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이씨 임영대군 효자공파 묘역군 전경. 상단에 이시진선생 묘역의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이시진(李時振, 1578∼1633)은 조선시대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기록된 효자로서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이다. 이시진 묘소(李時振 墓所)는 17세기 전반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주이씨 임영대군 효자공파 6세손인 이시진 묘부터 13세손인 이명규 묘까지 조성되어 있다. 墓域은 구릉의 능선을 따라 李時振 墓, 李晩栽(이시진의 장자) 墓, 李世彦(이만재의 장자) 墓, 李億齡(이세언의 장자) 墓, 李顯昌(이억령의 장자) 墓, 5대에 걸친 직계 장손들의 묘소가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李鶴齡(이세언의 차자) 墓, 李濟弘 墓, 李思遠 墓, 李明圭 墓 등 방계 후손들의 묘도 함께 있는데 능선부에서 약간 비켜 조성되어 있다. |
▲ 묘역군 하단에 위치한 이시진선생 신도비와 재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 모선재(慕先齋) 전경과 재실과 신도비를 건립(1990년) 하였다는 모선재기(慕先齋記) |
5대 묘는 봉분과 석물(상석, 혼유석, 향로석, 석비,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으며,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등은 조성 당시의 석물이며, 석비와 망주석은 대개 2003년 종중에서 일괄 건립한 것이다. 이시진, 이제홍 묘 석비는 당시의 것이다. |
▲ 묘역으로 오르며 이시진선생 후손들 묘역을 내려다 본 모습 |
▲ 이시진선생 묘역 하단에 위치한 장자 이만재(李晩栽) 묘역 |
이시진 묘에는 石碑(2점), 望柱石, 魂遊石, 床石, 香爐石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비 1점은 2003년에 건립하였으며, 망주석도 이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평면 사다리꼴 형태이며, 가로 6m, 세로 6m, 높이 1.5m정도이다. 부인 전주황씨와 풍산심씨를 합장하였다. 李時振(1578~1633)은 全州李氏 臨瀛大君派 6세이다. |
▲ 전주이씨 임영대군 효자공파 6세손인 이시진선생 묘역 전경 |
이만재 묘는 이시진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床石, 魂遊石, 香爐石(이상 조성 당시), 石碑, 望柱石(이상 2003년)등을 갖추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평면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가로 5.2m, 세로 8m,높이 1.6m정도이다. 분묘 조성 당시 석비를 세우지 않고 상석 前面에 ‘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 全州李公 晩栽之墓 配 淑夫人 坡平尹氏 祔左 癸坐’라 刻字하였다. 李晩栽는 이시진(1625~1705)의 장자이다. |
▲ 이시진선생 묘역은 좌우로 부인을 합부(合祔)하여 3인 합장 묘역입니다. |
▲ 봉분 좌우에 조성된 구묘비와 신묘비 |
이세언(1646∼1708) 묘는 이만재 묘 아래에 위치한다. 床石, 香爐石(이상 조성 당시), 石碑, 望柱石(이상 2003년)등을 갖추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평면 삼각형에 가까우며, 가로 5m, 세로 6.5m, 높이 1.5m정도이다. 분묘 조성 당시 석비를 세우지 않고 상석 前面에 ‘成均進士 全州李公 世彦之墓 配 公人 竹山朴氏 祔左 癸坐’라 刻字하였다. 李世彦(1646∼1708)은 이만재의 장자이다. |
▲ 이시진선생 묘역 뒷편 산길 안쪽에 묘가 있는 것 같아서 가 보았습니다. |
▲ 전방에 묘역이 있어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
이억령 묘는 이세언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床石, 香爐石(이상 조성 당시), 石碑, 望柱石(이상 2003년)등을 갖추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유돌 분이며, 직경 4m, 높이 1m정도이다. 분묘 조성 당시 석비를 세우지 않고 상석 前面에 ‘通仕郞 全州李公 億齡之墓 配 孺人 金海金氏 祔左癸坐’라 刻字하였다. 李億齡(1672∼1722)은 이세언의 장자이다. |
▲ 묘역이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봉분부터 뒷편까지 붙어있는 조금 특이한 묘역입니다. |
이현창 묘는 이억령 묘 우측 아래(이학령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2009년 부인 밀양박씨와 합장하면서 봉분을 재 조성하였다. 상석, 혼유석, 향로석, 석비,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다(2009년 건립). 봉분은 유돌분으로 직경 3m, 높이 1.2m 정도이다. 李顯昌(1695∼1771)은 이억령의 長子이다. |
▲ 묘비만 보아서는 누구의 묘인지 몰랐는데 함께 하신 벽암님 자료를 보고 이시진의 父 이희설선생 부부 묘란 것을 알았습니다. |
▲ 이시진 부모 묘역 측면과 후면 모습 |
이시진 묘소(李時振 墓所)는 조성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순조 12년(1812)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시진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계체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후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등장하는 이시진의 효행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
충주 이시진 효자각(충북 문화재자료 66호) |
▲ 이시진 효자각 입구 모습 |
이시진(1578~1633)은 조선 중기 때 효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하여 난리(임진왜란)를 만나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여 몸이 야위어 거의 죽을 뻔 하였다고 한다. 고을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1608년(선조 41) 정려를 명하여 세워진 효자문이다. ‘完山李時振之閭 萬曆 戊申春 命旌㰡‘이라 편액 되어 있다. |
▲ 이시진 묘역을 내려와서 이시진 효자각으로 가기 위해서 묘역 하단 우측에 위치한 민가 골목길로 들어가며 바라 본 모습 |
▲ 안쪽 민가에서 좌측 길로 살짝 오르면 우측에 이시진 효자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주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된 주간에만 4개의 소로를 놓아 주심도리 장형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초석이나 기둥은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며, 기와는 보수하였다. |
▲ 효자각 내부에 걸려있는 이시진 효자문 |
「東國新續三綱行實圖」340면에 幼學 李時振에 대한 이야기가 「時振斷指」라 하여 그림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이시진(李時振 ; 1578~1633)은 본관이 全州, 諡號는 沖軒公, 자는 起夫이다. |
▲ 이시진 효자각 담장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
▲ 이시진 효자각 내부 모습 |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1617년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72명의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쓰여 졌다. 편찬 동기는 임진왜란 이후 도의가 문란해지자 국가에서 백성들의 도의를 회복하고자 펴낸 일종의 국민 윤리서이다. |
이시진선생 묘역 위치도 |
지도 좌측 빨간선 시작점 주변에 주차. 빨간선 끝 지점에 이시진선생 묘역이 위치. 소재지 :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산17-1 |
지도 상단의 화살표 지점에 이시진선생 묘역이 위치. 지도 하단의 충주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친정가다 저 이정표를 봤는지 그냥~~~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