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에서 귀국해 발광하다 공직에 임용된 1994년.
곡절을 거쳐 시작된 상수도관리사무소 ‘이의가압장’에서의 공직생활은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동안 직원들이 부족했던 탓인지 가압장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 뿌리고 쓸고 대걸레로 닦아냈다. 공간이라야 고작 숙직할 수 있는 방과 주방 하나에 기계 운영실 겸 사무실, 500마력 정도의 펌프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배전시스템실,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만큼의 주차장, 지하의 펌프장 등이었다. 대형 펌프장 치곤 터가 좁아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가압장 상부는 깨끗해졌다.
가압장 상부 쪽이 말끔해지자, 대형 펌프장이 자리 잡고 있는 지하로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이야 말로 존재감이 있는 곳이었다. 가압장의 특성상 주요 임무는 펌핑(Pumping)을 통해 배수지(보통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음)로 물을 올려주는 것이었다. 배수지에서부터는 자연수압으로 시민들의 주방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3,300V 고압 모터에 연결된 펌프를 24시간 365일 가동해야 했다. 때문에 전기사고[정전]나 펌프 고장은 곧 단수를 의미한다. 가장 긴장해야 하는 지점이다.
매끄러운 가동을 위해선 체크리스트에 따라 수시로 정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문가가 부족해서였는지 때를 놓쳐 펌프의 소음이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고장을 우려한 나머지 타부서의 직원들이 긴급 지원을 나와 땜방(?)만 하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스를 주입하고 나면 반드시 쌓이는 똥[일종의 윤활유]을 치우지 않아 산더미를 이루었고, 조금씩 쓰다 쌓아둔 걸레들이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었다. 상수의 질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상수도 시설로는 논할 수 없다.
성질 급하고 더러운 내가 그런 모습을 두고 볼 순 없었다. 편의상 공업직[기계직]으로 임용되긴 했지만, 전기전문가로 오랫동안 생활한바 있고, 자동차 정비와 모터수리도 이미 풍부한 경험이 있던 나로선 모터와 펌프, 고압배전 선로 등을 익히는데 별도의 시간이 필요 없었다. 펌프 등 각종 시설물을 때 맞춰 점검하고 정비했다. 속된 말로 ‘닦고, 조이고, 기름을 친 것’이다. 귀를 찢을 만큼 요란했던 소음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펌프실 위아래가 깔끔해졌다. 좀 과장하면 가압장이 반짝였다.
펌프실을 내려다 볼 때마다 찌푸려졌던 인상이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가끔 상수도관리사무소에서 순회하는 동료 직원들이 변화된 가압장을 보고는 다들 놀라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특유의 고집을 지속했다.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범 공무원이 들어왔다’는 찬사(?)가 들렸다. 이상했다. 세상에 일반 기업의 노동 강도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같은 일이었음에도 모범공무원 소릴 듣다니,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직의 정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마침 여름이라 그런지 가압장 주변에 지들 멋대로 자란 잡초가 무성했다. 가만히 놓아두면 상수도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때때로 예초를 해준단다. 성질 급한 난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박봉이긴 하지만, 공구상이 즐비한 구천동으로 달려가 예초기 한대를 구입했다. 때만 되면 둘러메고 잡초를 제거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전기기술자나 가스기술자 노릇하면서 가지고 있던 공구들을 대거 가압장으로 옮겨 놓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펌프장 관리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공직에 들어온 이후, 가장 변화된 삶이라고 한다면, 역시 전쟁에 가까운 삶을 살다 ‘성찰할 수 있는 삶’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검정고시 학원에서 아내를 만나 아이 낳고 살면서 혼인식(婚姻式)에 대한 생각을 못했는데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되다 보니, 거행(?)하기로 했다. 다만 서양에서 유입된 오늘날의 혼인식은 달갑게 여기지 않던 터라 전통혼례로 할지? 천주교에서 간단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마침 우리 부부와 아이가 세례를 받았던 지동성당에서 치르기로 했다.
바로 성당을 찾았다. 6개월을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수료하고 세례를 받은 전력(?)이 있어선지 반갑게 맞아주셨다. 혼인식을 성당에서 치르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흔쾌히 수락했다. 결정된 날은 ‘10월 12일’로 정했다. 허례와 허식을 누구보다 싫어한 난 양가의 가족들만 모셨다. 사용료는 없었으나 신부님과 수녀님께 수고 많으셨다고 5만원씩 드리고 곧 ‘본수원 갈비’로 이동했다. 먹고 죽을 만큼 많이 주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비우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약간의 살림살이를 장만한 것까지 계산해 보니 대략 50만 원이 들었다. 우리 분수에 딱 어울리게 혼인식을 치른 것이다. 사실 내가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는 이유는 분에 넘치는 행태들을 마구 저지르는 점 때문이다. 특히 불특정 다수에게 청첩장을 뿌려 한몫 챙기려는 작태들을 보면 눈을 확 찔러 버리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어려운 이웃들이나 직원들을 위해 돕자고 하면, 단돈 만원도 고민하는 사람들이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5만원, 10만원씩을 척척 내는 것을 보면 속이 아주 뒤집어진다.
진정성 없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혼인식을 거창하게 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보장’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 삶이 과연 그런가? 아기 낳는 연습을 하고 시집가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 고유의 ‘남을 배려하는 혼인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나부터 실천했고, 실천하고 있다. 4년 전, 장인의 작고(?)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공직자는 일반 민중들과 다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공직에 들어온 이후,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아 나쁘지 않았고, 공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좋았다. 또한 아내가 기대했던 혼인식도 무리 없이 치렀다는 점에서 1994년은 이래저래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공직에 들어와 반드시 해야 할 일[당위]도 생겼다. ‘민중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직은 일반 기업과 차원이 다름을 깨달은 것이다. 이를 위해선 민중의 살림살이와 국방을 알아야 하고, 민중의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숙명(?)을 인식한 것이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20년 10월 12일’ 오늘이다. 아내가 조촐하게 파티를 하잖다. 평생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걸 잊고 사는데, 이젠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서 그런지 대놓고 요구한다. 과거 같으면 크게 소릴 질렀을 법한데 고개를 끄덕이다니, 내가 늙긴 늙었나보다.^^ㅋ