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3(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 박상은 원장(안양샘병원 미션원장, 한국로잔부의장)
말씀 : 누가복음 7:11-17
제목 : 두 종류의 행렬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생명을 위한 고난" 특별집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너무나 환영합니다.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두 종류의 행렬"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저에 대한 소개를 해 주셨습니다만, 저는 신장내과 의사이고,
샘 병원의 미션원장으로 일하면서 생명윤리를 따로 공부할 기회를 가져서 이후에 국가생명윤리 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지금은 합동신학대학원의 생명윤리 석좌교수로, 생명윤리 학회 고문으로 또, 로잔의 생명위원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 가정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이미 4남1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쌍둥이로 저희가 태어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5남매가 있었으니 더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될 법도 한데,
저희 어머님은 낙태를 하지 않으시고 심장병을 앓으시는 가운데 저희 쌍둥이를 낳아 주셔서
쌍둥이 동생은 장신대신대원의 교수로 주목사님하고 같이 신학을 공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또 이렇게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님의 그 결정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7남매가 다 짝을 데리고 오더니 아이를 낳기 시작해 가지고 지금은 60명 정도 되는 그런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분명히 두 분이 만나셨는데, 이렇게 60명이 되는 걸 보면서
30배의 결실을 가져오는 그 주님의 말씀이 정말 이루어지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저출산 시대에 정말 아이를 낳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도 큰 축복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의과대학을 서울에서 졸업을 했지만, 장기려 박사님 밑에서 배우고 싶어서 부산에 내려가서 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턴 때에 제가 기억하는 환자는 쇼크 상태로 온 23살의 여자 환자였는데,
6개월 된 태아를 낙태시키기 위해서 조산소를 찾아갔다가, 그 조산사가 6개월짜리 애가 뭐 이렇게 크냐 그러면서
계속 긁어대서 자궁을 뚫고 창자의 일부까지 긁어내면서 복강 안에 출혈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혈압도 잡히지 않는 그 여성의 배를 가르고 자궁을 들어내고,
그리고 창자의 일부까디 들어내면서 배 앞에 인공항문을 만드는 참 안타까운 수술을 하게 되어서
그 여성은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고, 또 배로 변을 봐야 되는 참 안타까운 상황의 여성을 제가 경험하고
장기려 박사님에게 찾아가서 이런 환자를 보았느냐고 여쭤봤더니,
장기려 박사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닥터 박,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가 많겠어? 죽임을 당한 아기가 많겠어?"
저는 당연히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가 많겠지요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니라는 겁니다.
그 때만 해도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의 두 배 이상의 아이들이 낙태를 당하는 참 안타까운 그런 상황이었지요.
그러면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닥터 박, 자네가 의사가 되지 않더라도 이것만 막아낼 수 있다면,
자네가 의사가 되어서 살릴 수 있는 환자보다 훨씬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걸세."
저는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했다가, 고신의대 교수를 내려놓고 미국에 가서 생명윤리를 공부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생명윤리를 공부하면서 그곳에 있는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를 함께 공부할 기회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국가생명윤리위원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장관 6명이 위원으로 와 있고, 또 민간 위원들 14명 이렇게 20명이 모여서
우리나라의 생명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지켜내는 그런 위원회가 되겠습니다.
이 위원회에서 제가 했던 일 중에 하나가 우리나라 최초로 생명존중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독교적인 가치를 담아서 이 생명존중선언문을 발표를 했습니다만,
아직도 안타깝게 우리나라에 이 생명의 존엄성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읽으신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7절의 말씀에는 두 종류의 행렬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을 향해서 들어가고 계셨고, 그리고 나인성에서는 행렬이 나인성 바깥을 향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을 향해서 들어가는 예수님을 앞세운 행렬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는 생명의 행렬이었다면,
나인성을 빠져나오는 나인성과부의 독자의 관을 앞세운 행렬은 어쩌면 죽음의 행렬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두 행렬의 차이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떤 행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행렬의 맨 앞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가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행렬은 예수님을 앞세운 행렬입니다. 이미 백부장의 종을 살리신 행렬이고, 기쁨과 환희의 행렬이고,
또 소망의 행렬이 나인성을 향해서 가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영생의 행렬입니다.
