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Costco 에서 한 블럭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른바 '수퍼 월마트'가 있어서, 때때로 잘 이용합니다. 둘 다 할인매장의 대표적인 곳이지만, Costco 가 조금 더 고급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회원제인데 비해, 월마트는 저가 상품 위주로 회원제와는 상관없는 곳이고, 또 이곳은 이른바 '수퍼 월마트'라 하여 다른 곳에서 다루지 않는 식료품도 꽤 많이 다루고 24시간 영업한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와인 가격도 꽤 저렴한 편인데, 이곳에서 요즘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는 프랑스산 피노 느와가 있어 한 병 집어 왔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프랑스산 피노 느와이고, 가격도 8달러 대이니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궁금해서' 한 번 사본 와인입니다.
프랑스산 피노 느와라고 해도 이런 10달러도 안 되는 막와인부터 수천달러까지 나가는 로마네 콩티까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는 집에 가니 닭 가슴살 볶음밥을 해 놓았습니다. 아마 처형이 가져다 준 테리야키가 남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남은 음식들이 있을 때는 그저 볶아버리거나 혹은 잡탕을 만들어버리거나... 재활용이라는 면에서 참 꼼꼼한 면을 보여주는 아내는 제게 편안히 먹을 수 있는 한 끼니를 만들어 주면서, "와인을 뭐 할 거예요?"라고 물어봅니다. 역시... 이제 아내가 먼저 물어보는 것은 아내가 그 '업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엔 절대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시간은 정말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싣고 흐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뒤에 무엇이 있을지 미리 안다면, 인생은 재미 없는 게 되어 버릴 겁니다.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이 '내가 모르는 어떤 미래'의 밑거름이 될 거라는 믿음, 사실은 그것이 인생을 가장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 이 와인은 첫맛은 참 밍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음식과 함께 먹으니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향이 확 튀는 것도 아니고, 바디가 튼실한 와인도 아니지만, 하루를 열심히 살고 집에 들어왔다고 자부하는 저의 몸에 쌓인 피곤을 풀어내주는데는 이런 편안하고 막 즐길 수 있는 와인이 훨씬 좋습니다. 일단 격식 안 잡아도 되고(언젠 잡았나? 하하) 그냥 편히 꿀꺽꿀꺽 마셔보기도 하고, 향을 맡아보기도 하고... 분명한 건, 술이 조금 오르고 나면 세상은 참으로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와인도 물론 더욱 편해지고 말입니다.
프랑스 와인이지만 프랑스 말을 고집하지 않고, 병에 영어로 '비스트로 와인'이라고 적어 놓은 바르통 앤 구스티에의 피노 느와. 레이블이 참 편안합니다. 비스트로라는 말이 원래 작은 식당을 의미하는 것이고, 미국보다는 프랑스, 이태리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동네 어귀나 골목 근처의 테이블 몇 개 안되는 작은 식당을 연상하면 될 성 싶은데, 아무튼 유럽에서의 '비스트로'는 그냥 편안하게 앉아 친구들과 밥 먹으며 와인 마시고 하는 그런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 와인이 그냥 그만큼 편안하다... 는 의미의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조금 마시다보니 맛에 미묘한 변화가 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냥 부드럽게만 느껴지던 와인에서 베리의 향과 맛이 좀 강해지는가 싶더니, 향이 차츰 깨어 옵니다. 피니시도 나쁘지는 않은 성 싶습니다. 이 와인은 말 그대로 '뱅 드 따블'일 터. 생산지도 특정지역으로 적혀 있지 않지만, 그래도 프랑스산 피노 느와의 기본은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와인들이 가끔 눈에 띌 수 있는 것은, 미국 내에서의 와인에 대한 인식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과거 프랑스 와인이라면, 무조건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고급 와인만을 생각하고, 그 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았던 것은, 얼마전까지 와인 소비 초기 단계에 있었던 한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온 약 20년 전만 해도 와인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이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와인 붐이 불기 시작하고, 와인을 마시는 인구가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 열풍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와인애호인구의 저변이 넓어지며, 사람들이 진짜 '와인 맛'을 알게 되자, 그때까지 '관념으로만 와인을 마시던' 사람들도 '실체로서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애호가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람들 눈 밖에서 들어오지 않던 온갖 와인들이 수퍼의 진열장을 야금야금 차지하기 시작했고, 지난 10여년동안 와인의 대종은 고급 와인에서 대중적인 와인으로, 하지만 어느정도 격을 갖추고 있는 와인들로 그 헤게모니가 이전됐습니다.
예, 과거 같았으면, 이런 와인이 수입됐다면 사람들도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이고, 사실 수입사부터가 이런 와인 자체에 관심따위 갖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와인 인구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겉멋의 거품'이 빠진 것은 분명 와인애호가들에겐 좋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수입사들도 눈 부릅뜨고 '저렴한 가격의 훌륭한 와인' 을 찾게 된 것입니다. 물론 미국 안에서의 양조기술도 크게 발달되면서 수입 와인들과 경쟁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불러일으켜 미국 와인 양조산업 자체가 르네상스를 맞는 '윈-윈 시추에이션'이 된 것도 미국내 와인애호가들에게는 큰 복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수혜자 중 하나인 셈이고.
아무튼, 이 와인의 레이블에 그려진 두 친구의 모습처럼 아내와 저도 꽤 오랜 시간 식탁에서 '와인'이라는 주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결국 아이들 이야기로 빠져서, 성당 이야기도 하다가 어쩌다가 씻고선 잠이 들었습니다. 아주 편안했습니다.
시애틀에서...
편안해 보입니까?
예, 편안했습니다...
첫댓글 에티켓 처럼 편한 칭구랑 마시면 조을거 같네요....더불어 평화로워보이네요...
그리고 편안한 글 .. 늘 읽을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
더 이상 무슨 와인이 필요하리오..^^
에티켓 정말 예뻐요 -.-ㅎ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마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저 볶음밥이 더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