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백이 넘치는 커다란 기합 소리가 왕궁 내의 연무장에서 크게 울려 퍼졌
다. 어차피 그곳은 왕실 기사단 전용의 연무장이라 이렇게 환한 대낮에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이상할 장소였으나, 그 힘찬 기합 소리
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만큼은 어쩌지 못할 기
이함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옆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건장한 기사들이나, 아니면 그
어울리지 않는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는 소녀나, 혹은 그 소녀를 연습
용 검으로 상대해 주고 있는 중년의 위엄 있는 기사 등은 어떠한 괴이함
도 느끼지 못하는 듯 싶었다. 오히려 그것을 아주 당연시하게 받아들인
달까.
소녀는 위로 바짝 틀어서 묶은 멋들어진 금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마치
나는 듯 검을 고쳐 잡아 상대에게 내리쳤다. 그러나 금방 소녀의 검은
상대방의 거대한 힘에 밀려 쫓기듯 근처의 풀밭에 떨어졌고, 소녀는 칫
하는 침음성을 터뜨리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착지하였다.
소녀를 상대해 주던 중년의 건장한 기사는 슬쩍 미소 지으며 소녀에게 다
가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끝이 무딘 검을 내밀어 소녀의 목에 조준하며
말했다.
"하하, 이번에도 제가 이겼군요, 왕녀님. 하지만 많이 느셨습니다. 저도
자칫 잘못 했다간 질 뻔하였으니까요."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능란하게 해대는 자신의 스승이자 왕실 기사
단장 로우케를 어이없다는 눈길로 바라보던 루비오 왕국의 제1왕녀 라이
데이아 릴 이데르바 루비오는 자신의 손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 내고
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기사의 예법을 취했다.
"신 라이데이아 릴 이데르바 루비오, 당신과의 결투에서 졌다는 것을 시
인합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왕녀 라이데이아의 틀에 꽉 짜여진 듯한 태도에 로우케는 혀를 끌끌 차
는 도중에도 라이데이아와 같은 태도를 취하며 인사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사와 기사간의 결투가 끝난 후에 하는 예법을 끝마친 라이데이
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로우케를 바라보았다. 금방의 절도 있는 기사
의 태도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모습으로, 그야말로 스승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충실한 학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라이데이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스승님? 저는 분명히 지난 시간에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최대한 스피드와 제 몸의 가벼움을 살려 스승님을 공격하였
는데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서 빛나는 광채에 눈이 부시다는 착각을 느끼며
로우케는 천천히 대답을 생각하였다. 그는 완연한 무골이어서, 보통 그
런 부류들이 그렇듯 그 또한 말솜씨가 없었다.
로우케는 침을 한번 삼킨 후 절도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그녀에게 설명
을 시작하였다.
"물론 왕녀님께서 왕녀님의 그 빠른 스피드는 잘 살려 저를 공격하셨으
나, 역시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저보다 힘이 약하신 왕녀님으로서는 무
리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옆구리나 다리 등을 공격하셨어 야죠."
"하지만 제가 옆구리나 다리 등을 먼저 노리고 공격하였더라도 스승님께
서는 틀림없이 피함과 동시에 저를 공격하셨을 겁니다. 뭐니뭐니 해도 당
신은 이 왕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이니까요."
왕녀의 거침없는 지적에 로우케는 잠시 말문이 막힐 뻔했으나, 그녀의 질
문이 어차피 자신이 조금 후 설명할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있
게 말하였다.
"그럴 경우에는 정면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그 직전에 몸을 살짝 비틀어
공격 위치를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럼 다음 수업에는 그 방법에 대
하여 배워 보도록 하지요. 물론 이 왕국 최고의 기사인 저를 이기실 수
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
로우케의 자만과 그의 뒤에 따라붙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라이데이나는 잠
깐 동안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훗 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겉으로 보이는 위엄 있는 분위기와 당당함, 기백,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
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임에도 그는 그 속으로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
은 여리고 천진난만한 구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
고는 라이데이나나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나 생각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 왕녀님!"
왕녀와 단장은 멀리서 메이리 치는 것처럼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보았다. 그러나 왕녀도, 로우케도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갑자기 들려온 지친 숨소리에 목소리를 찾던 왕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가 흠뻑 미소지었다.
"헤르데이스. 아르덴."
그 목소리의 시발점이자 기사단장 로우케의 맏아들인 헤르데이스와, 그
목소리의 시발점이자 라이데이나의 배다른 동생 아르덴은 똑같이 숨을
몰아쉬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먼저 숨을 추스리고 왕녀께
예를 취한 것은 헤르데이스였다.
