다. 이곳은 고대 한반도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대규모 토기 생산 유적으로, 함안군에서 발견된 18곳 중 14곳이 여기서 발견됐다. 그중 우거리와 묘사리에서 6기의 토기 가마가 발굴됐는데, 이 가마들은 모두 4세기 무렵 아라가야 토기를 생산하던 오름가마로 구릉 끝자락에 위치하면서 등고선과 직교로 배치돼 있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 단면 형태는 원형이며, 가마 규모는 길이 6~98m, 너비 1.6~2.2m다.
아라가야의 토기 생산 유적이 천제산과 법수면 일대에 대규모로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라가야 도공들의 기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토기를 생산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강의 범람으로 퇴적된 고운 점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남강과 낙동강 등의 물길을 이용해 영남 각지에 토기를 손쉽게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생산된 삿자리무늬 항아리는 창원‧진주‧합천‧부산‧대구‧칠곡 등 영남 지역뿐만 아니라 공주‧남원‧여수‧해남 등 먼 지역에까지 유통됐다. 아라가야인들이 사용할 양 이상의 토기를 생산해 넓은 지역에 유통했다는 사실은 토기 생산이 4세기 아라가야가 크게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아라가야의 상징은 불꽃무늬 토기火焰形透窓土器다. 불꽃무늬 토기는 불꽃의 형태를 다리 부분에 뚫어 장식한 토기로, 굽다리 접시‧손잡이 그릇‧그릇 받침 등 다양한 기종에서 확인된다. 이는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토기로, 4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까지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널리 유행했다. 불꽃무늬를 토기의 장식 요소로 채택한 배경에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이전 시대까지 유행하던 원형과 삼각형의 구멍이 결합했다는 설, 고구려 불교의 영향이라는 설, 불의 주술적 의미를 형상화했다는 설 등이 있다. 불꽃무늬 토기가 고대 아라가야의 땅이었던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진주‧의령의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꽃무늬 토기가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토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꽃무늬 토기는 아라가야 영역 외에도 김해‧부산‧합천‧산청‧창녕‧울산‧경주‧김천‧광양 등 가야·신라 문화권인 영남 지역과 전남 동부 지역, 고대 일본의 중심지였던 긴키近畿 지방에서도 출토됐다. 이를 통해 1500년 전 아라가야의 대외 교류 관계를 추적할 수 있겠다.
수레바퀴 모양 토기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아라가야의 뛰어난 토기 제작 기술과 미적 감각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원래의 용도는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술과 음료를 담아 마시는 잔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이나, 수레바퀴 장식이라는 점과 무덤 부장용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라가야의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굽다리 위에 뿔을 형상화한 U자 모양의 원통형 용기를 올려놓고 그 양쪽에 수레바퀴 한 쌍을 배치한 형태다. 바퀴는 원형판의 가장자리에 선을 그어 나타냈으며, 그 내부에 방사상放射狀으로 직사각형 구멍을 뚫어 바큇살을 표현했다. 또 바퀴 중앙에 구멍을 뚫고 굴대와 연결함으로써 수레바퀴가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말이산 4호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모양 토기를 약 10배 크기로 확대해 만든 청동상이 함안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아라가야의 말갖춤
말갖춤은 말을 부리거나 꾸밀 때 쓰는 연장이나 장식품을 말한다. 용도에 따라 재갈과 편자 같이 말을 부리기 위한 제어용 발걸이와 안장 등 기수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정용, 말 띠 드리개‧꾸미개 등의 장식용, 말 투구와 말 갑옷 등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어용으로 나눌 수 있다.
가야의 기승용騎乘用 말갖춤은 중국 동북 지방의 제작 기술의 영향을 받아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아라가야의 말갖춤은 5세기 무렵 도입됐으며 말 갑옷, 말띠 드리개와 같은 전쟁용·장식용 말갖춤이 출현한 뒤 5세기 후반부터 장식용 말갖춤의 비중이 높아졌다.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 갑옷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가슴 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으로 구성돼 있다. 마갑총馬甲塚은 ‘말 갑옷이 출토된 무덤’이란 뜻이다. 함안 지역에서 말 갑옷은 말이산 고분군 마갑총 4·6·8·45·75호분에서 출토됐는데,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출토 빈도를 자랑한다. 마갑총의 말 갑옷은 출토 상태가 온전해 원형을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크게 주목받는다. 말 갑옷은 900장 이상의 작은 철판을 가죽 끈으로 연결해 만든 것으로 아라가야 철기 문화의 우수성과 강력한 중장기병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마갑총에서 발견된 둥근고리큰칼도 눈길을 끈다. 둥근고리큰칼은 둥근고리, 손잡이, 칼등을 화려하게 꾸민 장식대도다. 둥근고리와 칼등은 지그재그 문양과 작은 원(점)을 새긴 홈에 금과 은을 채워 넣은 상감 기법으로 꾸미고, 비늘 문양을 두드려 새긴 은판에 도금해 나무로 된 손잡이에 감은 것이 특징이다.