하지만, 이 나인성 밖으로 빠져나오는 행렬은 과부의 독자의 그 시신을 앞세우고 오는 죽음의 행렬,
슬픔과 통곡의 행렬이고, 절망의 행렬이며 나인성 밖을 빠져나가 공동묘지를 향하는 그런 이별의 행렬이 되겠습니다.
이 두 행렬이 그냥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었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이 파란만장한 이 나인성과부의 이 행렬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시고 멈추어 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를 보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처럼
이 당시만 해도 이 과부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남편에 이어서 죽게 된, 이 안타까운 이 과부의 삶은 얼마나 참 안타까운 삶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셔서 관 위에 손을 대시며 그 청년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살아난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그 어미 과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이 두 행렬의 만남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더 이상 공동묘지를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유턴해서 다시금 나인성으로 돌아가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앞세운 그 생명의 행렬과 합류해서 더 큰 행렬이 되어서 나인성을 향해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공동묘지에 가기 위해서 준비했던 모든 장례 소품들은 다 버려두고,
이제 예수를 쫓아서 함께 이 생명의 행렬에 동참한 큰 행렬이 되었을 때, 예수의 소문이 온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는데
더이상 공동묘지를 갈 필요가 없는 죽음의 행렬은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행렬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21세기를 폭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폭력에는 두 종류의 폭력이 있는데, 눈으로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거시적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인지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폭력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죠.
어쩌면, 911테러와 같은, 또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이런 푹력들은 우리가 단번에 알 수 있는 그런 끔찍한 폭력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동전보다 작은 크기의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우리가 잘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폭력으로 죽임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911테러로 5천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매일같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핀셋보다도 작은 크기의 발이 잘라져 나와 있습니다.
소파수술로 잘라져 나온 그런 몸가지들을 다 모아봤더니, 한 인간의 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진공흡입술이라고 해서, 진공청소기처럼 음압을 걸어서 썩션을 해낼 때,
태아의 몸이 갈기갈기 잘라져서 나오는 그런 흡입술도 낙태의 시술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낙태된 태아가 화장품과 약품의 원료로 유통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21세기의 현대의학은 많은 발전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 의학이 과연 다 옳은 것일까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노릇을 하는 의학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만능주의, 최근에 젠더이데올로기까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그 수많은 사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복제하려고 하고, 맞춤아기를 만들려고 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놈 프로젝트를 완성했던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그의 저서 『The Language Of God(신의 언어)』라는 책을 내면서
'유전자 지도에서 발견한 신의 존재'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해 봤더니,
이 인간의 유전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이 신의 언어라는 책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유전자를 가위질해서, 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해서 맞춤아기를 만들고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를 위한 수많은 생명윤리의 문제들을 저희가 논의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변형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예기치 않는 그런 과일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또, 형광유전자를 집어넣은 고양이를 여러분이 하나 사 두시면,
밤에 화장실 갈 때 불을 켜지 않아도 이 형광고양이 덕분에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그런 형광고양이도 시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한 생명은, 우주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오늘 이 고난주간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정말 부족하고, 동물보다 그리 썩 나은 것 같지 않은 미물과도 같은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이 고난 주간에
우리는 다시금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세 개의 기본권이 있습니다.
생명권, 건강권, 행복 추구권...
이 세 가지는 늘 우리가 누려야 되지만, 가끔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가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덜커덕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 가지 권리가 충돌을 하는 거죠.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이 그 여성에게 왜 없겠습니까마는,
뱃속의 그 태아의 생명권에 비교해 본다면 행복 추구권은 꼬리를 내려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생명권과 생명 결정권이 있습니다.
