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식지동(食指動) 1 처음으로 긴장했다. 이청악은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일반무사라면 느끼지 못할 것이나 이청악 같은 고수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강적이라......!' 오랜만에 전신이 뿌듯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명왕성에 들어오고 아직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한데 지금 그런 촉감이 피부를 자극시키고 있었다. 강적이다! 피부들이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검집도 없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조차 나직하게 울고 있었다.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더니 팔자 형태의 발 모양을 유지하며 오연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울림이 퍼졌다. "나오시오......!" 음성이 통로 저쪽으로 휘돌며 메아리를 퍼뜨린 것이다.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쉿!" 설부용의 물음에 기운상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으며 기다리라는 눈짓을 했다. 메아리는 반 각이 채 못 되게 울림을 만들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질 무렵,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허무적인 기운이 스물스물 배어 나와 상대를 물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기세를 남에게 전파시켜 동질의 느낌을 만들 정도라면 대단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인영이 먼저 입을 연 것이다. "대단한 내공이로군......." 기운상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도 그렇군.' 그런 걸 아는 자라면 자신도 그렇다는 증거일 게다. 음성의 울림이 반 각이나 간다면 그건 내공이 심후하다는 증거였다. 메아리에 의지하지 않고 울린 순수한 내공의 화후였다. 그 증거를 간단히 찾아낸 인영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 이청악은 인영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빙긋 웃었다. "당신은...... 무림괴절령이라 소문난 자객이로군." 무림괴절령. 이름도 괴이하고 별호도 괴이하다. 그의 이름도 무림괴절령이고 별호도 똑같다. 무림괴절령이란 외호만이 그를 대변하는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는 모든 게 비밀이다. 그러나 무림괴절령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하고 잔인하며 신속한 자객이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아직 누구도 그의 표적이 되어서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그의 자객업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가 표적을 정하면 그 사람은 그 날로 인생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건 정설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 설부용이 기운상에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형, 그렇다면 저 사람이 그 자객?" "그렇다. 그러나...... 이 형은 쉽지 않을 것이야." "왜죠?" "자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암살을 시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건?" "그만큼 이 형이 강자란 증거지. 무림괴절령이 그렇게 봤다면 저자도 뛰어난 고수란 증거겠지? 그러나 저자는 암살로는 어렵다는 것을 감지하고 직접 나선 것이야." 무림괴절령이 무거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직접 보니 더욱 실감이 나는군!" 이청악이 빙긋 웃었다. "자객 대상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로군. 당신은 청부를 받아 이곳에 나타난 모양인데 자신의 죽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나?" "큭큭....... 자객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거야. 당신도 그런 걸 모른다고 하진 않을 텐데?" "그렇군." 이청악은 무림괴절령의 말에 수긍했다. 자객의 본연 업무가 바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왜 모르겠는가? 단지 무림괴절령 같은 초고수가 명왕성의 청부에 응한 게 안타깝다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다시 생각한 것은 자객이라도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상대라면 그곳이 어디든, 청부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선 무사로서의 기질이 아닐까? 무림괴절령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그는 이청악에 대해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활동했고 싸움을 시작했으며 누구와 대결을 벌였는지 모조리 조사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표적으로 삼는 청부자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만나고 싶은 적수이니 내 앞에 반드시 나타날 거야.' 