마갑총은 둥근고리큰칼 이외에도 말 갑옷, 말 투구 등 각종 철기류와 토기류가 출토된 5세기 중엽 아라가야 최고 권력자의 무덤이다. 특히 말옷과 둥근고리큰칼은 아라가야 사람들의 쇠 다루는 기술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말 갑옷과 함께 함안 출토 아라가야 유물 중 최초로 보물로 지정됐다.
가야에서 신라로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 삼국시대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6세기 초반에 이르면서 가야‧백제‧신라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압박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아라가야는 외교를 통해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100년 넘게 지속된 나제 동맹은 와해된다. 554년 신라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에 승리한 뒤 큰 장애물 없이 가야로 진출했다. 결국 6세기 중반 아라가야는 대병大兵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함안
아라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후에도 옛 아라가야 땅은 해안과 내륙을 잇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됐다. 신라의 진흥왕은 지방의 군사 조직인 소삼정召彡停을 설치하기도 했다. 757년(경덕왕 16년) 군의 명칭이 ‘함안군咸安郡’으로 변경됐다. 신라는 속현으로 현무현과 의령현을 두어 관할했다. 그 중심지는 과거 아라가야의 중심지가 아닌 지금의 성산산성 남쪽 일대로 보이는데 이곳에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지방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한 승관직僧官職인 군통郡統이 파견됐다는 기록도 창림사昌林寺 탑기塔記에 나온다. 이를 통해 아라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함안 지역이 여전히 정치적·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함안 성산城山(139.4m) 정상 부분에 있는 산성이다. 성벽의 윗부분이 많이 허물어져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처럼 보이나, 1991년부터 4년간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는 납작하게 다듬은 모난 돌들을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린 것이 확인됐다.
규모는 면적 227,821㎡, 전체 길이가 1.4km로, 성벽은 안쪽의 작은 분지를 감싸면서 높은 곳을 따라 쌓았는데 그 모양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타원형이다. 동쪽과 남쪽, 서쪽의 성벽에서 성문터가 발견됐고, 성의 안쪽에는 물을 저장하던 시설과 건물터 네 곳 정도가 확인됐다.
성산산성은 <여지도서輿地圖書> <함주지>에 ‘가야고성加耶古城’으로 기록돼 있다. 성산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아라가야가 신라에 점령됐을 때 신라군에 맞서 싸우던 장군이 전쟁에 진 것을 원통해하며 울면서 성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뒤부터는 장군을 본 사람도 없고 장군의 행적이나 사후의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성산산성에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진 아라가야 장군의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성산산성을 발굴할 때 목제품, 과일의 씨와 함께 신라 시대 유물인 신라 기와, 깨진 토기 조각이 나왔다. 또 700년 전의 연꽃 씨앗도 출토됐는데, 그 싹을 틔운 것을 ‘아라홍련’이라 한다. 동문 터 안쪽에서는 300여 점의 목간木簡도 출토됐다. 이 목간들은 산성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밝혀줄 소중한 자료이다. 사적 제67호.
700년의 기다림 ‘아라홍련’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함안 성산산성을 발굴 조사하던 중 연못에서 옛 연씨를 수습했다. 그중 두 알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 년 전 고려시대의 연꽃 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함안박물관과 농업기술센터는 공동으로 씨앗의 싹을 틔우기 위해 씨담그기를 하였고, 세 알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분갈이 등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은 끝에 2010년 7월 첫 연꽃이 피어났다. 700여 년의 세월을 견뎌 연붉은 빛깔의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우리 앞에 드러낸 것이었다. 아라홍련阿羅紅蓮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함안이 아라가야의 옛 땅으로 기억됐다는 기록들(<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착안한 것이다. 마치 그 모습은 고려 불화나 불상에서 보이는 연꽃대좌를 연상하게 할 만큼 우아하고 아름답다.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
군북면 방어산 능선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마애불이다. 너비 약 7.5m, 높이 약 6m의 암벽 면에 4.5m에 이르는 본존불本尊佛 입상立像과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 입상이 선각線刻돼 있다. 우측의 협시보살 아래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를 통해 불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임을 알 수 있다. 선으로 새긴 마애불상의 선후 관계를 밝히는 데 기준이 되는 것으로 최고의 자료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