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오십송이 장미
헤엄
새벽 한 시의 꽃 도매시장은 고요했다. 24시간 운영이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도 많았다. 고무 양동이에 꽃이 종류별로 꽂혀 있었고, 각종 꽃향기가 뒤섞여서 풍겼다. 가게마다 가게명이 적힌 푯말이 꽂혀 있었고, 계좌번호로 주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스팔트 바닥을 거닐면서 다양한 꽃을 눈에 담았다. 평소 꽃에 문외한인 나는 꽃집에 방문할 때마다 주로 안내판에 적힌 꽃의 이름과 꽃말을 천천히 읽곤 했는데, 도매시장 내에는 안내판 없이 꽃만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이름과 뜻을 모른 채로 오로지 꽃의 생김새만 쳐다보는 것은 낯설었다. 내가 각양각색의 꽃을 바라보는 사이에 엄마는 가게마다 노란색 프리지아가 있는지 살폈다. 현성이 친구 두 명은 두리번거리며 함께 노란색 프리지아를 찾아다녔다.
엄마는 자식들의 졸업식에 갈 때마다 노란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노란색 프리지아를 고른 이유를 물으면, 엄마는 움푹 들어간 오른쪽 보조개를 보이며 답했다.
“그냥 예쁘잖아.”
나는 졸업식마다 프리지아를 건네는 엄마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위해 꽃말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졸업은 끝맺음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기에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뜻을 가진 노란색 프리지아와 잘 어울렸다. 노란색 프리지아는 내가 유일하게 꽃말을 정확히 기억하는 꽃이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도매시장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노란색 프리지아를 원하는 양만큼 구매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가게마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꽃이 있었다. 붉은 장미였다. 엄마는 가게마다 붉은 장미의 가격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현성이 친구들은 엄마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한 명은 꽃집마다 장미꽃 한 송이의 가격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고, 한 명은 백오십송이를 살 경우 필요한 돈을 얼추 계산했다. 우리는 가장 짙게 붉은 장미꽃이 담긴 양동이 주변을 서성거렸다.
“엄마, 프리지아 말고 장미 사도 괜찮은 거야?”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빨갛고 예쁘잖아.”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엄마는 빨간색이 돈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미신을 굳게 믿는 엄마를 볼 때면 종종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엄마가 자주 쓰는 물건은 죄다 빨간색이었다. 지갑, 휴대폰 케이스, 안경까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빨간 바지, 빨간색 후리스, 빨간색 양말, 빨간색 목도리, 빨간색 후드티를 사줬고, 나는 의도치 않게 온몸에 빨간색을 두르고 다니게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빨간색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작은 신념이 생겼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남색 체육복이나 검은색 후드티만 입고 다녔다. 다만, 지금의 내 옷장에는 꽃무늬로 된 옷이 종류별로 있다. 특히 잔꽃 무늬 원피스를 즐겨 입곤 했는데, 빈티지 가게에서 발견한 붉은 잔꽃 무늬 나시 원피스가 내 마음을 울린 이후로 작은 신념은 손쉽게 무너졌다. 나는 단색으로 빨간 건 질색이지만, 꽃무늬와 뒤섞여서 정신없이 화려한 붉은 색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내 옷의 주도권이 엄마에게 있었을 때, 빨간색은 그저 피하고 싶은 색이었다. 더 이상 내 옷에 엄마가 크게 관여하지 않는 지금은 종종 엄마가 빨간색에 깃든 미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곱씹어보곤 했다.