그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이 실현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일생일대에 단 한 번 맞는 행운이라 생각했다. 무림괴절령은 빙그레 웃었다. "난 행복하오." "나도 그렇소." 이청악도 동조했고 공감했다. 두 사람은 적수란 것을 잊은 듯 서로를 보며 평화롭게 대화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눈빛이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데도 기운상은 숨이 막힐 듯했다. '애초에 난 상대도 아니군.' 그 정도인가? 그게 실제적인 두 사람의 능력이란 말인가? 기운상은 어찌 되었던 혈색령과 도망령을 죽였다. 그런데 그런 강자가, 그런 생각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대단한 두 사람이 오늘 마주쳤다. 이 지하동굴 안에서! 기운상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천하를 통틀어 3~4명만이 그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서 기운상은 평온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를 아껴주는구나.' 말이 필요 없었다. 사내, 그것도 천하를 울리고 있는 사내들이라면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서로를 바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림괴절령이 말했다. "이 형과 빨리 만나지 못한 게 한이 되오." "내세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만납시다." 파팟!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허공에 부상했다. 2 '씨를 말리려는 수작이야.' 궁설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의도는 보기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어 보였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바로 그런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저들에게 물러나지 못할 대가를 제안했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런 제안을 할 수 없지만 명왕 궁왕기라면 자격이 넘쳐 흘렀다. 그 자격을 남용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가만 적당하면 누구나 응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다고 궁설지로서는 거부할 명목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바랄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궁왕기의 배려라 하기에는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고 큰소리치기에도 멋쩍었다. 그녀는 결심하고 말했다. "누가 먼저 나설 거예요?" "우리외다!" 강남칠협이었다. 현궁이 당연히 나서려는 순간에 궁설지가 제동을 걸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은 전인각과 전개연이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앞으로 나섰다. 현궁은 불평이 있었지만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이청악이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래의 형수님이 될지도 모르니.......' 궁설지가 전개연을 불러 나직이 속삭였다. "저들은 목숨을 걸었어." "아씨,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전인각 방적에게 속삭였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 강남칠협은 검법에 능수능란한 자들이다. 저마다의 독특한 검세를 익혀 난해한 상대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공은 더욱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전인각이 좌측으로 비켜서고 전개연은 5보 우측에 섰다. 그러자 강남칠협은 타원형을 그리며 몸을 비스듬하게 세웠다. 하나의 검이 그들에게 쥐어져 있었고 단아한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은 반드시 결판을 내겠다는 결심이 선 얼굴이었다. 방적은 전개연을 힐끗 보더니 옆으로 휘돌았다. 스읏! 동시에 전개연이 허공에 몸을 띄웠다. 거구의 몸이 허공에 뜨자 마치 고무풍선처럼 가벼웠다. 부력이 허공에서도 통하는 듯했다. 슈악! 어느새 그녀의 몸이 뒤틀리며 패협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거령수(巨靈手)였다. 패협의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그 순간에 쾌협의 검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캉! 한 번의 대립은 단순하게 끝이 나며 서로가 물러섰다. 그때, 방적이 재빨리 앉으며 세 사람의 하체를 공략했다. 취앗! 가공스런 경기가 일어나 땅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유협과 죽협, 매협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검을 꽉 거머쥐었다. 슈욱! 그들은 물러남과 동시에 이미 허공에 뜬 방적의 각법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발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것을 강남칠협은 처음 보았다. 