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향교陽川鄕校(서울시 기념물 제8호/서울 강서구 양천로47나길 53)
1. 양천陽川의 연혁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재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는 율진군栗津郡 속현으로 공암孔巖이라 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수주樹州에 속했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양천陽川으로 된 후 그 이름을 조선 내내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14년 8월 21일 김포金浦·양천陽川을 병합하여 김양金陽으로 했으나 2년 후인 태종 16년 7월 30일 다시 분할돼 양천으로 복귀했다.
그 후 고종 32년(1895년) 5월 26일 전국을 23부府체제로 개편하면서 인천부에 속해 양천군이 됐으나 1년 뒤인 고종 33년(1896년) 윤5월 1일 13도 편제가 되면서 경기도 인천부에 속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에 김포군, 통진군과 합쳐 김포군이 됐는데 이때 양천현청이 있는 곳은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가 됐다.
* 세종실록지리지/경기/광주목/금천현의 기록에는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가 1년 만에 파하였으며”라고 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태종 때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후는 1963년 1월 1일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서면 부천군 오정면 오곡 및 오쇠리를 영등포구에 편입 양동, 양서 출장소가 설치됐다. 1967년 12월 31일 양동출장소 폐지가 됐고, 1977년 09월 01일 영등포구에서 강서구로 분구된 후, 1988년 01월 01일 다시 강서구와 양천陽川구로 분구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천향교가 있는 곳은 강서구다.
2. 양천향교 연혁
조선 초기 양천향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군현에까지 향교가 설치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도 향교가 있었을 것이다. 향교에 대한 기록은 『학교등록學校謄錄』 인조 24년 7월 6일 양천현령이 경기감사에 올린 첩정牒呈에 나온다. 이 문서에서는 이때까지 향교가 제대로 지어지지 못했다고 했다.(양천향교 46쪽) 아마도 임진왜란 또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등록』 현종 5년(1664년) 12월 16일 기록에 의하면 양천과 과천의 교생 수가 5, 6명밖에 안된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경국대전』에 현의 학생정원이 30명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정도면 거의 향교로서 기능이 사라진 수준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기사는 『학교등록』 숙종 9년 8월 29일자 예조에서 올린 계목啓目(왕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장계를 살펴보니, 양천의 성묘聖廟가 기울어 허물어지고 터가 비좁아서 참으로 옮겨서 지어야 하는데 역량役糧과 재와材瓦도 이미 마련하고 갖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묘를 옮겨 짓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비록 금령이 있었으나 도신道臣이 이미 친히 봉심하여 계문하였으니 그간의 사세가 참으로 부득이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미 장계한 대로 시행하라는 내용으로 회이回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그대로 하라고 계하였다.(양천향교 47쪽)
이 내용을 보면 이미 대성전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옮겨지을 준비가 다됐는데 이전 임금의 명으로 짓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계목을 올린 후 숙종이 지으라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이때 옮겨 지은 것인데 원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양천향교 위치에 대한 그림은 1872년(고종 9년) 「양천현지도」와 김희성(1710~?)이 그린 「양천현아」가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도 있지만 부분도라 참고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양천현아」에 의하면 양현향교는 관아 뒤쪽 산등성이에 있다. 다른 향교는 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양천향교는 관아에 근접해 있다. 왜 여기로 이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종 때는 이미 향교 교육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에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지도층과의 연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에 김포군, 통진군과 합쳐 김포군이 되면서 양천향교 재산은 김포향교로 넘어가게 됐다. 당시 일본 총독부는 지역유림에 의해 자율적으로 운영하던 향교를 공공재산으로 인식하고 60% 이상을 보통학교 운영비로 전용했다고 한다. 지금 양천초등학교부지 역시 양천향교 땅이었다. 향교 운영비는 향사享祀 비용과 건물보수비가 대부분인데 일제가 전용하면서 유지비용을 지방 유림의 기부금으로 충당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양천향교 52쪽)
해방 이후인 1965년 ‘서울시 향교재단’이 설립되면서 양천양교 재산권을 가져오고 다시 양천향교로 재산권이 넘어갔다. 이후 양천향교에 대한 본격적인 보수가 이뤄졌다. 1969년 외삼문과 대성전을 보수했고, 1980년 11월 복원공사를 시작해서 1981년 11월 완공됐다.(양천향교 54쪽) 1990년 06월 18일 서울시 기념물 제8호로 등재됐다. 아마도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3. 양천향교 건축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를 보면 1981년 복원공사 전과 후의 차이가 많다. 1981년 이전 상태는 대성전 일곽과 외삼문과 내삼문 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대성전도 지금과 외형이 다르다.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 나온 짓기 전 모습을 보면 창호가 일반 주택 창호와 같다. 측면과 뒷면도 일반 벽돌로 쌓은 듯하다. 대성전 앞 포장도 4각형 블럭(?)을 깔았다. 대성전이 변한 것은 일제강점기 내지는 1969년 보수를 하면서 당시 유행에 따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외삼문 안쪽에 ㄱ자형 기와집이 있는데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관리사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양천향교 명륜당이 사라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된 것이 아닐까 한다. 18세기 중엽에 김희성이 그린 「양천현아」를 보면 양천향교는 대성전 일곽만 표현돼 있다. 이것을 보면 이미 18세기에 들어 교육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고 제향공간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외삼문도 가운데 문이 더 높은 소슬대문이었는데 평삼문으로 변했다.