도매시장 내에는 꽃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다. 가게는 한 사람이 들어갈 틈만 보였다. 사람이 지나갈 통로보다 물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리본 끈이 색깔별로 배치되어 있었고, 캘리그라피가 적힌 축하용 엽서도 있었다. 원예 가위와 각종 씨앗을 판매하기도 했다. 구석에 고무 양동이가 쌓여있는 걸 보니, 도매시장 내에 입점한 가게들은 주로 이곳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게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포장용 비닐과 분홍색 리본 끈, 학사모가 그려진 카드 세트를 골랐다. 계산대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 사장님은 먼지떨이를 손에 쥐고 물품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사장님은 계산대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음에 또 오라며 흑백으로 출력한 주차권 한 장을 건넸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네 명이 모두 모였다. 엄마는 왼손에 차키를 쥐었고, 오른손에는 꽃 포장 용품과 카드 세트를 들었다. 나와 현성이 친구들은 신문지에 돌돌 말린 장미꽃을 오십 송이씩 소분해서 나눠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장미 향이 풍겼다. 우리는 장미꽃을 끌어안고서 주차장까지 걸었다. 서로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우리는 자동차 트렁크에 백오십송이 장미를 실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왼쪽에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엄마의 손이 보였고, 자동차 미러 너머로 뒷좌석에 앉은 두 명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거리는 주황빛 가로등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거북이의 비행기라는 곡을 들었다. 친구들이 현성이가 가장 자주 듣는 곡이었다며 틀어준 것이었다. 체육대회 당일이면 교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곡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가사처럼 파란 하늘도, 비행기도 없지만, 괜스레 햇빛 아래 운동장 스탠드에서 흙먼지를 맞았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달리기가 끝난 뒤 선생님이 찍어준 보라색 숫자 도장을 내게 보여주는 현성이의 주먹 쥔 손, 다람쥐 동물 잠옷을 입고 계주 선수들을 응원하던 목소리, 내 옆에 앉아 막대풍선을 치던 소리 같은 것들을 말이다. 지난여름 이후로 종종 잊고 있던 사소한 장면들이 갑작스레 선명해지곤 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현성이가 노래를 부르짖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뒷좌석에 앉은 친구들이 현성이와 함께 노래방에 갈 때마다 찍은 영상을 연속 재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 속 현성이는 두 눈을 감고 형형색색의 노래방 조명 아래에서 불안정한 음으로 발라드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하는 현성이는 맑은 소리를 내며 동요를 불렀던 것 같은데, 영상 속에서는 변성기가 온 뒤 쇳소리를 높게 올리려고 애쓰는 영락없는 남자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현성이가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엄마가 말했다.
“집에서 샤워할 때마다 노래를 흥얼거리던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억지로 음을 올리려는 현성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종종 웃었다.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현성이는 변성기가 오기 전, 나와 점점 키가 비슷해지는 그즈음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현성이는 변성기가 오고 난 뒤,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난 뒤의 모습일 터였다.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현성이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내가 목격하지 못한, 오직 현성이의 입으로만 전해 들었던 순간들을 조금씩 더듬었다. 체육대회에서 반별 티셔츠로 노란색 텔레토비 옷을 입은 모습, 반장 선거에 나가서 능청스럽게 공약을 밝히는 모습, 유일하게 계절을 가늠할 수 있는 교정의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순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웃음과 말 사이의 적막이 길어질 때쯤, 엄마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말할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간판 불을 꺼둔 엄마의 사무실에서 우리는 장미꽃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사무실은 커피믹스가 종류별로 올려져 있는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는 그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엄마는 가시 제거기로 장미를 손질했고, 친구 두 명은 비닐 포장을 했다. 나는 비닐 포장된 장미가 흘러내리지 않게 분홍색 리본 끈을 묶었고, 바닥에 쌓인 가시를 틈틈이 치웠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창문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포장된 장미는 물이 담긴 양동이에 꽂아두었다. 새벽 세 시 반이 넘어가자 엄마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줬다. 나는 그동안 혼자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학사모가 그려진 카드에 어떤 문장을 쓸지 고민했다.
‘장미꽃을 선물합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한 문장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웠다.
머리를 굴리다가 사실과 거짓을 섞어보기로 했다.
‘현성이 친구들과 함께 포장한 장미입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현성이 친구들과 함께 포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축하한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단언하기 어려웠다. 축하의 의미를 담아 꽃을 구매한 것은 맞았지만, 정말로 내 마음이 그들의 졸업을 온전히 축하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입안이 텁텁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이틀 내내 먹은 육개장과 꿀떡은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현성이가 처음으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었다고 문자로 보내준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줄 몰랐다.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는 사진 속 현성이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지 않았다. 현성이는 수능이 끝나면 크게 웃을 때마다 보이는 토끼 이빨을 교정하고 싶어 했다. 6월 모의고사를 보고 난 뒤에는 재수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말했다.