생명 결정권은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낙태를 하거나,
인간 복제를 하거나, 안락사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것이 이 생명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권이지, 결코 생명 결정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우리의 심장이 뛰는 그 순간 동안
마음껏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 드리는 것이 바로 이 생명권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 생명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켜야 될 헌법적 & 생명윤리적 가치는
* 낙태가 아니라 생명
* 비혼이 아니라 결혼
* 혼자가 아니라 가정
* 소유가 아니라 사랑
*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의사가 기록한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고
이 마리아가 어디를 향해서 달려갑니까? 산 중에 있는 친척 엘리사벳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이 엘리사벳은 이미 세례 요한을 잉태한 지 6개월이 되어서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옴을 알고서
"큰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이렇게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드리드에 있는 박물관에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 임신 6개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 잉태
* 엘리사벳 복중의 6개월 된 태아 요한이, 막 잉태된 예수님의 방문을 받으며 기쁨으로 뛰놀았다.
* 엘리사벳을 마리아를 향하여 '내 주의 모친'이라고 고백함으로 막 잉태된 배아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하였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옴은 어찜인고?"
예수님은 언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분만되신 날이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날은
그로부터 9개월 전에 예수님께서 아주 작은 연약한 인간 배아의 모습으로 마리아 태중에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누가 지극히 작은 자일까? 스스로 자신을 지켜낼 수 없는 자가 지극히 작은 자인데,
우리 주위에 장애자, 환자, 어린이, 노인, 정신질환자, 수 많은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연약한 자가 인간 배아, 인간 태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가 되새기면서
뱃속에 잇는 태아에게 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낙태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처참하게 죽이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비명을 지르면서 엄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낙태는 작은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처절한 행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한 그 날을 "우리가 생명의 날로 지키자"
그래서 12월 25일 성탄절을 기준으로 산부인과에서 배운 수식을 가지고 계산해 봤더니,
달 수에 9를 빼고 일 수에 7을 더하면 잉태일이 되거든요.. 3월 32일이 나와요.
그래서 4월 1일을 우리가 생명의 날로 지키고, 4월 첫째 주간을 생명주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깜깜한 마리아의 태중에서 9개월의 삶을 사셨을까요?
그것은 인간 배아, 인간 태아가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2000년도부터 이 생명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는데,
재작년에는 온누리교회 작년에는 중앙성결교회, 그리고 올해는 주안장로교회에서 이 생명주간 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사단법인 '프로라이프'를 처음 설립하신 김현철 목사님,
수요일에는 베이비박스 이종락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시고,
그리고 목요일에는 생태계의 윤리, 우리 기독교인이 어떻게 환경과 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될 것인지
한기채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 주시고,
금요일에는 이 시대를 뒤덮고 있는 젠더이데올로기,
남자와 여자의 성을 이제는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남자와 여자 외에도 70가지, 어떤 학자들은 200가지의 성별이 존재한다면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성별을 여러분들이 정할 수 있다라는 이 젠더이데올로기가 지금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말씀을 현숙경 교수님께서 해 주시고,
마지막 토요일은 로잔 운동과 이 생명운동에 대해서 한철호 선교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시고,
주일 오후에는 생명주일 예배로 이재욱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실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4월 1일 생명의 날에 기독교, 카톨릭, 많은 분들이 함께 생명의 날 걷기대회를 저도 함께 참여해서 걸었습니다.
또, 자살예방 걷기대회, 이런 것들이 저는 생명의 행렬이 아닌가,
이 죽음의 행렬에 맞서서 비록 작고 나약하지만 생명의 행렬이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 고난의 길, 이 십자가의 길이 바로 이 생명의 행렬이 아닌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앞세운 이 생명의 행렬이 오늘도 이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헌혈을 하고 골수기증을 하는 이런 것들은 생명행렬이 아닌가,
피로 회복을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나눔의 기적이 되겠습니다.
저희 병원에서도 여기에 참여해서 코로나 기간 동안에도 헌혈을 이어 왔습니다.
한자로 생명(生命),
너무나 저는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생명(生命) - 생(生)을 명(命)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어떻게든지 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생명,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