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랑] 명왕 冥王(2권) 13. 도천하(刀天下)

[ㅎHㅅiㅅi]

제13장. 도천하(刀天下)


1

사랑,
그것은 어설프지만 확실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주는 매력이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는 없지만 가슴은 쿵쾅거린다.
서로가 앉은 상태에서 바라보지는 못하지만 느끼고는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신의 의향은 어떻소?"
그는 되물었다. 되묻는 의도는 당신의 의향에 따라서 나도 선택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놀랐다.
하나 윤미랑은 할 말이 따로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 처지로써는 어떠한 말이라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통상적인 말뿐이었다.
목적성이 있는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전 할 말이 없어요......."
유흥립은 그녀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이름이 이청악이외까?"
"그래요."
"그 사람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오."
"......."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도 그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나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유흥립은 그녀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신을 데리고 와서는 단지 미인계를 펼치러 왔다고만 했소. 그리고는 그냥 가 버렸소. 윤 소저, 당신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만 갔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 말도 없거니와 그건 사실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그녀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어서 미움받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흥립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고 갔지요. 허나 그 사람은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요. 나의 가슴과 머리를 뒤흔들 정도로 아주 정확하게 말이오."
"그걸 어떻게?"
그녀는 놀라며 엉겁결에 물었다.
유흥립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도 난 무림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이었소. 독도 유흥립하면 감히 일 대 일로 맞붙자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소. 내 자랑이 아니오. 심지어 소림이나 무당파의 화상이나 말코도사라도 말이오."
그는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만큼 실력도 갖추었고 인격도 제 나름대로 형성된 복합체였다.
그래서 그는 명왕성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오랜 시일 끝에 영입되었다. 그러나 그는 무사로서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고 있었다. 윤미랑도 어느 정도 그를 느끼고 있었다.
'보기보다는 괜찮은 사람 같애.......'
한데 이청악이 그의 무사기질을 건드린 것이다.
여인을 데리고 와서는 그냥 놔두고 가 버렸다. 책임을 지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유흥립은 이청악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때의 그의 사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특히 얼굴은
....... 한데 윤미랑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예전의 사랑하던 그 여인과 너무 닮아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해 잠시 대결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런 시점에서 그녀가 자신 앞에 자의든 타의든 다시 나타났는데 어떻게 별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청악으로서도 조사를 해 봤겠지만 철저하게 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안목을 믿은 것뿐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궁설지가 본 것과 자신이 조사한 것을 총괄, 분석한 결과 그런 결단을 내리고 돌아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모험이었다. 어쩌면 죄 없는 하나의 생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청악은 도박을 건 것이다.
윤미랑은 유흥립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본상식은 갖추고 있었을 것이오. 무사라면 언제라도 부딪힐 가능성이 있기에 사전 분석은 하고 있어야만 할 테니. 그래야 갑작스레 맞닥뜨려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와 생사결전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오. 하물며 무림칠기의 우두머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윤미랑이 쏘아붙였다.
유흥립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오. 허나 아주 무서운 사람이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소름 끼치도록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오. 게다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오."
그러면서 그는 슬며시 떠보았다.
"그 사람을 좋아...... 하오?"
그녀는 움찔했다. 그러나 대답은커녕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한 차례 그를 쏘아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여자와 똑같군.......'
유흥립의 시선에서 사랑이 느껴지며 안온한 기운이 솟구쳤다.
예전의 여자의 향수보다 더욱 짙은 향취를 뿜어내는 여자였다.
윤미랑.
그녀는 그랬다.
그에게서 빼앗아간, 아니 놓아 버린 그녀의 화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기쁜 와중에도 걱정이 앞섰다.
'그녀를 택하면 배신이다!'
명명백백(明明白白)했다.
아마도 이제는 이미 들키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감시조가 늘 따라다녔다. 그들은 언제나 그를 감시했고 돌봐 주었다. 그러나 배신하면 여지없이 그를 처치하려 들 것이다.
그건 틀림없었다.
꽝!
방문이 그대로 박살나 날아가 버렸다.
윤미랑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자석처럼 강렬했고 용암처럼 뜨거웠다. 독사, 아니 이제는 독도 유흥립이었다.
방문 앞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이쪽을 향해 노려보고 있었다.
윤미랑은 그들을 상세히 훑어보았다.
앞장 선 네 사람, 독사사행도였다.
그리고 정확히 44명의 흑색 경장차림의 무사들, 살벌해 보였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주, 전 사미도요. 어서 당신의 그 본심을 철회하시오. 여자는 어디를 가나 바닥에 수없이 깔려 있소이다. 당주!"
그의 음성에는 진심이 깔려 있었다. 사미도는 유흥립의 결단이 본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만큼 독도 유흥립이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란 게 밝혀졌다. 윤미랑은 이청악의 생각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분은 이미 알고 있었어. 위 서열의 고수들도 많은데 그분은 이 사람을 택했어. 그건 너무나 쓸모 있기 때문이었구나.'
첨가한다면 그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청악은 자세히 듣지도 않고서 이미 윤미랑과 유흥립의 숙명적인 운명을 기약해 버린 것이다. 그 기약에 그녀도 유흥립도 자연스레 말려들었다.
아무 후회 없이.......
천천히 일어섰다.
유흥립은 일어서면서도 윤미랑의 허리를 절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의 진실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배신의 길을 걷겠는가?
스르릉......!
자신의 도집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사미도, 난 이미 결심했다. 그러니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라!"