“에이 그 뻐드렁니가 니 매력인 걸 받아들여.”
“많이 무섭지? 벌써 포기하지 말고 일단 계속 해. 솔직히 엄마가 지금 다 돈 내줄 것처럼 말해도 딱히 돈 없으실 거야. 끝까지 해봐.”
내 말을 들은 현성이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누나는 치열이 고르니까 내 마음 몰라. 이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데!”
“누나! 나는 대학 가면 학원 알바 열심히 해서 돈 잔뜩 벌 거야. 내가 모은 돈으로 교정도 하고, 엄마랑 아빠 호강시켜 드릴 거야. 그러니까 나는 꼭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더위가 한풀 꺾였다. 선선한 바람이 내가 입은 상복에 스쳤다. 내 머리카락에는 흰색 리본 핀이 달려있다. 나는 가족들과 검은색 리무진을 탔다. 다 같이 타는 리무진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창문 너머에는 녹음 진 나무가 보였다. 창밖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이상할 정도로 아주 맑았다. 내 귓가에는 현성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누나 우리 지금 개쩐다! 리무진 처음 타잖아!”
상복은 둘째 날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음식 세팅을 돕는 직원도 둘째 날부터 근무하신다고 했다. 나는 겨자색 도트 무늬 가디건과 검정색 프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디건과 깔맞춤으로 겨자색 도트 양말도 신고 있었다. 장례식 첫날에 온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악수하다가 내 양말을 보고 눈동자가 흠칫 흔들렸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열 개의 발가락을 동시에 발바닥 쪽으로 구부렸다. 검정색 프릴 원피스 안에 입은 검은색 속바지가 점점 축축해졌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돌돌 말아 팬티 안에 겹쳐두었다. 그날 나는 삼 개월 동안 하지 않았던 정혈이 갑작스레 시작됐다. 늦은 밤 한걸음에 찾아와 준 언니들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진짜 미안한데 혹시 나 생리대 좀 사줄 수 있을까? 지하에 편의점이 있을 거야.”
조금 뒤 언니들은 내게 검은 봉지를 건넸다. 생리대와 칫솔과 치약, 검은색 양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겨자색 노트 양말을 검은색 양말로 갈아 신었다. 내게 필요한 것만 챙겨준 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으며 만난 사이였고, 글에 관한 이야기만 나눴다. 내가 쓰는 글은 말할수록 한없이 초라해지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매일 쓰는 일기에 뒤엉켜 있는 두터운 감정의 맥락을 하나씩 정리하는 기분으로 썼다. 꼬인 실을 풀다가 더 꼬여진 실을 조심스레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미간을 구기다가도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실을 풀어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언니들은 손과 입으로 내가 쓴 이야기를 읽었다. 나는 펜을 쥐고 글 사이에 느낀 점을 표시하는 언니들의 손, 둥글게 둘러앉은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글에 관해 말하는 언니들의 목소리들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언니들이 떠난 장례식 테이블에는 육개장과 각종 안주를 먹은 흔적이 아닌, 육공 바인딩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를 되돌아보는 나의 습관을 기억해 준 것이었다. 나는 그 노트에 일기 쓰기를 시도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두서없이 적는 시간을 누구보다 좋아했지만, 단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내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았다.