그렇다고 방관하다가는 그대로 황천행이다. 우두머리인 영협이 사선으로 검을 그어 내리며 덮쳐왔다. 그곳은 방적의 좌측으로 사각지대였다. 방적이 우측으로 몸을 틀어 공격하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마악 검이 방적의 등을 가르려는 순간에 그의 몸이 휘돌았다. 회전날개처럼 빠르게 움직인 그의 몸을 따라 발길질이 이루어 졌다. 상대를 포기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방적은 날렵하게 발 안쪽으로 검을 차면서 재차 한 바퀴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검과 함께 퉁겨 나가는 영협의 얼굴을 향해 공격했다. 그 순간은 길게 설명이 되었지만 눈 깜짝할 찰나였다. 파팡! 2장이나 물러선 영협은 겨우 피했지만 얼굴이 얼얼함을 아직도 느끼고 있었다. 부어오른 듯 가렵기까지 했다. 그나마 쾌협이 도와주었기에 간신히 물러날 수 있었다. 자리는 처음과는 달리 서로가 바뀌어 있었다. 다시 방적과 전개연이 등을 맞대며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강남칠협을 응시했다. 강남칠협은 입술을 깨물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방적은 느꼈다. '이렇게 가다가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순간이 왔다. 방적은 전개연의 허리를 툭툭 쳤다. 전개연이 슬쩍 곁눈질을 했다. 그의 눈빛을 보자 전개연은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방적의 눈빛이 강렬하자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희생하며?' 그녀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방적이 믿는 것은 그의 다리가 의족이란 것이다. 그것을 희생하여 적을 섬멸하고 자신도 어느 정도의 부상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상처로만 끝나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허리를 칠 때, 그녀는 희망이 있는 눈빛으로 보았다. 그러나 처음보다 나은 것이지만 오십보백보였다. '식지동이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선공(宣公) 사년조(四年條)에 나온 것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상대를 죽인다는 그런 말이다. 그 상대가 군주(君主)라는 게 마음이 걸렸지만. 그런 이야기대로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방적이 천천히 전개연의 등을 떠나며 다리를 고무래 정(丁)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긴장하며 마음을 졸였다. '뇌전연환각법(雷電連環脚法)이다!' 천라도마 야율제를 피떡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끝나면 내공이 거의 고갈된다. 그런 만큼 효과도 아주 지대하다. 전개연이 문제삼는 것은 그 순간에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촌각의 순간을 벗어나려면....... 그게 있다면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적절하게 호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 손에 달렸다!' 그녀는 떨렸지만 전신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이내 마음을 평정했고 차분한 심경이 되었다. 강남칠협도 두 사람의 행동이 이상하자 이내 긴장감이 고조된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들도 느꼈다. '한 수로 승부를!' "개연!" 파팟! 타원형으로 서 있는 첫 부분을 훑으며 방적은 두 발을 기계처럼 움직였다. 첫 번째 타격이 영협이었다. 파팡! 검을 그의 손에서 퉁겨 내고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아랫배 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스각! "으악!" 영협의 비명이 울리자 다른 여섯의 행동이 빨라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손을 조심해!" 물러서던 죽협이 소리쳤으나 방적의 발길질에 정신이 없었다. 뇌전연환각법은 한 번 뜨면 백팔 번의 발길질을 끝내야만 지상에 착륙한다. 콰콰콰......! 물러나던 죽협이 발길질을 피하며 그의 손을 주시할 때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그의 머리를 덮었다. "피해!" 꽝! 뇌수가 터지고 피가 흐트러지는 안개처럼 움직일 때 죽협의 몸은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전개연의 거령수였다. 파파......! 끊임없는 풍차처럼 방적의 발길질은 계속되고 남은 다섯의 방어는 순간적으로 정교하게 변했다. 따다당! 4개의 금속성 울림이 퍼지자 방적은 순간, 뜨끔했다. 아니나 다를까! 칵! 옆구리에 하나의 검이 스며들었다. 앞에서 뒤로 꼬치 꿰어진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왼쪽 다리가 반원을 그렸다. 슉! 꽝! 이마 밑으로 얼굴이 탈골된 매협이 옆으로 퉁기고 그 사이를 뚫고 패협의 위력 있는 검기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괴이한 방향으로 쑤시고 들어오는 쾌협의 쾌검만 아니었으면, 패협의 가슴도 함몰될 뻔했었다. 그러나 방적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좌측 발을 들어 패협의 검을 막고 그의 우수가 비스듬히 뉘어지며 쾌협의 검과 동시에 스쳤다. 곽! 팍! 쾌협의 검이 그의 어깨를 꿰뚫고 우수에 쥐어진 기이한 모양의 검은 쾌협의 이마를 뚫고 말았다. 그 검은 꼬불꼬불 구부러진 길처럼 세 번의 굴곡이 있는 검이었다. 