"당주 한 번만 더......!"
"끝났다!"
냉정했다.
명령을 내리는 사미도의 음성은 더욱 냉정했다.
"쳐라!"
슈아앗!
10개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상, 중, 하 가릴 것 없이 그대로 폭죽처럼 떨어져 내렸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독도 유흥립의 몸은 그대로 솟구쳤다.
피리릿!
팽이처럼 휘도는 그의 몸과 같이 윤미랑도 따랐고 그의 칼은 걷잡을 수 없이 돌풍을 일으켰다. 거칠 것이 없었다.
파파팡!
퉁겨 내는 곳에는 불똥이 튀었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듯 퉁겨 나가는 10명의 뒤를 그대로 따라갔다. 10명의 반응이 있기도 전에 그의 몸이 틀어졌다.
그리고 칼이 날았다.
스왓!
가가각!
막을 새도 없어 보였다.
무사들의 칼과 몸뚱이가 갈라지는 마당에 피는 엉뚱하게도 독도 유흥립의 몸으로 튀었다.
스읏!
몸을 뒤틀어 자신이 뒤집어쓰고는 윤미랑을 안전하게 안고 저 멀리 내려섰다. 허공을 휘저으며 10명의 도객을 절단 내고 퉁기는 핏줄기를 등짝으로 막아내며 내리는 과정은 아주 수월했다.
그러나 보기에만 그렇지 실제로 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윤미랑도 알고 독사사행도도 분명히 알고들 있었다.
그래서 독사사행도는 긴장했다.
사미도가 말했다.
"당주, 당신은 자신의 역량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소?"
"아마도 삼 푼 정도는......."
유흥립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통났고 배신했다.
무엇을 더 숨기고 회피하려 하겠는가? 무공 정도를 숨기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결과만 낳지 않을까 해서다. 자신의 진정한 기량을 안다면 저들이 물러가리라 여겼다.
게다가 귀중한 여인이 자신의 허리에 착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그는 누구도 개의치 않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불편하지 않소?"
"아뇨......."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스스스.......
두 남녀가 사랑 씨름에 열중할 때 어느새 그들을 빙 둘러싼 무사들과 독사사행도였다. 한 치의 빈틈도 주지 않고 물샐 틈도 보이지 않았다.
살기(殺氣)에 겨울의 날씨가 더욱 추워지는 것 같다.
사미도는 허무하게 당한 10명의 무사들을 보았기에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를 막아야만 했다.
그렇지 못할 시에는 문책을 당한다.
'죽음이다.'
오로지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든지 아니면 잡아라도 가야 한다. 그러나 그는 뒤의 말은 포기했다.
그건 말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앞의 것도 그리 희망적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했다. 반드시 이루어 내야만 한다.
츄르르......!
독사사행도가 이미 눈길을 맞추고 어지러이 휘돌고 있었다.
그 뒤를 34명의 무사들이 언제라도 뛰어들 듯 노리고 있었다.
독도 유흥립은 태연하게 그들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칼만 밑으로 늘어뜨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윤미랑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편안하게 안겨 있었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아니에요. 전 편해요."
유흥립은 씨익 웃었다. 독사사행도의 행동이 변했다.
슈슈슉!
4개의 칼날이 사방에서 쇄도했다.
빠름의 음향과 동시에 사방에서 날카로운 도기가 분출되었다. 사방에서 덮쳐드는 도기는 어디에도 빠져 나갈 구멍을 제공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물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애써 외면한 것 같았다.
유흥립의 하얀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독도가 끝내 독기를 뿜었다.
취아앗!
허공에서 덮쳐오는 4개의 도기에 맞서 독도 유흥립은 반쯤 허공에 떠서 그대로 반원을 그렸다. 몸과 칼이 일체가 되어 휘돌아간 것이다.
까가강!
독사사행도는 칼이 퉁기자 허공에서 주춤했다. 그때, 독도가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퉁겨 나가던 독도를 더욱 잡아당기며 그대로 쓸어갔다.
그때는 이미 밀리던 몸이 반동을 이용하여 솟구친 상태였다.
그리고 6자 거리에서 그의 독도는 뿌려졌다.
쉬앗!
스가각!
3개의 칼날은 잘려나가고 3개의 몸뚱이도 허리에서 동강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는 살아 남았고 그 칼날은 독도 유흥립의 등짝을 가르며 내리쳤다.
역시 독사사행도는 만만치가 않았다.
사미도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일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독도 유흥립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몸을 뒤틀려 했다. 사미도는 그녀를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윤미랑이 다친다!
그것만이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슈악!
칼날은 이미 2자 거리로 다가왔다. 그가 뒤틀려는 순간이었다.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대로 퉁겨져 올라요!"
그는 흠칫했으나 이내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의 몸은 사미도의 칼날에 들이미는 꼴이 되었다.
"크하하......! 이제야 복수를......."
그는 그냥 말을 줄였다.
너무나 경악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목젖이 꽉 잡힌 상태에서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미도는 너무 놀라 두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의 칼날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찰나에 하나의 섬세한 손이 그의 칼날을 잡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대소를 터뜨렸고 그대로 내리쳤다.
그런데 웬걸, 그 손은 칼날을 뚫고 그대로 나아와 그의 목젖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거머쥐는 게 아닌가?
귀영수였다.
걸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우둑......!
목뼈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그녀는 사미도를 멀리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유흥립의 가슴을 톡톡 쳤다.
"이제 내려줘요."
"그러시오. 헌데 손은 괜찮소?"
"보시다시피......."
그녀는 우수를 흔들었다.
금방 한 사람의 고수를 죽여 버린 손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남은 34명의 무사들은 흠칫 떨었다. 독사사행도가 누군가?
아무리 당주라 하나 너무 쉽게 그들이 꺾여 버렸다.
게다가 저 여인의 솜씨는 또 무엇인가?
소름이 돋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사람이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교소가 들렸다.
"호호...... 어떻게 할 것이냐?"
윤미랑은 낭랑하게 웃으며 짤랑짤랑하게 말했다.
무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유흥립이 막았다.
"왜 그래요?"
"윤 소저, 그만 겁주시오. 애들 경기하겠소."
그는 윤미랑을 진정시키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미 너희들을 부리는 두목을 죽었다. 너희들의 죄는 없다. 그러니 그냥 물러가도록 해라!"
그들은 독사사행도가 죽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가 살려준다고 호언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허둥거리며 웅성거렸다.
"이것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그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자,
후닥닥......!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저질러 놓고도 어이가 없는 듯 멍하니 보고 있었다.
유흥립은 그녀를 보며 포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겁이 나서 접근이라도 하겠소?"
"하지 말라지 뭐....... 누가 겁나나요?"
그녀는 애교 있게 말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유흥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조금 있으면 지원군이 올 거요. 이제 어디로 갈 것이오?"
"포효동에 있어요."
"그래요? 그럼 갑시다!"