막연히 장례식장에서는 온종일 울음으로 가득 찰 것 같았다. 그러나 현성이의 장례식은 복작복작한 분위기였다. 주류를 마시고 얼굴이 새빨개진 아빠의 지인들, 열 살 이후로 본 적 없는 친척들의 낯선 얼굴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교회 사람들과 동네 여자들, 다양한 색깔의 교복을 입고 찾아온 현성이의 친구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어두운 옷을 입고 찾아와 준 내 친구들까지. 나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이 찾아와준 사람들을 맞이했다. 상례 예절이 낯선 친구들이 영정 사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도록 조곤조곤 안내하기도 했다. 새벽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길 때면, 나는 이 모든 게 쇼 같다고 생각했다. 현성이의 얼굴은 영정 사진에 박혀 있지만, 현성이의 몸은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만질 수 있는 현성이의 몸은 장례식장에 없는데, 사람들은 마치 현성이가 정말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사진 속 현성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고, 말을 건넸고, 기도했다. 한 번이라도 현성이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교복을 입은 현성이의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다. 추석 연휴와 겹쳤던 장례였음에도, 이틀 내내 방문한 친구들도 있었다. 평소에 말로만 듣던 이름을 교복 명찰로 읽을 수 있었다. 워낙 현성이가 날마다 언급하는 친구가 달라서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 장례식에 머문 얼굴들은 점점 낯익어졌다. 육개장으로 끼니를 채운 현성이의 친구들은 조문객들에게 방명록 작성 방법과 조의금 봉투를 두는 곳을 안내했고, 옹기종기 모여서 끊기지 않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덕분에 장례식장은 웃음과 대화로 가득했다. 긴 시간 동안 이어지던 대화가 멈출 때면, 내가 직접 친구들에게 찾아가 육공 바인딩 노트 내지를 한 장씩 건넸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여기에 적어 보는 거 어때요? 현성이한테 마지막으로 하지 못했던 말을 쓰는 편지여도 좋고, 오늘의 일기여도 좋아요.”
여태껏 나는 마음 깊숙이 박힌 감정의 덩어리는 말보다는 글로 쓸 때 더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바라보고 담소를 나눌 수도 있었지만, 처음 만난 현성이 친구들에게 피상적인 대화를 건넬 것 같았다. 그럼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조금 더 깊숙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현성이와 어떻게 알고 지낸 사이인지, 현성이는 어떤 친구였는지, 현성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동안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지금 장례식장에 찾아온 마음이 어떤지. 조심스레 묻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내가 현성이의 친구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처음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을 때, 골똘히 고민하던 친구들이 점차 한 줄씩 쓰기 시작했다.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또 다른 종이를 달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각기 다른 글씨체로 적힌 편지가 노트에 쌓이고 있었다. 그 편지를 현성이가 직접 읽을 순 없겠지만, 노트를 펼치면 언제든 현성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매일 쓰던 일기장을 펼치는 마음으로 펜을 들어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한여름에 현성이가 갑작스레 중환자실에 들어간 이후로, 엄마는 밤마다 찬양을 틀어두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방은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크기였다. 우리는 나란히 방바닥에 누워서 각자 다른 이불을 덮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등을 돌린 채 잠들었다.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당기고, 손으로 콧볼을 꽉 눌렀다. 5초간 숨을 참고 손을 떼어냈다. 나는 아주 작은 인기척에도 쉽게 잠에서 깨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귓가에는 엄마가 틀어둔 찬양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내 키가 엄마의 무릎에 닿았을 때부터, 엄마는 우는 건 매우 나약한 짓이라고 했다. 아빠가 화장실 문을 망치로 부쉈을 때, 오빠가 동생과 싸우다가 창문을 깨뜨렸을 때, 엄마가 내 앞에서 더 이상 이 집에서 못 살겠다고 식칼을 목에 가져다 댈 때,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오토바이가 쌩쌩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나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쳤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였다.
코로나 감염 방지로 인해 중환자실 면회는 가족 중 단 한 사람만 딱 한 번 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는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으나,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궈야 할 일상은 지속됐다. 엄마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엄마는 교회의 대예배실에서,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방에 누워서, 온종일 휴대폰으로 설교나 찬양을 들었다.
그해 여름은 비가 사무치게 많이 내렸다. 침수로 인해 맨홀 구멍에 빠진 사람들, 방문을 열지 못해 물에 잠긴 사람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지 못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물에 잠겼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성이는 친구들과 계곡에 놀러 갔다가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주위에는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숨을 못 쉬더라도, 집에 데려와서라도 키울 거야.”
엄마는 현성이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에게 말했다.
나는 지겨웠다. 현성이의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비를 먼저 염려했다는 것이, 나아질 것 같으면 고꾸라지는 집안 사정이, 매일 아침이 밝아온다는 사실이. 자꾸만 신을 찾게 되는 엄마의 삶에 대해서도. 의사가 우리 가족에게 연명 치료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어색했다. 대화를 나눌 때면 누군가를 비방하는 말이 들리곤 했다.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이 있으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진심 어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주춤거렸다. 안전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가족은 어떻게 논의할 수 있는 거냐고. 의사에게 되묻고 싶었다.