파앗! 빼어들자 피가 솟구치고 노을처럼 붉은 피보라는 좌우로 덮쳐오는 유협과 패협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콰곽! "방 가가!" 후앙! 콰쾅! 그녀의 거령수가 전력을 끌어올린 보람이 있었는지 방적의 오른쪽 가슴과 아랫배에 박힌 2개의 검을 부러뜨리고 유협과 패협의 머리통도 박살내었다. 철협의 검은 곧장 그녀의 등뒤를 찔렀다. 그 순간은 그녀로서도 어쩌지를 못했다. 푹! 쉭! 그녀의 주먹이 등뒤로 휘둘러졌다. 철협은 머리를 낮추며 피하더니 검을 빼냈다. 쑥! 동시에 그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아야만 했다. 허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방적이 떠 있는 것이다. 철협은 입을 딱 벌렸다. '괴물!' 파팡! 검을 들어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나다 철협은 몸을 띄우려 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형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식지동의 형세였다. 누군가 살리려는 욕심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며 철협의 몸이 옆으로 굴렀다. 하나 구르기도 전에 하나의 손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꽝! "끄윽!" 주르륵 밀려나가던 철협의 몸이 퉁기듯 다시 일어날 때, "그냥 주무시지!" 꽝! 그의 면상으로 다시 주먹이 날았다. 거령수였다. 앞면이 모조리 일그러진 상태로는 아마도...... 살기는 힘들었다. 그의 몸은 3장이나 날려가서 통로 벽면에 부딪혔다. 쿵! 장송곡(葬送曲)이었다. "방 가가!" 전개연의 육중한 몸이 그렇게 날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방적은 피를 엄청나게 흘렸다. 그녀도 등에서 피가 쉼 없이 흐르지만 자신보다 그를 더 걱정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난 비계가 많아서 괜찮아." 방적은 웃었다. 그러나 너무 힘이 없어 처량하게 보였다. 전개연은 그의 상태는 아랑곳 않고 일단 업어서 뒤로 물러섰다. "다음은?" 이미 먼저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발도 현궁이었다. 그의 시선은 하북절정도를 향하고 있었다. 하북절정도는 중주일도를 힐끗거렸다. 중주일도는 그를 보며 심각한 낯빛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음을 궁설지 일행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긴 말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하북절정도는 자신의 칼을 어깨에서 내렸다. 비발도 현궁은 4개의 비도를 좌우 손에 쥐고 있었다. '다시 빼어들 틈조차 없을 것이다.' 그는 알고 있다. 절정도의 최대 변수는 바로 쾌도술이다. 그의 쾌도술은 찌르기 위주가 아니라 베는 자세가 자연스럽다. 한 번 베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현궁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숫자를 손에 쥔 것이다. 4개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기류가 흘렀다. 누가 먼저 시작하든 무공의 고하(高下)가 승부를 결정한다. 3 "부용아, 아우들이 위험에 이르렀어!" 이청악은 자신의 가슴에 그어진 검흔에 자꾸 눈이 갔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다. 설부용은 이청악의 슬픈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무림괴절령을 살리려 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진전되지 못했다. 무림괴절령의 무공은 진정 강했다. 그가 너무 강했기에, 이청악으로서도 마음대로 그를 살리고 자신도 살릴 수 있는 힘이 미치지를 못했다. 그 순간에 궁설지 일행들에게 악재가 겹쳤음을 알아차리고 더욱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에게 보낸 고수라도 그렇다 치지만, 궁설지 등에게 보낸 사람들도 절대 만만치 않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서둘렀다. 그녀도 마음이 바빴다. '올 때는 가까운 것 같았는데 갈 때는 이다지도 멀다니.......' 그녀는 귓전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나 알 수 있었지만 마음은 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4 사삭! 절정도의 칼날은 아주 예리했다. 빠르기도 하지만 그 기세는 거대한 산악을 자를 수 있는 힘이 들어 있었다. 그 여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현궁의 신법 하나하나에는 묘용이 들어 있었다. 피함에도 적극적이지만 자신의 공격권을 만들기에도 주력했다. 슈아앗! 계속적인 공격에 현궁은 이미 50초 이상을 양보 아닌 양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양보라고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틈이 없어!' 그게 결정적이었다. 어디에도 한 치의 틈은커녕 반 치의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답답했다. 이대로 계속되면 결국 당하는 것은 자신이다. 알고는 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씁쓸했다. '아쉽군.' 상대 여인이 있었더라면 쉽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천하의 무림칠기인 현궁이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게 만들었다. 바로 하북절정도였다. 