2

"올까요?"
궁설지는 더욱 초조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것조차 의문이었다. 그녀로서는 도박을 했다. 자신의 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척간도 아니다.
단지 그가 데리고 있는 수하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우정이 두텁고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다른 3명의 여인들도 윤미랑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그녀들도 초조하고 불안한지 괜히 크게 떠들고 남자들과의 대화에 열중이었다. 지금도 안은 시끄럽다.
궁설지는 이청악이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고 있자 다시 물었다.
"올 것 같아요?"
"반드시!"
그는 그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궁설지도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지하 100장 밑이다.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녀가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어요?"
"미래를 보고 있소."
그녀는 멍청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려다 그가 너무나 정색을 하며 말했기에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얌전히 기다렸다.
이청악은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자세히는 모르나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소. 천축의 책에 심취하여 과거와 미래를 짐작하는 그런 방식을 배웠소이다."
"어때요?"
"앞으로 험난할 거요. 죽음도 각오해야 하고....... 에잇!"
그는 화를 벌컥 냈다. 그녀는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이건 장난이오.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조차 도저히 모르겠소. 어디로 어디까지 쫓아가야 하는지도 모르잖소?"
그로서는 너무 답답했다.
이런 과정조차 그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내로 태어난 그가 겨우 이런 놀음에나 빠져들고, 얼마나 자신이 한심한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는데 놔둔다는 식이오. 이건 모욕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오. 일체적인 무관심이오."
그녀는 그의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무관심?'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사람이란 관심이 있으면 싸움도 하고 욕설도 퍼붓고 저주도 내린다. 적수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건 방치해 두는 듯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아니 확실했다.
방치, 해 볼 대로 해 봐라.
놀던 아이도 멍석 깔아 놓으면 그만 둔다는데 이건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상대도 안 되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애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쥐어주고 구경하고 있는 입장, 그것이 바로 명왕 궁왕기의 태도였다.
방관하고 있는 태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이청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청악은 시선을 올리려다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수궁사(守宮絲)......!'
그녀의 팔목 부위에 뚜렷한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앞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게 또 수궁사였다. 순결한 여인의 상징이었다.
서역에서만 기생하는 곤충의 체액을 발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처녀성을 잃으면 그것이 없어진다.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뚫어지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단내가 이청악의 얼굴에 확 풍겨졌다.
'큼......!'
냄새가 좋았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뭐하지 않아요? 끝까지 나아가야지요....... 이 대협, 힘을 내세요!"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이청악은 그녀의 그런 어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오. 모두가 힘들어하니까......."
'냉정해도 속은 넓은 사람이야.'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차갑고 무심하지만 속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3