두 달간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현성이는 결국 죽었다. 현성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엄마는 쉰 살,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사망 선고를 받은 날, 간호사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동생분 사망하셨어요. 어머님이 지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신 것 같아서 따님께 먼저 말해요. 마음 추스르고 전해주세요. 혹시 장례식장은 잡으셨을까요?”
나는 믿기지 않았다. 장례식장을 미리 잡아두어야 한다는 것도, 동생의 죽음을 내 입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도. 마치 이미 동생의 죽음을 예견하고 부지런히 준비했어야 하는 것처럼 들렸다.
텅 빈 장례식장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려하게 장례식장 앞을 지키던 화환들도 모두 사라졌다. 오로지 가족들이 벗어둔 검은 상복들만 놓여 있었다. 머리카락에 꽂아둔 흰 리본까지 빼고 난 뒤, 장례식장 밖으로 나갔다. 너무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제야 너의 어깨가 좀 가벼워질 것 같았는데, 더 무거워졌구나.”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으렴.”
어릴 적 동네에서 봤던 아주머니들이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례식에서 큰 소리로 싸움 나지 않게 주변을 잘 신경 써야 해.”
“집으로 돌아가면 유품은 그대로 두면 안 돼. 너네 엄마가 싫다고 해도 꼭 정리해야 해.”
옆집 사는 아주머니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내 귓가에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 목소리들은 주로 나를 ‘가족을 보살피는 딸’로, ‘엄마를 챙기는 딸’로, ‘중심을 잃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는 딸’로 이끌었다. 딸이 아닌 ‘나’를 위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조심스러운 말로, 진심이 서린 눈동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건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좀 닥치면 안 될까?
나는 대체 왜 현성이가 물에 빠진 것인지, 왜 두 달간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게 된 것인지, 왜 더 이상 숨 쉴 수 없게 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 안에서 수많은 ‘왜’를 되물을수록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검열했다. 현성이가 계곡에 빠져서 응급실에 갔다는 전화를 받고 난 직후, 현성이 상태가 얼른 낫길 바라면서도 병원비를 낼 수 있는지 걱정하던 조바심을. 중환자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쌓이는 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노파심을. 연명치료를 결정하라는 의사의 말에 정서적인 대화가 단절된 가족 안에서 느낀 막막함을. 매일 내 옆에서 찬양을 틀어두고 자는 엄마의 휴대폰 전원을 끄고 싶었던 마음을. 엄마한테 힘이 되어야 한다고, 곁에서 네가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제발 그만 말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분노를, 점점 네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고 말하며 장례식장에서 내 등을 쓰다듬었던 어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던 마음을.
현성이의 죽음은 내가 처음 겪는 아픔이었지만, 내가 슬픔을 겪어내는 방식은 익숙했다.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밖에 나가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었다. 혼자서 웅크린 채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엄마에게 휴지와 호두과자를 건넬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면 현성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릴 적 사물함 손잡이에 붙여둔 스티커, 시멘트를 발라서 바닥에 손수 붙인 화장실 타일, 문틀에 걸어둔 운동용 철봉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혼자서 현성이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계곡에 메고 간 가방에는 갈아입지 못한 여분의 바지가 있었다. 반으로 접힌 6월 모의고사 시험지 한 묶음도 빼냈다. 가방에 달아둔 에펠탑 키링도 떼어냈다. 책상에는 각종 문제집과 립밤, 비타민, 귀마개가 놓여 있었고, 옷장에는 교복과 더 이상 입지 못할 옷들이 있었다. 나는 하나씩 꺼내서 파란색 비닐봉지에 담았다. 모든 물건을 정리하니 총 다섯 봉지가 나왔다. 다섯 봉지면 정리되는 짐이라는 게 사무치게 슬펐다. 진이 빠질 정도로 더 많은 봉지가 나왔더라면 미련 없이 현성이를 보내줄 수 있었을까. 나는 현성이가 더 많은 물건을 쓰고, 더 다양한 옷을 입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성큼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느새 내 얼굴에는 땀과 눈물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현성이가 쓰던 안경은 버리지 못하고 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엄마의 한 마디였다.