홍살문도 예전에는 가양동 사거리(지금 양천향교역 사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하마비는 양천향교역 1번 출구에서 양천초등학교 쪽으로 50m정도 올라가면 있다. 홍살문과 하마비가 대부분 같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홍살문이 이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맞다. 그러나 김희성이 그린 「양천현아」를 보면 홍살문은 향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1872년 「양천현지도」를 보면 관아 앞에도, 향교 앞에도 있다. 즉 홍살문이 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복원된 하마비는 관아의 하마비로 옆에 관아 홍살문이 있었고 향교 홍살문은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위치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 나온 과거 양천향교와 현재 양천향교를 비교해보면 1981년 복원은 새롭게 짓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복원이라는 말보다는 우리 건축용어인 ‘중건重建’ 또는 ‘중창重創’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양천향교 건축을 언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 양천향교 건물은 1981년 양식으로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양천향교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다. 『양천읍지』(1899년)에서는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 했지만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 있는 배치도를 보면 남동향인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양천향교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 앞에 비석이 9개 있고, 외삼문을 지나면 명륜당이 보이고 명륜당 앞쪽에 동재‧서재가 있다. 명륜당 뒤쪽 언덕에 내삼문이 있고 그 뒤에 대성전이 있다.
『양천읍지』내용 중 ‘正位五聖位從享二十二位(정위오성위종향이십이위) 聖廟制度甚小無東西翼廡(성묘제도심소무동서익무)’라는 내용이 있다.(양천향교 50쪽) 이 내용은 ‘정위에 5명 성인을 모셨고 배위로 22위를 모셨는데 성묘제도가 심하게 좁아 동무, 서무가 없다.’라는 것이다.
향교는 도, 부, 군·현 등과 같이 향교가 소속되어 있는 행정단위에 의하여 규모가 달라진다. 강릉, 전주, 경주, 상주 등 관찰사가 머무는 큰 읍에서는 대설위大設位를 하고, 부, 목, 도호부 등에서는 중설위中設位, 군·현 등에는 소설위小設位를 한다. 대설위는 대성전에 공자, 4성, 공문10철, 송조 6현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문 62현, 한당 22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중설위는 대성전에 공자와 4성, 공문10철, 송조 6현을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소설위는 대성전에 공자와 4성, 송조 4현을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신다.
소설위를 하는 향교에서는 대성전 안에는 5성과 송조 4현을 모시고 대성전 앞에 있는 동무‧서무에 동국 18현을 좌우로 9현씩 나눠 모신다. 양천향교에서는 터가 좁아 동무‧서무를 지을 공간이 없다보니 대성전 안에 공자와 4성인(맹자孟子,증자曾子,안자顔子,자사子思)을 모시고 배위로 송조 6현과 동국 18현을 모셨다.
이는 소설위小設位에 해당하는데 일반적인 소설위와 다른 점은 ‘송조사현宋朝四賢’이 아니라 중설위에서 모시는 ‘송조육현宋朝六賢’을 모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가는 것은 숙종 때도 ‘터가 비좁아 옮긴다’고 했는데 현재 양천향교 역시 동무와 서무를 둘 수 없을 만큼 대성전 영역이 좁다. 그래서 대성전 안에 27위 모두 모셨다는 것인데 그리 크지 않은 대성전 안에 27위나 되는 위패를 어떻게 모셨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과거 향교가 있었던 곳은 얼마나 더 열악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 송조육현宋朝六賢(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소옹邵雍,장재張載,주희朱熹)
송조사현宋朝四賢(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그리고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에 의하면 2011년 현재 공자, 4성, 공문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이것은 중설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현에서 모시는 소설위와도 다르고 『양천읍지』에 나온 위패수보다 더 많다. 예전에도 포화상태였을 것인데 이 많은 위패를 어떻게 모셨는지 궁금하다. 양천은 일제 강점기에는 군현통합으로 김포군에 속했다. 따라서 향교 기능 역시 김포로 넘어갔기 때문에 해방 후 다시 모실 때 변형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 양천향교 실측조사보고서/강서구/2011.12.
- 겸재정선/이석우/북촌/2016.07
-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 인터넷 고전번역원
- 인터넷 사이트 : http://www.dapsa.kr/blog/?p=7978http://www.dapsa.kr/blog/?p=7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