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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묵상글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부담은 적게, 사랑으로 크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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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부담은 적게, 사랑으로 크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없으면 안 되는가?
두 분 없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건가?
그럴 리 없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없어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다른 사도를 쓰실 겁니다.
오늘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신다고.
그러나 당신 교회를 세우실 때 베드로를 반석 삼으시겠다고.
그렇긴 하지만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역할을 할 사람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은 꼭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아닌 우리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역할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기초 역할, 교회의 기초 역할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두 사도에 대해 “교회의 기초를 놓아준 그들”이라고 하고,
오늘 감사송은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된 베드로와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준 바오로”라고 하며 그 역할에 대해 칭송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 친히 당신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신 바 있으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도를 대표하여 주님의 신원 곧
주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아시다시피 그 반대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극구 반대하여 박해에 앞장서던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그를 반대자에서 복음의 선포자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꿔주셨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와 달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하고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거듭 말하지만, 주님 친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어도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일꾼 삼으실 수 있고 기초 삼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될 수 있고,
지금 우리 교회에 소 베드로와 소 바오로가 필요한데,
관건은 주님이 우리를 당신 교회의 기초 삼으시려 할 때 우리가 응답하느냐입니다.
요즘 본당 단체장이나 재속프란치스코회 평의원 선출 때
수락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이 교회의 기초 삼으시려는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의 기초 되는 것이 싫고,
그래서 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으면 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한때는 싫었고 그래서 배신자와 반대자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또한 돌아서는 자였고 회개자였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축일을 지내며 주님 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처럼 큰 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것이 아니니
작은 교회의 소 베드로와 소 바오로가 되겠다는 겸손한 마음이면 됩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먹는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격려를 받습니다.
화이팅!
부담은 적게,
사랑은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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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를 주님께서 바오로를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습니다.”(마태 16,17).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는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곧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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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세례명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서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 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라고 말 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제자로써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복음적 삶을 사는 가운데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밥이 되시고, 영양이 되신 성체를 모시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 주는 성체의 삶을 살 때 천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늘을 갈망하는 만큼 우리 손에 쥐어진 열쇠관리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천상상급을 확신 하였듯이 우리도 상급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사제수품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성경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혼자 힘으로 신부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또한 홀로 서 있기를 바람이 아니니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 많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도구로 삼고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 부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당신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끝까지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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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가요계에서는 ‘남진과 나훈아’는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경쟁자’였습니다. 남진은 멋진 외모와 시원한 입담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가창력과 춤을 따라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남진의 노래는 ‘님과 함께’가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경쾌한 멜로디가 지금도 어깨를 들썩이게 합니다. ‘가슴 아프게,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을 찡하게 했던 노래입니다. 80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아직도 건강한 모습입니다. 나훈아는 독특한 창법과 구수한 입담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한’을 노래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나훈아의 노래는 ‘고향역’이 있습니다. 노래의 도입부에 기차소리가 나면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는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잡초, 무시로, 사랑’과 같은 노래는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시대를 풍미했던 경쟁자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어릴 때 정치계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고난 받는 민중을 대표하는 야당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40대 기수론으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떨어졌습니다. 카랑카랑했던 그의 목소리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오랜 시간 투옥과 연금의 시기를 거쳤지만 199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IMF’라는 금융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이겨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으로 대한민국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햇볕정책’은 그의 대표적인 대북정책이며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그 열매였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그의 말대로 그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닭의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탄압받던 야당을 이끌었습니다. ‘삼당합당’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라는 말처럼 1992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무력화 하였으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대통령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대한민국 정치계에는 김대중과 김영상이라는 큰 별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종교계에는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참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깊은 산사에서 한 시대의 ‘죽비’가 되었던 법정스님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소유하려는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을 개원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기꺼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종교는 진리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를 향해가는 경유지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고통 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하였습니다. 법정 스님을 명동성당의 대림특강 강사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김수환 추기경님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진리’ 안에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특유의 저음과 깊은 성찰이 묻어나는 말씀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따뜻하게 하였던 어른들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완벽했던 분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 야단도 맞았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부족하고, 겁이 많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마침내 교회를 빛내는 천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야단을 맞았었고,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더 나쁜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인 확신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고,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3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떠났고,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초대하셨고,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의 허물과 잘못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도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초대교회의 신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허물과 결함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도 부족함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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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
-기도, 고백, 유언-
어제는 몸살 감기에 심한 열로 꼼짝 못하고 수도원을 찾은 여러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만 드리고 많이 누워서 지낸 날입니다. 마침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고 마침 외출하는 수녀님의 친절한 도움으로 수녀님의 차로 병원앞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고 잘 처방받아 다시 회복되어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사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라 믿습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믿는 이들의 눈에는 모두가 은총의 섭리요 하루하루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날마다 제 나름대론 온힘을 다해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 강론에 대한 어느 자매의 답글이 참 반가웠습니다.