“너는 너 슬픔만 아니?”
동생을 잃은 누나의 마음보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이 더 사무치게 슬플 것이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믿을 수 있는 가족이 둘뿐인데도, 서로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나는 엄마의 슬픔을 함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친한 친구를 잃은 열아홉 살 아이들의 마음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티 내지 않고, 꾹 참으면서 매일을 보냈다. 내가 남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엄마만큼은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현성이를 잃은 이후에 느끼는 마음을 가장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적을 수밖에 없는 내 가슴에 얹힌 복잡한 덩어리를 함께 느끼고 나누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썼던 시도가 모두 오해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아침마다 텀블러에 큰 얼음 두 개를 넣고 냉침한 차를 담았다. 차가운 물에 찻잎을 10시간 동안 담그고 기다리면, 쓴맛이 줄어들었다. 나는 현성이가 없어도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아침마다 머리를 말리면서 다양한 패턴 무늬의 옷을 고를 수 있었다. 다음 날 지장이 가지 않도록 잠자는 시간을 신경 쓸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내가 겪은 슬픔이 마치 실체 없는 일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현성이의 죽음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것이라 했다. 나는 죽음의 크기를 사람들의 말로만 가늠하게 됐다. 점점 내 주변은 현성이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처음 만난 사이에서 가볍게 가족 관계를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게 어려웠다. 올해 여름에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길거리를 걷다가 칼에 찔린 사람들, 음주 운전으로 차에 치인 사람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쓸쓸하게 죽은 보호 종료 청소년들, 애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 매일 가는 학교에서 보호받지 못한 교사들까지. 수많은 죽음을 스마트폰 스크롤 하나만 내리면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어떤 날에는 눈물이 나왔다. 그러다가 무표정한 채로 한꺼번에 많은 죽음을 손가락 하나로 스쳐 보내고 있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거리의 나무를 바라봤다. 아스팔트 도로에는 노랗고 붉게 물든 나무의 그림자가 비쳤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선선해진 공기가 내 살갗에 닿았다. 코끝에는 은행 냄새가 맴돌았다. 현성이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방귀를 뀌었을 때 나는 냄새 같았다. 가방에서 장례식에서 쓴 육공 바인딩 노트를 꺼냈다. 노트 첫 장에는 ‘결국은 사랑’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성이의 죽음이 믿기지 않을 때마다 그 노트를 꺼내 읽었다. 가지각색의 글씨체로 가득 찬 노트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현성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떠나간 이를 기억한다면,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집에는 찬양이 들렸다. 나는 끝나지 않는 찬양 소리에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것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방에 누우면, 천장 한구석에서 벽지가 울고 있는 게 보였다. 톡 건드리면 물이 쏟아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흐물거렸다. 장례를 마친 후에는 그 벽지에 거뭇한 물 자국이 남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곧바로 발견할 수 있는 짙은 색이었다. 손쉽게 지워지지 않고, 가릴 수 없는 크기였다.