대화, 그건 사람들간의 화목을 이끌어 내는 중점 요소이다.
남녀 두 사람은 대화에 너무 열중하다 누군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유흥립이 입을 다물었다.
윤미랑도 뭔가 느꼈다.
누군가, 아니 두 사람이었다.
하나의 칼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도 유흥립은 그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팔황쌍사(八荒雙邪)!"
변방의 신이었다.
그가 그들을 알아보는 순간, 윤미랑이 즉시 물었다.
"알아요, 당신?"
당신, 많이도 발전했다.
유흥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하는 눈치였다.
"내가 데리고 왔소. 십대 고수 중 서열 십 위이지만, 도(刀)의 달인들이오."
십대 고수는 명왕 궁왕기가 모든 자료를 점검해 선정한 사람들로 이 시대 최고의 무사들로 꼽는다. 중원천하, 오지, 변방, 막북, 관외 어디를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십대 고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포의 핵심 존재 명왕이 정해 줬기 때문이었다.
흑백의 옷으로 분리된 그들 중 흑의의 인물이 말했다.
흑사(黑邪)였다.
"유 당주, 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처지가 되다니 참으로 안됐소이다."
그의 음성은 그다지 듣기 거북하지는 않지만 발음상 문제는 있었다.
뒤이어 백사(白邪)가 한마디 더 했다.
"목을 가져가야만 하외다."
"이 목을? 가져갈 수 있으면 해 보시오."
이들의 대화는 서론도 필요 없었다. 윤미랑도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치사하게 어르고 달래고 그러다가 서로의 무공을 비견하기도 하며....... 필요 없었다.
본론만이 해결의 관건이다. 그건 무공대결이었다.
그녀는 유흥립의 좌측으로 3보 옮기며 말했다.
"그냥 시작해요."
"......?"
팔황쌍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인이 설치다니 이게 어떤 일인지 저 여자는 모른단 말인가?
흑사가 말했다.
"죽음의 대결이오. 여인은 물러나시오."
순간, 윤미랑의 눈빛이 홱 변했다.
유흥립은 보았다.
'이것들아....... 오늘 너희들의 목숨은 저당잡혔다!'
그는 안다.
그녀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도 겪지 않았던가?
쉿!
팟!
동시에 일어났다.
흑사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한데 언제 나타났는지 하나의 손이 자신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엉겁결에 칼이 휘둘러졌다.
겨우 살아남았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5개의 손가락자국, 핏줄기도 선명했다. 백사도 흑사의 가슴을 보며 섬뜩했다.
그리고 외쳤다.
"귀영수!"
"알기는 알고 있군!"
그녀는 코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유흥립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동시에 덤벼요.'
어쩌면 쉽사리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되면 쉽게 결판이 날 것이다. 단지 상처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약점이 있기는 하다. 하나 해야만 했다.
슈팟!
두 사람은 좌우를 맡아 퉁기듯 날아갔다.
마치 메뚜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다가 튀어 오른 형상이었다.
쌍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그들도 동시에 솟구쳤다.
파앗!
각도가 서로 달랐지만 떠오른 지점은 일치했다.
각자는 마주치자마자 벼락처럼 공격을 시도했다.
깡!
푸캉!
앞의 음향은 정상인데 뒤의 음향은 괴이했다.
유흥립과 흑사는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시선을 돌렸다.
부러진 반 동강의 칼을 들고 놀라며 피하는 백사와 좌수의 눈에 팔뚝에 상처를 입었으나 적의 무기를 꺾어 놓고는 덤벼드는 윤미랑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는 한 마리의 암표범이 아니라 암호랑이였다.
무승부였지만 그녀가 약간은 우세했다.
밀려나던 백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벽에 부딪힌 듯 그대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교묘히 칼을 휘두르며 윤미랑의 목을 노렸다.
겨누기는 어렵지만 성공하면 치명적이다.
칼날의 부담스러운 공격에 윤미랑은 도세에 억지로 끼여들려는 상태로 몸을 날렸다.
"윤 소저!"
유흥립의 음성이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그의 눈길엔 기이한 광경이 잡혔다. 반 동강의 칼날이라 보기에는 너무 매서웠다.
하나 윤미랑의 기세는 그 보다 한 수는 더 사나워 보인 것이다.
칼날이 내리치는 그 기세를 그대로 어깨로 받으며 그녀의 우수는 움직였다.
슈욱!
츠칵!
"음!"
"크윽!"
그녀의 어깨에서 가슴께로 칼날이 그어졌다.
동시에 피가 튀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우수를 움직여 백사의 심장을 파 버렸다. 엄지와 검지, 중지가 모조리 마디 끝까지 박혀들었다. 더 이상 들어가지도 않는다.
백사는 내리친 그대로 하강했고 그녀도 심장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내려섰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유흥립과 흑사는 움직여야 했다.