낙교는 하북절정도의 칼날이 서슬이 시퍼렇자 놀랐다. '저 정도로?' 보지 않은 동안에 그의 고심한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하나 낙교는 실망하지 않았다. 저 완벽한 도세를 뚫고 언젠가는 둘째 형이 비도를 날릴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다. '암......!' 낙교도 생각은 안심하면서도 상황이 그렇지 못하여 초조했다. 계속 몰리는 현궁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형편도 아니고 그랬다가 저들도 모조리, 아니 어디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적들까지 죄다 동원될 것이다. 급박하게 흐르지만 낙교는 침착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기묘한 형상이 눈에 잡혔다. '미끼......?' 절정도의 칼날은 현궁의 머리칼과 옷자락 등 어디 하나 헤쳐놓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단정히 묶었던 머리는 산발되었고 옷자락은 군데군데 찢겨져 걸레조각이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현궁의 신법은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조차 오히려 유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갑자기 뒤틀렸다. 슈육! 한 순간에 뭔가를 포착한 듯 현궁의 좌수 비도가 2개 날았다. 하북절정도는 이제 마지막 단계를 밟으려는 형세였다. 그는 물러나고 피하기만 급급한 현궁을 보면서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칼이 깃발처럼 종횡으로 나부꼈다. 칼 깃발의 영향은 사방 3장으로 번져 나갔다. 현궁의 몸이 그것에 휩쓸리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회다!' 하북절정도의 칼이 순간, 직각에서 좌우로 45도씩 움직였다. 마치 벌떼가 꽃술을 빨 때 움직이는 날개처럼 순간적이었다. 그때, 현궁의 비도가 날았던 것이다. 카캉! 손아귀가 찌르르 하는 느낌이 왔다. 하북절정도는 입술을 깨물며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역시 강하군!' 그는 칼을 고쳐 잡고 즉시 쓸어왔다. 후앙! 칼바람은 태풍처럼 주위를 떨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현궁의 옷자락도 팔락거렸다. 그의 시야도 어지럽게 만들었고 다리까지 후들거리게 했다. 모든 게 허공에 날렸다. 그러나 현궁의 비도는 날리지 못했다. 쉬익! 방심하는 순간, 그대로 날아드는 독사의 이빨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그것이 바로 현궁의 비도였다. 하북절정도가 입술을 깨물며 생각함과 동시에 그에게로 날아든 2개의 비도였다. 그의 두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콰콱! 삭! 2개의 음향은 듣기에 그리 거북하지는 않았다. 음향은 부드러웠으나 결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심장 부위와 명치에 틀어박힌 2개의 비도는 손잡이만 겨우 보였다. 하북절정도는 퉁기듯 날아가며 최고의 절초인 풍륜절개(風輪切開)를 펼쳤다. 쾌도술의 마지막 종착역이라 할 수 있었다. 그 한 번의 칼질에 현궁의 좌측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둘째 형!" 낙교가 용수철처럼 퉁겨 나오며 그를 부축했다. 현궁은 지혈을 하면서 손을 들었다. "난 괜찮아!" "저런......!" 중주일도와 중원사검의 안타까운 음성이 들려왔다. 쿵! 동시에 누군가 무너지는 음향도 들렸다. 하북절정도의 죽음의 증거였다. 궁설지는 하북절정도의 도법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현궁의 처지를 보면서 반짝이고 있었다. '십대 고수는 명실상부한 무림의 진실일 수도 있겠어......!' 그녀는 현궁과 방적이 싸움에 임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하나 어느 정도 요양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싸울 수 있음을 안다. 하나 그것보다는 이곳의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급박한 순간이기도 하지만 위기도 첩첩산중이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이곳에서 상처를 입고 기동이 불편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먼저였다. 그때도 떠오르는 생각은, '이 상공.......'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되었다. 저쪽에서 누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만약이라도 중주일도가 나서면 그녀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중원사검이 나서더라도 그건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 그들이 나설 것이라 장담했다. '순서상이라도.' 그건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 그녀는 내심은 이렇게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수하와 무림칠기들에 대한 비평이었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어.' 그건 그들로 봐서도 진일보(進一步)한 것이었다. 무공면이나 전력면이나 심적인면에서도 훨씬 앞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생각 와중에 누군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다음은 누구시오?" 파영권 견책과 성랑호리 육효진이었다. 이상적인 연인(戀人)이었다. 