*
‘현성이 친구들과 함께 포장한 장미입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카드 백오십장을 쓰고 나니 손목이 저렸다. 중지에 박인 굳은살에 열기가 느껴졌다. 평소에도 편지를 쓰는 걸 즐기는 나였지만, 얼굴을 모르는 한 학년 전체에게 짧은 쪽지를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한 글자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지만, 쓸수록 지금껏 쓴 게 아깝다는 생각에 몰려오는 졸음을 꾹 참고 끝까지 썼다. 새벽 다섯 시였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고등학교 졸업식이 진행될 터였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가 틀어둔 찬양이 들렸다. 나는 그 찬양을 들으며 쪽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개운해진 얼굴로 옷장 문을 열었다. 화려한 꽃무늬 패턴 사이로 연두색 단색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밝고 단정한 옷이었다. 남색 떡복이 코트나, 검정색 원피스를 입었을 수도 있겠지만, 검정색 원피스는 상복 같아서 싫었고, 남색 떡볶이 코트는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가 더 무거워져서 입지 않았다. 연두색 단색 원피스와 어울리는 스타킹으로는 회색 도트 스타킹을 골랐다. 도트는 꽃무늬만큼 내가 좋아하는 무늬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졸업식이었고, 그래서 더 내가 좋아하는 옷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현성이가 쓰고 다니던 안경을 썼다. 엄마는 검은색 정장 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었고, 남색 코트를 입었다. 평소에 자주 입는 검은색 롱패딩을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하니 차려입은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오늘도 늘 끼고 다니던 빨간 안경을 쓴 모습이었고, 목에는 금색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3학년 교실 복도는 고요했다. 창밖에는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인 몇몇 학생들이 보였다. 그들은 졸업 가운을 입고 포토존에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본 졸업식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현성이 친구들도 곧바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복도에서 1반부터 8반까지 반별 인원만큼 장미꽃과 카드를 분배했다. 3학년 1반 앞문에서 뒷문까지 일렬로 장미꽃이 놓여졌다. 복도에서는 장미 향이 진동했다. 한 명은 장미꽃을 끌어안은 채로 앞문을 열었다. 한 명은 카드를 한 움큼 손에 쥐고 뒷문을 열었다. 그들은 교실 문을 열고 장미꽃과 카드를 올려두었다. 모든 교실 책상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와 카드 한 장이 놓여졌다.
현성이가 다닌 고등학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였다. 엄마와 함께 등굣길을 걷는데, 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스팔트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학교 정문이 보였는데, 지금은 언덕까지 올라가는 버스 노선이 생겼다. 점심시간에 학교 밖에 나가 몰래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학교 앞 구멍가게는 사라졌고 교내 매점이 생겼다. 삼 년 내내 공사 중이던 아파트 단지는 완공된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이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신발 끈에 걸려 넘어지면 바로 무릎에 피가 날 것 같이 울퉁불퉁하던 아스팔트 도로도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날이 풀릴 때마다 붉은 벽돌 빌라 앞에서 수다를 떨던 할머니들이 쓰던 의자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선생님 몰래 가던 담벼락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학교를 세운 목사의 동상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번들거렸고, 조경이랄 것도 없던 학교에서 유일하게 계절을 가늠할 수 있었던 나무 한 그루도 꼿꼿이 그 자리에 뿌리 박혀 있었다.
강당으로 가는 길에 학사모를 쓴 아이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운동장에는 보호자들의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꽃다발을 들고 강당으로 향하는 보호자들의 뒷모습을, 졸업 가운을 입고 셀카를 찍으며 걷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마와 나는 나란히 걸었다. 엄마는 늘 나보다 빠른 걸음으로 급하게 걷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나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걸었다. 우리의 손에는 꽃다발이 없었지만, 서로의 손을 잡을 순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가 금세 땀이 차서 손을 떼어냈다. 강당에 들어서자 반별로 직접 만든 졸업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나와 엄마는 맨 오른쪽 좌석에 앉아서 그 영상을 봤다. 그 영상 속에는 벚꽃이 피어난 나무 아래에서 반별 단체 사진을 찍은 현성이가 있었다. 영상을 보는 시간 동안 친구의 얼굴이 나오면 서로를 놀리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뒤섞인 웃음소리 사이로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상이 다 끝날 무렵에는 3학년 1반 아이들이 일어나서 무대 주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졸업장을 받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름이 호명된 순으로 무대에 올라가 졸업장을 받았다. 한 명 한 명 졸업장을 받을 때마다 스피커에서 발랄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떤 아이들은 졸업장을 받고 난 뒤 무대에서 담임 선생님을 꽉 끌어안았고, 어떤 아이들은 화려하게 회전을 한 후 인사를 건넸고, 어떤 아이들은 다 같이 절을 했다. 졸업식 당일에 무대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할지 고민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3학년 8반까지 모두 호명되자 점점 더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고 내 정신은 점점 어수선해졌다. 졸업식 수여와 장학금 수여까지 끝이 났다. 교장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한 구절을 소개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기 8장 7절에 적힌 말이었다. 졸업은 고등학교 시절의 끝이지만, 동시에 사회로 향하는 또 다른 시작임을 이야기했다.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졸업한 이후에는 또 얼마나 달라질지 기대를 품어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나중을 생각할 수 있는 열아홉 살의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느끼는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겪는 슬픔을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납작하게 판단해 버린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현성이가 죽은 이후로 나는 두 사람의 삶을 사는 기분이 들었다. 현성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됐을 때, 차라리 내가 숨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매일 빌었다. 수많은 만약을 상상했다. 장례를 치른 뒤 죽고 싶단 생각이 들 때면, 현성이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도대체 왜 계속 삶이 계속되는지 알 수 없었다. 현성이의 사고 이후로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들이 전부 버겁게 느껴졌다. 더 이상 현성이가 겪지 못할 미래를 가늠해 보려는 노력, 내 삶에서 이어질 미래를 상상해 보려는 노력, 학사모를 쓴 열아홉 살의 아이들이 그려갈 미래를 응원하려는 노력 같은 것들이 내 머릿속을 뒤엉켰다. 그러니까 나는 내 삶에서도 분명히 미래가 있을 터인데,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지난한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분명히 끝이 있을 거라고 믿어보면서도, 금세 내가 느끼는 복잡한 마음에 짓눌려 있었다.