한쪽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쪽도 결판을 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서로간에 퉁기듯 덮쳐갔다. 그 속도는 처음의 속도보다 서너 배는 빨랐다.
파팟!
머리칼이 날리는 것을 보며 유흥립은 싱긋 웃었다.
'처음이군.'
자신의 몸에 흠집을 낸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칼로써 말이다.
복잡한 심경이지만 수긍해야 했다.
슉!
뒤이어 날아오는 칼날은 끝 부분이었다.
찌름의 상태, 그건 유흥립이 최대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옆구리를 노렸다. 그곳이 그가 취한 자세의 허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켰다.
우수에 있던 칼을 좌수로 옮겼다. 어느 쪽이든지 가능했다.
누구도 몰랐고 흑사도 놀랐다.
"허억!"
그는 칼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훤히 보이는 것을 마다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유혹은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결국 그어갔다.
쉬칵!
피가 튀었고 살점도 퉁겨 나갔다.
스각!
그보다 더 묵직한 음향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흑사는 자신의 시선을 한쪽으로 모은 빛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분명히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는데 자신의 눈과 눈 사이를 지나갔다.
어지러웠다.
그는 비틀거리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튀어 올랐다.
'죽여야 한다!'
그것만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흥립은 움직이지도 않고 방어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일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마음은 가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흑사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잇!"
파악!
그가 힘을 쓰는 동시에 정수리에서 명치까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피가 튀는 것은 당연하고 뇌수까지 허공에 솟아올랐다.
허연 뇌수, 죽음의 결정체, 그리고 흑사는 무너졌다.
쿵!
그는 백사의 죽음조차 보지 못하고 그렇게 갔다.
백사는 그때서야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털썩!
윤미랑은 냉정히 돌아섰다. 그녀도 비틀거렸다. 상의는 이미 피로 물들어 빨갛다. 유흥립은 하의가 시뻘겋게 물들어 대조를 이루었다. 그도 비틀거리다가 윤미랑의 곁으로 걸어왔다.
"어떻소?"
"당신은요?"
서로가 걱정이다.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괜찮소!"
유흥립은 빙그레 웃었다.
윤미랑도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린......."
"천생연분 같소!"
뒷말은 유흥립이 대신했고 서로를 부축하며 서서히 그곳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1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누군가 나타났다.
스윽!
1명이다.
그러나 대단한 기세가 느껴지고 주위가 삼엄하게 변했다.
엄중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자 마치 수십, 수백의 인적이 느껴지는 듯했다. 인영은 허공에 떠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당했군, 벌써......."
음성이 기이했다.
뱀이 기어가도 저런 음향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소름 끼치는 그런 음성, 음유(陰幽)로웠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누군가 기다렸다. 쌍사의 시신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하나의 흔적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건 독도경혼(毒刀驚魂)이로군!"
그는 흑사의 반으로 갈라진 상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유흥립이 좌수로 펼쳤던 비기(秘技)였다.
그러나 그 도법이 좌수인지 우수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단순한 도법은 아닌데?"
그는 쉬운 게 아님을 알았지만 확실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겨우 이름만 밝혀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관외철비각(關外鐵飛脚) 형은 왜 안 오지?"
그가 기다리는 사람의 별호 같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성(性)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통로 저쪽을 수시로 쳐다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전히 그쪽에서는 나타날 기미조차 없었다.
기다림이란 묘한 것이라 처음엔 초조하다가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대다수였다.
그도 그랬다.
'먼저 쫓아야겠다!'
팟!