밑바닥 같은 상황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그들이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어김없이 그녀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스윽! 소리 없이 다가온 네 사람은 중원사검이었다. 무림에서 검으로 최고를 차지한 사람은 이들 4명밖에 없을 것이다. 명칭도 그랬다. 중원사검, 천하에는 이 4개의 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부심이며 자존심이었다. 검으로 일어섰고 검으로 부상하려 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서는 자는 그들의 검을 받아야 한다. 중원사검은 강호에 발을 디딘 지 이미 20년이 훨씬 지났다. 그 동안 숱한 싸움을 해 왔지만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성장하였고 이제는 무림이 붙여준 명예로운 호칭인 중원사검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들을 초청했다. 그들이 하늘이라 우러러보았던 환우삼제를 단 3초만에 무너뜨린 명왕 궁왕기였다. 명왕성의 성주이기도 했다. 중원사검은 협의의 인물이다. 그건 누구나 인정했고 명호도 중원을 대표함을 무림인들이 직접 인지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 전에, 그들은 무사이며 강자존을 절대적으로 신봉(信奉)한다. 상대가 누구든지 그건 별로 따지지 않는다. 강하다면, 누가 불러도 그들은 갈 수 있고 그곳에 설 수도 있었다. 하물며 좀도둑도 아니고 하류배도 아니었다. 그들을 불러들인 사람은 천하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였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고 올라설 수도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인물이었다. 명왕 궁왕기가 불렀기에 그들은 서슴없이 이곳으로 왔고, 그리고 떳떳하게 설 수 있었다. 궁설지는 네 사람을 보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저들은 명예와 권력, 영화보다 무공이 먼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강자존의 법칙이었다.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무식하기도 하고 협의의 인물로써는 부적합하지 않느냐 여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각은 다르다. - 강자라도 천하를 휘어잡을 수 없으면 백도든, 흑도든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천하를 오시하고 떡 주무르듯 하는 유일존재만이 그들의 환영을 대대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중원사검으로 명호를 받을 때 호언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지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궁설지가 무림칠기를 택한 이유 중 최선은 그들이 나이가 젊고 협의에 투철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이청악 때문이었다. 셋째도 이청악이 있어서였다. 둘째는 그녀가 보기에도 출중한 인재였고 또한 신비스러운 존재로 부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의 이유는 바로 환우삼제의 제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백한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하에서 최고는 아니었다. 단지 이름을 드날렸고 협의심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명왕 궁왕기가 선택한 십대 고수는 이름 그대로 강자존을 떠받드는 전형적인 무사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불러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지 않은가? 동사검(東邪劍), 서독검(西毒劍), 남황검(南皇劍), 북제검(北帝劍). 중원사검은 중원을 사등분하여 휩쓸고 있었다. 그들을, 아니 십대 고수라 이름 붙인 이들에게는 누구도 말을 함부로 붙이지 못했다. 삼성당이나 화건방이라 할지라도 어림없었다. 그저 양보나 사양 정도는 받아내어도 그 외에는 절대 거부였다. 그걸 벗어나는 것에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십대 고수가 인정해야만 했다. 중원사검과 중주일도 정도가 되면 그 절차는 무척 까다로웠다. 얼마나 까다로운지 일설에 의하면 화건방의 이인자인 호법이 협상하려 왔다가 따귀만 맞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중원사검에게 어떠한 보복조치도 못했다. 그만큼 그들은 강했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자존심이 있었다. 그 자존심을 무너뜨릴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격조차 모두 미비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들을 찾았고 그들은 승낙했다. 그 자격은 바로 명왕 궁왕기 정도 되어야 가능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중원사검 위쪽으로 중주일도가 있다. 그리고 무림괴절령과 고금사황(古今邪皇)은 그 누구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이 찾았던 것이다. 그들을 찾은 사람은 바로 고금사황과 오랜 친분을 유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흔쾌히 응락했다. 고금사황 정도의 친구라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