성경 구절만 선명히 기억에 남고 그 이후에 길게 이어지는 말들은 전부 흘려들었다. 스피커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연설을 마친 뒤 명예 졸업장 수여가 시작되었고, 현성이의 이름이 호명됐다.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엄마의 손을 매만지다가, 혼자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입은 연두색 원피스에는 엄마의 눈물 자국이 조금 묻었다. 회색 도트 스타킹은 보풀 없이 말끔했고, 내가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강당에는 잠시동안 내 발소리만 크게 들렸다. 모두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찰나에 무대 위로 올랐다. 사회자 선생님은 명예 졸업장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내게 졸업장을 건네는 교장선생님과 악수했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표정을 드러내야 하는 건지 모르는 채로 굳었다. 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시끄러운 박수 소리, 또각거리는 신발 소리,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것들이 내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무 많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기에 무대 너머로 보이는 시계를 쳐다봤다. 시침과 분침이 멈춰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후 엄마에게 명예 졸업장을 건넸다. 교가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강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동차가 꽉 차 있는 운동장을 혼자 걸었다.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구름다리를 건넜다. 익숙한 교실 문이 보였다. 복도는 고요했다. 복도 바닥에는 창문 모양대로 들어선 햇살이 보였다. 나의 그림자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늘진 복도에 들어선 볕뉘에 몸을 녹였다. 교실 주변을 서성거렸다. 3학년 1반 앞에 멈춰 섰다. 교실 창문 너머로 급훈이 적힌 종이를 쳐다보았다.
‘3-1=1 삼 학년 일반은 하나’
아무도 없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빈 교실의 모든 책상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의자에는 아이들이 입고 온 잠바가 걸쳐 있었고, 각종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딱 한 개의 의자에만 아무것도 걸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칠판을 쳐다봤다. 졸업식이 끝났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첫댓글 이전에 썼던 글까지 한 편의 글로 구성한 것을 보며 저도 이전에 썼던 글을 버려두지(?) 말고 꼭 퇴고를 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해봅니다👍 이렇게 완성되어갈 혜엄님 글이 진짜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하고요!
주민등록증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었다는 부분이 이른 나이를 부각해서, 장례식장에 없는 동생의 몸을 안고 싶었다는 부분이 현실적이어서, 현성이와 어떻게 알고 지낸 친구들인지 궁금했다는 부분이 혜엄님 마음을 잘 나타내주어서 특히 와닿았습니다.
리무진을 처음 탄다고 신나하는 동생의 말은 - 신나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으로 써보면 어떨까 한번 생각해보았어요.
글들 통해 저한테도 현성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단편 소설이네요. 잘 정돈 된 문장으로 풀어 나간 이야기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삶에서 일어난 일을 꾸역꾸역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필자의 노력이 보여서 뭉클했습니다. 이 글이 조금 더 좋아지기 위해서 이 아픔과 고통을 해석한 부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동생의 죽음, 가정의 곤란을 의미화하는 작업이 곧 메시지가 되겠죠. 그부분을 벼려서 넣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