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을 보면 선생은 마음의 연인 아사코와 세 번 만났다. 첫 번째는 17세 이팔청춘 나이에 도쿄에서 하숙집 주인 딸로 만남이다. 그 후 한참을 잊고 지내다 다시 그곳을 찾아 30세에 목련꽃 같이 화사한 아사코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다시 10년이 지나고 40세에 만났을 때 2차 세계대전의 격랑으로 마치 시들어가는 백합 같은 모습과의 대면이었다. 피천득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관능적인 몸매도 완전히 노출되면 금방 식상하여 더 이상 매력적인 대상으로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매일 가까이하면 미운 부분이 보이게 된다. 정원에 어슬렁거리는 달팽이는 껍데기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귀엽지만 민달팽이는 너무 벗어 징그럽다. 적당한 노출에서 매력이 묻어난다. 괴테는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15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걸려 있으면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감동의 수명은 짧다. 약간의 못 이룬 욕심, 못 다한 아쉬움, 가려진 모습, 미완성으로 부족한 느낌을 남겨 두어야만 늘 호기심이 넘치고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좋은 차, 명품, 넓은 집 등을 소유하면 처음에는 부자 된 기분이라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치지만 결국 그 감정도 잠시 지속되다가 다시 옛날 상태로 돌아간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게 인간 탐욕의 착시 현상이고 그 좋고 비싼 것들도 내 손에 있지 않고 남들이 갖고 있을 때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놓치는 점은 진정으로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만드는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자주 잊고 산다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고,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완벽함은 오히려 쉽게 지치고 포기하고 싫증을 낸다. 모자람에서 채운다는 희망이 자라고 기대감이 지속된다. 약간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사는 삶, 지금보다 더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 부족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실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무엇이든지 손에 넣으면 빛이 바래는 ‘행복의 패러독스’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궁핍할 때는 돈이 행복과 기쁨을 주지만 일단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수입이 아무리 늘어도 행복감은 탄성한계를 넘어 용수철처럼 늘어져 버린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내면화 되어 돈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소유의 욕구가 불투명한 미래로 연결 되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돈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는 이유는 물질을 행복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잘 사는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비교하고 부러워하여 항상 불만족하고 헛헛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원한다고 모두 소유하기 어렵고, 소유할 필요도 없다. 그런 상황인 자신을 미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다. 단지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덜 가질 수는 있어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실이다. 소유는 행복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경험과 존재를 통해 사소하고 소박한 것일지라도 만족할 줄 아는 감사의 가치를 더하면 행복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옮긴 글)
첫댓글 맞는 말씀 ㅎㅎ ㅎㅎ
共感~~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