"신 헤르데이스 온 아트슬론, 왕녀님을 뵙습니다. 항상 왕녀님의 걸음걸
음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그대의 가슴에 항상 신의 은총이 깃들길. 일어서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헤르데이스의 인사말에 짧게 답하며 라이데이나
는 기품 어린 왕녀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그 옆에서 아직껏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자신의 말썽꾸러기 동생에게 가볍게 눈을 흘겼다.
"도대체 너는 얼마나 뛰어왔다고 금세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얼른 일어나."
가시 돋친 말과는 다르게 손수 손을 내밀어 자신을 일으킨 라이데이나에
게 아르덴은 귀엽게 눈을 찡그린 후 투정하듯 말했다.
"헬이 멋대로 뛰어가는 걸 어떡하라고. 이 연무장은 길도 잘 모르는데.
그리고 그 누나 같은 말투 좀 집어쳐 주겠어? 겨우 나보다 닷새 먼저 태
어난 주제에."
멋대로 남의 귀한 자식의 이름을 줄여 부르는 아르덴을 못마땅한 눈초리
로 쏘아보던 라이데이나는 아르덴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톡 쏘
아 붙였다.
"길을 모르긴 왜 모르니? 건장한 기사들이 살벌하게 싸우는 게 무서워서
지, 뭐. 좀 간을 키우는 게 어때? 그래 가지곤 장가도 못 가. 그리고 닷
새도 엄청난 기간이야. 너와 나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겨우> 닷
새 먼저 태어난 나와, <겨우> 닷새 늦게 태어난 너와의 차이. 나도 누나
노릇 하는 것 싫어. 그러니 제발 신경 안 쓰이게 처신 똑바로 하고 다녀
주겠어? 아르덴 왕자 전하?"
"칫."
한마디도 져주지 않는 누이의 신랄한 말투에 아르덴은 무언으로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라이데이나는 더욱 더 신이 나서 그를 비꼬았다.
"어제 일만 해도 그래. 어제, 너 로우케 경에게 검술 수업 받기로 했으면
서, 빼먹었다며? 잘 하는 짓이야, 잘 하는 짓. 너, 일국의 왕자 맞니? 그
것도 기사의 나라 루비오 왕국의! 그래 가지곤 왕가의 체통만 떨어뜨린다
고. 알아들어?"
라이데이나는 누나 노릇 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
실수 투성이 동생을 챙기는 무서운 누나 노릇은 딱 맞는 것 같았다.
라이데이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옆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
켜보던 왕실 기사단장을 끌어들였다.
"로우케 경도 왕자의 검술 스승으로서 뭐라 말 좀 해 보오. 책임감 없이
하기 싫은 일을 요리조리 피하는 왕자는 왕제의 자질이 없음과 동시에
기사의 자격도 없는 것 아니겠소이까. 로우케 경이 그렇게 왕자를 방관하
고만 있으니 왕자가 더 버릇없이 구는 거요. 뭐라 따끔하게 한마디 일러
두어야지."
금방 까지만 해도 <스승님>이라 칭하며 아주 예의 있게 존대하던 라이데
이나가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그에게 반 낮춤을 하자 그녀의 이중성에 혀
를 내두르면서도 로우케는 왕녀의 퍼런 서슬에 질려 이리저리 말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그는 말재주가 없었다.
"에, 왕자님. 그래선 안 돼지요. 옛말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뭣이냐. 바로 일찍 일어나면 여러 가
지로 좋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충분한 수면 또한 매우 중요하므로 자고
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데…."
"아차차. 헤르데이스, 왜 날 찾은 겐가?"
"아, 참. 늦게 말씀 올리는 죄,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께오서 오랜만
에 가족끼리 함께 식사를 하자고 명하시었습니다. 왕자님께서 왕녀님과
함께 가시자고 하여서 지금까지 왕녀님을 찾고 있었던 겁니다."
죽이 잘 맞는군.
아르덴은 기사단장의 익히 유명한 횡설수설을 막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
린 라이-아르덴 혼자 부르는 라이데이나의 애칭-와 헬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 느긋한 생각도 곧 꿀밤 한 대에 깨지게 되었다.
억울한 눈빛으로 라이데이나를 돌아보는 아르덴에게 라이데이나는 차가
운 일별을 던졌다.
"그런 명을 들었으면 재빨리 내게 말해야지. 뭘 그렇게 멍청하게 군거
야?"
그리고 벌써 저 멀리 헬과 함께 사라져 버린 라이데이나의 뒷모습을 멍청
히 바라보던 아르덴은, 억울한 외침으로 울부짖으며 힘들게 뛰어가기 시
작했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에! 헬도 있는데에에에!"
한바탕의 폭풍우가 지나간 것만 같은 연무장엔 어느 샌가 로우케만이 혼
자 덩그라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