4

"어찌된 일이오?"
이청악이 모두 모인 가운데 물었다.
윤미랑은 입을 다물고 누워 있었다. 상처가 꽤나 심했고 피도 많이 흘린 탓이라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유흥립은 그나마 괜찮은 듯 입을 열었다.
"팔황쌍사가 나타났었소."
"그들이......?"
"그들의 칼은 무서운데?"
"그래서 이렇게 당했소."
현궁과 낙교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유흥립이 자신들의 상황을 말한 것이었다.
궁설지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유흥립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윤미랑이 나약한 음성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죽었어요!"
그때서야 궁설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악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궁설지는 가슴이 뜨끔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이 대협?"
이청악은 그녀를 힐끗 보다가 통로 저 너머를 응시했다.
"누가 오고 있소."
그녀는 놀랐다. 그리고 긴장하며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청악은 다시 말했다.
"한 명이오. 헌데 다른 느낌도 같이 섞여 있소이다."
"무엇이지요?"
"강한 느낌!"
그렇다면 1명은 절대 아니다. 적어도 2명 이상이다.
2명이 오는데 이런 느낌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어떡하죠?"
"우리도 일단 이동합시다."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슈퍼맨]

잼 납니다

[얼음골]

고맙습니다.

[여여풍]

감사합니다.

[신두]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