“시들고 사라지는 자연의 변화 안에서 저는 삶의 허무와 슬픔을 느끼는데, 신부님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를 생각하시며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으세요. 글 감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의 제목입니다. 오늘처럼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다 보면 절실한 물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양대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저절로 떠오르는 성가 291장 일부를 나눕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착하신 목자 성 베드로여 천국문 여는 으뜸 사도로
주님께 소명받으셨으니 우리의 도움되어 주소서.
간택된 사도 성바오로는 주님의 사랑 사로잡히어
온세상 두루 다니시면서 부활한 주님 전하셨도다.”
위 가사에서 보다시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도로 전혀 다릅니다. 서로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보완하면서 일치임을 우리 역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체험합니다. 참으로 서로 같아서가 일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며 살아갈 때 다양성의 조화요 일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주님과 함께 힘껏 책임을 다하며 사는 이들이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제 주변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이 힘든 세상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니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격려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기도, 고백, 유언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성인들은 교회의 사람이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하니 교회 공동체에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점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일치합니다. 언제나 강론 끝부분에서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꼭 당부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두분 사도의 품이자 뿌리내린 기름진 밭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감옥에 갇혀있던 베드로의 생환과정에서 교회공동체의 기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즉시 기도는 응답되어 주님의 천사의 개입으로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둘째,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의 언어입니다. 참된 언어가 고백의 언어입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진실한 사람,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말이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삶의 꼴을 형성하는데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은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요!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주님, 당신을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도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을 통해 자기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며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물음이 “예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구구한 답들이 많습니다만 이에 만족치 못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답이 정확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감격한 주님은 이런 고백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며 고백 역시 은총임을, 은총의 고백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은총의 고백이요 고백의 축복입니다. 이어서 축복과 더불어 하늘 나라의 열쇠라는 엄청난 책임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셋째, 유언입니다.
임종어가 유언이요 평생 좌우명이 또 묘비명이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임종어를 예상하여 평소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임종어가 좌우명이 나의 모습을 주님을 닮은 참나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모해 갈 것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저에겐 사도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전력투구, 최선을 다해 살아온 주님의 전사, 복음의 전사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고백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요! 평생 지침으로 삼고 하루하루 이렇게 살 때 그대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일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평생 좌우명이자 묘비명은 다음 두 말마디일 것이라 제 나름대로 추측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늘 기도하는 것이며, 늘 고백하는 것이며, 늘 유언을 좌우명으로 삼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렇게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저의 유언이자 좌우명이요 묘비명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동안 많이 인용했지만 저에겐 늘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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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으신 모든 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6장 28절과 29절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믿음 자체로 완성되며 동시에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도 베드로는 주님,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한마디가 베드로 사도를 사도들의 으뜸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도좌의 으뜸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이 한마디가 저와 우리의 마음속에도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베드로 사도의 한마디를 진심으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그 믿음을 잊어버리거나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하수인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을 우리는 너무 쉽게 떠나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축일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진짜 나의 주님인지, 나는 그분을 내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기도하며 봉헌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생선 맑은탕
예전에는 뻘건 매운탕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뽀얀 맑은탕이 좋습니다.
취향도 변하고
입맛도 변하고
그랬나 봅니다.
그렇게 변했다고 해서 매운탕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변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도 이런 일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향과
기도의 성격
그리고 색깔과 맛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바뀌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무르익어 가는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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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만약 육상 국가대표가 당신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꽤 큰 액수의 돈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가대표와 달리기 한 번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응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달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내기에 응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지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출발선에 같이 서서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기는 비슷하거나 내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만 응할 것입니다. 만약 전혀 가능성이 없는데도 더군다나 달리기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이 내기에 응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내용의 이상한 동화가 하나 있지요. 바로 이솝 우화에 있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입니다. 결말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요. 쉬지 않고 묵묵히 달려간 거북이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저는 노력보다 거북이의 용기를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만만해서 중간에 잠들어 버린 토끼의 어리석음을 떠나서, 솔직히 거북이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도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용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런 용기를 간직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재면서 아예 출발선에 서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삶은 분명 많은 변수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 출발선에 서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꼭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함으로 그 안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우리의 용기 하나가 위대한 성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용기로 위대한 성공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솔직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두렵지 않았을까요? 복음을 선포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변할까요? 더군다나 너무나도 두려운 죽음의 공포는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열정을 쏟고 주님을 향해 헌신합니다. 분명히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쏟아부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안 되는 이유만을 내놓습니다. 출발선에 아예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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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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